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245)
성황의 아이들-245화(245/469)
245. 귀환 (5)
그로부터 한참 동안, 성진은 신성력의 폭포 속에 파묻혀 있었다.
몸은 순식간에 멀쩡해졌다.
과연 힘의 궤가 다르다고 하더니, 어제부터 고생해준 로건이나 사제들의 수고가 무색해질 정도로 막대한 신성력이었다.
한데 어째서인지 몸이 다 나은 뒤로도 쏟아지는 빛의 폭포는 좀처럼 그칠 줄을 몰랐다.
‘대체 언제까지…….’
성진의 마음이 조금 불편해졌다.
그야말로 ‘기적’의 무의미한 낭비가 아닌가. 겉보기에는 영락없이 외간 여자에게 안겨있는 모양새라 조금 민망하기도 하고.
하지만 성진은 잠시 성황이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기로 했다.
신성력이 퍼부어지면 퍼부어질수록, 팔에서 느껴지는 떨림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안하구나, 아들아.]이윽고 성진을 놓아준 성황이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황급히 눈의 붕대를 끌러내니, 그의 눈동자에는 어느새 평소와 같은 침착한 빛이 되돌아와 있었다.
[널 언제까지고 혼자 두지 않으리라 생각했건만, 가장 힘든 시기에 그냥 방치한 꼴이 되고 말았다.]그럼에도 그의 침울한 듯한 기색이 여과 없이 전해져와, 성진은 슬그머니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탓이 아니잖아요. 그새 황궁에 틈새라도 열렸습니까? 뭐가 되었든 피치 못할 급한 사정이 생겼던 거죠?”
[…….]“오히려 제 잘못이 큽니다. 나름대로 체력을 관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급속도로 몸이 나빠지는 바람에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성진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따금 점멸하는 은색의 안광을 보건대, 또 남들이 볼 수 없는 뭔가를 빠르게 훑고 있는 듯했다.
[…그래. 오러가 한번 뒤엉키기 시작하니 갑자기 걷잡을 수 없어진 것이라.]이윽고 성황이 한숨을 내쉬며 성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툭툭.
[너무 잘 배웠다 해야 할지, 소질이 과하다 해야 할지. 염상과 의념을 숨 쉬듯 자연스럽게 다루다 보니 이런 부작용도 생기는구나.]역시 몸속의 오러가 성진의 의지에 따라 멋대로 움직인 게 원인이었다.
그렇게 몸이 몇 차례 헤집어지자, 무의식적으로 눈을 보호하고 있던 오러까지 엉켜들면서 눈 상태 또한 급속도로 나빠진 것이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별다른 해결 방법은 없단다. 연습을 통해 의념을 의식적으로 분리하는 방법을 찬찬히 익히는 수밖에.]착 가라앉아 있는 그의 눈동자에서, 일순 희미하게 씁쓸한 감정이 비쳐든다.
[하나, 익숙해지면 그것을 바탕으로 또 무슨 일들을 더 저지를지…….]“음…….”
괜히 찔려서 시선을 피하던 성진의 뇌리에, 순간 번뜩 하고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 맞아. 그게 있었지!”
갑자기 신이 난 성진이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조금 과장된 태도로 팔을 활짝 벌렸다.
“그나저나 아버지, 제가 정말 끝내주는 기념품을 구했습니다!”
“기념품.”
“예! 보시고 놀라지 마십시오. 이건 그야말로 지그스문트령만의 특산품이라 할 만하죠! 어디서 또 구하기는 힘들걸요?”
성진은 척척 침상 옆으로 걸어가, 구석에 쟁여둔 얼음 심장을 자랑스럽게 꺼내 들었다. 희미한 빛을 뿜어내는 작은 얼음 조각 세 개를.
“이게 뭔지 아십니까? 무려 글래쳐 트롤을 조종할 수 있는 컨트롤러입니다!”
“글래쳐 트…….”
“이름도 지었습니다. 빙수라고 하죠! 식구 수대로 빙수들을 황도에 가져갈게요! 온 가족이 하나씩 궁에 놔두면 여름에도 정말 시원할 겁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잠시 침묵하던 성황은, 이윽고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이마를 짚었다.
[그래, 빙수…….]와, 역시 아버지!
이곳에서 빙수들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는 사람은 처음 보네? 감탄 어린 시선으로 눈을 반짝이고 있는데, 성황이 나직한 한숨을 쉬며 물었다.
[저것들을 황도로 가져가고 싶더냐?]물론 성진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네, 되도록이면 그러고 싶습니다. 특히 시슬레에게는 꼭 보여주고 싶어요. 그 애는 늘 글래쳐 트롤의 실물을 궁금해했으니까요.”
울프 기사단과 글래쳐 트롤의 박진감 넘치는 전투.
어쩌면 자신을 쭉 괴롭히던 [델크로스 연대기]에서, 꼬맹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부분이 아닐까?
그러자 성황의 눈빛이 조금 심각하게 변했다. 뭔가를 깊이 고심하는 눈치였다.
[…그대로 가져가면 보나 마나 베니투스가 길길이 날뛸 터인데.]아, 역시 그럴까?
[하지만 크기를 조금만 줄이면 괜찮을 것도 같구나.]“네? 그런 게 가능합니까?”
[가능하다. 내 조만간 시간을 내서 조작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마. 괜히 혼자서 해보겠다고 덤비지는 말고.]그렇게 말하는 양이 금방이라도 떠날 듯한 분위기라, 성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벌써 가셔야 합니까?”
[그래. 내가 이곳에 머무는 것을 그리 좋게 보지 않는 자들이 있단다.]그러고 보면 확실히, 성황은 얼마 전부터 샤론 경에게 빙의하고 있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려는 듯 보였지. 북부의 인과가 부족하다고 했던가?
[그리고 이왕 온 김에 잠시 들여다볼 곳도 있구나.]흐릿해진 초점으로 어딘가를 응시하던 성황은, 마지막으로 토닥거리듯 성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곧 다시 보자꾸나. 이제 딴짓하지 않고 금방 황도로 돌아올 것 아니냐?]“네, 아버지.”
성진이 확신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성황이 비식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래. 그럼 되었다.]그래서 그냥 그렇게 넘어갔냐고?
아니다. 성황은 방을 떠나기 전에 기어이 성진의 이마에 딱밤을 때리고 사라졌다.
따악!
“꾸엑……?”
단지 이번에는 소리에 비해 그다지 아프지는 않아 이상했달까.
어쩐지 묘한 기분에 젖어 이마를 문지르던 성진은, 곧 얼음 심장을 얌전히 제자리에 넣어두고 침상에 누웠다.
[의외네? 네 아버지가 가자마자 당장 시험해볼 줄 알았는데?]마왕 놈이 의아한 듯 중얼거렸다.
방금 못 들었냐, 마왕아? 아버지가 가르쳐준다고, 혼자 시도하지 말라고 하셨잖냐.
[네가 그 말을 듣는다고? 천하의 이성진이?]‘물론이지.’
이제부터는 나도 나름대로 착한 아들 노릇을 해 볼 거라고.
[에휴, 네 주제에 퍽이나…….]‘닥쳐!’
* * *
한편, 겨우 무장을 해제하고 마사인과 식탁에 마주 앉은 로건은 주의 깊게 사촌 형의 표정을 살폈다.
“조금 서운하지는 않으십니까?”
“서운하다니, 뭐가 말입니까?”
“모레스가 형님을 다시 전처럼 칭하는 것이요.”
로건의 태도는 조심스러웠다.
마사인이 모레스를 각별하게 생각하는 것은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가 어려서부터 워낙 마사인을 따르기도 했고, 어른스러운 로건보다는 아무래도 손이 많이 가는 동생이다 보니 이것저것 챙기다가 정이 들었던 것이리라.
한데 기껏 형님이라 불렸다 했더니, 또다시 호칭이 마사인 경으로 돌아가 버리다니.
그런데 마사인의 반응은 의외였다.
“아, 그거라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저하. 모레스 황자님은 간혹 저렇게 잠꼬대를 하십니다.”
“…네?”
“밤에 이따금 잠꼬대를 하시거든요.”
당황한 로건에게 마사인이 차분히 설명했다.
“알게 된 계기는 전담 시녀의 제보였습니다. 열병을 크게 앓으신 뒤에 생긴 일이라, 처음에는 신경이 쓰여 밤에 종종 저하를 찾아보게 되었죠.”
그러니까 성진이 처음으로 몰래 황궁을 빠져나간 날부터였던가. 마사인은 그때부터 한동안 황자의 취침 시간을 조심스럽게 관찰했다.
본의 아니게 그의 휴식을 방해한 적도 있었다. 워낙 기감이 보통이 아닌 모레스 황자다 보니, 아무리 조심해서 들여다본다고 해도 잠에서 깨는 일이 다반사였다는 것.
“그럴 때마다 종종 저를 그렇게 부르시더군요.”
마사인 형님, 이라고.
듣고 있던 로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런데 다음날이 되면 전혀 기억을 못하시는 겁니다.”
“기억을… 못 한다고요?”
“예, 잠에서 깨었던 것은 물론이고, 저를 만났던 것까지, 전부요.”
로건의 표정이 자못 심각해지자,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마사인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며칠간 그런 일이 반복되었지만, 저하의 건강에 딱히 이상 신호가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생각했죠. 저하께서는 비록 열병으로 기억의 대부분을 잃으셨지만, 그래도 무의식 어딘가에는 아직 기억의 일부가 남아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기억…….”
“네. 진주궁의 닌니아스 의원에게 상담하니 그러더군요. 기억상실증 환자들은 간혹 어떤 특정한 계기가 생기면, 잊고 있던 기억을 부분적으로 떠올리는 경우가 있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새로 생긴 기억을 대신 잊기도 한다고 합니다만.”
“……!”
로건의 얼굴의 희게 질렸다.
마사인의 말에, 지금까지는 생각해본 적 없는 새로운 가능성 하나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저하? 저하,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처음 만났을 때 성진이 했던 말들이 온전한 진심을 담고 있었기에, 지금까지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가능성이었다.
‘이성진은 자신이 모레스가 아니며, 모레스의 영혼이 어디로 갔는지도 모른다고 했지. 하지만 실은 이성진이 스스로의 상태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던 거라면?’
이성진의 무의식에 모레스의 기억이 남아 있다? 그리고 잠결에 그것을 떠올릴 때가 있다?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왜 이성진이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이 ‘모레스 시절’의 기억뿐이라 여긴 걸까?
그것도 전생의 기억을 온전히 가지고 있는 로건 자신이 말이다.
‘설마 이성진이란 사람이 실은 모레스의 전생이라면? 모레스로 환생해서 그것을 잊고 지내다, 열병을 계기로 자신의 전생을 떠올리게 되었다면?’
그리고 그 대신 모레스로 살아온 기억들을 잊게 되었다면?
그러면 지금까지의 의문들이 모두 설명되는 것이다.
이따금 로건이 이성진에게서 모레스의 어린 시절을 겹쳐보게 되는 것도.
그리고 이성진의 존재에 대해 분명 알고 있을 게 빤한 성황이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고 있는 것도.
‘하지만…….’
그럼에도 이성진의 기척은 모레스와는 완전히 다르다. 내가 그것을 헷갈릴 리가 없어. 그 점은 대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거지?
로건이 깊은 혼란에 잠겨 있을 때였다.
갑자기 낯선 기척 하나가 그들이 앉은 식당으로 들어왔다. 소드 마스터인 로건조차 다가오는 것을 감지하지 못했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기척을 죽이고 있는 자였다.
“아, 샤론 경.”
“……!”
마사인이 반색하며 그를 부르자, 로건이 바짝 긴장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뒤를 잡혔다고? 대체 누구에게?
그리고 그는, 낯익으면서도 어딘지 생소한 엑소시스트의 모습을 마주하게 되었다.
“…샤론 경?”
그랬다. 겉으로 보기에는 분명 샤론 경의 모습이다.
하지만 묘한 안광을 발하는 은회색의 눈. 그 익숙하고도 독특한 눈동자를 로건이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아바마마?’
그때 엑소시스트가 입을 열었다. 마치 머릿속에서 직접 울려 퍼지는 듯 느껴지는 기이한 목소리였다.
[로건, 괜찮으면 잠시 나와 걷겠느냐?]* * *
마물 전담반 일에 관여하면서 자주 얼굴을 보는 엑소시스트의 기척을, 로건은 결코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앞장서서 성큼성큼 걷고 있는 엑소시스트는 어떠한가.
‘일순 당연하게 성황이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의 제안에 순순히 따라 나왔지.
하지만 따지고 들면, 지금 저 엑소시스트에게서 느껴지는 기척은 성황의 그것과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았다.
어디 그뿐인가. 신체의 차이에서 기인한 자세나 보폭 등의 사소한 변화 또한 눈에 띄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변하지 않는 것이 있었다.
바로 차분하게 정돈된 오러를 휘감고 있는 특유의 분위기. 공기나 땅의 마찰을 조금도 느끼지 않는 듯, 홀로 존재감을 뿜어내는 표홀하기까지 한 움직임.
“아바마마십니까?”
한참을 따라 걷던 로건이 물었다. 이상한 질문이라 생각했지만 그렇게밖에 물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엑소시스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역시 알아보겠더냐?]“네. 하지만 기척이 조금 다르십니다.”
[그래, 기척.]엑소시스트, 아니, 아마도 성황일 것이 분명한 그녀가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알고 있느냐, 로건? 사람의 기척을 결정하는 요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에서도 기억이나 경험은 기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지. 단지 인간의 경험이란 것이 여간해서는 연속성을 잃지 않기에, 단시간에 변하는 일이 드물 뿐이란다.]그리고 성황은 뜻밖의 말을 했다.
[네 기척도 마찬가지니라.]“네?”
[하루에도 몇 번이고 바뀌곤 하지. 단지 그 차이가 그리 크지는 않아,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고 있을 뿐이니라.]로건이 당황하여 입을 달싹거리는데, 성황은 애매한 지점에 이르러 마침내 걸음을 멈추었다.
영지의 입구.
아직도 군데군데 마수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는 어수선한 장소였다.
끈질기게 재생하는 라이칸슬로프의 심장을 내리찍던 병사들이, 두 사람을 알아보고 황송한 듯 고개를 숙인다. 어제 눈부신 활약을 보였던 황자의 일행을, 그들이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으니까.
‘한데 왜 굳이 이런 장소를?’
로건이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툭툭.
발끝으로 바닥을 가볍게 두드리며 성황이 말했다.
[그래, 로건. 너는 분명 내게 묻고 싶은 것이 있을 테지.]기다리고 있던 말이다.
“네, 실은 그렇습니다.”
로건은 자세를 가다듬고 성황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