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267)
성황의 아이들-267화(267/469)
267. 베르트란 & 리 (1)
오르토나가 멸망한 이후, 갈수록 팍팍해지는 생활에 지친 북부 사람들이 대거 도적으로 전향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정면에는 ‘은총의 기사’를 앞세우고, 또 옆에서는 흰 정복을 번쩍이며 말을 모는 릴리움 별동대가 호위하는 행렬을 방해할 간 큰 자들이 어디 있으랴.
황도로 돌아가는 길은 지그스문트령으로 향할 때 이상으로 평온했다.
그동안 성진은 마차 안에서 로건이나 마사인 경과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전에도 진주궁에서 로건과 함께 점심을 들곤 했지만, 이렇게 하루 종일 그와 함께 붙어있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덕분에 성진은 릴리움 별동대가 얼마나 극성스러운 팬클럽인지를 제대로 알게 되었다.
특히나 이들의 최고봉은 바로 릴리움의 삼총사, 오토, 엘리, 뒤상 경이었다.
“저하, 여기 아침 기도를 위한 경전과 성수를 대령했습니다.”
“아, 번번이 고맙네, 오토 경.”
“저하, 새벽에 록산느의 털을 빗질해 두었습니다.”
“수고했네, 엘리 경.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록산느가 무척이나 좋아했겠군.”
“저하, 가시는 길 적적하실 텐데 옆에서 좋아하시는 오르토나의 시집을 낭송해 드릴까요?”
“아니, 괜찮네. 세심하게 신경 써 줘서 고맙네, 뒤상 경.”
성진은 혀를 내둘렀다.
릴리움 별동대도 별동대지만, 로건 녀석도 대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하루 종일 눈을 빛내며 성가시게 구는 작자들을 저렇게 웃으면서 넘기는 걸까.
[뭘 저 정도로 그래. 저놈은 예전에 모레스의 패악질도 성인처럼 참아 넘겼다면서?]‘음…….’
마왕의 지적에 성진은 잠시 숙연해졌다.
“모든 일에 이리 부지런하고 솔선수범하니, 참으로 성기사의 귀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언제나 저들에게 많이 배우고 있어.”
“…너 그거 농담이지?”
옆에서 보다 못한 브루노 단장 역시 성진에게 주억거렸다.
“릴리움 별동대가 저런 자들이었군요. 로건 저하를 성심성의껏 모시는 점은 인정할 만하나, 그래도 참으로 극성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성진은 어이가 없는 눈으로 브루노 단장을 바라보았다.
아니, 단장? 매 식후마다 따끈한 멜보른 차를 대령하는 자네도 결코 정상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하지만 성진은 그에게 대놓고 타박하지는 않았다. 여기서 더 나아질 수 없으리라 여겼던 단장의 차 맛이 갈수록 좋아지고 있었으니까.
호르륵.
[아아, 정말 좋다. 온 몸의 피로가 싹 풀리는 느낌이야!]차 맛을 공유받은 마왕 놈이 행복에 겨워 염상 결정 속을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이렇게 평화로운 여정이었지만, 불화는 전혀 예상 못 한 곳에서 일어났다.
바로 늑대개 막스와 로건의 애마 록산느의 사이였다.
으릉…….
푸르륵.
처음 마주한 날부터 두 동물의 시선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험악한 기류가 흘렀다,
그렇게 싸늘한 첫 대면이 끝나고, 그때부터 둘은 사사건건 서로를 견제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긴 빗질을 받거나 성기사단의 휘장을 장식하고 있을 때면, 록산느는 자랑스러운 눈으로 막스를 내리깔아 보았다.
-어떠냐? 너 따위가 감히 이런 대접을 받아 본 적 있어?
그러다가 밤에 되어 야영지 옆에 말을 묶어둘 때면, 이번에는 막스가 놀리듯 록산느의 주위를 방정맞게 돌아다녔다.
-거기서 뭐 하냐? 꼼짝도 못 하고 있으니 재밌냐? 어?
말 못 하는 두 짐승들의 신경전이 어찌나 노골적으로 변해 가는지, 이제는 일행의 모두가 둘의 불화를 눈치챌 정도였다.
[끼리끼리 만났네. 왜 저렇게 싫어한대? 이런 걸 동족혐오라고 하는 건가?]큭큭큭큭.
마왕이 고소하다는 듯 사악하게 웃었다.
닥쳐라! 그 말, 그대로 너에게 돌려주마.
하지만 이렇게 팽팽하던 둘의 대치가 간혹 막스의 참패로 끝나는 때가 있었다. 바로 로건이 마차 대신 록산느를 타고 이동할 때였다.
아름다운 백마는 그럴 때마다 우아하게 발굽을 울리며 당당한 눈으로 막스를 내려다보았다.
-자 봐라! 나는 이렇게 대단하다고.
그러면 잔뜩 빈정상한 막스가, 그때부터 성진의 마차로 달려와 시끄럽게 짖어대는 것이다.
웡웡!
-나를 타! 어서 나도 저 녀석처럼 타라고!
의미를 대번에 알아들은 성진이 간식을 꺼내주며 살살 늑대개를 달랬다.
“아니, 막스. 너는 이제 전처럼 크게 변신할 수 없다니까. 변신이 가능하면 그것대로 곤란하고. 너는 말이 아니잖아? 이제 사람을 태울 필요 없어.”
하지만 고집 센 막스는 여간해서는 포기하지 않았다.
웡웡웡!
-나도 강하다! 나도 거대하다!
워우우우우우!
-어서 나를 타라아아아아!
그 난데없는 생떼에 성진은 결국 이마를 짚고 길게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여하튼 막스. 이 철없는 녀석아…….”
그렇게 시끌시끌한 하루가 저물고 밤이 되면, 성진은 마차에서 늦게까지 명상을 했다. 오랜만에 오롯이 수련에 열중해서인지 간혹 새벽을 넘기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런 날은 보다 못한 로건이 마차 문을 두드렸다.
똑똑.
“쉬엄쉬엄 해, 이성진. 그러다 몸이라도 상하면 어쩌려고.”
오러에 예민한 이 소드 마스터 녀석은, 기척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성진이 명상 중인지 수면 중인지를 쉽게 파악하는 것이다.
성진은 뚱한 얼굴로 마차 문을 열었다.
“아, 조금만 더 하고.”
“너무 늦었으니 그만 자.”
“하지만 지금 엄청 중요한 타이밍이라고! 여기서 조금만 더 집중하면 뭔가 바나하스 연공의 숨겨진 진의를 깨달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그렇다면 소드 마스터 가엘 베르트란으로서 단언하지. 괜찮다. 아직 넌 그런 경지에 이르려면 한참 멀었으니, 그건 다 네 착각이야.”
“…….”
거, 할 말이 없네.
결국 성진은 입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너나 오르덴 같은 천재가 아니란 말이야. 이렇게라도 명상 시간을 아껴서 그만큼 더 검술 수련을 해야 한다고.”
최근의 성진은 그답지 않게 초조했다.
워낙 사건‧사고가 많아서 도통 수련에 진척이 없었던 데다, 오르덴의 수련을 보고 자신과 천재의 격차를 확실하게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버지에게 도움이 될 수 없어.’
그러자 로건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성진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냐, 이성진. 네가 천재가 아니면 대체 세상 누가 천재라는 거야?”
“…응?”
“너처럼 자연스럽게 오러층을 쌓고 오러를 움직이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 천하의 가엘 베르트란도 너처럼 빠르게 오러를 쌓지는 못했다.”
성진은 멍하니 로건을 바라보았다. 워낙 얼굴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입에 발린 말을 잘하는 놈이라 반신반의한 것도 있었다.
하지만 로건은 아랑곳하지 않고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검술도 마찬가지지. 너처럼 감각만으로 최적의 검로를 그려낼 수 있는 자 역시 흔하지 않아. 그런 사람은 늦든 빠르든 언젠가는 검의 오의에 도달해 소드 마스터가 된다. 단지 시간의 문제일 뿐이야.”
“…….”
성진은 눈을 깜박거렸다.
천재라고? 아니 그럴 리가.
자연히 연무장에서 본 오르덴의 검 사위가 뇌리에 촤르륵 펼쳐진다. 그 남다른 의념이 담긴 하나하나의 형과, 그것이 모여 이루어 낸 패도적인 식들.
검의 천재란 그런 게 아닌가?
“확실히 대공자는 쉽게 보기 힘든 검재를 가지고 있다. 장래가 기대되는 젊은이라는 건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야.”
성진의 의문에 로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해봤어? 대공자가 스스로 자신이 펼치는 검을 보게 되면, 과연 너와 같은 것들을 파악할 수 있을까? 한눈에 보고 검에 담긴 의념을 이해할 수 있을까?”
로건은 설명했다.
어지러운 급류의 물살을 일일이 헤치고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자는 분명 대단한 천재일 것이다.
하지만 휘말리기 전에 먼저 목표를 파악하고 급류를 건너뛰는 자는, 어떤 의미에서 보통의 천재와는 차원이 다른 천재라고.
“그러니 날 믿어. 넌 언젠가 분명 강해진다.”
그렇게 말을 마친 로건이 옅게 미소 지었다.
“자, 이제 알았으면 어떻게 해야겠어?”
“어…….”
성진은 충격으로 멍하니 있다 얼떨떨하게 대꾸했다.
“…내가 가진 것도 나름 괜찮은 재능이니까, 갈고닦기 위해서 맞춤형 수련에 매진하자?”
“그게 아냐. 지금 이대로도 충분하단 말이야. 그러니까 뭔가에 쫓기듯 그렇게 자신을 채찍질할 필요는 없어.”
알겠어? 일찍 자라. 어린아이는 일찍 자야 키가 큰다고.
반년도 차이나지 않는 주제에, 혼자서 어른인 척 로건이 충고했다.
“그리고 이성진.”
“응?”
“네 주위에는 너의 뜻에 따라 검을 뽑을 사람들이 많아. 언제나 그걸 잊지 마라.”
“음…….”
근데 이 녀석. 번지르르한 말을 하면서 너무 자연스럽게 날 손아랫사람 취급하고 있는데?
“근데 너는 안 자냐? 한창 자라는 녀석이 늦게까지 왜 이러고 있어?”
그러자 로건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나야 무슨 상관이야? 언제든 몸을 회복시키는 신성력이 있는데.”
헉. 반박할 수가 없다.
하는 수 없이 성진은 얌전히 마차에 누워 잘 준비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성진이 모포를 덮는 걸 확인하고 마차 문을 닫으려던 로건이, 갑자기 빼곰 얼굴을 들이밀며 이렇게 묻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말인데, 이성진. 검을 조금 깊이 배우고 싶다면 이참에 너도 헤네시스 연공을 조금 배워보면…….”
“됐거든!”
이 녀석이 잊을 만하면 영업을 시도하네? 난 바나하스 연공법으로 대성할 거라니까!
* * *
그렇게 십여 일에 걸친 여행 끝에 마침내 레지나에 도착한 일행은, 오랜만에 접하는 대도시의 향취에 흠뻑 젖어들었다.
정신없이 오가는 짐마차와 가벼운 옷차림의 사람들. 화려하게 도색된 간판과 빽빽한 노점상 들.
“기분 탓일까요? 황도의 포근한 공기가 여기까지 전해지는 느낌이에요!”
클로디아 경이 주근깨를 씰룩거리며 킁킁 공기의 냄새를 맡았다. 그녀의 말대로 레지나로부터 황도까지는 이제 하루 거리였다.
노점상에 빽빽하게 진열된 꼬마 성 아우렐리온의 조각상들도 여전했다. 반갑게 거리를 둘러보던 성진은, 문득 기억과는 다른 묘한 위화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기분 탓인가? 전에 비해 영감님의 조각들이 좀 통통해진 느낌이…….’
에이 설마.
‘도시 전체의 트렌드가 단숨에 바뀌는 일이 있겠어? 그냥 내 착각이겠지.’
그리고 일마 경과 음유시인 로랑과는 여기서 작별이었다.
“아나톨리아로 가는 역마차가 엇갈릴 것 같아, 부득이하게 여기서 인사드려야겠습니다. 부디 보중하십시오, 저하.”
일마 경은 공손히 예를 취한 후 조용히 일행을 떠났다.
이제부터 딸을 찾아 기약 없는 여행을 해야 하는 그녀를 위해, 로건과 발레리 경이 소박하게나마 축언을 읊조려 주었다.
“저하 덕분에 목숨을 건지고, 또 다시 없을 귀중한 경험들을 했습니다. 막장에 대해서는 결국 배우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제부터 제게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습니다.”
로랑 역시 씩씩한 목소리로 말했다.
“새로운 목표?”
“예. 앞으로도 오래도록 기억되는 대서사시를 쓰고 싶습니다. 그 시작으로, 우선 지그스문트령에서 있었던 저하의 활약을 대륙에 널리 퍼뜨리려 합니다!”
…설마.
그 음율 구린, 과장과 찬사로 점철된 낯 뜨거운 습작들을 당당하게 부르고 다니겠다는 거냐?
성진이 기겁하는데, 어느새 훌쩍 멀어진 로랑이 마지막으로 크게 소리치며 눈을 찡긋거렸다.
“모두 제게 맡겨 주십시오! 제가 언젠가 저하를 방랑기사 페르낭보다 더 유명한 주인공으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아니, 그러지 마, 로랑.
제발 그러지 마!
하지만 로랑은 신나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그대로 일행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괜찮으십니까, 저하?”
예기치 못한 상대로부터 치명적인 내상을 입고 비틀거리는 성진에게, 마사인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 괜찮아, 마사인 경.”
성진은 그의 부축을 받고 겨우 몸을 추슬렀다.
내가 지금 이러고 때가 아니야. 레지나에 온 김에 로건에게 보여줄 것이 있으니까.
그렇게 일행이 숙소에 짐을 푸는 동안, 성진은 로건을 이끌고 물류 중계소 근처의 한 건물로 향했다. 다샤에게 미리 구매를 부탁하고, 슈미트 부장에게 운영을 지시한 작은 상단이 있는 건물이었다.
거기에는 인부 몇몇이 이제 막 개점을 준비하느라 바쁘게 움직이는 중이다. 아직 제대로 된 간판도 없이, 허술한 현수막 하나만이 걸려있는 초라한 상단이었다.
-베르트란 & 리
베르트란 & 리.
사실 이 작은 상단의 이름을 완전히 정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아마도 지그스문트령에서 로건이 성진에게 이런 말을 했을 때였지.
-그래. 이해할 수 있다. 나 역시 한때는 내가 더 이상 ‘가엘 베르트란’이 아니라는 사실을 견디기 힘들었던 때가 있었으니까.
그때 생각했었다.
성진에게는 계속해서 자신의 이름을 불러줄 자들이 있었다. 로건과 마왕은 앞으로도 언제까지고 그가 이성진임을 잊지 않아 주겠지.
하지만 로건, 저 녀석은 어떤가.
이 세상에 어느 누가 저 녀석의 진짜 정체를 알고, 그 이름을 불러줄 것인가.
그래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한 것이다. 어딘가에 가엘 베르트란의 흔적을 남기고, 사람들이 계속해서 상단의 이름을 불러주면 좋을지도 모르겠다고.
어차피 언젠가는 로건에게 주기 위해 만든 회사니까.
“아직은 실적 없는 신생 회사의 공동 바지사장이 된 걸 축하해, 로건!”
성진이 손을 활짝 펼치며 자신만만하게 외치자, 로건이 얼이 빠진 얼굴로 건물을 훑어보았다.
회사? 그게 무슨 소리야?
이 작은 게 상단이라고?
“아, 선물을 주면 좀 기뻐하라고! 너 돈 많이 벌어야 하잖아? 언제까지나 아버지가 주는 용돈으로 오르토나인을 연명하게 만들 수는 없지 않겠어?”
성진의 핀잔에 로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이걸로 돈을 벌 수 있으면 좋을 거다. 생각해 줘서 고마워, 이성진. 하지만 상단 운영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아. 차라리 그 자금으로 오르토나를 도울 다른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쯧쯧.
이 녀석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
“상단이 아니면 의미가 없어, 로건. 자금의 흐름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계속해서 변화해야 한단 말이야. 알겠어? 이 ‘베르트란 & 리’는 오르토나의 최북단과 황도를 이어주는 물류 이송의 통로가 되는 거야!”
“오르토나 북부?”
“그래”
성진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베르트란 & 리’를 기점으로, 오르토나의 경제를 서서히 자생하게 만드는 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