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258)
성황의 아이들-258화(258/469)
258. 레지나의 갈림길 (2)
그들은 지금 틈새로 향할 예정이라고, 성황이 설명했다.
단지 일전에 황궁에서 경험한 곳과는 달리, 관리하는 주인이 따로 존재하는 대단히 안정적인 공간이라나. 그래서 멀미 걱정은 크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얼음 심장을 가져가는 걸 잊지 말거라.]영혼만이 이동할 테지만, 그래도 지니고 있는 물건이 그대로 반영되는 신기한 공간이라고 한다.
확실히 일전에도 성진은 집무실과 틈새 양쪽에서 동시에 몸이 존재하는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어떤 원리인지는 몰라도 아마 그것과 비슷한 현상이 아닐까.
“음…….”
얼음 심장 세 개를 챙겨 품에 넣던 성진은, 잠시 망설이다 슬그머니 하나를 빼내어 탁자 위에 도로 올려 두었다.
어쩐지 하나 정도는 본래 모습으로 두는 것이 좋겠다는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한데 순간적으로 성황의 눈에서 밝은 은빛이 번쩍이나 싶었다.
[이왕이면 모두 들고 가는 것이 어떠냐. 조만간 네게 심장 하나가 더 생길 것 같다만.]“네?”
[이미 또 하나의 소재를 파악하고 있지 않느냐?]그러자 성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그렇습니다. 뭐, 일단 생각나는 것이라면 그 망할 놈의 데카론 나이트가 놔두고 온 것 정도인데…….”
[그럼 그자가 그것을 네게 가져오겠구나.]“네에?”
성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노인네가 왜 그런 짓을 합니까?”
[네가 그에게 대단히 화를 내지 않았느냐?]아니, 그렇다고 해서……?
[그는 아마도 네 심기를 크게 거스르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자가 위험을 감지하는 능력은 생각 외로 탁월하단다.]그렇다기에는 이미 너무나 느슨하고 덜떨어진 모습을 많이 보였는데요?
[아마도 네가 도착한 순간, 그자는 영지가 위험을 무사히 넘기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했을 테지. 덕분에 긴장을 완전히 풀어버린 게 아니겠느냐.]“…설마 절 믿고 그런 바보짓들을 했다고요?”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데, 성황이 성진의 이마를 침상 위로 꾹 눌렀다.
[더는 깊이 그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다. 내게 주어진 인과는 정해져 있고, 이제는 별로 시간이 없단다.]아니, 근데 그 노친네를 생각하니 또 열 받네!
아버지, 말 나온 김에 그 영감에게도 뭔가 해 줘야 하지 않습니까! 이대로는 제가 억울해서……!
성진이 버둥거리자 성황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자들에게는 내가 이미 손을 써 두었으니, 이제는 결과를 기다릴 일만이 남았다. 지금은 더는 신경 쓰지 말거라.]“네?”
[이만 자거라.]따악.
어쩐지 평소보다 힘 빠진 딱밤을 맞은 성진의 의식이 휙 하고 멀어졌다.
* * *
“흐음…….”
따각따각.
추격대의 후위에서 천천히 말을 몰던 빈센트 노인은, 때때로 몸을 엄습해오는 한기에 안절부절못하다 결국 낮은 신음을 흘렸다.
“왜 그러십니까, 빈센트 님?”
울프 기사 하나가 의아한 듯 물었지만, 그는 대답 없이 눈썹을 고집스레 찌푸렸다. 막연하게 느껴지는 커다란 공포와 불안감을 어린 기사에게 뭐라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이 모든 것이 황자들이 온 뒤로 시작되었다.’
모레스 황자의 앞에서도 평정을 유지하기 어려웠는데, 로건 황자가 눈앞에 나타난 이후로 그 두려움은 상당히 구체적인 것이 되어 있었다.
특히 앞에서 백마를 몰고 있는 소년 성기사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면, 강하게 엄습하는 두려움에 고삐를 쥔 손이 떨려올 지경이었다. 뒤통수 하나만큼은 참으로 성황을 쏙 빼닮은 천재 소드 마스터.
‘폐하…….’
성황이 지그스문트령에 무단으로 들어와 아멜리아 황녀를 데려간 날.
그날의 일을 빈센트 노인은 온전히 기억하지는 못했다. 단지 단숨에 죽음에 이를 만치 큰 충격을 받고, 뼛속 깊이 두려움을 새겼던 감상 정도가 흐릿하게 남아있다.
어쨌든 그날부로 노인은 아들에게 백작위를 양위하고는 영지에 그대로 틀어박혔다.
매년 가던 탄신연에도 가지 않았다. 성황의 그 서늘한 회색 눈을 떠올리기만 해도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오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대신 노인은 그날부터 한 발짝도 영지 밖으로 나가지 않고 수련에만 매진했다. 검을 휘두르지 않고서는, 더욱 강해지지 않고서는 불안한 마음을 다스릴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미망이었다!’
이번에 성황과 꼭 닮은 아들들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데카론 나이트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심마에 휘말리고 만 것이다. 이대로는 영영 두려움을 극복할 수도,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이를 수도 없으리라.
-역시, 어디의 쓸모없는 데카론 나이트보다 네가 월등히 낫구나!
그리고 머릿속에서 자꾸 모레스 황자의 인정사정없는 평가만이 맴돌고 있다.
결국 고심하던 빈센트 노인은 홀로 빙벽 기지를 향해 말머리를 돌렸다.
“일마 경. 나는 잠시 가봐야 할 곳이 있네. 추격대를 부탁하지.”
그러자 일마 경이 평소보다 그늘진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네? 빈센트 님. 갑자기 어디로…….”
“남쪽의 절벽. 그 악마 숭배자를 잡았던 곳으로 다시 한번 가봐야겠네.”
어째서일까, 그는 더 이상 모레스 황자에게 흠을 잡히고 싶지 않았다.
글래쳐 트롤의 얼음인지 무언지. 내 반드시 찾아내어 그 건방진 애송이 황자로부터 어서 쓸모를 인정받아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일마 경의 의아한 시선을 뒤로 한 채, 빈센트 노인은 굳은 얼굴로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 * *
사방이 안개로 자욱하다.
발걸음 소리마저도 완전히 매몰해 버리는 무거운 정적 속에서, 성진은 성황을 따라 눈에 보이지 않는 길을 걸었다.
영혼이 몸에서 멀어지는 것에는 몇 가지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다.
분노가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통제할 수 없는 감정에 이성이 속절없이 휩쓸리는 것을 막아 주었다.
거기다가 아까까지는 흐릿했던 기억들이 조금이나마 명확해지는 느낌도 들었고.
그래서 성진은 그의 예감이 시키는 대로 성황에게 질문을 건넸다. 지그스문트령에 대한 성황의 의도를 정확히 알아내야 할 것 같다는 강렬한 예감을 따라.
[아버지, 제게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전 백작 부인에게 내리셨다는 축복은 대체 무엇입니까?]인과의 한참 모자라는 부분을 끼워 맞출 정도이니 엄청나게 강한 축복임에는 분명하리라.
하지만 성진은 아직까지 노부인의 몸에서 그 어떤 축복의 증거도 찾지 못했다.
평생을 대접받고 살았을 테니 나이대에 비해 건강한 것은 당연하나, 그래도 남편인 빈센트 노인과 비교하면 부쩍 늙어 보이는 모습. 노화를 전혀 피하지 못한 보통의 노부인이 아닌가.
그러자 성황은 의외의 대답을 했다.
[나는 그 여인의 육체가 아닌 영혼에 축복을 내렸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이따금 꿈을 꿀 수 있도록.] […꿈이요?] [그래.]꿈? 어째서 그런 방식으로?
잠시 의문이 들었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어쨌든 그녀가 고통에서도 숨 쉴 기회를 주신 거군요. 왜입니까?]그 목소리에 실린 불만의 기운을 느꼈는지, 성황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성진을 내려다보았다.
[아들아, ‘인과를 움직이는 것’과 ‘인과를 만들어 내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느냐?]움직이는 것과 만들어 내는 것?
성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성황이 여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언뜻 생각하기에는 차이가 없는 듯 느껴질 수도 있다. 둘 모두 같은 바탕에서 출발할 수 있고, 동일한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지. 하나 안타깝게도 인간의 업을 논하는 데에는 그 둘이 미치는 영향이 크게 다르단다.]이는 보통의 인간이 인과의 움직임이 빚어내는 결과에 무지하다는 관점에서 비롯된다.
그렇게 말한 성황은 몸을 돌려 희뿌연 안개를 헤치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걸 아느냐? 처음부터 그 여인이 그리 독했던 것은 아니다. 남편의 혼외자식을 내쫓았을지언정, 최소한의 의식주를 제공하는 것을 막지는 않았지. 또 그녀가 딸을 남기고 죽었을 때도 남겨진 아이를 백작저에서 보살피는 데 반대하지는 않았느니라.]그게 보살핀 겁니까? 더 고통스럽게 말라 죽으라고 작정하고 괴롭힌 거지?
반발하는 말이 목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성진은 꾹 참고 그의 다음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계속해서 영지 밖으로 돌아다니는 남편을 평생 기다리는 동안 악의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그러다가 남편의 재능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손자가 또다시 아멜리아에게 관심을 주는 것을 보고는 이리 생각한 게다.]이대로는 손자 오르덴 또한 여자에게 마음을 뺏겨 빈센트의 전철을 고스란히 밟게 될 거라고.
아멜리아가 지그스문트의 모든 것을 망치는 원흉이 되리라고.
[그렇다고 죄 없는 어린 누님을 그토록 괴롭힌 것이 정당화됩니까? 살의를 품는다고 해서 모두가 살인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울컥.
역시 못 참겠다! 영혼이 되어도 화나는 건 화나는 거다!
그러자 툭.
성진의 이마를 가볍게 쳐 생각이 뻗어나가는 것을 방해한 성황이 말을 이었다.
[그래. 마음으로 몇 번이고 죽일 만큼 깊은 증오를 품더라도, 정작 직접 손을 쓰는 것과는 분명 넘을 수 없는 큰 차이가 있다. 그리고 너의 개인적인 복수에 마치 신과 같은 공평한 판단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니라.]-지금의 너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무지 속에 있으니.
착각인가? 언뜻 성황으로부터 희미한 사념이 들려온 기분이.
성진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성황의 말이 이어졌다.
[만일 원칙적인 정당함을 따진다면 복수의 주체가 아멜리아가 아닌 다른 이가 되는 것만큼이나 우스운 일도 없지 않느냐.]아니, 그건 좀!
[그럼 복수할 힘이 없는 사람은 그냥 당하고만 있으라는 말씀이십니까? 옆에 있는 자가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겁니까?] [아들아. 네가 그 여인에게 복수한 것을 나무라는 것이 아니란다.]툭툭.
울컥하는 성진을 달래듯 어깨를 두어 번 더 두드린 성황이 다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펄럭. 공기의 흐름 따위는 없는 공간인데도, 성황의 흰 법복 자락이 바람에 나부끼듯 흔들렸다.
[단지 이것 하나만은 명확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너는 결코 아멜리아를 대신해 정의를 행사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 [그 여인은 분명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그러한 결과를 맞이했으나, 그것이 마땅히 받아야 할 응보를 신을 대신해 내린 것이라 착각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을.]성진은 입술을 깨물었지만, 분한 심정과는 별개로 그에 대한 적절한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네가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한 또 다른 자, 빈센트 경의 경우는 어떠하더냐.]뚱하게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성큼성큼 앞으로 걸음을 옮기며 성황이 말을 이었다.
[그는 영지의 안전을 위해 마경에 거대한 빙벽을 쌓고, 남부에서 이교도를 몰아내며 평생을 바쁘게 살았느니라. 그러다가 간혹 백작저로 돌아오는 날이면 집사가 그에게 그리 보고하곤 했다. 아이는 별일 없이 잘 지내고 있노라고.] […….] [하여 그는 생각했느니라. 거기서 괜히 관심을 줘서 안 그래도 불편한 부인의 심기를 더욱 거스를 필요가 있을까?]그래서 누님을 방치한 것을 정상참작이라도 한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대체 누님의 고통은 누구의 잘못이라는 말인가.
인상을 구긴 성진이 더는 따라오지 않자, 성황은 다시금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마치 성진이 하는 생각을 알고 있다는 듯.
[그래. 납득하기 어렵겠지. 이 모든 것들이 누군가 무심코 ‘인과를 움직이는 것’에서 시작되었다면 믿을 수 있겠느냐?]움직이는 것과 만들어 내는 것의 차이.
성황은 아까부터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멜리아의 존재를 알게 된 어느 오만한 자가 이리 생각했다. 제 아비만큼 검의 재능을 타고나지 못한 대신, 아비의 오점을 백작저 모두에게 제대로 인식시키는 것이 차후 그로부터 영지를 물려받고 운영하는데 훨씬 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 [몰락한 오르토나의 귀족이었던 어머니와, 아나톨리아에서 큰 부를 누리는 집안에서 시집온 아내. 고집스러운 두 사람의 갈등이 극에 달하다 못해 집안이 어지러운 날이 이어지니, 이 분노의 방향을 다른 곳으로 트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성황의 담담한 목소리가 텅 빈 공간을 울리듯 퍼져나갔다.
[그때 그자가 속삭인 것은 고작 몇 마디 말이 다였느니라.]어머니, 마치 악마처럼 사람을 매료시키는 저주받은 일족에 관해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어째 저 소녀의 눈이 그들과 똑 닮았군요.
아버지, 백작저의 일은 제가 도맡아 할 테니, 아버지께서는 사소한 일에는 마음 쓰지 마시고 오직 대륙의 안위를 지켜 주십시오.
성진의 눈이 경악으로 커다랗게 벌어졌다.
[너는 여기서 누구의 잘못이 가장 큰 것 같으냐?]아니, 그것이 사실이라면, 사태를 가장 악화시킨 자는 단연코…….
[하지만 ‘인과를 움직이는 것’에 이렇게나 명확한 결과가 따름에도, ‘인과를 만들어 내는 것’에 비해 그 업의 무게가 한없이 가볍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겠느냐?] [……!]당시 대공자였던 헨드릭 지그스문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성황이 자신의 아이를 애타게 찾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얼굴도 제대로 모르는 이복누이가 그의 여인이었다는 것도.
그제야 후환이 두려워진 그는 영지로 조사를 오는 길드원들을 교란시키고, 아멜리아의 존재를 아는 외부 사람들을 차근차근 처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머니와 사용인들에게 작은 소녀를 더욱 괴롭혀 죽음에 이르도록 부추겼다. 이후 사실을 알게 된 성황이 조사를 했을 때, 마치 소녀가 병약하여 시름시름 앓다가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듯 보이도록.
[하나 수년간 다른 이들이 벌을 받기 충분한 인과를 쌓도록 만들었음에도, 정작 본인은 조금의 인과도 쌓지 않은 것이다. 심지어는 그 모든 것이 최소한의 희생으로 영지를 부흥시키기 위해서라 스스로 믿어 의심치 않고 있단다.]감정을 담지 않은 무기질적인 눈과 차분히 내뱉어지는 목소리. 그런데도 성진은 오히려 그가 전에 없이 화나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나름의 ‘선의’에서 비롯된 일생의 공과 과를 엄밀히 따지자면, 그의 영혼은 분명 공적 쪽에 그 무게가 더 실리게 될 테지.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보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다.]-그래서 나는 변경백이 무엇을 꾀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음에도 이를 가만히 내버려 두고 있는 것이다. 심히 그 결과가 기대되는구나.
그로부터 희미하게 실려 오는 사념.
이번에는 분명 착각이 아니었다. 성진은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제대로 알아들은 것이다.
[…아버지가 가장 복수하고 싶은 대상은 바로 헨드릭 변경백이군요.]지금은 전 백작 부인처럼 무거운 복수를 하기에 쌓인 것이 충분하지 않으니, 그가 충분한 인과를 ‘만들어’ 업을 쌓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그러자 성황이 눈을 조금 크게 뜨고 성진을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부정하지 않으마. 그러니 가급적이면 그자가 어떻게 해서든 무언가 큰 업을 쌓아줬으면 하는구나.]밝은 안광을 빛내던 회색의 눈이 전에 없이 어둡게 가라앉는다. 그리고 성진은 또다시 그가 내뱉지 않은 본심을 희미하게 전해 들었다.
-나는 그자가 돌이킬 수 없는 큰 죄를 짓도록 그저 방관하고 있다. 그 결과를 빤히 알고 있음에도 이를 이용하려 들었으니, 본질적으로 나와 헨드릭 변경백은 그리 다르지 않은 것이다.
성진이 그의 생각을 어렴풋이 전해 듣는 것을 성황은 알고 있을까?
-그럼에도 그자를 증오한다. 결과를 ‘알면서도’ 인과를 멋대로 움직인 죄를 고스란히 짊어져도 괜찮다고 생각할 만큼.
아마도 모르고 있으리라. 자식들을 향해 감정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적이 없는 양반이니까.
단지 사념을 접하는 것에 성진이 더욱 능숙해진 데 더해, 평소보다 감정을 잘 갈무리하지 못하는 그의 상태가 합쳐지며 일어났을 찰나의 우연.
-물론 이 또한 내 개인적인 원한에서 기인한 것이며 자기만족임을 잊지는 않는다.
흠칫, 성진은 갑자기 불길한 예감에 몸을 떨었다.
이 양반이 헨드릭 변경백보다 더욱 원망하는 사람이 있지 않나? 바로…….
[…아버지, 말씀해주십시오. 변경백은 왜 영지에 약차를 들였습니까? 그는 애초에 무엇을 계획하고 있었습니까?]성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성황이 씁쓸하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지금의 너는 완전한 오라클의 상태가 아니지 않느냐. 그런 것까지 쉽게 가르쳐줄 수는 없구나.]-네가 그것을 안다면 분명 나를 막으려 들지 않겠느냐?
[하지만……!]성진이 그에게 뭔가를 더 말하려 할 때였다.
[이야기는 이쯤에서 끝내는 것이 좋겠다. 목적지에 다 왔느니라.]성황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안개가 걷히며 잿빛으로 빛바랜 회색의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