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265)
성황의 아이들-265화(265/469)
265. 황도로 (2)
최근 돌아가는 상황에 헨드릭 변경백은 골치가 아팠다. 어느 것 하나 그의 예상과 맞아떨어지는 것이 없었으니까.
‘본래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변경백은 언제나 최대한의 변수를 따져가며 거의 완벽하게 계획을 세우는 편이었고, 변칙으로 인해 계획이 틀어질 경우를 위한 여러 단계의 대비책이 존재했다.
그래서 모레스 황자가 갑자기 영지에 나타나 약차의 유통 중지를 요구했을 때도 당황하지 않았다. 약차가 안 된다면 그에게는 또 다음 단계가 있었으니까.
전대미문의 대공습에 동요하지 않았던 것도 마찬가지. 그에게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숨겨 둔 최후의 보루가 있었다.
‘한데 대체 어째서?’
생각해보면 답은 빤했다.
이상하게 모레스 황자가 만들어내는 변수는, 언제나 인간이 예상하고 대비할 수 있는 범위를 아득하게 벗어나 있는 것이다.
황자를 중심으로 모든 것이 틀어지고 있다. 약차는 물론 밀로 상단, 그리고 참회 교단의 움직임까지.
‘이제는 또 성유물이라니!’
처음에는 무슨 헛소리인가 했는데, 정말로 백작저 후원에 떡하니 얼음 기사가 서 있는 게 아닌가!
황도에서 파견된 성유물 조사원이 ‘은총의 기사’가 강림한 증거라며 정식으로 서류까지 꾸며갔다. 결코 그로서는 미리 예상할 수 없었던 사태였다.
‘이번 일은 황자도 조용히 덮으려 할 줄 알았는데…….’
한때 불온한 소문이 돌던 모레스 황자의 입장이다.
어차피 마수를 움직였다는 것을 널리 알려봐야 좋을 것이 없을 테니, 그것을 덮어주는 척 약간의 이점이나마 취해보려던 것뿐이건만.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상황이 반대가 되었다.
‘마수의 도움을 받아 살아남은 영지라는 오명보다, 차라리 주신이 성유물을 내려 친히 보호하신 영지라 알려지는 것이 백번 낫다!’
그러니 모레스 황자 역시 변경백에게 미리 언질도 하지 않은 것이다. 마치 변경백이 독단으로 황자들의 공을 축소하려 한 것을 고스란히 되돌려주기라도 하듯.
어차피 성유물이 강림한 소식으로 대륙은 떠들썩해질 터. 지그스문트의 굳건함을 북부에 과시하려던 욕심은 물거품이 되었다.
이러면 굳이 황자들의 활약을 축소한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또 이후로 참회 교단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게다가 모레스 황자는 아마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다.’
공을 축소하려 한 대가로 황자가 무엇을 요구할지 벌써부터 머리가 아팠다.
그런데 떠나기 전날, 막상 서재에 나타난 모레스 황자가 다짜고짜 변경백에게 내뱉은 말은 이것이었다.
“변경백, 막스를 내게 줘.”
“……?”
“내 약속하지. 세상 그 누구보다도 막스를 행복하게 해주겠네.”
순간적으로 변경백은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울프 기사단부터 말단 병사까지, 영지의 쓸 만한 인재들의 목록이 뇌리를 휘리릭 스치고 지나간다.
‘마르크스 경은 은퇴를 앞둔 노인이지. 얼마 전 들어온 아랫마을 마르크스는 제법 재능 있다 들었지만, 아직 스콰이어 단계다. 둘 다 저하와 따로 접점도 없을뿐더러, 딱히 탐을 낼 만한 인재도 아닐 텐데. 대체 누구를…….’
그러자 황자가 한심하다는 얼굴로 덧붙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나, 변경백? 그게 오래 고민할 문제인가?”
“송구합니다, 저하. 하오나 어느 마르크스를 말씀하시는지…….”
“대체 무슨 소리야? 나는 사육장의 늑대개를 말하고 있네.”
“아아? 네. 그렇습니까?”
확실히 귀여워하는 늑대개가 하나 있다 들었지.
그럼에도 바로 그것을 떠올리지 못한 것은, 황자가 처음부터 그 개를 요구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헨드릭 변경백은 사육하는 개들의 이름을 일일이 기억하고 있지는 않았다. 영지의 모든 인적자원을 꿰고 있지만, 개는 머릿수가 중요할 뿐, 자잘한 개체의 특성 따위 철저하게 관심 밖이었으니까.
“어쩌겠나. 내게 줄 수 있나?”
“물론입니다, 저하. 사냥개라면 얼마든지 뜻대로 하십시오.”
협상거리 축에 끼지도 못하는 개의 처분 따위, 괜히 패로 사용하려다 역효과가 날지도 모른다. 그럴 바에야 상대에게 인심이라도 쓰는 쪽이 낫지.
“좋아. 역시 그대는 대화를 할 줄 아는 사람이네.”
황자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짓더니, 옆으로 척척 걸어가 서재의 책을 하나 뽑아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아무렇게나 휘리릭 넘기다 책장에 꽂고는, 또 다른 서류철을 꺼내 들었다.
간혹 빈센트 노인이 용건이 있어 서재로 들어오면 하릴없이 하는 짓과 판박이였다.
“…….”
변경백은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서재는 그의 공간이며, 자신의 규칙 속에서 온전히 통제되는 공간. 그리고 그는 그 규칙이 조금이라도 어지러워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모레스 황자나 빈센트 노인이나, 하필 그가 함부로 할 수 없는 대상인 두 사람이 비슷한 버릇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통탄할 수밖에.
“솔직히 말하면 변경백. 이번에는 조금 감탄했네.”
탁.
이윽고 모레스 황자는 들고 있던 서류를 책꽂이에 집어넣고는 고개를 돌렸다
“지그스문트령이 가진 상상 이상의 저력에 말이야. 빙벽이 대파되고 많은 병사들이 죽거나 다쳤지. 또 영지의 일부는 전쟁터가 되어 완전히 무너져 내렸어. 한데 그런 혼란 속에서도 영지민들은 혹한에 떨지 않고, 또 굶주리는 일도 없군.”
칭찬 같지만 협상의 시작으로 듣기에 썩 좋은 말은 아니다. 그러니 거리낌 없이 마음껏 뜯겠다는 말일까?
하지만 변경백은 언제나 그렇듯, 표정을 능숙하게 감추며 고개를 숙였다.
“과찬이십니다, 저하. 마경이라는 위험을 곁에 두고, 언제나 대비에 소홀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그래. 알고 있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지난 수년에 걸쳐 조금씩 모아둔 거겠지.”
어쩐지 묘하게 느껴지는 말이다.
헨드릭 변경백이 그 의미를 생각하느라 슬쩍 눈썹을 찌푸리는데, 그를 가만히 응시하던 모레스 황자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더욱 확신하게 되었네. 그대가 사리사욕을 따지지 않고, 오직 영지의 미래만을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일한다는 것을 말이야.”
“그리 알아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저하.”
대꾸하면서도 변경백은 의아했다.
황자는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가.
“그런데 변경백, 최근 그대를 보면 간혹 이런 생각이 드는 때가 있네.”
모레스 황자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기우뚱 기울였다.
“그대에게 영지의 번영은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지나? 백작가나 영지민의 안위와 상관없이.”
“…네? 그게 무슨 말씀인지.”
“말 그대로네. 그대에게는 대륙에서 가장 전도유망한 아들이 있고, 혹한에도 영지를 지키는 충성스러운 영지민들이 있어. 그런데 그런 그들과 영지는 아예 다른 것인가?”
“…….”
“밀로 상단의 약차 건이 좋은 예지. 왜 때때로 그대가 하는 일이 이들의 안위와 완전한 평행선을 그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까?”
그야 당연히 다른 것이다. 헨드릭에게 있어 그들은 영지를 이루는 구성원이지, 영지 그 자체가 아니니까.
하지만 다년간의 경험을 통해, 변경백은 이것이 틀린 답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느끼셨다면 그것은 오직 저의 부족함이 불러온 결과입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영지민과 제국을 위해 이 한 몸을 마칠 뿐입니다.”
그러자 언젠가 마주했던 성황의 눈과 닮은, 차가운 무채색의 눈동자가 그를 조용히 응시한다.
“이거 하나만 묻겠네, 변경백.”
“네, 저하.”
“그대는 그들이 [참회목]을 꺼내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나?”
갑자기 정곡을 찔린 변경백은 하마터먼 흠칫 놀랄 뻔했다.
하지만 정말이지 필사의 노력으로, 찰나의 순간 얼굴 근육이 움찔거리는 것을 막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보일 수 있었다. 애송이 황자가 감히 간파하지 못할 능숙한 대처였다.
“그들이 누굽니까, 저하. 또 참회목은 무엇인지요?”
마계수의 습격 사실에 대한 것은 이미 울프 기사단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의 이명인 [참회목]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이 사실. 대번에 알아듣는다면 그 이상 수상한 일이 없으리라.
하지만 변경백은 전혀 몰랐다. 지금 황자의 머릿속에 있는 무언가가 방금 그의 귓가에 이렇게 속삭였다는 것을.
거짓말이야.
“…….”
그리고 황자는 미소 지었다. 어린 소년이 짓는다고는 생각지도 못할 섬뜩한 미소였다.
“뭐, 그럼. 서론은 되었네. 이제 우리, 남은 계산에 대해 이야기를 좀 해볼까?”
그로부터 한동안 변경백은 모레스 황자와 이후의 보상에 관해 논의했다.
내용은 별것 없었다.
로건 황자와 릴리움 별동대가 마경에서 활약한 내역에 대해 정식으로 황도에 감사장을 보낼 것.
그리고 새로 계약하는 상단과의 거래에서 몇 가지의 우선적인 독점권을 인정할 것.
크다면 클 수도 있으나, 어디까지나 변경백이 상정한 범위 내였다. 오히려 이전에 파악한 황자의 성정에 비하자면 너그러울 정도.
‘영지의 사정을 봐준 건가. 지금까지 잠자코 있기에, 벼르다가 돈이라도 잔뜩 뜯어내려나 했는데.’
그렇게 황자를 보내고 나서 변경백은 책장으로 다가갔다. 아까부터 거슬리던, 타인에 의해 흐트러진 그의 규칙을 바로 잡아야 했다.
그런데 서둘러 정리하려던 변경백은 순간 믿을 수 없는 사실을 깨닫고 우뚝 멈춰 섰다.
‘…그대로야?’
변한 게 없다.
복잡한 규칙으로 놓인 책장과 서류의 순서는 물론, 교모하게 틀어져 있는 의도된 흐트러짐까지.
‘분명 두서없이 뽑아서 뒤적거리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었건만!’
순간 변경백의 머릿속에, 황자가 지나가듯 내뱉은 말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아까 느꼈던 찜찜함의 이유를 깨달았다.
-그래. 알고 있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지난 수년에 걸쳐 조금씩 모아둔 거겠지.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이미 황자는 지그스문트령의 수년간에 걸친 물자 이동을 모조리 조사했다는 말.
그것도 절대 외부에 노출한 적이 없는, 변경백을 비롯한 소수만이 알고 있는 극비의 자료들을 본 것이다!
변경백은 충격으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황자가 대체 언제부터 서재를 드나들었을까. 대체 어디까지 본 걸까. 아니, 어디까지 내 계획을 파악했을까!’
물론 위험한 내용의 서류를 보란 듯 따로 만들지는 않는다. 모든 계획과 자료는 변경백의 머릿속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의미 없어 보이는 자료의 나열만으로 많은 것들을 유추하곤 한다.
‘단순히 협상을 위해 온 것이 아니다. 그는 내게 경고를 한 거야.’
자신의 규칙이 만능의 자물쇠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변경백은, 일순 모골이 송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 * *
[그래서 결론은 뭐였어? 넌 대체 뭘 협박한 거야?]‘글쎄…….’
사실 변경의 앞에서 한껏 있는 척을 했지만, 성진 역시 변경백이 생각하는 구체적인 계획을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었다.
‘결국은 적당히 경고 선에서 마무리하는 수밖에.’
물론 저 작자가 누님에게 한 짓들을 생각하면 모세혈관 하나까지 남김없이 벗겨먹고 싶지만, 그렇게 되면 고달파지는 것은 변경백이 아닌 지그스문트령의 신민들이다.
변경백은 본래 사치하는 성정이 아니라, 영지를 위해 합리적으로 자금을 운영하는 자니까.
지금은 오히려 난데없는 재난을 맞은 지그스문트령이, 지원금을 더 청구해야 할 판인 것이다.
‘변경백은 숨기고 있는 마지막 수가 있어. 그것도 암흑교단과 관련된 일일 테지.’
성진은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당분간 지그스문트령에서 눈을 뗄 수 없겠는데? 다샤에게 원숭이 망루의 요원을 총동원해서 밀착 감시하라고 할까…….’
하지만 마왕은 영지에서 별다른 마기를 느끼지 못했다고 했지.
어쩐지 사람의 눈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깊이 파고들다가는 요원들이 몸을 빼기도 힘들 테고.
결국 고민하던 성진은 결론을 지었다.
‘이 건은 슈미트에게 맡기자.’
어차피 지그스문트령의 반독점 계약을 따낼 지부장이니, 이 정도의 수고는 해줘야 하지 않을까.
계약 문제로 오가며 감시하기도 좋을 테고, 그에게는 메에메에 우는 제법 귀여운 권속 악마가 있으니까.
[뭐? 그런 덜떨어진 짐승 울음소리를 내는 권속이 좋다고? 네가 그래서 개소리를 내는 저 잡종개를 귀여워하는 거야?]‘넌 왜 얼마 전부터 이상한 걸 걸고 넘어지냐?’
하지만 그들의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복도에서 썩 유쾌하지 않은 인간을 마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저하. 어쩐 일이십니까!”
변경백의 둘째 아들이 반색하며 그의 앞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 같은 표정이지만, 성진은 대답 없이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
“어찌 그러십니까?”
전에 약차를 마시고 정신없는 상태에서 들었던 날카로운 사념을 성진은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오르덴 저 자식, 끝도 모르고 잘난 척하는 게 정말 꼴 보기 싫어 죽겠군. 어디 가서 콱 죽어버렸으면.
저 느슨한 미소 속에 메마른 눈동자. 아마도 변경백의 성정을 가장 빼다 박았겠지만, 그만큼 머리가 돌아가지는 않는 놈.
성진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물었다.
“대공자는 어디 있나?”
파삭. 에밋의 미소에서 금이 간다.
“네?”
“자네와는 볼일이 없어. 자네 형은 어디 있나?”
그러자 그는 얼굴색이 변하는 것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씨근덕거렸다. 아직 제 아비에 비하면 한참 멀었군.
그러나 속이야 어떻건, 에밋은 황자의 질문에 적절한 대답을 해야 했다.
“…연무장에 있을 겁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아냐, 그럴 필요 없어.”
성진은 그렇게 대꾸하고는 그를 지나치며 말했다.
“대공자는 누구와 다르게 오러의 활성이 무척 대단하거든. 숨긴다고 숨길 수 있는 기척이 아니니까.”
“…….”
“자네도 멀쩡한 팔에 붕대 감고 있지 말고, 형님처럼 수련이나 하는 게 어떤가? 아니면 가서 영지 일이나 돕든지. 다 큰 놈이 꾀병이라니, 뭐 하는 짓이야?”
뒤에서 그를 따라오는 살벌한 시선을 고스란히 느끼며, 성진은 콧방귀를 뀌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지그스문트가에는 정말 마음에 드는 놈이 없구나.’
그나마 오르덴이 개중 제일 나은 거 같아.
…오르덴 주제에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