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277)
성황의 아이들-277화(277/469)
277. 옐로우 존 (1)
성진은 생각지도 못한 감각을 느끼며 눈을 떴다.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어두운 방에서 침구를 덮어쓰고 있었는데, 지금은 주변이 환하게 밝은데다 몸이 휑한 느낌이 들었다.
‘…뭐지?’
폭신한 침상 대신 잔디밭을 짚으며 눈을 뜨니, 머리 위로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탁 트인 푸르른 잔디밭과 파란 하늘.
자신의 방이 아닌, 명백히 생소한 장소였다.
성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게 누님이 말한 그 꿈인가…….’
눈을 빤히 뜨고 있음에도 시야가 몽롱하고 흐렸다. 반면에 머릿속은 묘한 각성 상태가 유지되고 있다.
확실히 어딘가 생생한 감각이 들기는 하네.
부스스.
그렇게 몸을 일으키던 성진은, 문득 평소와 달리 머릿속이 허전한 느낌에 물었다.
‘…야, 마왕아?’
역시나 놈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또 내가 몸을 놔두고, 영혼만 어디론가 빠져나온 건가?’
그렇다면 단순한 꿈이 아닐지도.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어쨌든 지금 상황이 그다지 위험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뭐, 정말 자신이 위험에 처했다면 아버지가 당장 달려오셨을 테니까.
바로 그때였다.
[누구지? 저기서 갑자기 나타났는데?]옆에서 웬 사람들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가 아닌, 사념으로 이루어지는 또렷한 대화였다.
[게스트 ID 유저입니다. 별다른 장비조차 없는 걸 보면 뉴비인 것 같군요.] [뉴비가 엘로우 존에 떨어지다? 그것은 운이 없는.]성진은 부스스 몸을 일으켜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고 짐작되는 세 사람의 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가 옆에 있지. 저 친구도 영 운이 없다고는 못 하겠는데?]성진이 자신을 향한 뚜렷한 시선을 감지했음에도, 그저 그들이 바라보고 있다고 짐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그들에게서 도통 표정이나 눈 같은 뚜렷한 형체를 구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거무스름한 연기 같은 것으로 이루어진 그들은, 마치 그림자나 유령들처럼 보였다.
[그나저나 정말 오랜만의 게스트 ID군요.]길쭉길쭉.
인간이라기엔 어딘가 과하게 늘씬한 형체가 말했다.
[하지만 그의 접속은 어딘가 불안정한? 그래픽이 부서지고 있습니다.]동굴동굴.
마치 덩어리진 듯, 통통한 형체가 잘못 번역된 듯한 묘한 말투를 구사했다.
…근데 잠깐, 저놈 지금 팔이 5개야? 게다가 구불거려? 대체 뭐지?
[간혹 이런 경우가 있지. 하지만 괜찮아. 기능은 멀쩡했어.]살랑살랑.
긴 머리채 같은 것을 휘날리는 누군가가 말했다.
어쨌든 드러난 형체만으로는, 이쪽은 그래도 제대로 된 인간이라는 느낌이 든다.
치직, 치직.
그리고 그들 모두의 희뿌연 형체 사이로, 간혹 괴상한 노이즈 같은 것이 지나갔다.
‘내 눈이 이상한 건가, 저놈들이 이상한 건가…….’
하지만 성진은 그들이 악령 헤이즈처럼 무섭거나 껄끄럽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자신의 두 주먹이 생생하게 느껴졌고, 저놈들의 실체 또한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이 주먹을 휘둘러, 필요할 때 놈들을 두드려 줄 수 있다는 말이지.
‘어라?’
그러다 문득 자신의 손에 시선을 준 성진이 당황했다.
‘내 손은 또 왜 이래?’
저 세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손 역시 시커먼 연기처럼 보이는 것을 확인한 성진은 생각했다.
아, 맛이 간 건 내 눈 쪽이었구나.
[어쨌거나 뉴비까지 하면, 우리도 겨우 필요한 인원을 채우는 건가? 잘하면 4인 이상 던전에도 들어갈 수 있을지도.] [그러한 판단을 가지기는 아직 이른. 우리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모릅니다.] [데리고 다니면서 판단할 수 있겠죠. 뉴비는 결코 우리의 상대가 되지는 못할 테니까요.]“…뭐?”
뭐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자신이 그 화제의 중심이라는 것 하나는 잘 알 수 있었다.
성진은 인상을 썼다.
대체 뭐라는 거냐. 나에 관해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알아듣게 설명부터 하라고.
“지금 무슨 소리들을 하는 거지? 당신들은 누구야? 또 지금 여기는 어딘데?”
성진이 갑자기 입을 열자, 순간 그들 중 하나가 움찔 놀라며 얼어붙었다. 셋 중 가장 인간에 가깝다고 생각했던 자였다.
그러더니 곧 반가운 듯 성진을 향해 외치는 것이 아닌가.
“지금 그 말! 그건 분명 제국어인데! 당신, 혹시 델크로스 사람인가?”
“……?”
성진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성큼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치직, 칙.
이따금 시야에 노이즈가 끼는 듯했지만, 그래도 희미한 형체만으로도 그의 훤칠한 키와 단단한 체구를 알아볼 수 있었다.
“와, 델크로스 본상 세계에서 게스트 ID로 접속한 사람은 처음 봐! 이렇게 반가울 수가!”
표정을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어쨌거나 그는 무척 기쁜 눈치였다.
[이봐들! 이 뉴비가 알고 보니 내 고향 사람이야!] [동향인?] [그렇다면 신중해야 합니다. 그는 당신의 현실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자일지도 모릅니다, 오웬.] [걱정 마. 자네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는 내가 이 친구가 적응할 수 있게 도와주겠어.]하지만 그의 자신만만한 선언에 대한 주위의 반응은 영 시원찮았다.
[글쎄요. 그건 다시 생각해보는 게 어떨까요?] [오웬, 당신 역시 아직은 능숙하지 않은.] [퀘스트는 또 어쩔 겁니까? 당신도 아직 전직 아이템을 구하지 못한 걸로 압니다만. 당신을 이끄는 상태창은 그다지 만만치 않은 성미인 것 같았는데요.] [괜찮아, 괜찮아. 성미가 좀 삐딱하긴 해도, 우리 상태창 씨도 앞뒤가 꽉 막힌 건 아냐. 게다가 전직 아이템이 지금 구할 수 있는 물건인지도 모르겠고. 전 서버에서 씨가 말랐다고 하던데.]도통 무슨 소리들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성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자, 그에게서 시원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이봐. 아직은 혼란스럽겠지만, 걱정하지 마. 내가 도와주지.”
치직. 칙.
노이즈 너머로 희미하게 휘어지는 입매가 보인다. 어쩐지 분위기만으로도 쾌활하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잘 부탁해, 뉴비. 일단 통성명을 할까? 내 이름은 오웬. 오웬 록우드다.”
오웬 록우드.
“…낯설지 않은 이름인데?”
우리 집에도 그 이름을 가진 놈이 하나 있지. 바로 집 나간 장남 녀석이다.
하도 집에 들어오지를 않아, 조만간에 찾아가 그놈의 면상은 봐야겠다 싶긴 했는데.
“뭐, 그럴지도 몰라. 내 이름은 대륙에서는 제법 흔하게 쓰는 이름이지. 너는?”
“이성진이다.”
무심코 대답한 성진은 아차 싶었다. 이게 델크로스식 이름이 아닌데.
역시나 그림자로 이루어진 고개가 기우뚱 한쪽으로 기운다.
“참 독특한 이름이네. 대륙에서 흔히 듣는 양식은 아니군. 너 혹시 바르샤의 소수 부족이냐?”
이놈, 지금 내가 남부 이교도가 아닌지 떠보는 건가.
성진은 잠시 고민한 후 대답했다. 어쨌든 제국어를 구사하는 놈이라면 표면적으로는 델크로스 정교회를 믿는 놈이겠지.
“주신의 은총 안에서 나고 자란 황도 사람이다. 그런 날더러 지금 제국의 적이냐고 묻는 거냐?”
“뭐? 하하. 아니, 특이해서 물은 거니 그렇게 날 세우지 말라고. 게다가 바르샤 부족이라고 해서 모두 제국의 적인 것은 아니야.”
다급하게 손사래를 치는 모습에 별다른 악의는 없어 보였다.
그나저나 제국인인 주제에 바르샤의 편을 들다니, 별 이상한 놈을 다 보겠네.
어쨌든 잠깐의 언쟁 끝에, 오웬이라는 남자가 이 세계에서 성진을 가이드해 주기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성진은 그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우선 성진 혼자서는 이 세계에 대해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으리라는 것.
또 성진에게 처음부터 호의적인 것과는 별개로, 시야가 뚜렷하지 않은 상황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을 셋이나 상대하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너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눈에도 네 모습이 이상하게 보여. 그건 아마도 네가 사용하는 단말이 온전하지 않거나, 다른 문제가 생겨서일 거야.”
오웬이라는 남자는 성진을 이끌고, 어딘가로 부지런히 향하며 설명해주었다.
“단말?”
“그래. 너도 이곳에 접속하기 위해 사용한 물건이 있지 않아?”
순간 성진의 뇌리에 부서진 이정표가 떠올랐다.
정말로 선대 오라클의 보석이 그를 이 장소로 데려온 건가?
“짐작했겠지만, 아까 그 장소에 있던 녀석들도 마찬가지지. 모두 단말을 이용해서 게스트 ID를 얻어 접속한 녀석들이거든. 정식 유저가 아니야.”
그리고 오웬은 성진에게 이 세계에 대해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이곳이 규상세계의 일종이며, 여러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 찾아와 일시적으로 접속하다 사라지는 일종의 휴식터와 같다는 것. 그들 플레이어들은 각자 자신의 정체성, 즉 ID로 대변되는 계정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 모두가 사념이 실체에 이르는 대단히 신비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이놈도 잘 모르는 것 같은데…….’
한참 그 횡설수설한 설명을 듣던 성진은 결론을 내렸다. 아까 그림자 둘이 오웬을 못 미더워한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성진은 지구의 상식으로 간단하게 생각했다.
이곳은 일종의 게임 속 세상 같은 것이고, 성진과 오웬은 정식 계정을 가진 유저가 아니라는 것.
“자, 일단 이거라도 좀 받아놔. 네가 오늘 쓸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옐로우 존에서는 뭐든 조심해야지. 초보자용 무기로 무난할 거야.”
열심히 떠들어대던 오웬이 품에서 뭔가를 꺼내 성진에게 건넸다.
물론 성진에게는 그것이 뭔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저 오웬의 손에서 짤막한 그림자 같은 것이 어른어른 거리기에, 거기에 뭔가 무기가 있구나 짐작할 뿐이다.
하지만 일단 공짜라고 하면 받는 것이 인지상정. 오웬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성진은 손을 내밀어 덥석 그것을 움켜쥐었다.
순간 오웬이 기겁을 했다.
“어어, 야! 잠깐! 잠……!”
하지만 이미 늦었다.
서걱.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뭔가가 날카롭게 손을 베어내는 감각이 느껴지더니 뜨뜻한 것이 손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마도 피가 흐르는 것이리라. 물론 성진의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탱그랑!
땅에 떨어진 막대기가 둔탁한 금속음을 울렸다.
“으아! 아무리 옐로우 존이라지만, 파티원끼리도 상해 처리되다니!”
오웬은 허둥지둥 지고 있는 것들을 벗으며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붕대, 붕대! HP, HP!
이윽고 흐릿한 천 조각 같은 것을 찾아낸 그는, 성진의 손에 그것을 둘둘 둘러주며 투덜거렸다.
“너 미쳤냐? 칼날을 그렇게 움켜쥐면 어쩌자는 거야? 아무리 초보자용이라지만, 그래도 강화가 끝나서 제법 날카롭다고!”
아, 몽둥이인 줄 알았는데, 역시 검이었나보다.
“어, 미안. 눈에 안 보여서.”
“…….”
그러자 오웬이 잠시 멈칫하더니 머리를 긁적거렸다.
“음,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했는데, 시야가 깨지는 건 역시나 생각보다 문제가 많구나. 많이 불편하지?”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
혹시 다음에 또 만나는 일이 생겨도, 나는 댁을 알아볼 자신이 없다고.
“그래? 알았어. 잠시만 있어 봐.”
에휴. 일전에 싹싹 긁어서 선물 보내느라 캐시가 거의 바닥인데.
오웬은 그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부지런히 뭔가를 조작했다.
“일단 선물 보냈어. 수락이라고 해.”
그리고 그의 말대로, 성진의 눈앞에 작은 창 하나가 떠올랐다.
〚Qr#^^E& 님께서 □□□ □□ 님에게 ‘모여라 친구들 – 스킨’ 선물을 보냈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수락 / 거절〛
텍스트 창이 뜨는 걸 보니. 확실히 여기가 규상세계가 맞기는 하구나.
“근데 네 이름이 오웬이 아닌데? 다 깨져 있어”
“아까 말했잖아? 우리는 다 게스트 ID라니까?”
“음.”
대강 납득한 성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락.”
그러자 순간, 성진의 시야가 화악 밝아졌다. 모호하던 풍경의 경계가 뚜렷한 선을 찾고, 빛바랜 사물들이 단번에 밝은 색조를 되찾는다.
다만 그것은 그리 정상적인 세계는 아니었다. 노란 보도블록과 티끌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솜사탕처럼 동그랗게 떠다니는 구름들.
마치 알록달록 단순하게 채색된 유아용 게임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
“오오, 아바타 귀여워졌네. 어때? 이제 좀 시야가 괜찮냐?”
성진은 멀뚱히 바뀐 오웬의 모습을 바라보다 물었다.
“아까보다 훨씬 괜찮긴 한데. 너 혹시 그걸 적용하면 시야가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어?”
“아니? 나도 스킨을 직접 써본 적은 없어. 그냥 제일 저렴한 걸 골랐는데, 왜? 뭔가 문제라도 있냐?”
“…….”
“워워, 오해는 하지 마. 캐시 아끼려고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저렴할수록 그래픽이 단순해지니까, 너처럼 불안정한 접속자가 쓰기에도 큰 무리가 없기 때문이라고!”
성진의 눈앞에서 키 큰 붉은 여우 한 마리가 걱정스럽게 묻는다. 풍성하게 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왜? 무슨 일인데? 왜 날 그렇게 봐?”
어, 징그러울 정도로 너무 귀여워서 차마 말해 줄 수가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