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278)
성황의 아이들-278화(278/469)
278. 옐로우 존 (2)
“우리는 일단 그린 존으로 가야 해. 플레이어들끼리 서로를 죽이지 못하는 곳이지. 자세한 건 거기서 설명해줄게.”
뾱뾱.
“뉴비는 일단 안전하게 적응을 하는 게 우선이지. 우리 같은 게스트 ID 사용자는 여간해서는 부활하기가 어렵거든. 잘못하면 현실에서 진짜 죽어버리는 경우도 있다고 하더라.”
뾱뾱뾱.
“하지만 게스트 ID 사용자는 다 마찬가지야.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으니까,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이곳에 매달리는… 어이, 듣고 있냐, 뉴비?”
“어. 듣고 있어.”
정말 적응 안 되네.
뾱뾱뾱.
아까부터 성진이 작은 발굽을 내디딜 때마다, 바닥에 꽃잎 모양의 발자국과 함께 소름끼치게 귀여운 효과음이 들렸다. 물론 그것은 앞서가는 오웬도 마찬가지.
씩씩한 걸음걸이로 귀여운 발소리를 내는 여우를 따라가며, 성진은 한숨을 쉬었다.
‘…반드시 그 캐시라는 걸 모아 스킨을 바꿀 테다!’
이곳에 언제까지 머무르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남들과 달리 목숨을 걸어야 한다니, 언뜻 무섭게 들릴 수도 있어. 하지만 걱정 마. 이곳 역시 사람과 사람이 부대끼는 세상이니까. 결국은 다 적응하기 마련이더라고.”
성진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앞서가는 여우가 속도를 내며 주억거린다.
조언이랍시고 묵직한 소리들을 주워 넘기고 있지만, 풍성한 꼬리를 기분 좋게 흔드는 꼬락서니를 보면 그 말들의 무게가 한없이 가볍게만 느껴졌다.
“오웬, 어쨌든 너는 지금 델크로스 차원에 살고 있는 거지?”
“물론이지.”
“그럼 여기는 단말을 이용해 들어온다 치고, 여기서 나가고 싶을 땐 어떻게 나가는데?”
“아아, 그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바로 현실로 돌아가는 거지.”
붉은 여우는 코를 킁킁거리며 성진을 돌아보았다.
“방법이 좀 까다롭긴 해. 근데 그런 건 네 상태창 씨가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어?”
“상태창 씨?”
이런저런 텍스트라면 뜨긴 하는데.
“그거야 규상세계의 특징이잖아. 그것 말고, 너에게 직접 퀘스트를 내주고 이것저것 귀찮은 일을 시키는 놈 말이야.”
성격 더럽고 보상을 깎지 못해 안달인 꼬장꼬장한 놈.
오웬은 한동안 욕인지 설명인지 구별할 수 없는 말들을 늘어놓았다.
거기서 받은 인상은, 그 ‘상태창’이 흔히 보는 텍스트 창과 달리 대단히 인격체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오랜 시간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 □□…….
그러고 보면 잠결에 어렴풋이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기는 한데.
잠시 기억을 곰곰이 되짚어보던 성진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런 거 없어.”
“그래? 거참 이상하네. 게스트 ID 유저에게는 늘 상태창이 붙어있기 마련인데. 역시 네 그래픽이 깨지는 것이랑 뭔가 관련이 있으려나?”
오웬은 뾰족한 귀를 잠시 쫑긋거리더니, 이내 몸을 돌리며 설명을 이어갔다.
“아무렴 어때. 지금 이곳에 있다는 건, 네게도 중요한 목표가 있다는 말이겠지. 현실에서 이루기는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어떻게 해서든 관철해야 할 목표가.”
“목표라…….”
이쯤에서 슬슬, 성진은 이 세계가 아멜리아 누님이 말한 꿈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앞서 짐작했던, 오라클의 ‘선택하지 않은 미래’와도 큰 관련이 없어 보이고.
그녀와 완전히 같은 행동을 했는데 어째서 이렇게 다른 결과가 나오는 걸까.
“본래 제대로 된 ID를 가진 유저들은, 원할 때 마음대로 이곳으로 드나드는 쉬운 방법이 있다고 들었어. 하지만 그건 우리 게스트 ID 유저와는 크게 상관없는 일이지.”
“그럼?”
“우리는 어느 정도 성과가 있다고 판단되면 자동으로 이 세계에서 나가게 돼. 혹은 현실에서, 반드시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라든지. 그 적절한 때를 결정하는 것은 순전히 상태창 씨의 마음이야.”
“…….”
“게스트 ID 유저는 상태창의 허락하에만 이곳에 드나들 수 있다는 거지.”
성진은 미간을 슬쩍 구겼다.
그런 확실치 않은 것에게 자신의 안위를 맡겨야 한다고?
“말했잖아? 어떻게든 이뤄야 할 목표가 있으니 뭐든지 매달려야지. 게다가 지금까지 겪어 본 바로, 성격이 좀 나쁘긴 해도 상태창 씨는 나름 유저가 최적의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존재야.”
선택.
그 말을 듣는 순간, 묘한 예감이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성진은 잠시 앞서가는 여우를 찬찬히 살펴보다 입을 열었다.
“오웬.”
“응?”
“네가 말한 그 단말이라는 거, 혹시 오라클의 이정표인가?”
“이정표?”
눈을 둥그렇게 뜨고 돌아보는 오웬을 향해, 성진이 다시 설명했다.
“그 작은 보석 같은 거 말이야.”
“아아, 그래. 너는 그걸 이정표라고 부르냐? 맞아. 그게 바로 단말이야. 아까 본 친구들의 설명으로는, 그것이야말로 상태창 씨의 근원이라고 하더라.”
역시.
“그럼 오웬, 너는 꼭 이뤄야 하는 중요한 목표가 있어서, 집을 내팽개치고 여기 매달려 있는 거야?”
“뭐어? 내팽개치다니, 누가! 내가 지금 얼마나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을 참고 있는지 네가……!”
발끈하며 소리치던 여우가, 주춤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 근데 내가 너한테 그런 얘기까지 했던가?”
“응. 아까 했잖아.”
성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 입을 다물었다.
아멜리아 누님이 말한 꿈의 정체를 파헤치지는 못했지만, 어쩐지 이곳에 좀 더 머물러 봐야 할 이유가 생긴 것 같았다.
뾱뾱 뾱뾱.
이후로 두 사람은 한동안 너른 들판을 묵묵히 가로질렀다.
‘이건 산양인가…….’
지나가다 보이는 냇물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니, 보슬보슬한 털과 동그랗게 말려 올라간 뿔, 그리고 또랑또랑한 눈동자가 보였다.
슈미트의 권속 악마인 그 메에메에가 떠오르는데.
‘정말 이름이 메에메에…는 아니겠지.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한번 물어볼까.’
그의 양손에 있는 것 역시 손가락이 아닌 작은 발굽이었다 그런 괴상한 손인데도, 오웬이 건넨 무기를 멀쩡히 움켜쥘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
“오, 거의 다 왔다. 저기 작은 초소가 보이지? 무장 경비병들이 오가는 곳. 저쪽이 바로 그린 존의 경계야.”
성진은 여우가 가리키는 방향에서,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작은 버섯 집과 두 발로 걷는 개미들을 발견하고는 한숨을 쉬었다.
‘설마 경비병이 정말 개미인 것은 아닐 테고.’
답답한 것은, 이 모든 꼴사나운 광경들이 ‘모여라, 친구들 – 스킨’을 적용받은 성진에게만 해당된다는 것이다.
거기다 더 열 받는 것은, 다른 사람의 눈에는 모든 것이 정상인 가운데, 오직 성진 혼자만 작은 산양처럼 귀여워 보일 거라는 점이었다!
‘마왕 놈이 여기 없어서 정말 다행이다.’
성진은 답지 않게 우울한 기분에 젖어 생각했다.
만일 놈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한동안 무척이나 신이 나서 성진을 놀려대겠지.
‘그린 존이란 곳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캐시 버는 방법에 대해 물어봐야겠어.’
하루빨리 이 유아적인 스킨에서 벗어나자. 그런 결심을 하며 버섯 초소를 향해 한 걸음을 더 옮겼을 때였다.
뾱.
갑자기 뭔가를 감지한 성진이, 걸음을 멈추고 앞서가는 여우를 불러 세웠다.
“어이, 잠깐만. 거기 서봐, 오웬.”
“응?”
“너 밖에서 막 원한 사고 돌아다니냐?”
“…뭐?”
여우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성진을 돌아본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아니면, 저기 왜 수상한 놈들이 널 노리고 숨어 있어?”
성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제길! 들켰다!”
“고급 암막 아이템을 썼는데, 대체 어떻게 눈치챈 거지?!”
초소로 이어지는 길옆의 작은 풀숲에서, 여러 마리의 깜찍한 동물들이 우르르 튀어나왔다.
모두가 토끼나 너구리 그리고 오소리같이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귀여운 동물 친구들이다.
단지 고운 털이 뒤덮인 앙증맞은 손에, 각각 살벌한 흉기를 하나씩 들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지.
“에잇! 이왕 이렇게 된 거 정면에서 치자! 마침 놈은 혼자다!”
“저 옆에 작은 양이 하나 있는데?”
“양이 아니라 염소겠지! 저런 시대착오적인 유아 스킨을 착용한 놈이 뭐 별거라고! 그냥 무시해!”
빠직.
순간 성진의 이마에서 핏줄이 솟았다.
물론 보송한 털에 덮여있어 남들 눈에 보이지는 않았겠지만.
“자, 좋은 말로 할 때 순순히 전직 아이템을 내놓으시지!”
뭐야, 원한이 아니라 단순 강도인가.
성진이 놈들의 수를 가늠하며 손아귀의 검을 만지작거릴 때였다.
“위험하니 저기 물러서 있어, 뉴비.”
붉은 여우가 허리춤의 한손 도끼를 빼어 들며, 심각한 표정으로 성진의 앞을 가로막았다.
“저래 봬도 저놈들은 제법 이름난 길드에서 나온 놈들이다. 이런 데서 도적질이나 할 레벨들이 아닐 텐데, 요즘 전직 아이템 때문에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야.”
성진은 그들을 에워싸고 있는 동물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휘황찬란한 무기와 방어구로 도배하다시피 하고도, 좀처럼 긴장감을 숨기지 못하는 자들을.
반면 그들 모두를 상대로 홀로 서 있는 오웬은, 작은 도끼 하나를 든 깜찍한 여우 주제에 제법 듬직해 보이기도 했다.
“너 혼자서는 힘에 부치지 않을까? 인원이 너무 많아. 아무래도 둘이서 상대하는 쪽이 나을 텐데.”
성진의 물음에, 오웬이 뾰족한 주둥이를 씰룩이며 제법 그럴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뉴비의 손을 빌릴 정도는 아니지. 그런 걱정 하지 말고 너를 최우선으로 생각해. 아까도 말했잖아? 저놈들과는 달리, 우리는 이곳에서 죽으면 생사를 장담 못 해.”
“…….”
“그러니까 너는 절대 이 앞으로 나오지 말고, 안 되겠다 싶으면 초소까지 있는 힘껏 도망쳐.”
성진은 인상을 쓰며 팔짱을 꼈다.
그래. 좋아. 위험을 무릅쓰고 뉴비를 챙기겠다는 그 마음가짐 하나는 칭찬해 줄 만하다.
근데 말이지. 네가 밖에서 이러고 다니는 거, 집에서도 알고 계시냐? 응?
“서로 괜히 손해 보지 말고, 이왕이면 대화로 해결하자. 나에게 뭘 원하나?”
오웬이 도끼를 겨누며 한 걸음 앞으로 내딛자, 그를 둘러싼 동물들 역시 똑같이 한 걸음을 뒤로 물러나며 주춤거렸다. 어지간히 오웬이 두려운 모양이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순순히 전직 아이템을 내놔라.”
“전직 아이템? 그걸 왜 나한테서 찾지? 서버 전체에서 씨가 마른 통에, 나도 구하는 걸 포기하고 있었는데?”
그러자 선두에 있던 너구리가 분해 죽겠다는 듯 발을 동동 굴렀다.
“웃기지 마! 네놈의 수상한 패거리가 옐로우 존에 갈 때마다, 서버의 희귀 아이템을 모조리 휩쓸어 가는 거, 누가 모를 줄 아냐?”
“아니,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내놓지 않겠다면 우리도 어쩔 수 없다! 길드의 사활이 걸린 문제니까!”
너구리는 3등신의 머리에 용케 끼고 있던 투구 바이저를 덜컥, 내리며 명령했다.
“자, 들었겠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 모두 놈을 쳐라!”
와아아아!
함성과 함께, 수십 마리의 동물들이 아장아장 오웬을 향해 달려든다.
뾱 뾱 뽁 뾱 뾱!
뭔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에는 다들 심각하게 귀여운 모습들이었다.
“…….”
빠각!
그사이 번개처럼 휘둘러진 오웬의 도끼가, 선두에 있던 너구리의 투구를 내리쳤다. 놈의 머리통이 투구와 함께 쪼개지며, 피 대신 오색의 별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반짝반짝.
그와 동시에 성진의 눈앞에 작은 텍스트 창이 톡 튀어 오른다.
〚우리 어린이 친구들! 게임을 하기 전에는 꼭 부모님께 허락을 받는 것을 잊지 마세요. 혹시 이 게임은 친구가 즐기기에 조금 폭력성이 높지는 않나요?〛
“이야아앗!”
“받아라! 매직 미사일!”
“파이어 볼!”
찬란한 빛과 함께 온갖 무기와 마법 이펙트가 오웬을 향해 빗발친다.
하지만 붉은 여우 오웬은 대단히 노련했다.
그 혼란한 와중에서도 눈먼 공격 하나 얻어맞지 않으면서, 도끼로 하나하나 동물들의 머리를 찍어 내린다.
퍼걱! 퍼걱!
번쩍! 번쩍!
동시에 환한 빛줄기와 함께 여기저기서 오색의 별가루들이 튀어 올랐다.
“와…….”
성진은 질린 얼굴을 했다.
이 혼란스러운 광경은 트라우마로 남을 것 같다. 진심이었다.
내가 빚을 내서라도 당장 이놈의 스킨을 바꾸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