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256)
성황의 아이들-256화(256/469)
256. 다락방 (5)
오르덴은 성진에게 과거의 일들을 자세히 말할 수는 없었다. 이미 오래전 지나가버린 일인 데다, 가문의 커다란 치부이기도 했으니까.
단지 전 백작 부인이었던 그의 조모가 어린 아멜리아를 탐탁지 않아 했다는 것. 이에 백작저의 모두로부터 수년간 사생아로 홀대받았다는 것. 그리고 성황이 백작저로 찾아와 사용인들을 응징했음을 두루뭉술하게 설명했을 뿐.
하지만 성진은 그 짧은 설명을 듣는 동안 혼자서 많은 것들을 유추할 수 있었다.
지푸라기 덩어리를 인형이라며 소중히 생각하고 있었다든지, 보물 상자라 불렸다는 쓰레기의 상태라든지.
무엇보다 어둡게 가라앉은 오르덴의 얼굴이 많은 것들을 설명하고 있었다. 단순무식한데다 거짓말에 영 소질이 없는 놈이니까.
‘그냥 홀대가 아니라, 뭔가가 더 있구나!’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성진은 그리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아버지가 누님을 데리러 왔다니, 어련히 알아서 정리하지 않으셨겠는가. 어쨌든 이제 아멜리아 누님은 황궁에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고.
“그럼 자네의 조모님은 어찌 되셨나?”
단지 오르덴의 조모가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는 조금 궁금했다. 지그스문트령을 처음 방문했을 때 백작 부인이 이렇게 말한 것이 생각났으니까.
-올해는 어머님이 편찮으셔서 탄신연에 참석하지 못했답니다.
그 말은 지금도 그 망할 할멈이 백작저에서 잘 대접받으며 지낸다는 뜻 아니겠나.
뭐, 지그스문트가 워낙 위세 높은 귀족이라, 아무리 아버지라고 해도 여느 사용인들처럼 막무가내로 손을 쓰기는 힘드셨을 테지.
그렇다고 정식 재판을 열어 누님이 홀대받았다는, 어떻게 생각하면 황실의 일원으로서 흠이 될 여지가 있는 사실을 공공연히 드러내셨을 리도 없고.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을 리는 없는데…….’
그리고 그에 대한 오르덴의 대답은 의외의 것이었다.
“…축복?”
“예, 그렇습니다.”
엉?
성진은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왜?”
당장 때려죽여도 시원찮을 인간에게 어째서 그런 짓을?
“그건 저도 잘…….”
뭐, 무식한 오르덴 놈에게 답을 기대하고 물은 것은 아니었다. 성진은 떨떠름한 얼굴로 상자의 내용물을 내려다보았다.
‘이게 더 이상 누님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따위 것들. 하려고만 한다면 성진은 아멜리아에게 방 안 가득한 인형을 선물할 수도 있고, 값비싼 보석 세트들을 한 아름 안길 수도 있다.
단지 우리 누님이 중2병 취향이라 그다지 반길 것 같지 않아서 그렇지.
‘하지만 이름까지 지어 주셨다면, 당시 누님에게는 무척 소중한 물건들이겠지.’
한 사람의 추억을 어떻게 타인이 멋대로 재단하여 가치를 매길 수 있을까, 역시 기회를 봐서 슬쩍 여쭤는 봐야겠다.
그렇게 결정한 성진은 다 부서진 상자를 조심스럽게 품 안에 갈무리했다.
“어쨌든 자네에게는 고맙다는 말을 해야겠군. 누님의 물건을 지금까지 잘 간수해줬어.”
오르덴은 무뚝뚝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런 그의 얼굴에 잠시 스쳐가는 옅은 안도와 아쉬움을 성진은 놓치지 않았다.
그래, 이런 누더기들이라도 누님의 물건이라 보내기 섭섭하다 이건가?
성진은 표정을 굳히며 오르덴에게 말했다.
“설마 허튼 생각을 하지는 않으리라 보네. 자네는 단순하긴 해도 분수를 모르는 자는 아니잖아?”
“네?”
“모르지는 않겠지? 자네와 아멜리아 누님은 혈연이야. 사촌지간이라고.”
“……!”
충격받은 듯 멍하니 굳어있던 오르덴이, 갑자기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닙니다! 당치 않습니다! 저는 결코 그런 무도한 생각은……!”
“흠, 그래?”
그렇다면 뭐.
성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락을 나섰다. 그런데 뒤에서 오르덴이 마치 들으라는 듯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게 아닌가.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완전한 사촌지간은 아닌…….”
뭐, 인마?
성진이 돌아보며 눈을 부라리자, 오르덴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물론 제가 다른 마음을 먹고 있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저하!”
“그래, 당연히 그래야지.”
안 그러면 자네는 앞으로 황도 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할 테니까.
성진이 콧방귀를 뀌며 계단으로 향하는데-
“하지만 현 브르타뉴의 왕과 왕비는 이종사촌지간…….”
…이 새끼가 내 손에 죽으려고 진짜!
오르덴을 붙잡고 다그치고 협박하느라, 성진이 다락을 나선 것은 그로부터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안 돼!”
“저하, 저는 방금 아무 말도…….”
“글쎄,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 되니까!”
“…….”
방으로 돌아오는 길.
걷는 걸음걸음 쉬지 않고 구박했더니 오르덴의 얼굴이 눈에 띄게 우울해졌다. 그러더니 한숨을 푹 내쉬며 끝내는 이런 말을 지껄이는 게 아닌가!
“…하지만 저하.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아멜리아 황녀님의 생각…….”
크악! 이 새끼야! 오늘 너 죽고 나 죽자!
오르덴의 멱살을 와락 움켜쥔 성진이 그를 앞뒤로 탈탈 흔들대고 있을 때였다.
“오르덴!”
갑자기 뒤에서 근엄한 호통이 들려왔다.
당황하여 뒤를 돌아보니, 웬 나이 지긋한 노부인 하나가 지팡이를 짚고 서서 형형한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할머님!”
오르덴이 정색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성진도 눈치를 봐서 슬쩍 그의 옷깃을 놓고 몸을 돌렸다.
‘할머니?’
그래. 저 할멈이 누님을 홀대했다는 오르덴의 조모, 전 백작 부인인가.
성진은 못마땅한 눈으로 노부인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편안한 실크 잠옷 위에 숄 하나만 두른 격 없는 차림새에 반해, 딱딱한 노부인의 얼굴은 강퍅하고 고지식해 보였다. 느슨하게 어깨로 흘러내린 머리는 헝클어져 있는데, 또 지팡이에 기대어 꼿꼿하게 세운 허리는 우아하기 그지없다.
남편과 비교하면 훨씬 나이 들어 보이는 모습. 실제로는 크게 나이 차이가 나는 부부는 아니겠지. 빈센트 노인은 노화가 늦어지는 데카론 나이트니까.
‘어디가 아프다더니, 겉으로는 제법 멀쩡해 보이는데?’
딱히 먼저 예를 갖출 필요를 느끼지 못한 성진이 빤히 그녀를 바라보는데, 노부인은 근엄한 표정으로 성진을 향해 꾸짖었다.
그러니까, 오르덴이 아닌 성진을 향해서였다.
“오르덴! 이런 훤한 장소에서 가문의 기사를 핍박하다니, 이게 대체 무슨 경우 없는 짓이냐! 지그스문트의 적장자로서 자각이 있기는 한 거냐?”
“…….”
“대체 언제까지 어린애같이 굴 테냐. 차라리 동생 에밋이 너보다 배는 어른스럽겠구나!”
성진이 멀뚱히 오르덴을 돌아보았다.
‘편찮다더니 머리가 좀 아프신가?’
‘송구합니다. 최근에 조모께서 약간의 치매 기를 보이십니다. 본래는 사용인들이 늘 붙어다니는데, 아마 낮잠 시간에 혼자 몰래 빠져나오신 모양입니다.’
그렇게 대꾸한 오르덴이 노부인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살살 달래었다.
“할머님, 왜 또 혼자 나와 계십니까? 어서 방으로 들어갑시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아니, 이런! 지금 지그스문트 백작 부인인 내가 친히 손자를 가르치고 있는데, 왜 가문의 기사가 날 방해하는 거요! 썩 물러나지 못하겠소?”
노부인이 오르덴을 노려보며 휘익 지팡이를 휘두른다. 제법 매서운 손속이었다.
뻐억!
팔을 얻어맞은 오르덴이 재빨리 지팡이를 붙잡았다. 오러 유저인 터라 그리 아프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래도 그의 얼굴에 일순 숨길 수 없는 서운함이 어린다.
“할머님, 고정하십시오.”
“무엄하다! 지금 어디서 감히 일개 평기사가 귀족의 앞을 가로막느냐!”
지팡이를 빼내지 못하자, 노부인은 아예 주먹을 꽈악 움켜쥐고는 오르덴의 등과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치기 시작했다.
퍽 퍽 퍽!
“놔라! 놔라, 이놈아!”
“할머님! 접니다. 오르덴입니다!”
“이 더러운 놈이, 그래도!”
와, 노인네가 진짜 성깔하고는.
아무리 손자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해도, 아무에게나 무턱대고 폭력을 휘두르네.
“쯧쯧.”
성진이 작게 혀를 차는데, 또 그걸 어떻게 들었는지 노부인이 휙 고개를 돌려 성진을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고상하던 노부인의 품격은 온데간데없이, 산발이 된 머리와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 마치 지옥굴에서 고개를 뺀 악귀와도 같았다.
“…그 눈!”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미간을 찡그리고 있는데, 노부인이 고개를 모로 휘익 기울이더니 성진의 코앞으로 바짝 얼굴을 들이밀었다.
초점이 흐린 채 커다랗게 뜨인 그녀의 눈동자에는, 분노를 넘어서는 일종의 광기까지 어려 있다.
그렇게 빤히 성진과 시선을 맞추던 노부인이 이윽고 입술을 짓씹으며 말했다.
“그래, 나는 이런 눈을 알고 있어. 이건 천박한 그 마녀 계집의 눈이야!”
…뭐?
성진이 섬뜩한 예감을 느끼며 노부인을 빤히 바라보았다.
“할머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분은 신성제국의 황자님이십니다!”
당황한 오르덴이 그녀의 어깨를 잡고 뒤로 세게 끌어당겼지만, 한번 발작을 시작한 노부인의 광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거세었다.
“크악! 놔라! 저기 그 계집이 있다! 빈센트를 밖으로 꼬여낸 더러운 것이 저기에 있어!”
“할머님! 여봐라! 여기 아무도 없느냐!? 어서 할머님을 모셔라!”
“내가 저것을 저대로 가만히 내버려 둘 것 같으냐! 죽여 줄 것이다! 괴롭히고 또 괴롭혀 끝내 말라 죽게 해 줄 것이다!”
크와와악!
정신 나간 노인이 마치 개처럼 침을 튀기며 짖어대는 꼴을 성진은 가만히 노려보며 서 있었다.
‘그래, 내가 진작 깨달았어야 했다.’
후회와 자괴감, 그리고 그것을 월등히 넘어서는 거친 분노가 온몸을 잠식한다.
저런 성깔을 가진 사람이 아멜리아 누님을 홀대했다지 않는가. 대체 어떤 식이었을지, 처음부터 의문을 가졌어야 했어.
그리고 성진은 곧바로 그 해답을 알 수 있었다. 오르덴은 물론 달려온 시녀들에게 붙잡힌 노부인이, 이번에는 목을 꺾어 성진을 거꾸로 노려보며 빠득빠득 이를 갈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천박한 사생아야! 왜 때려도, 때려도 죽지를 않느냐!”
“…….”
“왜 굶겨도 죽지 않고, 왜 사지를 부러뜨려도 죽지를 않느냐! 왜 아득바득 살아나는 거냐! 너는 진정 악마의 씨앗이더냐!”
저런 식이었겠구나.
작은 아이였던 누님을 저런 눈으로 노려보고, 저렇게 욕하고, 저렇게 때린 거구나!
“하하.”
성진은 몰랐지만, 무의식중에 그의 입은 작게 웃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흠칫. 느닷없이 섬뜩한 기운을 느낀 오르덴이 놀라며 성진을 바라본다.
하지만 성진은 더는 주변의 상황을 인식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강렬하게 몰아치는 감정을 붙잡고, 눈앞에 있는 인간의 탈을 쓴 괴물에게 온 정신을 집중할 뿐.
끝을 알지 못할 극도의 분노는 어찌 보면 희열과도 맞닿아 있을 것이다. 흥분에 젖은 손이 떨리고, 입꼬리가 절로 길게 찢어진다.
“말해 봐라.”
성진의 눈에서 희미한 은빛 안광이 점멸하기 시작했다.
“네가 누님에게 뭘 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나한테 다 말해.”
우뚝.
그러자 발작하던 노부인이 움직임을 멈추고 뻣뻣하게 굳어서 성진을 바라보았다.
얼어붙은 입에서는 더는 아무런 소리도 새어나오지 않았지만, 성진은 노부인의 눈을 통해 그녀의 영혼이 하는 말을 충분히 듣고 있었다.
작은 소녀를 뾰족한 구둣발로 걷어차는 저 여자, 작은 소녀의 뺨을 언제까지고 후려치는 저 여자, 작은 소녀의 머리채를 쥐고 미친 듯이 악다구니를 쓰는 저 여자…….
수없이 많은 장면들이 눈앞을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듯 고양된 감정은 급격한 의식의 확장을 동반한다.
주변의 소리가 훅 멀어지며 시야가 사방으로 걷잡을 수 없이 확장되기 시작한다.
“…저하?”
성진의 눈에서 기이한 빛이 번들거리자, 불길한 기운을 느낀 오르덴이 조모를 놓고는 그에게로 다가왔다.
“왜 그러십니까, 저하?”
멀리서 들려오는 듯 멀기만 한 오르덴의 목소리를 들으며 성진이 멍하니 생각했다.
‘그래, 오르덴. 예전에 저 노망난 것을 본 아버지가 뭐라고 하셨다 했지?’
오르덴은 성진에게 한 번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지만, 어쩐지 성진은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는 아멜리아의 눈앞에서 가장 행복한 모습으로 기억되거라. 후일 네게 일어날 일로 인해, 내 아이들이 일말의 죄책감도 가지지 않도록.
그래, 아버지의 뜻을 알겠다. 성진은 순간 모든 것을 명확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한 사람의 영혼이 온전히 감내할 수 있는 징벌의 크기. 최악의 형벌을 내리기에는 조금 모자랐던 인과가, 그때 누군가의 축복으로 인해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이룬 거다.
‘이건 내게 주어진 기회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최악의 복수를 할 수 있는 기회. 내가 참지 않을 것을 아신 아버지가, 기꺼이 내 몫을 남겨 주신 거야.
어찌 기쁘지 않을 수가 있는가!
헉.
이유를 알 수 없는 공포를 느낀 오르덴이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기분 탓일까. 지금 황자의 모습이, 오래전 작은 아멜을 안고 있던 성황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기이하게 빛을 발하는 저 눈은 예전 성황의 그것과 똑같이 섬뜩하지 않은가!
그때 안도한 성진이 마음껏, 그야말로 마음껏 마음속의 분노를 노부인에게 쏟아냈다.
[너는 앞으로도 영원히 네 죄를 용서받지 못한다. 너는 죽을 때까지 편히 잠들 수 없을 거다. 죽은 이후에도 네 영혼은 결코 쉴 수 없을 거다.]허업.
영혼을 강타하는 충격에, 늙은 여인이 바람 빠지는 신음을 흘린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아무도 너의 죽음을 알지 못한다. 아무도 죽은 너를 기억하지 못할 거다. 죽은 이후에도 네 영혼은 천 갈래, 만 갈래로 갈라지며 다른 영혼의 천 배, 만 배로 고통받을 거다. 그 시간은 영원히 끝나지 않아.]끄어어어.
노부인이 거품을 물고 눈을 까뒤집자, 기겁한 시녀들이 노인을 복도에 눕히며 소란을 피운다.
마님! 정신 차리십시오, 마님!
하하. 어쩐지 유쾌한 기분이 된 성진이 마지막 저주를 퍼부었다.
[소멸을 갈망하며 빌고 또 빌겠지만, 그럼에도 언제까지나 스러져 사라지는 호사를 누리지 못할 거다. 네 영혼은 멀쩡히 되살아나 또다시 고통을 반복할 테니까.]감히 네게 허락된 [안식] 따위는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저하…….”
목소리가 아닌 사념으로 퍼부어진 저주. 한 사람의 영혼에 깊이 아로새겨진 저주.
아무도 그것을 듣지 못했지만, 성진의 바로 옆에 있던 오르덴만은 느낄 수 있었다. 방금 황자가 뭔가 무서운 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대체 방금 무엇을 하신…….”
오르덴의 떨리는 목소리에, 옆을 돌아본 성진이 기분 좋게 웃어 보였다. 여전히 눈동자에서 은회색의 섬뜩한 광채를 번뜩이는 채로.
좋아. 나는 저것이 죽을 때까지 얼마든지 더 기다릴 수 있다. 최고로 농익은 완벽한 복수를 위해서라면. 누님이 받은 고통을 백 배, 천 배로 갚아주기 위해서라면.
‘이제 슬슬 돌아가지 않으면 위험한데.’
끝없이 고양되는 기분과 어디까지고 뻗어나가는 의식.
무척이나 멋진 기분이었지만, 성진은 이제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방법은 알 수 없었지만, 뭔가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럼에도 성진은 끝까지 잊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모자라는 마지막 한 방울의 인과를 완성했다.
“그러니까 할멈. 나 역시 널 기꺼이 축복해 주지. 얼마 남지 않은 그 생, 죽을 때까지 부디 몸 건강하라고.”
달칵.
머릿속에서 완벽하게 조율된 인과가 맞물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영원한 고통의 굴레에 갇히게 될 가엾은 영혼의 족쇄가 완성된 것이다.
“하하하.”
“저하.”
“하하,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냐, 오르덴. 나도 네 조모를 축복했다. 마치 아버지가 그러셨던 것처럼.”
하하하하.
입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성진은 내심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큰일 났다. 이거 멈추질 않아. 이제 어떻게 돌아간다지.’
아니, 굳이 돌아갈 필요가 있을까?
왜냐하면 나는…….
툭!
그때 누군가가 성진의 어깨를 가만히 붙잡았다. 성진이 채 기척을 느끼지도 못하는 사이에, 누군가가 그의 곁으로 빠르게 다가온 것이다.
성진은 뒤를 돌아보았다.
“샤론 경?”
그리고 곧 엑소시스트의 밝게 빛나는 은회색의 눈을 마주한다. 한껏 끌어올려졌던 입꼬리가 내려가며, 서서히 시야가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흥분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정신이 고요히 제자리로 돌아온다.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