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254)
성황의 아이들-254화(254/469)
254. 다락방 (3)
오르덴이 성진을 안내한 곳은, 증축된 백작저 꼭대기에 있는 작은 다락방이었다.
“황녀님께서는 어린 시절, 주로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곤 하셨습니다.”
오르덴의 설명에 성진은 말없이 방 안을 둘러보았다.
군데군데 파손된 채 남아있는 거친 나무 바닥과, 마감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허름한 벽.
먼지가 뽀얗게 쌓여있는 작은 들창에서 비좁게 빛이 새어들고, 지푸라기가 날리는 작은 침대에서는 초가을의 마른 햇살 같은 냄새가 났다.
‘…주로 시간을 보냈다? 설마 여기가 누님이 지내던 곳은 아니었겠지?’
어딘지 싸한 예감이 드는 것은 단순한 기분 탓일까?
그러던 중 성진은 벽면 여기저기에 쓰여진 작은 낙서들을 발견했다. 어린아이의 것으로 보이는 어설프고 동글동글한 필체의 단어들이었다.
“…이건 누님의?”
“네, 저하.”
과연, 어린 시절부터 누님은 명필의 자질을 보이고 있었구나. 지금도 손재주는 엉망이지만, 필체 하나만큼은 유려하기 그지없지.
성진은 묘한 감상에 젖어 단어들을 손으로 더듬었다. 어린아이가 처음 배울 법한, 성진도 충분히 읽을 수 있는 단어들이었다.
엄마, 아빠, 가족, 벨, 엄마, 아빠…….
-가족과 함께 책을 읽는 것이 내 오랜 꿈이었어.
문득 성진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며 행복한 듯 웃던 아멜리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런데 그중에서 알아볼 수 없는 단어들도 몇몇 눈에 띄었다. 도통 읽을 수 없어 무엇인지 물어보자, 오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어가 아니니까요, 저하. 그건 브르타뉴어입니다.”
“그래?”
“네.”
교회, 천사, 오두막, 뭐 그런 의미의 글자들이라고 오르덴이 설명해주었다.
“황녀님께서는 더없이 총명하시니, 아마 어린 시절부터 그 자질이 나타났던 거겠지요. 배우지도 않은 브르타뉴어를 홀로 깨우치셨으니까요.”
…배우지도 않은?
어딘가 미묘한 설명에 성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이를 깨달은 오르덴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네, 제가 알기로는 어린 황녀님께 브르타뉴어를 따로 가르친 자는 없습니다. 이곳에서 스승을 가져본 적이 없으니까요. 아마도 저 단어들의 의미가 무언가 다른 것이었다면, 황녀님은 마녀로 낙인찍혔을지도 모릅니다.”
감히 신성제국의 황녀를 누가 마녀로 몰아?
성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안내된 다락방도 그렇지만, 어쩐지 이후 알게 될 진실이 썩 유쾌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하를 이곳으로 청한 것은, 보여드린 후 처분을 결정하고 싶은 물건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말한 오르덴은 몸을 숙여 작은 침대 아래쪽을 더듬었다. 깊숙이 숨어있는 나무판자 하나를 뜯어내고 그 속에서 조심스럽게 뭔가를 끄집어낸다.
이윽고 그가 일어서서 성진에게 내민 것은 작은 나무상자였다.
“이건 황녀님이 어린 시절 숨겨두었던 보물들입니다. 이 저택에서는 저 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사용인들 조차도요.”
성진의 눈썹이 꿈틀 위로 올라갔다.
“누님이 자네에게만 따로 알려줬다고?”
“그건 아닙니다. 그저 저택에 있을 때 틈틈이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자연히 알 수 있게 되더군요. 작은 소녀가 몰래 물건을 숨길 만한 장소를요.”
성진은 오르덴이 내미는 상자를 받아들었다. 잔뜩 먼지가 쌓이고 이음새가 어그러져 있어, 보물 상자라기보다는 쓰레기라는 말에 더 어울리는 물건을.
삐그덕.
먼지와 함께 뚜껑이 열리고, 이내 상자와 비슷하게 볼품없는 내용물들이 드러났다.
말린 지푸라기 덩어리와 낡은 천 조각, 작고 하얀 조가비, 그리고 반으로 부서진 작은 팬던트.
“이게 보물…….”
성진은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다. 아무리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의 물건이라고는 해도, 결코 보물로 간직할 것 같지는 않은 것들뿐이다.
조가비나 팬던트는 그렇다 치고, 지푸라기라니?
“아, 그건 인형입니다. 이쪽이 머리고 이쪽이 다리라고 하더군요.”
몇 갈래로 갈라져 묶인 것이 인형의 팔다리인 모양이었다.
“나름 제대로 이름도 붙어 있었습니다. 벨… 그러니까 벨루나라는 이름이었던 것 같습니다.”
성진은 황담함을 감추지 못했지만, 그 지푸라기를 바라보는 오르덴의 눈은 답지 않게 부드러운 빛을 띠고 있었다.
마치 아멜리아와의 그런 작은 추억 하나하나조차 소중하다는 듯.
“그래서, 이걸 보여주고 내게 묻고 싶다는 게 뭔가?”
성진의 물음에 오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부터 언제나 이 상자를 황녀님께 전해 드리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린 황녀님이 소중하게 여기시던 보물들이니까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했습니다.”
“두렵다?”
“네.”
그렇게 대답하는 오르덴의 눈이 어둡게 침잠했다.
“지금은 행복하게 지내고 계실 황녀님이 상자를 보는 순간, 어린 시절의 불행한 기억을 떠올리며 힘들어 하시지는 않을까 하고요.”
* * *
오르덴이 아멜리아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막 스콰이어 수련을 받기 시작한 10세 무렵이었다.
정원에서 검을 수련할 때마다, 다락의 창문 밖으로 빼꼼 내려다보는 하얀 얼굴이 간혹 눈에 띄었던 것이다.
“……?”
창백하고 무표정한 작은 얼굴, 거기에 산발이 된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소녀였다.
언뜻 보기에는 유령이라고 해도 좋을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어린 오르덴은 소녀가 전혀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꾀죄죄한 몰골에도 불구하고, 소녀가 마치 요정처럼 어여뻤기 때문이다.
“이 저택의 다락에 요정이 살고 있어.”
“응?”
“예쁜 여자아이 요정이야.”
어린 오르덴이 무심코 그런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그는 소녀의 정체가 너무나도 궁금했고, 자신의 작은 요정님에 대한 것을 누구에게든 알리고 싶었다.
하필이면 그 대상이 동생 에밋이 된 것은 통탄할 일이었지만.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함께 옆에서 검을 휘두르던 에밋이 해괴한 표정을 지었다.
“제정신이야? 왜 낮에 그런 잠꼬대를 하는 거야?”
“…너 맞을래?”
자신의 이야기를 무시하는 데 화가 난 오르덴이 에밋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자 얄미운 동생은 훌쩍 뒤로 물러나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형은 아직 애송이야! 어린애라고! 다들 장남이니 천재니 떠받들고 있지만, 바보 같은 형보다는 내가 훨씬 후계자답단 말이야!”
“그 입 닥쳐, 에밋. 실컷 두들겨 맞기 전에.”
“흥! 해 보라지! 내가 그렇게 놔둘 거 같아?”
에밋은 밉살스럽게 입을 툭 내밀어 보이더니, 그대로 잽싸게 정원에 있는 조모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할머님! 오르덴 형님을 좀 보세요! 아까부터 바보 같은 소리만 해요. 다락에 요정이 있다고 헛소리를 한다고요!”
에밋은 건수 하나 잡았다 싶었는지, 신이 나서 조모의 치마폭에 파묻히며 떠들어댔다.
“에밋! 그만하라고! 할머님, 실은 그게 아니라…….”
“그게 무슨 소리냐, 오르덴. 귀신이면 모를까, 세상에 요정이 있을 리가 없지 않니. 네가 헛것을 봤겠지.”
“……?”
“쓸데없는 소리들 말고 어서 수련이나 하거라. 네 아버지에게 너희들이 게으름을 부린다고 고해바치기 전에.”
조모는 자세히 묻지도 않고 단정적으로 그들의 대화를 끊어버렸다. 그때 자신을 싸늘하게 노려보던 핏발선 조모의 눈을 오르덴은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며칠간, 어쩐 일인지 오르덴은 다락의 소녀를 볼 수 없었다.
‘그 애는 정말 요정이었나 보다. 내가 사람들에게 얘기하는 바람에, 부정을 타서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 건가?’
어쩐지 섭섭한 마음에 그런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다음날이 되자, 소녀는 다시 다락방 창가에 나타났다. 자신이 예쁘다고 칭찬했던 얼굴이 피멍으로 엉망이 된 채로.
그제야 오르덴은 그 소녀가 요정 같은 게 아닌, 다락에 실재하는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오르덴은 이 소녀의 사정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게 되었다.
소녀의 이름이 아멜리아라는 것과, 그녀가 오르덴의 먼 혈연이라는 것. 어머니가 일찍 죽고 나서 의탁할 데가 없어진 소녀를, 그의 할아버지인 변경백이 데려왔다는 것.
사용인들이 그녀에 대해 쉬쉬하는 까닭은 오르덴의 조모, 그러니까 당시 지그스문트 백작 부인의 함구령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작 부인은 남편의 사생아를 증오하여 설산의 별장으로 감금하듯 떠나보냈고, 그런 그녀의 하나밖에 없는 피붙이 역시 끔찍이도 미워했다.
그러다 보니 모두가 아멜리아를 다락에 가둬둔 채 아예 없는 사람 취급을 했다. 심지어는 끼니도 제때 가져다주지 않는 것이 다반사.
점점 말라가는 소녀를 보다 못한 오르덴이, 어느 날 밤에 몰래 아멜리아를 다락에서 빼내어 부엌으로 데려갔다.
소녀는 주춤거리면서 그를 따라왔는데, 작은 손에 지푸라기 한 뭉치를 들고 있는 채였다.
“아멜, 그건 뭐야? 왜 그런 쓰레기를 들고 있어?”
“…벨이야.”
평소 말을 거의 하지 않아서일까, 조금은 어눌하게도 들리는 목소리였다.
그럼에도 오르덴은 그런 아멜의 목소리가 마치 지저귀는 작은 새처럼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에밋이 알았다면 죽어라 놀렸을 테지만.
“쓰레기가 아니라 내 인형이야.”
“그래. 벨이라고? 네가 붙여 줬어? 예쁜 이름이네.”
그런데 아무 생각 없이 한 질문에 아멜이 한 대답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아빠…….”
“응?”
“아빠가 붙여 줬어.”
오르덴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아멜, 너에게는 아빠가 없다고 했어. 할머님이 언제나 네 어머니를 욕하고 있다고.
사생아가 밖에서 또 다른 사생아를 낳았다고. 이 이상 더럽고 천박할 수가 없다고.
물론 어린 오르덴도 그 생각을 입 밖에 내지 않을 정도의 정신머리는 있었다.
“여기 앉아, 아멜.”
찬장을 뒤적여 마른 빵과 작은 치즈 조각을 찾아낸 오르덴은, 아쉬운 대로 그것들을 물과 함께 아멜리아에게 건넸다.
그리고 식탁 맞은편에 앉아 소녀가 식사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얌전히 입을 오물거리는 그녀가 역시나 요정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새 경계심을 푼 아멜리아는 곧 오르덴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털어놓게 되었다.
“…그래서 계속 보고 있었어. 검술이라는 거, 재미있어 보였거든.”
“그래? 그랬구나. 방에 혼자 있으면 심심하지는 않아?”
“괜찮아. 방에서는 매일 글자들을 쓰고 있어.”
소녀는 의젓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맑은 회색 눈을 들어 허공을 꿈꾸듯 바라보았다.
“게다가 조금만 기다리면, 아빠가 곧 날 데리러 올 거라고 했어.”
“누가? 아빠가 그렇게 말했어?”
아마도 외로운 소녀가 혼자 꿈이라도 꿨나 보구나. 측은하게 생각한 오르덴이 묻자, 아멜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검은 베일을 쓴 언니가 그랬어.”
검은 베일을 쓴 언니? 수상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게 누군데?”
“나도 잘은 몰라.”
부족하나마 그렇게 아멜과 약간의 담소를 나누는 데 성공한 오르덴은, 식사가 끝나자 아멜을 무사히 다락으로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그날 밤, 무척 행복한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다음날이 되어, 또 다시 창문에서 소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걱정이 된 오르덴이 다락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똑똑똑.
“아멜? 무슨 일 있어? 너 괜찮아?”
그런데 그의 뒤로, 갑자기 시녀 하나가 나타나 싸늘하게 말해주었다. 조모의 시중을 드는 젊은 시녀였다.
“그 계집애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할 겁니다, 공자님. 다리가 부러졌거든요.”
…뭐?
오르덴의 얼굴이 희게 질리는데, 시녀가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간밤에 도둑고양이처럼 부엌으로 숨어들었다더군요. 그런 나쁜 것들은 아예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어 줘야 정신을 차리지 않겠어요?”
이따금 아멜에게 손찌검을 하는 조모가 직접 저지른 일인가, 아니면 조모의 명을 들은 사용인들의 소행인가.
어쨌든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아멜을 위하는 모든 것들이 아멜에게 해를 끼치고 있어!’
소년은 자신의 한계와 현실을 깨달았다. 아무리 자신이 발버둥을 치더라도, 모든 일은 어른들의 사정대로 흘러가는 법이다.
오르덴은 아멜에게 접근하는 것을 완전히 포기하고 말았다. 어쩌면 조모가 진정 의도한 것은 그것인지도 모른다.
‘미안해, 아멜…….’
아멜은 얼마 뒤 다시 다락의 창가에 모습을 드러냈지만, 오르덴은 그녀를 외면하기 위해 애를 썼다.
어쩌다 간혹 눈을 마주치면 서글픈 눈을 하던 아멜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무시에 적응한 듯 또다시 무표정한 얼굴이 되었다.
그렇게 3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어느 날이었다.
지그스문트령에 정말로 아멜의 아버지라 자처하는 사람이 나타나게 된 것은.
“지금껏 잘도 아이를 숨겨 왔구나.”
새파랗게 질린 사람들을 헤치고, 흰 법복을 입은 범상치 않은 남자가 거침없이 백작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한 무리의 무장한 성기사들을 대동한 채였다.
-성황 폐하, 그 계집애의, 설마 그럴 리가…….
쉽게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웅성거리는 사람들 속에서도 오르덴은 확신할 수 있었다. 정말로 소녀가 말한 대로, 그녀의 아버지가 나타났다는 것을.
매번 아멜을 관찰하던 오르덴은, 남자의 얼굴이 어딘가 아멜과 닮은 구석이 있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바로 저 사람이 아멜에게 그 맑은 회색 눈동자를 물려준 사람이었다.
“아빠……!”
그리고 소녀를 마주한 남자는 입꼬리를 비죽 끌어올리며 살벌하게 미소 지었다.
사람의 웃는 얼굴이 그리도 무서울 수 있다는 것을, 오르덴이 처음 알게 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