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237)
성황의 아이들-237화(237/469)
237. 소드 마스터 (1)
번쩍!
상공에서 정체불명의 섬광이 번쩍였을 때, 마침 로건은 지그스문트령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큭!”
그 빛이 어찌나 강렬했던지, 일순 밤하늘이 새하얗게 변하며 그대로 사정없이 눈을 헤집었다.
밤길을 달리기 위해 오러로 안력을 잔뜩 돋우고 있었던 로건은 졸지에 완전히 시야를 잃고 말았다.
히히힝!
소스라치게 놀란 말이 앞발을 쳐들고 날뛴다.
혹여 말에게 무리가 가지 않을까 아예 손에서 고삐를 놓아버린 로건은 그대로 말에서 낙마했다.
다행히 인간을 훌쩍 뛰어넘는 소드 마스터의 감각은, 눈을 아예 감고도 무사히 바닥으로 착지하는 여유를 보일 수 있었지만.
“록사나!”
히힝! 히히힝!
로건은 겁에 질려 펄쩍펄쩍 날뛰는 자신의 애마에게 달려가 흐릿하게 보이는 고삐를 낚아챘다. 강력한 신성력이 벌써부터 그의 시력을 조금씩 회복시키는 중이었다.
“워워.”
말의 상태를 꼼꼼하게 확인하며 목과 등을 수차례 두드려주자, 록사나는 주인의 익숙한 체취를 맡고는 곧 잠잠해졌다. 이윽고 안정을 되찾은 말은 눈에 신성력을 흘려주는 로건의 손에 얌전히 몸을 맡겼다.
그는 그렇게 말을 돌봐주며, 아직도 침침한 눈으로 북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성진?’
어째서일까.
로건은 어쩐지 아까의 그 빛이 이성진과 전혀 무관하지 않을 거라는 묘한 확신에 사로잡혀 있었다.
단지 이상한 것은, 그 빛이 마경 쪽이 아닌 영지에 훨씬 치우친 방향에서 터졌다는 것인데.
‘분명해. 지그스문트령에 예상치 못한 뭔가가 벌어진 거다!’
전해져오는 공기의 동요가 벌써부터 심상치가 않다.
로건의 예민한 기감은 이미 전장에서 흘러나오는 특유의 저릿한 긴장감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가 아는 이성진이라면 결코 그런 위태로운 상황에서 홀로 몸을 빼려 들지 않을 테지. 그리고 마사인 형님 역시 그런 이성진을 그대로 두고 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두 사람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로건은 지금 당장 빛이 번쩍인 곳으로 가야 했다.
‘하지만 록사나는 이미 너무 지쳤다. 차라리 내가 혼자 달려가는 쪽이 빠를 거야.’
그는 잠시 주변 상황을 파악했다.
다행히 주변에는 마수들의 기척이 없다. 일대를 떠도는 늑대들도 지금쯤은 오르토나 북부로 이동했을 시기겠지.
게다가 록사나는 제 앞가림을 알아서 하는 제법 믿을 만한 파트너기도 했다.
로건은 말의 짐을 뒤져 황가의 문장이 함께 아로새겨진 성 바스티안 기사단의 휘장을 꺼내 들었다. 그 천을 펼쳐 말의 목과 몸통에 꼼꼼하게 둘러 주었다.
혹시라도 무도한 놈들이 록사나를 함부로 건드리지 않도록.
“미안하다, 록사나. 여기서 조금 쉬고 있으렴. 내가 금방 널 찾으러 오겠다. 아니면 기운 차리는 대로 지그스문트 영지까지 날 찾아와 주겠니?”
제법 오랜 시간 로건과 호흡을 맞춰온 총명한 짐승은 그 한마디만으로도 주인의 뜻을 알아차렸다.
말은 지혜로운 눈으로 로건을 응시하더니 머리로 그를 툭 밀어내며 푸르릉, 코를 울렸다.
“…착한 녀석.”
로건은 록사나의 흰 콧잔등을 애정을 담아 툭툭 두드려주고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애써 돌렸다.
그로서도 어지간하면 외진 곳에 애마를 홀로 내버려 두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지만.
‘하지만…….’
어쩐지 너무나 불안하다.
아까부터 ‘모레스를 무사히 데려오라’는 성황의 말이 뇌리에 박혀 떠나지를 않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혼자 보내지 않았을 거야!’
변경백의 눈치를 보지 말고 당당히 따라올 것을, 아니 차라리 이성진을 가지 말라고 붙잡아 두는 쪽이 좋았을 것을.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다. 입술을 짓씹은 로건은 곧 오러를 다리에 두르며 빠른 속도로 질주를 시작했다.
시력이 크게 손상됐던 눈가에는 어느새 약간의 시큰한 느낌만이 남아있었다.
* * *
말보다 빠르게 움직인 소드 마스터는 금방 전장에 당도했다.
“이게 대체……!”
그리고 도착해서 본 전장의 상황은 예상보다도 훨씬 더 나빴다. 지그스문트령의 병사들이 수없이 많은 라이칸슬로프들에게 둘러싸여 고전을 면치 못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거기다 새로 나타난 거대한 마수들도 문제였다.
로건으로서는 처음 맞닥뜨리는 얼음의 거인들. 아마도 글래쳐 트롤들로 짐작되는 수십 마리의 마수들이 전장을 향해 일제히 몰려오고 있다.
쿵. 쿵. 쿵.
병사들의 얼굴에 절망적인 기색이 드리워진다.
아마 놈들이 이대로 전투에 뛰어든다면, 겨우 균형을 이루고 있던 전선이 크게 흔들릴 것이 자명했다.
‘마수들이 빙벽을 넘었다? 어떻게?’
일순 그런 의문이 밀려들었지만, 로건은 이를 잠시 뒤로 하고는 그에게는 이미 익숙해진 이성진의 기척을 쫓아 전장을 내달렸다.
녀석의 기척이 평소와 달리 끊어질 듯 끊어질 듯 희미하게 느껴지는 것에 의아함을 느끼면서.
기척이 왜 이렇지? 어디 다치기라도 한 건가?
“……!”
그리고 후방에 있는 망루에서 겨우 그를 찾아낸 로건은 순간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전선의 상황? 병사들의 절망?
아니,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현재 이성진의 상태만큼 나쁘지는 않으리라 로건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아슬아슬하게 망루에 기대어 서 있었는데,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두 눈에서 시뻘건 핏물을 흘리는 중이었다.
게다가 몸에서 흘러나오는 오러 또한 어찌나 불안정한 상태였는지, 가만히 내버려 두면 그대로 온몸이 분해되어 일시에 공중으로 흩어질 것만 같지 않은가!
기함한 로건은 황급히 달려가 막 쓰러지려는 성진의 몸을 붙잡았다.
“괜찮아, 이성진?”
그리고 그를 붙잡자마자 전혀 괜찮지 않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오러를 예민하게 감지하는 로건의 감각이, 현재 성진의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단번에 파악했기 때문이다.
‘…오러의 흐름이 약하다 못해 아예 가닥가닥 끊어진 것 같다!’
몸에 오러가 타고 흐르는 길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 오러 연공을 하다 보면, 오러를 습관적으로 흘리는 경로 비슷한 것이 생기곤 했다. 일종의 지름길이나 회로와도 같은 것.
그런데 이성진의 몸에서는 그 길들이 망가지다 못해 아예 드문드문 끊어져 있었다. 마치 외기로 온몸을 일시에 헤집은 것처럼.
-얘가 얼마나 오러를 제멋대로 움직이는지 알면 너도 정말 놀랄 거야. 얼마 전에는 연공법을 무시하고 몸 안에서 막 휘젓는 바람에 거의 죽을 뻔했다니까?
아멜리아 누님에게 들은 말 그대로였다.
‘오러를 여러 차례 바닥까지 긁어 써야 했구나. 하급 기사의 오러 총량으로는 감당 안 되는 일들을 벌였고, 그게 회복되기도 전에 계속해서 같은 상황이 반복된 거야!’
몸에다 억지로 오러 고갈을 일으켰다가 또 빠르게 오러를 잡아당기고 하다 보니, 오러가 흘러가는 경로에 있는 조직이 죄다 손상된 거다.
그러니 이제는 단전의 오러가 회복되어 가고 있음에도, 오러가 길을 따라 제대로 흐르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날뛰고 있는 거겠지.
“로건 저하? 이곳에 어찌…….”
글래쳐 트롤의 등장에 얼이 빠져 있던 변경백과 브루노 단장이 그제야 로건을 발견하고는 눈이 둥그레졌다.
하지만 일일이 대꾸하고 있을 틈이 없다. 로건은 그들을 무시하고는 피가 흐르는 성진의 눈에 신성력을 흘리기 시작했다.
현재 이곳에서 이성진의 상태가 정확히 어떤지를 아는 자는 로건밖에 없을 것이다.
오러는 기본적으로 몸을 보호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운 작용을 위해 흘러야 할 오러가 도리어 오러 유저의 몸을 손상시킨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성기사들에게 아까 한차례 치료를 받으셨습니다만, 저하의 상태가 도통 회복이 되지 않으십니다.”
심지어는 전 데카론 나이트인 브루노 단장조차도 그랬다.
대단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오긴 했지만 ‘오러가 이리 약해지다니, 황자님의 몸이 많이 피곤하시구나’ 하는 정도의 얼굴이다.
그 정도로 지금 이 녀석의 상태가 일반적이지 않다는 말이었다.
“가만히 있어라. 너 지금 오러 흐름이 엉망진창이야. 눈은 또 왜 이 꼴이지?”
당황한 듯 버둥거리는 성진을 진정시키며 로건이 그의 상태를 안정시키기 위해 애썼다. 신성력을 흘리는 것과 동시에, 외기로 길을 잃고 날뛰는 성진의 오러를 올바른 길로 유도한다.
평소라면 외부에서 간섭하는 오러의 존재를 모를 리가 없건만, 지금의 이성진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듯 멍하니 눈을 깜박이고 있을 뿐이었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마사인 형님은?”
애써 침착하게 물었지만, 로건의 머릿속은 초조하기 그지없었다.
이런다고 이 녀석의 상태가 과연 회복 될 수는 있나? 이대로 영영 폐인이 되어버리는 게 아닐까?
검 수련을 그렇게나 좋아하는 이 녀석이 다시는 검을 쥐지 못하게 되어버리면…….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성진이 화들짝 놀라며 로건의 소매를 더듬거렸다.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현재 손에도 정확한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상태인 것으로 보였다.
“로건! 로건!”
로건은 이 증상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최후를 맞이했던 안드레스 평원에서의 마지막 전투.
수일간 먹지도 자지도 쉬지도 않고 대군의 공세에 맞서 싸웠을 때, 데카론 나이트의 강대한 오러 역시 최후에는 고갈을 면치 못했더랬다.
때문에 그는 무리하게 실낱같은 오러까지 긁어내어 죄다 사용해야 했었지.
최후에는 검을 쥔 손에 감각조차 없었던, 그렇게 온몸의 회로가 갈가리 찢어질 정도로 몸을 혹사시키다 사일러스 단장의 손에 죽어야 했지만.
‘만에 하나 내가 그때 목숨을 건졌더라도 결국은 폐인이 되었을 테지.’
오러의 균형을 완성한 데카론 나이트조자도 그 지경이 되었었다.
하지만 이성진. 너는 그때의 내가 아니잖아.
지켜야 할 나라도, 동포도 없는 네가 왜 이 지경이 되도록…….
“지금 여기서 이럴 시간이 없어! 너밖에 할 수 없는 일이야. 네가 꼭 그놈을 잡아줘야 해!”
그런데 이성진은 그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급한 그의 말에 로건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높아졌다.
“너 지금 네 꼴이 어떤지는 알고 하는 소리냐?”
하지만 이성진을 타박하면서도, 마음속은 자기 자신에 대한 자괴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녀석이 놀러 오라고 했다고 곧이곧대로 생각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서신을 받은 다음 고민할 것 없이 곧바로 릴리움을 소집했다면, 아니 그냥 그날 저녁부터 바로 이곳으로 달려왔다면.
“이 멍청아!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야!”
이 상황이 되도록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는 이성진에게 화가 난다.
“어서 그놈을 잡지 않으면 여기 있는 사람들이 적어도 반은 죽어! 영지의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거라고!”
하지만 무엇보다도 눈을 빤히 뜨고 이런 상황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고 있던 자신에게 화가 났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이들이 대체 네게 뭐라고?
‘…대체 왜 이렇게까지?’
델크로스의 황자인 나조차도, 오르토나의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제국에 대한 원망을 떨칠 수가 없는데. 모든 것은 이들이 감당해야 할 인과응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는데.
일단 황자로 태어난 이상, 그에 따른 의무를 다하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로건은 그에 대한 지독한 회의감이 드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성진, 정작 너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잖아? 이들의 안위가 네게 무슨 상관이라고.’
그런 로건의 머릿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성진은 빠르게 자신이 할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잘 들어. 저 산비탈 너머, 거기에 악마가 있다! 후드를 눌러쓴 젊은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어.”
어서 그놈을 어떻게 하지 않으면 지그스문트령이……!
빠르게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설명하는 그 절박한 얼굴을 바라보던 로건은 문득 깨달았다.
아아, 그래. 실은 네가 왜 그러는지 알고 있어.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지.
아닌 척하지만 이성진은 대단히 상냥한 놈이었다.
매사 관심 없어 보이는 뚱한 얼굴이지만, 언제나 주변의 상황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살피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어.
그렇지 않았다면 최근 아멜리아 누님과 시슬레의 얼굴이 그렇게까지 밝아지지는 못했겠지.
그 속을 전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던 성황조차도 최근에는 너로 인해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야.
-하지만 넌 이미 네 목숨을 바쳤어! 그럼 네가 그때 뭘 더 어쨌어야 한다는 거야?
무엇보다도 자신 대신 이렇게까지 진심으로 화를 내 줄 수 있는 놈이, 이 세상에 또 누가 있을까.
그런 이성진에게 로건이 뭐라고 했던가.
-혹시 모레스가 돌아오면… 그에게 몸을 돌려준다고 약속해줄 수 있겠어?
그런 잔인한 요구에 이성진이 뭐라고 대답했었지?
-그래, 어려울 것 없어. 난 어차피 죽었는걸.
정신이 어떻게 된 게 아닐까.
어떻게 자신은 이 녀석에게 그렇게 쉽게 그런 무서운 말을 내뱉을 수가 있었던가.
“휴우…….”
깊은 곳에서 울컥 솟구치는 분노를 억누르며 로건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기가 막힐 노릇이군.’
모레스를 찾아야 하는데.
이제는 자신이 모레스의 영혼을 찾지 못할까 조바심을 내는 건지, 아니면 갑자기 그가 돌아와 이성진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까 두려운 건지도 구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확실한 것이 하나는 있었다.
로건은 이대로 이성진을 잃어서는 안 된다.
-저는 공화정의 가치가 이 모든 희생들을 감수할 만큼 값진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를 확신하는 왕자님의 뜻을 실현하는 검이 되어 드릴 수는 있습니다.
언젠가 로건은 그의 친우 베니시오에게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제국이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고는 조금도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성진, 네가 몸을 바쳐 이 델크로스를 지키기를 원한다면, 적어도 나는 네 뜻을 이루게 만들 검이 되어 줄 수는 있을 거야.’
그래서 로건은 이성진에게 이렇게 대답했던 것이다.
“알았다. 일단 진정하고 천천히 말해봐. 내가 뭘 하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