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24)
성황의 아이들-24화(24/469)
024. 쌍둥이와의 외출 (2)
황금진리학회.
이 세상의 진리를 순수한 학문적인 호기심을 바탕으로 편견 없이 탐구하는 학술 모임.
자신을 그 학회의 수도 지부장이라고 소개한 청년, 안드리안 데비스는 제법 높은 신분의 귀공자였다. 마르고 왜소한 체격이 전형적인 방구석 학자 타입이었는데, 아래로 꽉 다물린 입매가 조금 고집스러워 보였다.
“카프란 추기경 각하께서 저의 백부님이 되십니다.”
그 말을 할 때 청년의 얼굴에서 순간적으로 옅은 경멸의 표정이 지나가는 것을 성진은 놓치지 않았다.
“한 때 존폐의 위기에 처해 있던 저희 학회는 황자님 덕에 커다란 전환점을 맞을 수 있었습니다. 제국의 먼 미래를 위해, 수년간 말없이 아낌없는 후원을 주신 저하의 혜안에 저희 회원들은 언제나 감동받고 있습니다.”
“뭘, 감동씩이나.”
“아닙니다! 이따금 무지한 자들로부터 저하를 비방하는 말들이 들려 올 때마다 저희가 얼마나 마음속 깊이 분노를 느끼는지 이루 설명할 수 없을 정돕니다.”
물론 성진은 이들을 후원한 기억 따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픈 이후로 기억이 어쩌고 설명할 타이밍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아무래도 이 청년이 말하는 학회라는 것이 정상적으로 양지에서 활동하는 곳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주신의 권위가 하늘을 찌르는 신성제국 내의 일이다. 진리 어쩌고 하는 단체가 이단으로 찍히기 딱 좋은 환경이라는 것은 비단 지구에서의 일만은 아닐 터.
그 증거로 옆에서 잠자코 대화를 듣고 있는 마사인 경의 얼굴이 점점 굳어가고 있었다.
“심한 열병으로 고생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혹시나 저하께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생길까 전전긍긍하였습니다. 마침 이렇게 우연이나마 저하를 뵙고 감사 인사를 드릴 수 있게 되어 크나큰 영광입니다.”
“음, 그런가?”
“예, 사실 이렇게 직접 뵈옵는 것이 저하께 누가 될까 저어하였습니다만, 황궁에서 거의 떠나시지 않는 황자님을 언제 또 영접할 수 있을지 기약이 없어…….”
의상실에 들렀다가 우연히 모레스가 왔다는 말을 듣고 충동적으로 찾아왔다는 모양이다. 수도 신사들의 단골 의상실이라더니, 과연.
마사인이 한 발짝 나서며 뭔가를 말하려 했지만, 성진은 재빨리 손을 들어 그를 저지했다. 그들이 이상한 기색을 보이는 순간 청년이 냉큼 도망쳐 버릴 거라는 확신이 들었던 것이다.
대체 모레스가 무슨 일에 어디까지 휘말려 있는지, 현재의 상황을 가능한 많이 파악해야 했다.
“그대들의 탐구가 언제고 델크로스에 큰 도움이 되리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네. 달리 해줄 것은 없고, 그렇게나마 소소한 도움을 주고 싶었어.”
“아아, 역시 저하께오서는…….”
청년은 몹시 감동한 듯 보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 눈에 미약하게 어려 있던 의구심과 불안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실은 학회 내부에서도 약간의 말들이 있었습니다. 저하께서 직접 모습을 보이지 않으시고 후원금만을 전하신다는 것을 빌미로, 그 의중을 곡해하는 못난 자들이 있었지요. 그러나 오늘 이리 저하의 뜻을 직접 전해 들으니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의심이었는지를 확실히 알겠습니다. 그저 감개가 무량할 따름입니다.”
“으음. 그러하군.”
학회 사람들과 직접적인 접촉은 없었다는 말이었다. 과연 후원한 자가 모레스가 맞기는 한 건가?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있는데 청년이 고개를 숙이며 황급히 말을 이었다.
“무지몽매한 일행들이 함께 있어 이 이상 자리를 비우면 필시 불필요한 오해를 살 것입니다. 저는 이만 물러갈 터이니 부디 옥체를 보중하십시오. 델크로스에서 저희가 진정 의지할 분은 모레스 저하뿐이십니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마사인 경의 얼굴을 힐긋 쳐다보고는 종종걸음으로 떠나 버렸다.
와.
갑자기 뭔가 세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이 건에 대해 뭔가 아는 게 있나, 마사인 경?”
“외람되오나 금시초문입니다. 저하.”
마사인의 얼굴은 흉흉했다. 그가 마치 당장이라도 떽 하고 호통을 칠 기세로 성진을 향해 다가오는데, 또다시 똑똑 하고 소심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스쳐가는 불길한 예감에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델크로스의 둘도 없는 홍복이어라! 아델하이트의 역병회를 후원해주시는 모레스 황자님께 심심한 감사의 인사를 담아…….”
문밖에는 짤막한 바가지 머리를 한 멀대 하나가 공손히 절을 올리고 있었다.
* * *
쌍둥이가 살롱 드메르시로 다시 돌아왔을 때, 성진은 총 3개의 단체 사람들과 안면을 튼 뒤였다.
황금진리학회.
아델하이트의 역병회.
푸른 공화혁명전선.
그 어느 것 하나도 지금 당장 이적단체로 몰려 말살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범상치 않은 단체들이다.
모레스 이 미친놈! 대체 신성제국의 황자라는 놈이 평소 뭘 하고 다닌 거냐!
-내가 없는 동안 조용히 수련이나 하며 지내거라. 사고 치지 말고.
성황이 폐관 기도에 들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이 지경이 되고 나서야 심상치 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우리 살롱 드메르시는 교양 높으신 공자님들의 사교 모임의 장이 되기도 한답니다아.”
그를 배웅하던 마담 쥬스티느가 쥘부채를 살랑거리며 말한다. 성진은 대답 없이 그를 쏘아보았다.
네놈 새끼가 제일 수상하다.
저 사람들이 의상실의 암묵적인 허가 없이 특실까지 올라왔을 리가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아무리 떠들썩하게 들어왔다고는 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 모레스의 방문이 여러 단체 사람들에게 알려진 데에는 아무래도 마담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을 거라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담 쥬스티느는 예의 진분홍색 퍼를 쓰다듬으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을 뿐이다.
이윽고 성진이 쌍둥이와 함께 마차에 오르자, 그는 긴 팔을 들어 올리며 마차를 향해 깊숙이 절을 해 보였다.
“다시 뵐 날을 마음속 깊이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모레스 황자님.”
말끝이 늘어지지도 않는 묵직한 어조.
마담 쥬스티느가 처음으로 내뱉은 그의 진정한 목소리다.
놀란 성진이 창밖으로 그를 돌아보았지만 마차는 이미 출발한 뒤였다. 순식간에 살롱 드메르시가 멀어져간다.
따각따각.
헤르나와 가데스는 성진의 맞은편 좌석에 나란히 앉아 그런 그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즐거운 시간 보냈어, 모레스?”
“유익한 시간 되었어, 모레스?”
“…….”
성진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아이들은 대체 뭘 알고 있는 걸까. 성진에게 누가 접근할 것인지 미리 짐작하고 있었던 걸까?
저런 이적단체들을 후원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신성제국 황자의 입지가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 빤했다. 혹시 모레스의 약점을 잡고 협박이라도 할 생각인가.
만에 하나 우연일 가능성을 생각해, 쌍둥이 앞에서 저 이상한 단체들에 관해 대놓고 발설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이것만은 반드시 물어봐야 했다.
“니네들, 알고 있었지? 대체 무슨 꿍꿍이야?”
“음, 이거 섭섭한데? 모든 것이 모레스를 위한 일인데.”
“그래, 좀 서운한걸? 우리는 모레스를 꽤 생각한다고.”
“…….”
뭔가 특별한 의도가 있었다는 걸 부인하지는 않는군.
성진의 복잡한 머릿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쌍둥이들은 의연한 얼굴로 그를 향해 타이르듯 덧붙였다.
“이제는 슬슬 혼자서 사교 모임도 좀 다니고 해야지, 모레스.”
“언제까지나 아빠 폐하의 보호 아래 있어서는 안 돼, 모레스.”
성진은 한숨을 쉬었다.
이 애들을 상대로 신경을 곤두세워봐야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빙빙 겉도는 대답만이 돌아오겠지. 그렇지 않더라도 현재 성진에게 주어진 정보는 지극히 제한적일 뿐이다. 지금 지나치게 날을 세우면 그나마 알아낼 수 있는 것들도 놓치는 수가 있을 터.
우선 조금은 장단을 맞춰 볼까.
“…다음은 어디지? 인형극을 보자고 했었나?”
성진의 말에 쌍둥이는 동시에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도자기처럼 말간 얼굴에 어린 한없이 천진한 미소였다.
* * *
베르트랑 거리.
수십 년 전만 해도 이곳은 시장 옆에 위치한 허름한 물류창고가 늘어서 있는 볼품없는 거리였다.
그러던 것을 어느 날부터인가 브르타뉴에서 온 한 극단이 허름한 창고 하나를 빌려 공연을 시작하면서 서서히 극장가로 변모되었다.
극단에서 가장 유명했던 배우의 이름을 따 베르트랑 거리라고 이름 붙여진 이곳은, 현재 대규모 오페라 극장이 3개, 거대한 발레 공연장이 3개, 그외 여러 연극 공연이 펼쳐지는 수십 개의 극장들 및 소극장들이 모여 있는 문화의 거리가 되었다.
공연은 극장뿐만이 아니라 길거리에서도 종종 펼쳐졌는데, 연극 홍보를 위한 단막극이나 타국에서 온 기예 공연, 그리고 아이들을 위한 작은 인형극 등이 주를 이루었다.
그것들은 보통 광장에 설치된 작은 간이 무대에서 펼쳐지곤 했다.
쌍둥이가 성진을 이끈 곳도 이제 막 공연을 시작하는 보잘것없는 간이 무대였다.
큰 널빤지 가운데에 나 있는 작은 창 하나가 무대의 전부. 좌석이라고 할 만한 것도 따로 없어 아이들은 무대 앞에 옹기종기 서서 공연을 기다리고 있다.
모여 있는 아이들 대부분이 대여섯 살 전후로 보여서 성진은 조금 당황했다. 이거 쌍둥이가 보기에는 연령대가 많이 낮은 거 같은데…….
어쨌든 공연은 시작되었다. 무대 옆 커다란 오크통에 놓인 불타는 촛불 몇 개를 조명으로, 붉은 커튼이 열리면서 작은 인형 두 개가 모습을 드러낸다.
‘어째 인형의 상태가 좀…….’
그것은 마리오네트는커녕 봉제 인형이라고 부르기에도 부족한 조잡한 인형이었다.
천으로 대충 눈과 입이 덧대어져 꿰매진 허술한 인형들이 흔들거리며 등장하자 몇몇 아이들의 입에서 실망하는 듯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런 실망도 내레이션이 흘러나오면서 사라졌다. 묘한 마력을 가진 목소리가 단번에 아이들을 사로잡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다른 세상의 두 마왕의 이야기. 꿈의 마왕과 불의 마왕이 약속을 하고 서로를 배신하는 이야기. 아직도 끝나지 않은 싸움에 관한 이야기.]저 싸다 남은 똥 덩어리처럼 보이는 노란색과 빨간색 솜뭉치가 두 마왕인 모양이었다.
‘…분명 용사와 마왕의 이야기라고 하지 않았었나?’
성진은 잠시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곧 인형극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나직하게 읊조리듯 울려 퍼지는 허스키한 목소리에는 마치 최면과 같은 울림이 있었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노인인지 젊은이인지 도무지 구별이 가지 않는 이상한 매력을 가진 목소리다.
[꿈의 마왕에게는 중대한 사명이 있었습니다. 세계를 위협하는 무서운 재앙으로부터 소중한 꿈들을 지켜나가리라 맹세했었죠. 그래서 꿈의 마왕은 언젠가 강력한 이야기의 마왕이 되겠노라고 결심했습니다.]빨간 똥 덩어리가 무대에서 퇴장했다.
작은 무대 한가운데는 이제 노란 덩어리만이 남아 무언가 비장한 결심을 하는 중이었다. 메롱 하고 혀를 내미는 듯한 인형의 표정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더욱 강해지기 위해 반드시 용사와 싸워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곧 적당한 용사를 찾아내어 전투를 벌였지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상대는 대단히 잔혹한 자였답니다.]노란 덩어리 옆으로 때가 탄 회색 덩어리가 나타났다. 그리고 노랑과 회색 덩어리는 몇 번인가 엎치락뒤치락 박치기 같은 것을 했다.
저 꾀죄죄한 덩어리가 용사야?
설마 저걸 지금 전투랍시고 하는 건가?
황당해진 성진이 그의 양팔을 잡고 있는 쌍둥이를 번갈아 쳐다보았지만, 둘은 진지한 얼굴로 인형극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꿈의 마왕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그를 이길 수 없음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그를 꿈속에 가두어 두고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이야기의 마왕이 되겠다는 꿈은 그렇게 용사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답니다.]아이들의 탄식이 흘러나온다. 진심으로 마왕의 도주를 안타깝게 여기는 모양이었다.
얘들아? 용사를 응원해야 하는 게 아니었어?
[그때 불의 마왕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위기에 빠진 꿈의 마왕을 돕겠다고 말했어요.]다시 빨간 똥 덩어리가 나타났다.
그 뒤로 이야기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인형극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극 대부분이 내레이션으로만 이어지는 이야기다.
불의 마왕은 꿈속으로 들어가 용사를 대신 없애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실은 마왕의 꿈 자체를 먹어치울 속셈이었다.
반면 꿈의 마왕은 불의 마왕이 용사를 없애주기만 하면 둘 모두를 꿈속에 묻어 죽여 버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 아래로, 속내를 감춘 인형들의 그림자가 음산하게 춤을 춘다.
어린아이들이 보기에는 치졸한 배신이 난무하는 지나치게 어두운 이야기였다. 그리고 암울함의 하이라이트는 용사가 다시 나타나면서 시작되었다.
잔혹한 용사는 불의 마왕을 때려잡는 데 성공했는데, 무려 사흘 밤낮 하고도 반나절 동안 마왕을 두드려 팼다. 심지어 마지막 반나절은 얼굴만 때렸단다.
아이들이 하나둘 마왕 불쌍하다고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성진이 보기에도 지독한 놈이었다.
“와… 뭐 저런 개새끼가 다 있냐. 저 잔인한 놈…….”
이러니 잔혹한 용사라는 말을 듣지. 이쯤 되면 나 같아도 마왕 편을 들겠는데?
혀를 차던 성진은 문득 묘한 시선을 느끼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헤르나와 가데스가 언제부터인가 그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뭐? 왜?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