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264)
성황의 아이들-264화(264/469)
264. 황도로 (1)
마경으로 떠난 추격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성진은 한동안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
수련을 하거나 이따금 막스를 보러가는 것 외에는 여전히 방에서 두문불출하는 채였다.
되도록이면 백작저의 인간들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변경백 일가는 물론 사용인들을 보기만 해도, 아멜리아의 과거가 떠올라 혈압이 오르고 뒷골이 당겼으니까.
대신에 성진은 오랜만에 수련에 매진할 수 있었다.
마사인의 꼼꼼한 지도를 받고 브루노 단장과 명상을 하다 보니, 마치 진주궁으로 돌아온 듯한 느낌도 들었지.
“조금 그립다. 하루 종일 연무장에서 수련에만 매진하던 충실한 나날들.”
“…그거 진심이십니까, 저하?”
브루노 단장에게 쪼여가며 옆에서 함께 수련하던 칼멘 경이, 별 정신 나간 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 성진에게 물었다.
“쯧. 당연히 진심이다. 그러니까 자네가 밝기가 제일 모자란 거야.”
“네?”
“자네, 클로디아 경보다 먼저 입단하지 않았나?”
근데 왜 그녀보다 밝기가 현저히 떨어지지, 응?
“아, 열 받게! 그런 비교질 좀 씨… 읍!”
“…….”
“…그, 죄송합니다.”
그 외에도 이리저리 벌여놓은 일들이 워낙 많아서, 그것을 수습하는 데만도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덕분에 덩달아 바빠진 것은 다샤였다. 성진이 부탁한 일들을 황도와 레지나에서 동시에 추진하느라, 원숭이 망루에 다량의 충원까지 요청했다고 들었다.
“저하, 정말 이 일을 추진하시는 겁니까?”
그리고 그녀는 매번 성진의 얼굴을 볼 때마다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그럼. 정말 하는 게 아니면, 지금까지 한 고생은 다 뭐야?”
“하지만 사업이라니, 너무 뜬금없지 않습니까?”
델크로스 역시 성진이 살던 지구와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고위층의 잘나가는 집안 자제들이, 멋모르고 야심만만하게 사업을 벌였다가 말아먹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 황자가 대륙을 종단하는 사업을 벌인다니, 기가 막힐 수밖에.
“뭐, 기본적인 바탕은 이미 슈미트 지부장이 착수해뒀어. 수익성에 관해서도 어느 정도 자문을 구해뒀으니 별문제 없어.”
게다가 준비하고 있는 로건의 선물이 완성되려면, 레지나에서 당장 밑 작업을 시작해야 한단 말이야.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수익이 날 것 같지 않습니다만. 유지비를 생각하면 적자 나기 딱 좋은…….”
“어허!”
본래 어지간한 사업은 안정화될 때까지 버틸 수만 있다면 반은 해결되는 거다.
나야 아버지가 계시니 자본이 마르지 않을 테고, 딱히 경쟁 사업자도 없을 테니 기다리면 언젠가는 자리를 잡게 될 거라고.
게다가 내게는 덱스터와 함께 만든 비장의 아이템이 있거든.
“그게 대체 뭡니까?”
“돌아가는 길에, 레지나에서 보여 줄게.”
음하하.
성진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부관 프란시스가 지그스문트령에 도착한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 * *
“…이게 정말로 글래쳐 트롤이란 말입니까?”
프란시스는 안경을 추슬러 올리며 날카로운 눈으로 빙수를 살폈다.
전투에서 대파된 1호 대신, 덱스터에게 조정을 부탁한 빙수 2호였다. 성진은 그것을 백작저 후원 구석에 주차해놓은 상태였다.
‘본래라면 식구 수대로 챙겨서 당당하게 입성할 계획이었지만.’
아무래도 거대한 마수들이 줄지어 걸어가면, 황도에 있는 사람들이 무섭다고 느낄 거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수십 톤에 이르는 얼음 괴물들이 잘 정비된 황도 대로를 박살 내놓을 것도 불 보듯 빤하고.
거기다 정교회의 반발까지 생각해서, 성유물로 지정한 한 대만 끌고 가기로 성황과 합의를 본 상태.
그런 만큼 빙수 2호에는 많은 공이 들어갔다.
성진이 프란시스를 향해 자랑스럽게 팔을 활짝 벌려 보였다.
“글래쳐 트롤이 아니라 빙수 2호야, 프란시스 경. 그리고 이제는 정식으로 성회의 인가를 받은 성유물이라고!”
“그게 헛소리라는 것은 저하도 아시고 저도 압니다. 그리고 성유물이 될 예정인 것에 마음대로 이상한 이름 붙이지 마십시오.”
오랜 시간 카트리나 단장과 떨어져 있어야 하기 때문일까, 평소보다 더욱 까칠해진 프란시스였다.
하지만 그런 그도, 막상 성진이 내보인 빙수 2호를 보고는 잠시나마 감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폐하께서 갑자기 마수를 성유물로 지정하라 하셔서, 이건 또 무슨 정신 나간 지시인가 했습니다만. 이 정도면 제법…….”
뭐, 무리도 아니리라.
빙수 2호는 더 이상 무식한 얼음 덩어리 괴물이 아니라, 제법 그럴싸한 형태의 얼음 갑옷을 걸친 기사 조각상에 가까웠기 때문.
가슴팍에 주신의 문양이 양각된 갑옷은 성기사들의 완전 무장과 닮아 있었다. 머리에는 대충 얼음을 뭉쳐놓은 듯 투박하던 얼굴 대신, 역시나 섬세하게 조각된 성기사단의 얼음의 투구가 자리하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허리에는 얼음으로 만든 긴 검을 차고, 등에는 주신의 문장이 새겨진 거대한 망토까지 휘날리고 있으니, 그야말로 주신께서 친히 내려주신 고귀한 기사라 표현할 밖에.
전체적으로 날렵해진 데다 크기 또한 5미터가량으로 줄여, 무게 또한 엄청나게 줄어들어 있었다.
이 정도면 빙수 2호가 걸을 때마다 황도대로가 구멍 날까 걱정할 일은 없겠지.
“이건 가져가서 아버지께 드리려고. 본궁 로비에 장식해두면 꽤 멋지겠지?”
뿌듯하다. 뭔가 부모님께 신형 차 한 대를 뽑아드린 효자 아들이 된 기분이라고.
“뭐, 좋습니다. 괜찮을 것 같군요.”
프란시스는 두툼한 서류를 꺼내 들더니, 거기에 뭔가를 부지런히 첨삭하기 시작했다.
“그건 뭔가?”
“성회에 제출할 서류들의 초안입니다. 성유물 지정이 어디 그리 간단하게 되는 줄 아십니까? 신기한 대륙 탐방기를 바탕으로 역사적 사료들을 여럿 꾸밀 예정이니까요. 그때 모든 내용이 맞아떨어져야 나중에 잡음이 없습니다.”
그렇게 대꾸한 프란시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서류 작성에 집중했다.
“일단 이 글래쳐 트롤의 이름은, 성유물 ‘은총의 기사’라고 합시다. 직관적이고 무난한 것이 좋지 않습니까?”
빙수 2호의 본래 이름을 아예 무시한 처사였다.
성진이 불만 어린 눈으로 쏘아봤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일필휘지로 첨삭을 휘갈기기 시작했다.
흠, ‘주신의 거인’이 아니라, ‘주신의 기사’라는 표현으로 모조리 바꾸는 게 좋겠군요. 크기에 대한 묘사도 맞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 거대한 몸을 일으키니 마치 태산이 일어나는 것과 같았다고 한다’라는 표현은, ‘기사가 검을 들어 올리니 가히 산을 가를 듯 위엄이 넘쳤다’ 정도로 바꿔 볼까요? 거인이 잘츠 호를 걸어서 가로질렀다는 목격담은 아예 삭제하는 게 좋겠습니다. 지금 저 크기로 호수 중앙에 들어갔다가는 아마도 머리 꼭대기까지 물에 잠기겠죠. 조금 우습지 않겠습니까? 그 외에는 책에서 설명해놓은 전체적인 묘사가 조금 문제가 될 것 같긴 한데. 아아, 이 부분은 차라리 [신기한 대륙 탐방기]를 통째로 뜯어고치는 쪽이 빠르겠군요. 그리고 또…….
옆에서 듣고 있던 성진은 대단히 당황했다.
“이미 출판된 책까지 고친다고?”
그러자 프란시스는 서류에서 눈도 돌리지도 않은 채 태평하게 대꾸했다.
“네, 뭐. [신기한 대륙 탐방기]야 어차피 그대로 두면 세상에 빛을 보지 못할 금서가 아닙니까? 이건 금서 목록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예정된 수순이었습니다.”
“…….”
“경전도 몇 차례나 뜯어고친 성회인데 뭘 새삼 놀라십니까? 그래도 황도에 수정본 초판이 출판되면 상당히 볼만할 겁니다. 저하께서도 하나 구입하시는 게 어떠십니까? 꽤 재미있다는 소문이거든요.”
경전을 뜯어 고쳐? 현대 지구에서 살았던 성진으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못 할 노릇이었다.
호기심이 인 성진이 프란시스가 수정을 마친 서류 하나를 슬쩍 곁눈질했다.
-그라니우스가 성황의 명을 받아 마경을 찾았던 날, 사방에서 상서로운 빛이 어리더라. 그야말로 주신의 신성한 뜻이 이 땅에 행사됨이라. 이에 신의 대리자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언젠가 주신의 나라에 닥쳐올 어두운 그림자에 대비함이니 신성한 거인을 내려 은총 받은 기사를 내려…….
아예 신화를 써놨네.
이건 너무 본격적인 날조가 아닌가. 양심은 어디 갔냐.
“예전부터 폐하께서 하시는 일이 늘 그랬습니다. 암흑 교단을 황도에서 몰아낼 때도 경전을 한번 완전히 뜯어고치셨거든요. 모두가 쉬쉬하고 있지만,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죠.”
“…아버지가?”
“네. 비단 폐하뿐만이 아닙니다. 역대 성황 폐하 중에는, 아예 경전의 한 장을 통째로 도려내버린 분도 있다더군요. 너무 오래전 일이라 이제는 그 내용을 알 수 없습니다. 그저 건국 당시의 비화가 실려 있었다든가, 델크로스의 멸망을 예언한 묵시록이었다든가 소문만 무성하죠.”
거기까지 말한 프란시스는 뭔가 막히는 부분이 있는지 눈을 가늘게 뜨며 서류를 노려보았다.
“뭐, 제국을 통치함에 있어 가장 효율적인 방식임은 부정할 수 없지만, 주신의 대리자로서 올바른 자세인가는 따지고 볼 일입니다. 솔직히 지금의 폐하도 양심과는 아예 담을 쌓으신 분이지 않습니까?”
그러자 성진이 울컥하며 눈을 치떴다.
“하지만 자네가 여기 있다는 것은 카트리나 경의 명이 있었다는 뜻 아닌가? 그럼 단장도 공범이잖아. 왜 아버지에게만 그러는 거지?”
그러자 이번에는 프란시스가 발끈할 차례였다.
“아니, 명령하신 분과 명령을 받으신 분이 같습니까?”
“아버지가 언제 단장에게 부당한 명령을 강요한 적이 있나? 내가 장담하는데, 카트리나 단장은 아버지의 명령에 대해 추호의 의문도 없었을걸?”
카트리나 경은 아버지의 명을 그대로 실행하는, 그야말로 아버지의 거울 같은 사람이라고. 그렇다면 그녀는 아예 자신의 생각이 없거나, 아니면 똑같이 양심과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거 아냐!
그러자 프란시스가 서류를 콰앙 바닥으로 내려놓으며 소리쳤다.
“이익! 우리 공명정대하신 단장님을 어떻게 보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단장님이 하시는 일은 다 옳습니다!”
“그럼 아버지가 하는 일도 다 옳아!”
“네, 저하! 그렇다고 치겠습니다! 아, 지금 애들 싸움도 아니고 이게 뭡니까!”
“웃기지 마! 불경이란 불경은 다 저지른 주제에, 경은 뭘 이제 와서 양보하는 척이야?!”
둘은 그렇게 한참을 쓸데없이 아웅다웅하다, 소란을 보고 달려 나온 마사인의 중재로 겨우 싸움을 멈췄다.
“프란시스. 자네는 평소에는 멀쩡하다가, 왜 카트리나 단장님만 걸리면 사람이 바보가 되는지 모르겠다.”
프란시스를 타박하던 마사인은, 성진에게로 고개를 돌리더니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로건 저하나 프란시스나, 저하와 함께 있으면 다들 왜…….”
“……!”
성진은 큰 충격을 받았다.
아니, 지금 이게 내 탓이라는 거야, 마사인 경? 그런 거야?
[그럼 이게 누구 탓이겠어?]‘닥쳐!’
어쨌거나 빙수 2호에 대한 보고서를 마무리한 프란시스는, 이번에는 ‘기적’의 목격담을 조사하기 위해 지그스문트령을 돌아다녔다.
그런데 별다른 날조 없이도 영지 사람들의 증언을 모으는 일은 생각 외로 간단했다.
워낙 큰일이라 경황이 없었던 데다, 어둠 속에서 벌어진 전투다 보니 빙수의 자세한 모습을 기억하는 자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주신께서 내려주신 얼음의 병사들이 신성한 빛과 함께 나타나 마수들을 무찔렀습니다!
그거 신성한 빛이 아니라, 아마 섬광탄이었을 거야.
-신의 사도들이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튀어 오르던 찬란한 광채란!
무식하게 주먹질을 하다 보니, 주먹의 얼음이 부서지면서 사방으로 막 튀어 오르긴 했지.
-어디 그뿐입니까! 등에는 거대한 지그스문트의 휘장을 당당히 휘날리고, 가슴에는 선명한 주신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발레리 경이 어설프게 꾸민 외양이 상당히 그럴싸해 보였던 모양이군.
“이것으로 모두 해결되었군요. 이제 성회에서도 이 일을 걸고넘어지지는 않을 겁니다.”
부지런히 그 발언들을 정리하던 프란시스가 홀가분하게 말했다.
생각보다 황도로 일찍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그의 기분도 한결 나아진 상태였다.
“뭐, 그럭저럭 얼버무려진 것 같기는 하군.”
성진은 아직도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뭔가 이렇게 얼렁뚱땅 해결되기는 하는구나.
안타깝게도 훤한 대낮에 빙수들을 목격했던 병사들은 상당수 전사하고 말았다. 협곡 요새를 지키던 늙은 한스 경을 포함해서.
이제 이 이야기에 딴지를 걸 만한 자들이 그다지 남지 않았다는 뜻이다.
무뚝뚝한 오르덴은 그렇지 않아도 과묵한 입을 아예 걸어 잠근 듯 침묵하고 있고.
-그러니까, 그들이 그냥 글래쳐 트롤이 아니라 은총의 기사, 즉 신의 사자였단 말입니까? 오오! 역시 그랬군요! 어쩐지 처음 본 순간부터 성스러운 기운이 느껴진다 했습니다!
그나마 멀쩡한 목격자인 오스카 경은 한술 더 떠서 영지의 술집이란 술집은 모조리 돌아다니며 소문을 확산시키는 중이었다.
이제 음유시인 로랑은 그의 증언을 바탕으로 허황된 노래를 지어 부르기에 이르러 있었다.
황자가 굳건히 손을 들어 하얀 지평선을 가리켰노라.
보라, 저 혹한의 침입자들을! 저것이 바로 우리의 오랜 적일지니!
그 가벼운 손짓에 주신이 내리신 은총의 기사가 검을 휘두르며…….
돌아가는 상황들을 황당한 심정으로 지켜보던 성진은, 결국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수밖에 없었다.
하여튼 제대로 된 언론이 없는 세상이란.
“뭐, 잘된 일 아닙니까? 덕분에 수습할 일이 많이 줄어 좋습니다만.”
단 이틀 만에 모든 작업을 끝낸 프란시스가 드물게 밝은 얼굴로 성진에게 당부했다.
“그럼 저는 먼저 황도로 가보겠습니다. 부디 저하께서는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돌아오십시오, 서류 준비가 만반이라고는 해도, 성회를 소집하고 ‘은총의 기사’를 성유물로 지정하는 데는 조금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그렇게 프란시스가 홀가분하게 영지를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추격대가 영지로 돌아왔다. 여전히 희게 빛나는 정복을 입은 로건과 릴리움 별동대를 포함해서.
이제는 정말로 성진이 영지를 떠날 순간이 온 것이다.
“헨드릭 변경백. 시간 괜찮으면 나와 잠시 얘기를 좀 하지.”
그리고 성진은 그날 저녁, 변경백의 서재를 찾았다. 황도에 돌아가기 전에, 그와는 담판 지을 일이 남아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