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275)
성황의 아이들-275화(275/469)
275. 꿈길에서 (4)
그날 저녁.
황궁 정찬 자리는 이전과 달리 비교적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시작되었다.
로건이 성진 못지않은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온 데다,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리자베스 황비도 자리에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타티아나 황후의 주도아래, 정찬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이어졌다.
그리고 마사인이 성진에게 전해준 것은 의외의 소식이었다.
“어머니가? 아세인 공국으로?”
“네. 갑자기 일이 생겨 어제 떠나셨답니다. 듣기로는 아세인 대공의 긴급한 호출이 있었다더군요.”
“…그래?”
성진은 리자베스 황비가 이 자리에 없다는 사실에 솔직히 조금은 안도했다.
지금까지야 모레스의 어머니라 생각하고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고 있었지.
하지만 그녀가 정말 자신의 어머니라고 생각하면, 그 차갑게 변한 시선을 도저히 정면에서 마주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최근 아세인 공국에 특별히 큰 문제는 없는 걸로 안단다. 아버님 폐하의 집무실에도 특별한 보고는 없었어. 별일 아닐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렴.”
성진의 미묘한 표정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아멜리아가 부드럽게 다독거렸다.
“네, 뭐…….”
조금 머쓱하게 대꾸한 성진은 얌전히 자리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근데 그건 뭐야, 마사인 오라버니?”
“못 보던 걸 하고 있네, 마사인 형님?”
“아, 모레스 황자님께서 주셨습니다.”
뭔가 멋진 기능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사실 잘 알아듣지는 못했습니다.
마사인이 옷깃에 꽂힌 작은 장신구를 내보이며 멋쩍은 듯 말했다.
“그래? 그럼 분명 나중에 쓸 일이 있는 기능일 거야. 마사인 오라버니.”
“하긴, 모레스가 준 거니까. 잘 가지고 있는 게 좋을 거야. 마사인 형님.”
“하하, 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입니다.”
쌍둥이들과 마사인 경이 주고받는 대화를 들으며, 성진은 주머니에 넣어온 또 다른 장신구를 깊숙이 찔러 넣었다.
리자베스 황비에게 주려고 준비하긴 했지만, 과연 그녀가 있었던들 건넬 수나 있었을지 새삼 의구심이 일었다. 언젠가 그녀와도 이렇게 평범한 가족처럼 웃고 떠들 날이 오기는 할까.
그날의 메인 요리 중 하나로는 곰고기 스테이크가 나왔다. 모레스 황자가 자주 찾는다는 이유로, 지그스문트 변경백이 사례품과 함께 보내온 것이었다.
실제로 곰고기를 좋아하는 것은 마왕이었고, 성진의 입맛에는 그리 특별할 게 없었지.
하지만 마왕 놈을 위해 꾸준히 먹다보니, 이제는 그럭저럭 정감 가는 맛이라는 느낌이었다.
조금 생소한 음식이 아닐까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정찬에서의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그러다가 성진은, 역시나 음식을 한입도 대지 않고 있는 성황을 발견했다.
“어, 아버지. 이거 생각보다 별미입니다. 부수기는 그만하시고 좀 드셔 보세요.”
“…….”
언제나처럼 무감각한 얼굴로 음식물을 해체하고 있던 성황이 움찔 놀라더니, 새삼스러운 얼굴로 곰고기 스테이크를 입에 넣었다. 그리고 무심코 미간을 찌푸린다.
물론 찰나의 순간이었고, 금세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했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과 보조를 맞추며 꿋꿋하게 스테이크 한 접시를 비워냈다.
‘음. 저건 취향이 아닌 모양이지?’
익숙해지면 제법 맛이 괜찮은데, 입맛 한번 까다로운 양반이야.
아, 저놈의 밥상머리 버릇. 언젠가 내가 고치고 만다. 조만간 황도에 짠하고 참연어 전문점이 나타날 테니까!
“라뷰야…….”
한편, 메인 요리에 손을 대지 않는 사람은 또 하나 있었다. 시슬레가 애처로운 표정으로 스테이크를 바라보고만 있었으니, 방에 두고 온 작은 곰인형이 떠오른 까닭이다.
“이게 곰이라고? 라뷰 같은 귀여운 곰이 죽어서 고기가 된 거야? 그 작은 아이들이 정찬회의 스테이크가 되다니, 대체 몇 마리나 필요했을까?”
“…….”
아니, 곰이란 게 네가 생각하는 그런 생물은 절대 아닐 거야.
“희생해 준 불쌍한 곰을 생각하면 한 조각도 남기지 말아야겠지만, 우리 귀여운 라뷰가 떠올라서 차마 손을 댈 수가 없어.”
부디 주신의 품에 안겨 좋은 곳으로 가렴.
작은 성녀가 가슴에 손을 모으고 경건하게 기도를 올린다. 덕분에 주변은 순식간에 숙연해졌다.
평소 어른스러운 성녀가 보여주는 의외의 동심이 귀엽기는 한데, 그 기저에 흐르는 분위기가 너무나 서글퍼서 그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한 것.
‘시슬레. 그건 실제로는 곰이 아냐. 글래쳐 트롤이라는 얼음 괴물이라고!’
성진 역시 입이 근질거렸지만, 주위의 분위기에 휩쓸러 그냥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나저나 멀쩡한 빙수 3호의 이름이 왜 갑자기 ‘라뷰’가 된 거냐.
“그거 이리 줘. 대신 내 디저트를 줄게.”
결국 성진은 차선책으로 상심한 시슬레의 접시를 바꿔주었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에서 환호를 지르는 시끄러운 놈이 하나 있었다.
[흑! 너무 좋아, 또 한 접시야! 이곳에 돌아오면 다시는 맛보지 못할 줄 알았는데!]결과적으로 마왕만이 감격해서 울먹거리는 정찬 시간이었다.
* * *
그날 밤.
진주궁 응접실에 아멜리아가 찾아왔다. 전에도 간혹 그랬던 것처럼, 오랜만에 늦게까지 성진과 담소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물론 새로 준비해 온 동화책을 한아름 안고 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 이제 동화책은 완전히 졸업했습니다, 누님. 읽기가 제법 늘었거든요.”
말을 알고 있으니 글자를 익히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특히 최근에 프란시스와 ‘은총의 기사’ 신화를 만들어내느라 어휘력이 비약적으로 늘어났지. 물론 아직까지 복잡한 철자들은 간혹 헷갈리긴 하지만.
“그래…….”
아멜리아는 기특한 듯 섭섭한 듯, 뭔가 미묘한 표정으로 성진을 바라보았다.
-우리 애가 벌써 이렇게 자랐구나. 참 장하기는 한데, 왠지 허전함을 감출 수 없다. 왜 아이들의 귀여운 시절은 이리 빨리 지나가버리는 것일까.
누님,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얼굴에 다 보이거든요.
“그래. 오르토나를 말이구나.”
이런저런 얘기 끝에, 성진은 ‘베르트란 & 리’에 대해 털어 놓았다. 상단의 궁극적인 목표에 대해 설명하자, 아멜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권이 형성되는 곳은, 싫어도 자연히 치안이 발달하게 되지. 이익이 명확하니 주변 영주들도 협조하지 않을 수 없을 거란다. 덕분에 오르토나의 난민들이 조금씩 정착하는 기회가 될 것 같구나. 어떻게 그런 큰 계획을 세웠니?”
성진을 바라보는 아멜리아의 눈동자에는, 뿌듯한 심정이 여과 없이 드러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게 있어. 집무실을 오가면서 본 건데, 분명 너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있을 거야. 아버님 폐하께서 초기에 만드셨던 오르토나 재건에 대한 계획이 있었단다.”
오르토나 재건 계획?
아버지가 그런 걸 만들었었다고?
“예전에 한번 말한 적이 있었잖니?”
그러고 보니, 치세 초기의 성황은 여러 가지 급진적인 정책을 펼쳤다고 했었지. 사사건건 정교회와 부딪히면서도, 여러 가지 혁신적인 정책들을 힘으로 밀어붙인 적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어느 기점부터, 그 모든 활동이 딱 끊어진 듯 중지되었다고.
예전에 아멜리아가 그랬었지. 정교회와의 잦은 충돌도 그렇거니와, 그 외에 여러 가지 현실적인 벽에 부딪혔기 때문에 성황이 한발 물러선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고.
하지만.
‘협정인가…….’
이제는 성진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모종의 이유로 갑작스럽게 협정에 손발이 묶인 성황이, 이후로는 어떠한 정책도 쉽게 손댈 수 없었으리라는 것을.
국가는 물론 한 대륙을 좌지우지하는 정책들이 잡아먹을 인과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일 테니까.
“네 계획과는 순서의 차이일 뿐, 어느 정도는 일맥상통하는 부분들이 있어. 참고하면 장기적인 계획을 만드는데 큰 도움이 되겠지. 그런데…….”
아멜리아는 조금 주저하다 물었다.
“그 참연어 사업이라는 거 말이야. 그와 비슷한 사업에 관해서는 본 적이 없구나. 그게 정말 수익성이 있기는 한 거니?”
“…….”
그녀의 순수한 질문에, 성진은 조금 시무룩해졌다.
누님, 우리에게는 저온 마차가 있단 말입니다! 이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고요!
“아, 누님.”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난 성진이 구석에 있는 짐을 뒤졌다. 오르덴에게서 맡아 둔 물건이 이제야 기억난 것이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가 하는 양을 바라보던 아멜리아는, 이윽고 성진이 낡은 보물함 하나를 끄집어내자 어리둥절하며 성진을 올려다보았다.
“이걸 정말 드려야 하는지 조금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누님이 직접 보시고 결정하셔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건?”
“지그스문트 백작저에서 가져왔습니다. 어린 시절, 누님의 보물 상자였다고 들었어요.”
흠칫.
아멜리아는 그제야 뭔가를 떠올린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뚫어져라 상자를 바라보았다.
성진이 조심스럽게 물건을 건네자, 그녀는 천천히 경칩이 떨어진 상자를 열고 낡은 지푸라기 하나를 들어올렸다.
“벨…….”
아멜리아의 눈이 과거를 회상하듯 깊이 침잠했다.
“그래.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 까맣게 잊고 있었어.”
성진은 모르고 있었지만, 아멜리아에게는 회귀 전까지 거의 수십 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과거다.
“그래. 그 시절은 무척 힘들었단다. 그럼에도 이것들은 내게 소중한 물건이야. 가져와줘서 고마워, 모레스.”
아멜리아는 지푸라기를 옆에 내려두고, 상자 안의 잡동사니들을 하나하나 꺼내보았다.
그런데 그녀가 낡은 팬던트 하나를 막 집어들었을 때였다.
순간 벼락이라도 맞은 듯, 잊고 있던 거대한 기억의 물결이 해일처럼 그녀를 단번에 덮쳐왔다.
“꿈…. 그래, 그때 나는 꿈을 꿨어.”
그 시절, 어렸던 아멜리아는 현실인지 꿈인지 모호하게 느껴지는 수많은 꿈을 꿨다.
가장 처음 기억하는 것은, 자신이 폭신하고 따뜻한 양모 외투를 입고 누군가에게 업혀 한없이 조잘거리는 광경이었다.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거예요, 아빠?
-네 조부가 우리를 찾지 못하는 곳이란다. 아멜리아.
아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알기로는 조부는 일대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걱정하지 말렴. 그는 감히 우리를 따라오지 못할 거란다.
그렇게 대답하는 남자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럼에도 한없이 든든하게 느껴졌다.
어쩐지 안심이 되는 기분에, 아멜리아는 배시시 웃으며 그의 망토 아래로 고개를 묻었다.
또 어느 날은, 쏟아질 것만 같은 별하늘 아래서 모닥불 옆에 누워 야영을 하는 꿈을 꿨다. 따뜻한 모포를 두르고, 품에는 새로 산 작은 인형을 끌어안은 채였다.
-이 예쁜 아이에게 멋진 이름을 지어주고 싶어요, 아빠.
-그렇더냐. 그럼 너는 그 아이를 어떻게 만들어 주고 싶으냐?
아멜리아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음, 우선 이 애에게는 가족이 아주 많았으면 좋겠어요. 가족을 달라고 소원을 빌었더니 아빠가 왔고, 저는 행복해졌잖아요? 그러니까 이 애도 그만큼 많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한참을 대답이 없던 남자는, 잠시 후 아멜리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럼 저 하늘의 별만큼 많은 가족을 가진 여신은 어떠냐? 밤하늘의 벨루나는, 내가 아는 한 가장 많은 가족을 가진 행복한 여신이란다.
-저 엄청나게 많은 별이 전부 다요?
아멜리아는 눈이 휘둥그레져 그가 들려주는 신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날, 그렇게 인형의 이름은 벨루나가 되었다.
또 어느 한 날은 시내에서 재미있는 연극을 보았다. 아멜리아는 남자의 어깨에 목마를 탄 채 신이 나서 탄성을 질렀다.
-공연을 제법 좋아하는구나. 그렇다면 이번에는 브르타뉴로 가보겠느냐? 그곳은 공연 예술이 무척 발달한 곳이란다.
-거기 공연들도 저 연극처럼 재미있나요?
-무척 재미있을 게다. 단지 그곳 사람들이 차가운 수프를 들이키다 목이 걸린 듯, ‘Arrch’라고 발음하는 것에만 익숙해진다면 말이다.
수프가 목에 걸린 소리가 어떤 소리지?
어쩐지 우습다 싶어서 깔깔거리며 이것저것 질문하던 아멜리아는, 어느새 그로부터 Arrch가 들어가는 단어들을 하나하나 배우고 있었다.
-깊고 깊은 숲, 정성으로 지은 초라한 오두막에 작은 천사가 내리니, 그곳이 곧 나의 교회이리.
-와, 지금 배운 단어들이 모두 나와요! 그 문구는 뭔가요?
-뭔가를 외울 때는, 이렇게 네게 의미가 있는 것을 함께 기억하면 큰 도움이 된단다, 아멜리아.
-그럼 그 문구가 아빠한테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요?
-그럼, 있다마다.
남자는 아멜리아를 번쩍 들어올렸다.
-바로 여기에 내 작은 천사가 있구나.
몸이 위로 떠오르자 마치 하늘을 나는 듯, 주변의 공기가 그녀를 감쌌다.
꺄하하하!
자지러지는 웃음소리가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그래, 내가… 어떻게 지금까지 이것들을 잊고 있었을까.”
갑작스러운 그녀의 반응에 성진이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아멜리아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