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276)
성황의 아이들-276화(276/469)
276. 꿈길에서 (5)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도 전의 일이다.
그날 레지나의 한 술집에서는 밤이 늦도록 청소가 이어지고 있었다. 타지에서 온 용병단 하나가 임무 성공을 자축하며 늦게까지 술판을 벌였기 때문이다.
주인과 직원은 녹초가 되었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날의 손님이었던 애스트로스 용병단은 거칠기는 해도 제법 통제가 잘 되는 자들이었으니까. 거기다 그들은 재고로 남은 질 나쁜 맥주들까지 싹싹 긁어 마셔주었지.
그 덕에 주인의 주머니는 넉넉하게 차올랐고, 직원들 역시 추가 근무에 대한 든든한 보너스를 받을 예정이었다.
“아까 그 청년도 용병이었을까요? 다른 일행들과는 어딘가 달라 보였는데, 혹시 이름난 귀족가의 기사는 아닐지…….”
홀에서 서빙을 하는 소녀가 열심히 행주질을 하며 물었다. 바쁘게 몸을 움직여서인지 조금 상기된 얼굴을 한 채로.
따로 구체적인 설명이 없어도, 주인은 소녀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확실히, 그라면 어디에서도 눈에 띌 만한 청년이었지.
“허가된 용병패를 가지고 있던데? 어려 보여도 제법 오래 구른 놈이야. 대충 급수를 보니 한두 해 해먹은 작자가 아니더만.”
“그걸 어떻게 아세요?”
“그 작자들이 술을 푸기 시작할 때 미리 용병패를 걷었다.”
레지나에는 간혹 보증처럼 용병패를 요구하는 술집들이 많았다. 워낙 술을 마시고 사고를 일으키는 용병이 많은 탓이었다.
“그렇군요.”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무슨 생각을 했는지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반듯하게 앉아 있길래 영락없이 기사님이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유능한 용병이라는 것도 제법 어울리네요.”
주인은 혀를 찼다.
“아서라. 그런 놈들에게 함부로 마음 주는 거 아니다. 젊은 용병과 살림 차렸다가 과부 된 아낙들이 이 레지나에 오죽 많은 줄 아냐?”
레지나는 북부를 오가는 용병단이 거의 대부분은 거쳐 가는 대도시. 수많은 용병들이 그렇게 애인과 약속을 나눈 채 북부로 갔고, 그대로 오르토나 내전에 휩쓸려 사라져 버렸다.
그때 양파 자루를 지고 들어오던 소년, 벤자민이 소녀를 향해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어차피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막 나가는 놈들이라고. 괜히 그런 것들에게 눈길 주지 말고 일이나 제대로 해.”
“아니, 눈길을 주다니! 게다가 내가 언제 일을 제대로 안 한 적이 있어?”
소녀가 눈을 뾰족하게 뜨며 소리치자, 벤자민의 목소리 역시 덩달아 높아진다.
“오늘 네 꼴이 어땠는지 모두에게 물어봐! 딱 봐도 그놈한테 한눈에 반한 꼴이던데!”
“반하긴 누가! 너는 왜 갑자기 나한테 시비야?”
소녀는 팩 토라져 행주를 쥐고 주방으로 사라졌다. 벤자민 또한 자루를 거칠게 내려놓고 주점 밖으로 나가버린다.
단지 소녀를 향한 벤자민의 마음을 알고 있는 주인장만이 속으로 쯧쯧 혀를 찼을 뿐이다.
저런 못난 놈.
‘나도 알아. 괜히 애나한테 화풀이 하는 거.’
한편, 짝사랑하는 소녀에게 소리를 지르고 나온 벤자민의 마음 역시 썩 편치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소녀가 낯선 용병을 향해 느꼈을 설렘이 어떤 것이었을지 너무나도 잘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처음 그 용병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던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야말로 이야기 속에나 나오는, 누구나 동경하는 멋진 용병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자가 아니었나.
“…미치겠네. 당장 내일 애나의 얼굴을 어떻게 본다지?”
벤자민은 첫사랑의 실패를 예감했다. 그렇게 자괴감과 패배감, 우울감에 휩싸여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때였다.
반짝.
바닥에서 뭔가가 빛을 발하며 그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응?”
달빛도 없는 어두운 밤, 기이하게도 바닥에 떨어진 뭔가가 홀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벤자민은 별생각 없이 빛을 향해 다가갔다. 그렇게 발견한 빛의 정체는 바로 선홍색의 작은 펜던트였다.
“이건…….”
그러고 보니, 아까 용병 청년이 주점을 나가면서 바닥으로 뭔가를 던지지 않았던가?
‘망가져서 버린 건가? 그러기엔 아까운데…….’
어째서인지 완전히 반으로 갈라져 못쓰게 되어버리긴 했지만, 그럼에도 영롱한 보석은 충분히 아름다운 빛을 뿜어냈다.
그가 홀린 듯이 펜던트에 손을 가져가려 할 때였다.
[조심하시오.]갑자기 머릿속을 울리는 묘한 목소리가 들렀다.
움찔 놀라 고개를 드니, 언제 나타났는지 한 여인이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구?”
벤자민은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여인이 온통 불길한 검은 색으로 뒤덮여 있었던 까닭이다.
검은 드레스와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검은 베일.
특히나 그 시커먼 베일은 여인의 얼굴을 완전히 가리고 턱 아래까지 늘어져 있어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베일 위로 어렴풋이 드러나는 실루엣은 섬세했고, 몸에 잘 맞는 검은 드레스는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아무래도 인간이 아닌 것 같아!’
무서운데 예쁘다니. 마치 죽음을 선고한다는 옛이야기 속 요정과도 같지 않은가!
벤자민이 식은땀을 흘리며, 재빨리 펜던트를 채어 도망갈 궁리를 하고 있을 때였다. 여인의 기이한 목소리가 다시금 뇌리를 울려왔다.
[경고했소.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인과에 한 번이라도 말려들면, 이후로는 더는 돌이킬 수 없소이다.]일순 검은 베일 속에서 섬뜩한 안광이 번뜩인 느낌이 들었다.
‘도망가야 한다!’
본능은 당장이라도 뒤로 돌아 달리라고 소리치고 있다. 그러나 벤자민은 바닥의 펜던트에 대한 미련을 쉬이 버릴 수가 없었다.
비록 부서졌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저 아름다운 보석은 쓸모가 있어 보였다. 그의 급여를 평생 모아본들, 앞으로 저런 보석을 다시 만져 볼 수나 있을까.
[…….]벤자민은 주춤거리며 눈치를 보았지만, 여인은 여전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무거운 경고와는 달리 딱히 그의 행동을 힘으로 제지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꿀꺽.
마음을 다잡은 벤자민은 재빨리 달려들어 바닥의 펜던트를 가로챘다.
그런데 그 순간.
화악!
환영처럼, 그의 눈앞에 갑자기 거대한 붉은 화염이 치솟아 올랐다.
“……!”
벤자민은 어느 순간 불길에 휩싸인 너른 대지 위에 서 있었다.
하늘에서는 별들이 빛을 잃고 땅으로 쏟아져 내리고, 바닥에서는 시커멓게 그을린 수많은 인간들이 고통스럽게 몸을 꿈틀거리는 지옥의 땅.
살이 타들어가는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그리고 비명 소리. 마치 영혼을 쥐어짜듯 처절하게 내지르는 그 비명 소리.
“으아아악! 지옥이다! 세상의 종말이다!”
벤자민은 공포에 질려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뭐야! 무슨 일이냐, 벤자민?”
“갑자기 왜 그래?”
소동에 놀란 주인장과 애나가 가게 밖으로 뛰쳐나온다.
그리고 잠시 후.
겨우 진정한 벤자민이 식은땀을 흘리며 다시 돌아보았을 때, 여인은 펜던트와 함께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 * *
“그래, 내가… 어떻게 지금까지 이것들을 잊고 있었을까.”
한동안 낡은 펜던트를 쥐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아멜리아는, 곧 성진을 돌아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죄송합니다, 누님. 제가 누님의 마음은 생각지도 못하고…….”
성진은 죄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어린 시절의 그녀가 지그스문트령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빤히 알면서도 너무 무신경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냐. 오히려 내가 고마워해야 할 일이란다, 모레스.”
하지만 아멜리아는 고개를 저으며 소중하게 펜던트를 어루만졌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나는 지그스문트령에 있을 당시에 많은 꿈을 꿨단다. 어째서인지 이 펜던트를 들고 잠이 들면, 언제나 행복한 꿈들이 나를 찾아왔어.”
그래. 행복한 꿈이었다.
너무도 생생하던 터라, 어린 아멜리아가 그것을 현실이라 믿을 만큼.
그래서 자신을 찾아온 낯선 성황을, 꿈속의 남자로 착각하고 아무 거리낌 없이 따랐을 만큼.
곧 풍족한 황궁 생활이 시작되고, 경계가 모호했던 어린 시절의 꿈들은 이내 아멜리아의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꿈들은 아멜리아에게 어떠한 식으로든 영향을 남긴 것만은 확실했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배우지 않은 브르타뉴어를 손쉽게 익혔고, 배우지 않은 대륙의 많은 이야기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아멜리아가 결정적으로 레오나드에게 마음을 빼앗겼던 계기가 무엇이었던가.
-나의 소중한, 영혼을 바쳐 사랑할, 단 하나뿐인 가족이 되어 주십시오.
그 단출한 청혼에 벅차오르는 기쁨을 느낀 아멜리아는, 그대로 두 번 생각하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던 것이다.
무의식중에도 어렴풋이, ‘소중한 단 하나의 가족’이란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그때, 어린 시절의 꿈처럼 행복한 생활이 다시 찾아오리라는 큰 착각을 했던 걸지도 몰라.”
한편 아멜리아의 말을 듣던 성진은, 문득 일전에 틈새에서 성황이 했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나는 그 여인의 육체가 아닌 영혼에 축복을 내렸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이따금 꿈을 꿀 수 있도록.
지그스문트 전 백작 부인에게 내려진 꿈의 축복.
당시는 어째서 그런 방식이었는지 의아했지만, 이제는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아멜리아 누님에게 허락되었던 만큼의 안식은 베풀어 주겠다는 일종의 자비. 그것이 그가 인과를 맞춰가는 방식인지도 몰랐다.
“당시에 나는 이걸 ‘꿈 목걸이’라고 불렀단다.”
아멜리아는 소매의 레이스 자락으로 쓱쓱 지저분한 펜던트를 닦아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성진은, 어쩐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혹시나 저 펜던트는……?
“일부러 사용인들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진흙을 잔뜩 발라두곤 했어. 형편없이 부서지긴 했지만, 당시에는 내가 가진 물건들 사이에서 가장 예쁜 보물 중 하나였지.”
그리고 그 예감은 적중했다.
레이스 속에서 때를 벗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성진도 익히 잘 알고 있는 물건이었던 것이다.
“이정표…….”
반으로 갈라진 선홍색의 보석.
분명 조모가 남겼다는 그 선홍색의 이정표였다.
* * *
그날 밤.
성진은 오랜만에 돌아온 자신의 방에서, 명상하는 것도 잊고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걸 어떻게 갖게 되었냐고? 너무 어린 시절의 일이라, 그 부분에 관해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지는 않아.
이정표의 출처를 묻는 성진에게, 아멜리아는 조금 주저하며 대답했었다.
-아마 어머니가 돌아가신 직후, 그 추운 별장에 홀로 남겨졌을 때였을 거야. 웬 낯선 여자 하나가 나를 찾아왔단다.
검은 베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에 모습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온통 검은색 일색이었던 여인은, 아멜리아에게 부서진 펜던트를 건네주며 부디 잘 간직해 달라 당부했다 한다.
‘아마도 이정표가 무엇인지, 그것의 가치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겠지.’
그렇다면 역시 오라클일까?
여자라고 했으니 성황은 아닐 테고, 아마도 전대 오라클이라든가.
‘…하지만 정말 조모님일 리가 없잖아?’
베스세바 황비는 성황이 어린 시절, 그가 황궁을 떠나기 전에 이미 독살당했다고 들었지. 그렇다면 그때까지 살아있을 리가 없었을 텐데.
성진은 자신이 지니고 있던 또 다른 이정표를 꺼내들어 잠시 찬찬히 바라보았다.
덱스터에게 주고 남은 반쪽짜리에 불과했지만, 그 단면조차 잘 계산된 커팅인 듯 다채로운 빛을 뿜어내는 신비로운 보석.
덱스터는 이것을, 오라클의 정신을 반영하는 일종의 단말 같은 것이라 설명했었다.
그렇기에 소스 편집기로 분석을 시도하려던 순간, 견디지 못한 기계가 터져버릴 정도로 방대한 자료를 보유하고 있는 거라고.
-깨어지고 산산이 부서져, 이것이 그의 예지가 아닌 현실임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성황은 이정표에 대해 그렇게 설명했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일 오라클이 이정표의 지시대로 미래를 선택하게 된다면, 선택 이전에 오라클이 본 예지는 어떻게 되는 거지?’
선택하지 않은 채 가능성으로 남아버린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만일 이정표가 오라클의 정신을 반영한다면, 혹시라도 그 일부가 이정표에 데이터의 형태로 남는 일은 없는 것일까?
성진은 고민하다가 이정표를 끌어안고 침상 위에 모로 누웠다. 아무래도 직접 알아보는 방법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너 지금 뭐 하냐?]마왕이 떨떠름하게 물었지만, 성진은 놈을 무시하고 꿋꿋하게 눈을 감았다. 어쨌든 먼저 아멜리아에게 들은 방법을 시험해볼 생각이었다.
-꿈을 꾸는 방법은 간단했어. 보석을 끌어안고 잠이 들기만 하면 됐으니까.
좋아, 이걸 끌어안고 잠을 잔다.
‘장난감을 숨기는 애도 아니고, 내가 이 나이 먹고 이런 걸 할 줄은 몰랐는데.’
하지만 시도해 볼 가치는 충분히 있다. 그렇게 판단한 성진은, 보석이 배기는 느낌을 참으며 열심히 잠을 청했다.
[게스트 ID의 접속을 확인합니다.]그렇게 얼마간 시간이 흘렀을까.
성진은 잠결에 희미하게 울리는 전자음 같은 것을 들었다.
[오랜 시간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 □□…….]* * *
눈을 뜨자, 옆에서 웬 사람들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념으로 이루어진 또렷한 대화였다.
[정말 오랜만의 게스트 ID군요.] [하지만 그의 접속은 어딘가 불안정한? 그래픽이 부서지고 있습니다.] [간혹 이런 경우가 있지. 하지만 괜찮아. 기능은 멀쩡했어.]뭐라는 거냐.
나에 관해 떠드는 거라면, 먼저 알아듣게 설명부터 하라고.
성진은 제대로 된 형체 없이 희미한 그림자처럼 보이는 이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지금 무슨 소리들을 하는 거지? 당신들은 누구야? 또 지금 여기는 어딘데?”
순간 그들 중 하나가 움찔 놀라며 얼어붙었다.
그러더니 곧 반가운 듯 성진을 향해 외치는 것이 아닌가.
“지금 그 말! 그건 분명 제국어인데. 당신, 혹시 델크로스 사람인가?”
“……?”
성진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성큼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치직, 칙. 이따금 시야에 노이즈가 끼는 듯했지만, 그래도 희미한 형체만으로 그의 훤칠한 키와 단단한 체구를 알아볼 수 있었다.
“와, 델크로스 본상 세계에서 게스트 ID로 접속한 사람은 처음 봐! 이렇게 반가울 수가!”
성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자, 그에게서 시원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이봐. 아직은 혼란스럽겠지만, 걱정하지 마. 내가 도와주지.”
치직. 칙.
노이즈 너머로 희미하게 휘어지는 입매가 보인다.
“잘 부탁해, 뉴비. 일단 통성명을 할까? 내 이름은 오웬. 오웬 록우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