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260)
성황의 아이들-260화(260/469)
260. 레지나의 갈림길 (4)
연골 발육 부전.
흔히 듣는 병명은 아니지만, 그래도 엄연한 지구식의 병명이다. 거기다 델크로스인의 차림을 하고 있는 성진을 이세계인이라 부른다고?
“…혹시 당신, 지구인?”
그러자 난쟁이가 흥 하고 코를 울리며 팔짱을 꼈다.
“딱 보면 모르냐? 이오니아가 멸망한 지금, 이 고차원적인 오버-테크놀로지를 감당할 세계가 지구 외에 어디 있단 말이지?”
오버 테크놀로지?
그렇게 말하기에는 네가 차고 있는 그 공구들이 너무 투박하고 고풍스럽지 않냐? 풍차나 증기기관 정도나 손보면 딱이겠는데?
‘적어도 내가 살았던 멸망 전의 지구는 반도체와 소프트웨어가 지배하는 세상이었다고.’
성진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덱스터가 고글을 주워들며 투덜거렸다.
“이 천재 덱스터 님의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게 만들다니. 어르신의 부탁만 아니셨다면, 이런 멍청한 놈은 당장이라도 엉덩이를 걷어차 쫓아내는 건데!”
뭐, 이 새끼야?
성진의 미간이 꿈틀하고 일그러진다.
이놈이 보자 보자 하니까. 내가 지금 아버지 얼굴을 봐서 무례를 참아주고 있는 걸 모르겠냐? 그게 아니었으면 나야말로 지금 당장 네 녀석을……!
‘어? 근데 잠깐만!’
순간 성진은 머리를 강타하는 깨달음에 눈을 깜박거렸다.
혹여 성황의 생각을 엿들은 것을 들킬까봐 의식적으로 두뇌 회전을 멈추고 있었는데, 은은하게 올라오는 빡침으로 인해 이제야 천천히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잠시 잊고 있었는데, 언젠가 성황이 그에게 이런 설명을 해 주지 않았나?
-지난 천 년간 이 델크로스를 수호해온 현명한 고룡이다. 진명을 말할 수는 없으나, 나는 그를 ‘어르신’이라 부르고 있단다.
그래. 이상하게 강하다고 느낄 수밖에. 그 노인은 정말로 드래곤이었던 거다!
어쩐지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이 수상쩍더라니.
‘그렇다면!’
씨익.
성진이 갑자기 이를 드러내고 사납게 웃자, 알 수 없는 한기를 느낀 덱스터가 움찔 놀라며 눈을 끔벅거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성진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향해 공손하게 말했다.
“지구인을 만나게 되다니 반갑습니다. 그곳의 앞서가는 기술에 관해서는 어르신으로부터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어르신이 어떤 분이신지는 덱스터 씨도 이미 아시죠?”
“아, 그래. 뭐…….”
덱스터는 ‘이놈이 갑자기 왜 이러지?’ 하는 얼굴로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한데 덱스터 씨는 어떤 연유로 다른 세계에 와서, 이 ‘드래곤’의 공방에서 지내고 계시는지요?”
“뭐? 갑자기 그건 왜 묻지? 그런 걸 네가 알아서 뭘 하게?”
덱스터가 눈썹을 꿈틀 움직이며 성진을 노려본다.
드래곤이라는 말에는 큰 반응이 없군. 이 점을 확인한 성진은 만면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아, 별거 아닙니다. 그저 지구처럼 좋은 곳을 두고 굳이 이곳에서 ‘우리’를 위해 수고해주시니 감사해서 그럽니다. 자, 그럼 공방을 구경시켜 주시겠습니까?”
성진의 상냥한 미소를 본 덱스터가 또다시 움찔 놀라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놀래라. 웃는 얼굴이 뭐 저리 살벌해?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이리 따라와라.”
삐그덕.
어째서인지 조금 주눅이 든 덱스터가 문을 활짝 열며 손짓을 했다. 그리고 그를 따라 방 안을 들여다 본 성진은 눈앞에 펼쳐진 어지러운 광경에 적잖이 놀라고 말았다.
‘문 안은 전혀 다른 공간이야!’
공방은 사실 방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거대한 전시장을 방불케 했다.
거센 증기를 뿜어내며 돌아가는 용도를 알 수 없는 기관들, 번쩍이며 빛을 점멸하고 있는 괴상한 수정판들. 연결을 다 헤아릴 수 없는 복잡한 구조의 와이어들.
그런 특색 있는 기계들로 채워진 여러 층의 선반들과, 또 여기에 오르기 위한 수십 개의 높다란 층계참들.
바야흐로 세계와 시대를 초월한 많은 물건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 같았다. 슬쩍 보기만 해도 눈앞이 뱅글뱅글 돌아갈 지경이다.
“하하, 어떠냐! 세상에 이런 장소가 있다고 감히 상상이나 해 봤냐?”
수북한 기계들 사이를 스쳐가는 동안, 덱스터는 자신감을 얻었는지 조금씩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걸 봐라! 간단한 조작만으로 수십 층의 분별 증류를 단시간에 해내는 놀라운 기계지! 저것도 대단하지? 무려 인간의 기억은 물론 전생의 기록까지 읽어내는 [영혼 리더기]다!”
“오…….”
물론 생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기계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성진의 감상은 단순했다.
‘음, 그래. 대단히 복잡한 기계들이구나.’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외떨어진 거대한 기계 앞에 도착했다. 천장까지 닿는 높다란 모니터와 번쩍이는 수정판들이 잔뜩 붙어있는 엄청난 기계였다.
짜잔!
팔을 활짝 펼친 덱스터가 자랑스럽게 외쳤다.
“자, 보아라! 이것이 바로 오늘의 하이라이트! 궁극의 [호문클루스 엔진 편집기]다!”
하지만 성진의 감상은 여전히 단순했다.
‘그렇군. 알 필요 없는 원리가 적용된 엄청 복잡한 기계구나.’
“와…. 정말 멋지군요…….”
짝짝짝.
그 영혼 없는 감탄에 덱스터가 입을 씰룩거렸다.
“…그게 다냐?”
“아뇨, 아주 훌륭합니다, 덱스터 씨. 놀란 나머지 정신이 혼미해져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을 정도로요.”
성진은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개소리를 지껄인 후 덧붙였다.
“하지만 이 오버-테크놀로지가 정말로 지구의 기술입니까? 제 식견으로는 지구의 물건과 조금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만.”
언뜻 보기에도 괴이한 광채를 발하는 예스러운 수정판들은 지구의 기계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자 덱스터가 미심쩍은 듯 인상을 찡그린다.
“물론 이것은 이오니아의 마지막 유산이지. 오버-테크놀로지임에 분명하지만 지구의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걸 네가 어떻게 알지?”
“그야 ‘우리’는 정신연령이 높은 만큼, 다방면의 경험을 축적하기 때문입니다.”
“…흠?”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느낀 덱스터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찬찬히 성진을 살피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어르신과 뭉뚱그려 ‘우리’라고 칭하지를 않나. 어린데도 묘하게 산전수전 겪은 듯 진중한 기세라던가.
시치미를 뚝 떼고 점잖게 그를 마주보자, 덱스터가 무슨 결론을 내렸는지 갑자기 흠칫 놀라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 얼굴에는 아차! 하는 표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채였다.
‘걸렸구나!’
“…혹시, 해츨링이십니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그가 물었지만, 성진은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리며 그 대답을 피했다.
어려 보이는데 정신연령이 높으면 다 드래곤이냐? 자, 이제 어느 쪽이 판타지에 절어있는 사람이지?
이후로는 성진이 요리하는 대로였다.
“우리의 동료가 되실 정도라면, 덱스터 씨는 지구인임에도 분명 그 오버-테크놀로지를 이용해 적어도 천년은 넘게 살아오신 거겠죠?”
“아니, 아닙니다. 저는 그냥…….”
덱스터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자 성진이 푸근하게 웃어 보였다.
“덱스터 씨. 부디 말씀 낮추십시오. 저는 이제 고작 640년의 정신연령을 가졌을 뿐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이 오버-테크놀로지를 완전하게 익히신 덱스터 씨에 비하면 멍청한 애송이에 지나지 않죠.”
내가 640년을 살았다고는 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거짓말은 아니라고.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덱스터의 얼굴은 해쓱해졌다. 장차 강대한 드래곤으로 자랄 긍지 높은 해츨링을 멋모르고 무시했다고 생각하는 거다.
좋아, 이제 좀 뽑아먹어 보실까.
“부디 어리고 철모르는 절 덱스터 씨께서 좀 잘 도와주십시오.”
그렇게 말하며 성진은 그의 앞에 지니고 있던 규상세계의 물건들을 왕창 꺼내 놓았다.
세 개의 얼음 심장들은 물론이거니와 네브라스카의 아뮬렛, 영혼석, 형제자매들에게 받은 마법 돌멩이들, 그리고 호두까기에 매여 있는 손수건까지.
이왕 공방에 온 것, 뽑아먹을 수 있는 건 모조리 뽑아먹자는 생각이었다.
“아니, 이건 너무 많지… 않습니까. 얘기가 좀 다른…….”
수북이 쌓인 일거리들을 확인한 덱스터의 얼굴이 우중충해진다.
하지만 성진은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어르신께서 원하는 것은 ‘최대한’ 들어주라 하셔서 욕심을 좀 부려 봤습니다. 아, 역시 너무 많은 물건은 힘들까요? 그럼 제가 한번 가서 다시 여쭤보겠습니다.”
“아니! 아닙, 니다. 괜찮, 습니다.”
덱스터는 다급하게 손사래를 치고는, 허리춤에서 기계 하나를 빼내 들었다. 그리고 성진이 꺼낸 물건들을 마치 스캔이라도 하듯 하나하나 대어보기 시작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그가 갑자기 동그랗게 눈을 치뜨더니, 정색하며 소리쳤다.
“어라? 잠깐, 잠깐! 이거, 뭐지, 요?”
“네?”
성진이 영문을 몰라 되묻자, 잔뜩 흥분한 덱스터가 소리쳤다.
“설마? 그게 여기에 있다고? 혹시 이거, 그겁니까? 오라클이 만든, 오라클의 정신을 반영한다는 그 [이정표]가 맞습니까?”
그렇게 외치며 그가 집어 든 것은 선홍색의 부서진 보석이 박힌 펜던트. 성진이 일전에 미궁에서 찾아낸 조모의 유품이었다.
* * *
지금으로부터 십수 년도 전의 일이다.
애스트로스 용병단이 막 의뢰 하나를 마치고 거대도시 레지나에 잠시 머물고 있을 무렵.
드물게 큰 성과를 거둬 추가금을 받은 용병들은, 거하게 술판을 벌이며 서로 자축을 하고 있었다.
“다음 의뢰는 브르타뉴다! 이번에도 넌 우리와 함께 갈 거지, 바트?”
거나하게 취한 저스틴이 부지런히 여장을 꾸리고 있던 네이트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는 단장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여전히 짐 싸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참에 아예 정식 용병단원이 되는 것은 어때? 정산 잘해줄게.”
“이번에는 빠지지. 나는 따로 가볼 곳이 있다.”
“…뭐? 안 돼!”
저스틴이 빽 괴성을 질렀다. 당연히 바트가 함께하리라 생각하고, 용병단의 능력에 비해 조금 빠듯한 의뢰를 선뜻 도맡은 참이었다.
“네가 없으면 의뢰는 어떻게 하라고?”
“나 없이 진행하든지, 아예 의뢰를 무르면 되지 않나.”
“불가능해! 이번 의뢰의 보수가 얼마나 세다고! 이건 절대 무를 수 없어!”
하지만 어느새 여장을 둘러맨 네이트는, 술집을 성큼성큼 가로지르며 냉정하게 말했다.
“이런 기회가 다시없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다. 이번에 가면 언제 또 대륙 북부로 오게 될지 모르지. 나는 서둘러 마리에게 가 봐야 해.”
그러자 둘의 실랑이를 가만히 보고 있던 용병단 단원들이 소리죽여 수군거렸다.
마리? 여자 이름이냐? 그야 여자 이름이지!
“뭐어? 바트! 드디어 사귀는 여자가 생겼어?”
“이 죄 많은 놈이 처음으로 애인을 사귀었다고!?”
“이런 부러운 놈! 예쁘냐? 그녀가 널 기다려 준다고 해?”
왁자지껄.
애스트로스 용병단이 흥분하여 떠들어대는 가운데, 네이트는 술집 문을 밀고 밖으로 나왔다. 다리를 잡고 매달리는 저스틴을 한 대 세게 걷어차면서.
그가 서두르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애인인 마리가 유난히 병약한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어쩐지 불안하다…….’
늘 암살자들을 꼬리처럼 달고 다니는 중이라 애인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식량을 잔뜩 쌓아 놓고 장작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만약을 대비해 자신이 직접 만든 이정표까지 남기고 왔다.
그럼에도 마리의 일신에 뭔가 큰일이 닥칠 것만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이다.
그렇게 막 북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때였다.
쩌적.
머리를 울리는 소리와 함께 목에 걸려있던 뭔가가 반으로 갈라졌다. 그에게 마지막 남은 어머니의 이정표였다.
“……!”
하필이면 지금.
이정표가 부서진 타이밍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지금 지그스문트령으로 가면 큰 문제가 생긴다!’
네이트는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혹시 지금 암살자가 자신을 가까이서 추격하고 있나? 이대로 마리에게 가게 되면, 혹시 자신은 물론 그녀의 위치까지 노출되어 버리는 건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다. 이정표가 지시하는 바에 따라, 이대로 북으로부터 최대한 멀어져야 해.’
그럼에도 네이트는 고민했다.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떠나왔지만, 마리는 그가 신성력을 주지 않으면 금방 시들거릴 정도로 병약한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가까운 시일 내에 한 번은 꼭 들러봐야 하는데.
‘하지만 어머니의 예지는 절대 틀리지 않는다. 이대로 내가 마리에게 간다면 돌이킬 수 없는 커다란 불행이 닥칠 테지.’
가만히 눈을 감고 마음을 다잡은 네이트는, 한숨을 쉬며 부서진 펜던트를 술집 앞에 던졌다. 혹여 이정표가 부서지면, 그 자리에 버려두라는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바트! 바트! 제발 좀! 응?”
그리고 그때까지도 지치지 않고 뒤에서 질질 매달리는 저스틴에게 끌려, 그대로 브르타뉴로 향하게 된 것이다.
* * *
[저는 어린 시절, 어마마마로부터 몇 개의 이정표를 받았습니다.]네이트는 어르신에게 담담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전대 오라클인 베스세바 황비는 네이트에게 총 세 개의 선홍색 보석을 남겼다. 그중 하나는 그가 아직 작은 아이였던 시절에 부서졌다.
당시 어린 네이트는 그 이정표의 지시를 따랐다가, 황자 살해를 의뢰받은 호위기사와 단둘이 미궁에 갇히는 사고를 당한 적이 있었다.
겨우 기사를 죽이고 미궁을 빠져나온 네이트는 한동안 어머니의 의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덕분에 로한으로 끌려갈 뻔한 운명을 극적으로 피한 것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암살자들을 피해 도피를 하던 시절, 막 태어난 오웬을 대자로 삼으며 그에게 선물했지. 어차피 자신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기에, 자신보다는 대자의 앞날에 작게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마지막 하나의 이정표가 바로 레지나의 갈림길에서 부서졌습니다.]역시나 네이트는 어머니의 당부를 충실하게 따랐다.
하지만 그때 그 갈림길에서의 선택이, 그와 아멜리아의 운명을 단숨에 뒤바꾼 것이다.
[만일 자네의 모친이 그 선택을 바꾸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 같나.]노인의 물음에 네이트는 턱을 괴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아마 그때 그녀를 다시 찾았다면, 분명 그녀가 임신한 것을 알았을 테지. 그리고 브르타뉴로 가는 길목에서 타티아나를 만나는 일도 없었을 거다.
암살자를 꼬리처럼 달고 다니던 시기였으니, 아마 계속 마리의 곁에 머물 수 없었으리라. 하지만 분명 지그스문트령을 중심으로 맴돌며 자주 그녀를 찾아 보살폈을 것이다.
[제가 그녀의 주위를 지켰더라도, 마리는 결국 죽음을 피하지는 못했을 겁니다.]지금의 네이트는 알 수 있다. 그 어떤 선택을 했건, 마리의 생은 더 이상 길어지지 않았을 것을.
하지만 네이트는 어린 아멜리아를 구할 수 있었을 테다. 그리고 아이와 함께 단둘이 대륙을 떠돌았겠지.
비록 넉넉한 생활은 아니었겠지만, 그들은 대륙의 신기한 것들을 구경하고 별미를 찾아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 두 사람은 충분히 행복했으리라.
[어마마마께서는 오라클로서 그 모든 것을 ‘알고’ 인과를 움직이신 겁니다.]인과를 ‘움직이는 것’과 ‘만들어 내는 것’에는 분명한 업의 차이가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과에 무지한 보통의 사람들에게나 통용되는 이야기.
그 모든 인과를 꿰뚫어보고 그 시작과 끝을 능히 파악하는 오라클은, 인과를 움직이는 것 자체가 고스란히 업으로 남는다.
[아마도 어마마마께서는 상상할 수 없는 크나큰 업을 짊어지셨을 테지요.]작은 소녀를 수차례 죽음의 문턱에 이르도록 하며 그녀의 삶을 지독한 고통에 빠뜨렸던 여인은, 영원한 고통의 굴레에 갇히기에 크게 부족하지 않은 무거운 업을 쌓았다.
하면 그의 어머니는?
그 소녀에게 닥칠 불행을 알면서도 그렇게 되도록 인과를 움직이고 만 전대의 오라클은?
고개를 든 네이트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대체 어마마마께서는 어떤 미래를 보고, 또 어떤 대가를 각오하셨던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