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240)
성황의 아이들-240화(240/469)
240. 소드 마스터 (4)
성진을 두고 떠났던 브루노 단장은 금방 돌아왔다. 치료 전문 사제인 구스타프와 동행한 채였다.
“저는 외상을 주로 보는지라 신성력 자체가 강하지는 않습니다. 저하께 특별한 외상이 없으시다면, 차라리 다른 사제를 데려오는 쪽이 좋지 않겠습니까?”
구스타프는 탐탁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거기에는 다급한 부상자들이 속출하는 중에 굳이 자신을 끌고 온 외지인에 대한 불만이 어려 있다.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보호받고 있을 황자가, 급히 사제를 찾을 만한 일이 뭐가 있겠는가.
하지만 브루노의 태도는 단호했다.
“그럴 겨를이 없습니다. 부디 서둘러 주십시오.”
모레스 황자는 브루노가 망루 아래에 기대어 놓은 모습 그대로였다. 단지 고개가 아래로 푹 떨어져 있는 것이 자못 불길하기 그지없었다.
그제야 심상치 않은 상황임을 깨달은 구스타프가 표정을 바로 하고 발걸음을 서둘렀다.
“저하.”
조심스럽게 다가간 브루노가 황자를 흔들었다. 그런데 힘없이 흔들리던 몸이 브루노의 팔 안으로 그대로 스르륵 무너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
모로 쓰러지며 드러난 황자의 얼굴은 마치 죽은 사람처럼 창백했다.
브루노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저하!”
그들은 다급히 황자를 바닥에 누이고 상태를 살폈다.
“왜 피가…….”
눈에서 흘러내린 피로 엉망이 된 황자의 얼굴에 크게 당황했지만, 구스타프는 곧 정신을 다잡고 신성력을 흘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심장이 아예 멎는 것은 아닌 듯 간간이 맥이 잡히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은 제대로 된 박동이라기에는 너무나도 위태로운 것으로, 마치 멈추기 직전 간헐적으로 떨리게 마련인 심장의 무의미한 수축에 지나지 않는 듯했다.
“저하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치료를 위해서는 원인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구스타프 사제의 물음에 브루노는 당황하여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통 짐작 가는 바가 없었기 때문.
그저 아침부터 꾸준하게 상태가 나빠지고 있었기에, 피로가 쌓여가고 있다 여겼을 뿐이었다.
“저 혼자로는 역부족입니다. 심장이 곧 멎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다른 사제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구스타프의 심각한 목소리에, 브루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도움을 청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헉……?”
그리고 소스라치게 놀라 그대로 주저앉았다.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는지, 웬 피투성이의 여자 하나가 빤히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그녀가 들고 있는 흉흉한 곡검에서도 마찬가지로 뚝뚝 피가 떨어지고 있었다.
“…샤론 경?”
브루노는 겨우 낯익은 기척을 알아보았다. 정신이 없어서 미처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몰랐던 모양.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수의 피로 범벅이 되어 있는 데다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기에, 한순간이지만 정말로 그녀가 유령이라고 생각했다.
“아아……!”
하지만 그의 부름에 엑소시스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지막하게 탄식한 그녀는 곡검을 바닥에 내던지고는 황자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안 그래도 희멀건 낯짝이 전에 없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모레스, 모레스, 널 어떻게 하지? 모레스, 모레스, 널 어쩌면 좋지?”
가느다란 목소리로 정신없이 되뇌는 모습에, 구스타스 사제의 눈썹을 꿈틀 치켜 올라간다.
하지만 브루노는 현재 그녀가 채널링을 하고 있는 상태란 걸 깨닫고는 다급하게 물었다.
“샤론 경. 아무래도 저하의 상태가 이상합니다. 혹시 폐하께 도움을 청해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샤론 경은 잠시 허공을 올려다보며 멍한 표정을 짓더니 곧 고개를 저었다.
“폐하께서는 지금 응답하실 수 없습니다. 여기서는 우리가 어떻게든 해야만 합니다.”
브루노가 드물게 듣는 그녀의 또렷한 음성이었다.
샤론 경은 황자에게 신성력을 흘리며 침착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구스타프 형제, 형제께서는 신성력이 강한 형제들을 더 요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니! 제가, 제가 가겠습니다!”
사제가 움직이기 전에 브루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제가 가는 것이 훨씬 빠를 겁니다. 어차피 저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동안 사제님은 신성력을 조금이라도 더……!”
그때 날카로운 샤론 경의 목소리가 그를 멈춰 세웠다.
“이곳에 계세요, 브루노 단장!”
“……!”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니, 늘 흐리멍덩해 보이던 엑소시스트의 검은 눈이 강렬한 의지를 가지고 브루노를 응시하고 있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모르시겠습니까? 지금 여기서는 당신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단 말입니다!”
“내가… 말입니까?”
얼떨떨한 목소리로 되묻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부디 저하의 손을 잡아 주십시오. 저하의 곁을 지켜 주십시오! 이분이 또 어딘가로 떠나지 않도록, 당신의 인과로 이곳에 단단히 붙잡아 주세요.”
인과.
그 말을 제대로 인지하기도 전에 브루노는 허둥지둥 황자의 손을 움켜쥐었다.
‘아렌쟈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내 인과가 분명 저하께 속해 있다고 했던가?’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브루노는 샤론 경의 절박한 목소리에서, 지금은 사제의 신성력보다도 그 인과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임을 직감했다.
“저하…….”
꽈악.
미약한 박동이 느껴지는 작은 손을 힘주어 잡고 있던 브루노는 새삼 깨달았다. 자신이 마음 편하게 의지하고 있던 믿음직한 소년은 사실 얼마나 작고 어린 아이인가.
“크윽!”
그러자 새삼스러운 후회가 일었다. 황자를 조금 더 제대로 보필했어야 했는데!
‘저하를 성심성의껏 섬기고 있다고 여겼지만, 결국은 나의 삶을 멋대로 누리고 있었을 뿐이지 않은가!’
자신의 경지를 되찾는데 집중할 수 있었고, 뒤늦게 칼멘을 지도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싫은 일이 있으면 굳이 황자를 따라다니지 않아도 되었으며, 진주궁에 틀어박혀 질 좋은 차들을 마음껏 음미하기만 하면 되었지.
세상에 어떻게 이런 선물 같기만 한 삶이 존재할 수 있는가.
‘그 모든 것이 저하 덕분이었다.’
황자가 그를 위해 마련해 준 목장이 너무나도 크고 자유로웠던 나머지, 이것을 지키는 울타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잠시 잊고 있었던 거다.
“성황 아빠는 아직 움직일 수 없어. 모레스의 심장을 움직여야 해. 빠르게, 빠르게, 빠르게!”
그러는 와중에도 샤론 경은 쉴 새 없이 뜻 모를 소리들을 중얼거렸다.
“아빠 폐하를 마냥 기다릴 수 없어. 모레스의 시간을 늦추도록 해. 느리게, 느리게, 느리게!”
한데 기분 탓일까.
그녀의 말과 함께 꺼져가던 황자의 맥이 조금이나마 돌아오는 기분이 들었다.
브루노는 절박한 심정으로 아까보다 미약한 온기가 도는 손을 움켜쥐었다.
‘저하께서 내게 이렇게 많은 것들을 베풀어 주셨는데, 내가 저하께 해 드린 것은 과연 뭐가 있는가!’
자신은 아직 예전의 데카론 나이트가 아니다. 불완전하나마 오러 균형 상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순수한 무력에 있어서는 아직도 마사인 경이나 마리아 경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어설픈 채널링 실력으로 아렌쟈와의 가교가 되겠다 말했지만, 엑소시스트인 샤론 경에게도 한참 못 미치는 실력. 황도에서 이렇게 멀리 떨어져서는, 그들이 보내는 강한 사념을 수신하는 것이 고작 아닌가.
그런데 그런 그의 생각을 어떻게 알았는지, 샤론 경이 브루노를 향해 옅게 미소 지었다.
“괜한 자책은 하지 마세요, 브루노 단장. 단장의 존재만으로도 저하께는 무척 큰 힘이 됩니다.”
“샤론 경…….”
“자신에게 속해 있는 인과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저하께서는 함부로 목숨을 내던지지 않으실 겁니다. 결코 그러실 분이 아니란 걸 아시지 않습니까.”
“……!”
그래. 오래 함께 부대낀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황자의 성정을 알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느릿하게 한 번씩 튀는 맥박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브루노는 고개를 숙여 조용히 눈물을 한 방울을 떨구었다.
* * *
콰직! 쩌억!
퍼억! 우르르르!
소드 마스터와 글래쳐 트롤 한 마리가 전선에 뛰어들면서 생긴 변화는 극적이었다.
쿵쾅쿵쾅!
특히나 글래쳐 트롤, 빈스의 활약은 대단했다.
전선의 모든 글래쳐 트롤들을 꽁무니에 매달고, 지그스문트의 휘장을 두른 빈스가 산비탈을 향해 질주한다. 틈틈이 따라붙는 놈을 두드려 차근차근 박살 내는 것도 잊지 않고.
“모레스 저하십니다! 그분께서 빈스를 조종하고 계신 겁니다!”
협곡 요새에서 이미 한차례 그 활약을 목도한 적이 있는 오스카 경이 신이 나서 소리쳤다.
라이칸슬로프들까지 일부 그쪽으로 달려가는 통에 이제 전선은 한결 여유가 생긴 상황이었다. 덕분에 일마 경은 병력의 일부를 더 빼내어, 상대적으로 취약한 남서쪽으로 보낼 수 있었다.
빈센트 노인과 세바스티안 경이 병력을 이끌고 간 상태지만, 아직까지는 꽤나 고전 중으로 보였으니까.
‘이것이 데카론 나이트와 소드 마스터의 차이!’
일마 경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데카론 나이트는 오러의 균형을 이룬 자.
그리고 그 완성된 오러 블레이드에 의념을 담고, 능히 세상의 이치를 꿰뚫는 자를 소드 마스터라 칭한다.
‘로건 저하께서 어찌 저리 어린 나이에 빈센트님을 넘어서는 경지를 이루셨단 말인가!’
어쨌거나 전선에서는 다시금 사기가 샘솟기 시작했다.
단지 이따금 빈스를 바라보는 마사인 경의 얼굴에만, 숨길 수 없는 걱정의 기색이 어려 있을 뿐이었다.
협곡 요새에서 빈스를 조종할 당시, 황자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음을 떠올린 까닭이다.
“일마 경. 전선이 안정되면 저는 바로 저하께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물론입니다, 마사인 경. 지금까지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일마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사인 경은 단연 이곳에 있는 최강의 전력 중 하나. 황자의 옆에서 절대로 떨어지지 않던 기사가 이렇게 오랜 시간 최전선에서 싸워 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었다.
한편 빈스와 함께 나란히 적진을 달리던 로건은 생각했다.
‘혹시 내가 없었어도, 이성진 혼자서 충분히 이들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빈스가 보인 활약은 대단한 것이었다.
일곱 마리째의 글래쳐 트롤을 때려눕힌 얼음 괴물이 몸을 쭉 곧추세우며 어깨를 휘둘렀다.
휘장을 자신만만하게 흩날리는 그 모습이, 일견 으쓱한 이성진을 보는 것 같아 로건은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더 이상 낭비할 시간은 없었다.
적의 시선이 빈스에게 몰린 지금이, 그에게는 모처럼 찾아온 황금 같은 기회가 될 터.
로건은 기척을 죽이며 빠르게 적들을 통과했다.
막대한 양의 오러로 세상 화려한 기교를 펼칠 수 있지만, 또한 마음만 먹으면 기척을 완전히 지우고 어디로든 감쪽같이 숨어들 수 있는 것이 바로 데카론 나이트다.
그리고 머지않아 로건은, 우거진 수풀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는 악마를 마주할 수 있었다.
이성진의 말대로, 짙은 후드를 눌러쓴 젊은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니?]악마가 그의 등장을 눈치채기도 전에, 로건의 강력한 신성 결계가 악마를 포획했다.
그라니우스 방어 결계, 0식.
신성력으로 적을 완전히 동그랗게 감싸는, 가장 기본적인 형태인 동시에 완전무결한 결계였다.
[이런! 어느 틈에?]순식간에 은빛의 장막에 둘러싸인 악마는 일순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곧 로건을 바라보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아? 당신, 어디서……?]하지만 이내 뭔가를 깨달은 듯, 여유를 되찾으며 길게 입꼬리를 휜다.
당장이라도 자신을 태워버릴 수 있는 신성 결계에 둘러싸여 있음에도,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악마는 홀린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누구의 영혼이 이렇게도 빛나는가 했소! 과연, 동부 최후의 검, 바로 당신이었구려!]의심할 여지없이 가엘 베르트란을 지칭하는 수식어.
로건은 흠칫 놀라며 물었다.
“나를 아나?”
[물론 알다마다. 깔깔깔깔!]악마는 태연자약한 태도로 돌변하여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당신을 가까이서 본 적이 있소! 분명 참회께 바쳐지기로 한 제물이었지! 내 주인께서 무척 애석해 하셨는데, 이리도 멀쩡한 모습으로 숨어 있었다니 이 어찌 기쁘지 아니하랴!]참회의 제물?
금시초문이었다. 저 악마가 말하는 것이 정말로 자신의 전생이 맞기는 한가?
로건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는 내전에서 전사했을 뿐이다. 악마의 제물 따위 알지 못한다.”
그러자 악마가 큭큭큭, 기분나쁜 웃음을 흘렸다.
[글쎄, 어떨지. 알지 못한다라, 그것참 순진한 태도요. 그대의 죽음에는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걸려 있었다오! 수호자가 그대를 빼돌리지만 않았어도, 지금은 많은 것이 바뀌었을 거요.]진실.
로건은 미간을 찡그리며 악마를 노려보았다.
[어떻소? 날 풀어주지 않겠소? 그렇게만 해준다면, 내 당신에게 중요한 정보를 주겠소이다.]거짓.
악마는 그저 이 자리를 모면하려는 생각이다. 뭔가를 말해줄 생각 따위는 눈꼽만치도 없다.
“하나만 묻지, 악마.”
로건의 눈이 시리도록 냉정한 빛을 담고 여인을 응시했다.
“내 조국 오르토나를 멸망시킨 건 악마들의 짓거리인가?”
[뭐, 이런 저런 인간사가 개입했으나, 궁극적으로는 그렇다고 볼 수 있소. 어떻소? 자세한 것이 알고 싶소?]물론 알고 싶었다.
그렇지 않아도 토벌대를 수년간 이끌면서 알게 된 것들이 있었다.
어째서 오르토나 전역에 오랜 악마 숭배의 증거가 발견되는가.
어쩌면 오르토나의 해체에는 뭔가 더 깊은 내막이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닐까.
로건이 생각에 잠겨있는데, 자신의 말이 먹히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악마가 은근히 구슬렸다.
[자, 무엇이든 말해 보시오. 그대는 내 주인께서 참으로 어여삐 여기시던 영혼. 나와 함께 내 주인의 앞에 선다면, 무슨 소원이든 그대가 원하는 것을 들어 주실 터.]소원이라.
로건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그러면 멸망한 내 조국을 다시 되돌릴 방법이 있나?”
[…뭐?]“내 조국을 내게 되돌려 줄 수 있는가?”
악마는 멈칫하더니 이내 비릿하게 웃었다.
[하하.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쓰는군. 이미 제물이 되어 사라진 것을 어찌 도로 되돌린단 말이오? 인간의 나라를 일으키는 일에는 막대한 인과가 소모되오. 내 주인께서 함부로 관여하실 일이 아니지.]진실.
로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더 들을 것도 없군.”
꽈악!
로건이 주먹을 움켜쥐자-
[뭣? 아니, 잠깐! 잠깐만! 궁금하지 않을 리가 없어! 인간이라면 절대……!]그제야 새파랗게 질린 악마가 손을 휘저었지만, 악마를 둘러싸고 있는 신성 결계가 단숨에 좁혀졌다.
치이이익!
결계를 이루는 은빛의 신성력이 악마를 뒤덮으며 매캐한 검은 연기가 일었다.
[끄아아아악!]고통스럽게 몸을 뒤트는 악마를 바라보며 로건은 냉랭하게 말했다.
“설마 내가 너를 통해서만 진실에 닿을 수 있으리라 착각했는가? 너희들, 삿된 것들이 내 조국에 저지른 수작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성기사단과 공조하여 조사를 하는 중이다.”
허울 좋은 거짓만을 휘감은 그 혓바닥에, 내가 속절없이 휘둘리리라 생각했던가?
“거기다 이성진이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꼭 처치해 달라고 했다.”
난 그 애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고.
[끄아아아아악!]악마는 하얀 성화에 휩싸여 날뛰었다. 그러나 곧 서서히 몸집이 줄어들더니, 이내 한 줌의 흰 재로 화하고 말았다.
이제 악마가 그 자리에 있었음을 짐작할 만한 흔적이라고는, 바닥을 굴러다니는 두 개의 얼음 조각들뿐이었다.
그것이야말로 악마가 글래쳐 트롤을 조종하는데 사용하던 얼음 심장이었지만, 로건이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다.
단지 오묘하게 점멸하는 희미한 빛이 심상치 않다고 느꼈을 뿐.
‘그러고 보니 아까 이성진이 이런 걸 하나 들고 있지 않았나?’
고개를 갸웃거리던 로건이 천천히 얼음 조각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조각에 휘감겨 있던 검은 마기가 로건의 온몸을 휘감으려 했다.
악마가 가지고 있던 물건이다. 지독한 마기에 오염되어 있어 보통 사람이라면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당장에 침식되었겠지만…….
강대한 신성력을 가진 로건에게 이 정도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중요한 물건인가? 이게 뭔데 끝까지 소중하게 들고 있었던 걸까?’
로건은 손바닥 위에 얼음 조각들을 찬찬히 굴려 보았다.
결심은 빨랐다.
‘증거로 한번 가져가 볼까? 별거 아니라면 그냥 이성진에게 주지. 한동안 병상에 누워있으려면 심심할 텐데, 이거라도 가지고 놀라고 해야겠다.’
로건은 신성력으로 얼음 심장을 공들여 정화한 다음 냉큼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그 선물을 받은 성진이 얼마나 기뻐할지 짐작도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