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28)
성황의 아이들-28화(28/469)
028. 검은 선지자들 (3)
마사인 경이 진주궁에 돌아온 것은 이미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앉은 늦은 시각이었다.
마침 성진은 막 저녁식사를 끝내고 아멜리아에게서 빌린 그림책 한 권을 펼쳐들고 있던 참이었다.
진주궁의 도서관에는 엄청나게 많은 전문서적들이 있었지만, 막상 글자를 배우려고 찾아보니 어린이들을 위한 쉬운 서책은 하나도 발견할 수 없었다.
리자베스 황비가 도서관을 처음 만들 때 모레스 놈의 지식수준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글자 공부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던 성진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것은 바로 천사 같은 아멜리아 황녀였다.
그녀는 어린 시절 읽던 여러 그림책들을 모두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었는데, 글자 읽는 법도 기억이 가물거린다는 성진에게 흔쾌히 자신의 소장품들을 빌려주었다.
간혹 점심 식사를 함께 하는 날이면, 그림책을 직접 펼쳐 들고 천천히 성진에게 읽어주곤 했다. 더듬거리며 읽어 내려가는 성진의 목소리를 열심히 들어주기도 하고.
-가족과 함께 책을 읽는 것이 내 오랜 꿈이었어.
괜히 시간 낭비하게 만드는 것 같아 미안해하는 성진에게 그녀는 오히려 행복한 듯 웃어 보였다.
덕분에 이제 성진은 간단한 동화책 정도는 느린 속도로나마 혼자 읽는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뭐, 성황에게 철학이나 종교 서적을 읽고 싶다 운운한 것을 생각하면 갈 길은 아직 멀고 멀었지만.
그렇게 오늘도 후식을 먹으면서 깜찍한 동물 그림이 그려진 어린이 서적을 설렁설렁 넘기고 있는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마사인이 대단히 지친 얼굴로 방으로 들어섰다.
“생각보다 많이 늦어졌습니다. 송구합니다. 저하.”
성진은 잠자코 책을 덮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오늘 성진은 그 나름대로 수련에 많은 진척이 있었다. 그래서 마사인의 조언이 더욱 절실했지만, 초췌한 얼굴로 걸어 들어오는 모습을 보니 탓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래, 뭔가 알아볼 것이 있다더니, 일은 잘 끝났어?”
분위기를 보니 그다지 성과도 없었던 것 같긴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마사인이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젓는다.
황금진리학회, 아델하이트의 역병회, 푸른 공화혁명전선.
모레스가 후원했다고 하는 수상쩍은 단체들.
“일단 저하의 개인 자금 사용 기록이 있는 진주궁 장부를 모두 조사했습니다만, 이들 단체에 대한 기록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전부터 진주궁의 행정 사무관을 닦달하여 5년 이내 후원 및 기부 내역을 낱낱이 조사했다.
그러나 정기적인 후원은 고아원 하나와 베르트랑 거리의 소극장 하나가 전부였고, 이따금 비정기적인 빈민 구호단체 후원 내역만 몇 건 있었다고 한다.
거기서 그는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했다.
첫째, 리자베스 황비가 모레스를 대신해 그의 이름으로 이들 단체를 후원했을 가능성.
둘째, 모레스를 음해하려는 황궁 세력이 그의 이름으로 후원금을 보냈을 가능성.
그래서 그는 그때부터 본궁으로 달려가 수년 치의 내명부 자금 기록을 모조리 조사했다. 불시에 재무 감사가 시작되는 줄 알고 담당 사무관과 행정 사제들이 기겁을 했다고.
그리고 결과는 깨끗했다. 대부분이 고아원과 빈민 구호 단체에 대한 기부. 이따금 예술 단체에 대한 후원.
적어도 황궁 내 자금이 저 수상한 단체들로 직접 흘러들어간 적은 없다는 것이다.
“와…….”
성진은 질린 얼굴을 했다. 듣기만 해도 오늘 하루 마사인이 얼마나 삽질을 했을지 여실히 느껴졌기 때문.
“물론 후원 기록에 있는 단체들 중 기록상에만 있는 유령 단체가 있다거나, 여기서 몇 차례 기록이 세탁되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습니다만…….”
마사인이 말끝을 흐린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내일은 각각의 후원 목록을 들고 그 단체가 실존하는지 자금이 제대로 들어가긴 했는지 일일이 조사라도 다닐 기세다.
아냐, 됐어! 그만해, 이 고지식한 양반아!
혼자서 그걸 어떻게 다 조사할 거야?
성진은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마사인 경, 그래서는 끝이 없어. 경은 기부금과 후원 내역을 조사했을 뿐이지만, 만약 내가 허위로 미술품 같은 고가의 물건 구매 내역을 만들고 자금을 빼돌렸을 가능성은 생각하지 않나? 몇 년 이내의 황궁 구매 물품을 모두 조사할 거야?”
“…….”
“물품이 없으면 또 어쩔 거야? 파손되거나 어딘가 선물로 보냈다고 하면 증거가 없잖아? 아니, 현물을 그냥 넘겼을지도 모르지. 아니면 황궁 창고에 있는 미술품이 위작이고 진품은 경매장에 있다던가.”
마사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런 가능성은 조금도 생각지 못한 것 같다.
“아니면 이건 어때? 내가 누군가의 청탁을 들어주고 대가성으로 후원을 요구했다든가 하면?”
“…대가를 요구하신 겁니까!”
마사인 경은 이제 졸도할 거 같았다.
아니, 이 양반아. 그러니까 내가 그랬다는 게 아니라 가능성의 이야기잖아.
뭐, 진짜 모레스가 그랬을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성진은 일단 마사인을 달래기로 했다.
소파를 툭툭 두드리자 그가 비틀거리며 다가와 자리에 앉는다. 에디스가 후식으로 두고 간 쿠키까지 물려주자 그제야 조금 정신이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그러게 밥은 좀 먹고 다닐 것이지.
“자, 마사인 경. 내가 말한 것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문제야. 실제로 일어났을 확률은 극히 낮을 거야. 황궁의 자금을 감쪽같이 빼돌리는 게 어디 보통 일이겠어?”
넋이 반쯤 나갔던 마사인의 눈에서 서서히 빛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앞서 말한 가능성들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어. 바로 황궁 밖 조력자의 존재다.”
“그 말씀은…….”
“이제는 자금 이동 내역을 쫓을 게 아니라, 예전의 내 사회적 교류 내역을 추적해야 한다는 말이지.”
성진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마사인에게 커다란 쟁반을 내밀었다. 3황자를 사교 모임에 초청하는 초대장이 수북이 쌓인 쟁반이었다.
“자, 이왕 돌아왔으니 나와 함께 초대장이나 읽을까? 읽으면서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 설명도 좀 해주고.”
그리고 나는 겸사겸사 철자 공부도 좀 하고.
마사인 경의 안색이 시커멓게 죽어가기 시작했지만 성진은 거리낄 것이 없었다.
당장 내일부터 또다시 시작될 삽질을 미연에 막아 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밤늦게까지 초대장 분류에 매달렸다.
일단 일과성의 행사가 아닌, 정기적인 모임으로 보이는 것들을 추린다.
생일, 약혼식 등의 개인 행사 관련 초대장은 모두 날려 버렸다.
수도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장소의 모임도 배제했다. 황궁 처돌이었던 모레스는 장기간 궁을 떠난 적이 별로 없다고 하니까.
귀부인들 위주의 모임이나 신학 관련 학술대회 등, 평소 모레스와는 아예 접점이 없다고 확신할 수 있는 일부 초청장도 제거했다.
그렇게 남은 것들을 추리니 단 3개의 초청장이 남았다.
첫 번째 발신자는 오르덴 지그스문트. 예스러운 테두리 장식이 있는 깔끔하고 하얀 서신이다.
“지그스문트 대공자입니다. 현 북방 변경백의 아들이자, 과거 명장으로 이름을 떨쳤던 빈센트 지그스문트 경의 손자죠. 대륙 제일의 기사, 발타자르 님의 수제자로도 유명합니다.”
지그스문트가는 중앙 귀족은 아니지만, 그 세가 대단하여 누구도 무시하지 못하는 대귀족이다.
대공자 또한 뛰어난 무위로 온 대륙에 그 명성이 자자하다고. 몇몇 나라들에서 개최된 무술대회에서 쉽게 우승을 휩쓰는 등, 델크로스의 공자들 사이에서는 우상처럼 여겨지는 자라고 한다.
매년 탄신연 전에 수도로 올라와 그를 추종하는 젊은 공자들과 모임을 가진다나.
“저하와 친분이 있다기보다는, 수도의 신분 높은 젊은이들 모두에게 보내는 초청장이라고 생각됩니다.”
마사인이 덧붙였다.
탄신연 직전의 모임이라 아직 기한도 충분하고, 이건 일단 제쳐두자.
두 번째는 리카르도 스카르차피노. 오르토나 출신의 귀족이자 대부호의 둘째 아들이다.
잠깐, 스카르차피노?
모레스와 혼담이 오가고 있다는 그 스카르차피노?
“아마 델크로스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일 겁니다. 리카르도 공자는 무척이나 사교적인 인물로, 유력 가문의 자제들과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지는 걸로 유명합니다.”
서신 또한 금빛으로 휘양 찬란한 것이 돈 냄새가 풀풀 난다.
대륙의 정세나 경제의 변화, 예술계의 흐름 등을 논한다니, 델크로스에서도 가장 주류 모임에 해당되는 거겠지.
이런 사람이 과연 개망나니 모레스와 뭔가 연결고리가 있을지는 의심스럽기는 한데.
아, 그러고 보니.
-그래도 두 달에 한번 정도는 친구분을 만나러 타운 하우스에 가시곤 했습니다.
에디스가 지나가듯 했던 말이 생각났다. 모레스가 유일하게 교류하던 친구가 그 스카르차피노가의 소공자라고 했던가. 혹시 그게 이 사람일까?
성진은 초대장을 한 번 더 눈에 담았다.
열흘 뒤 모임. 우선 여긴 가보는 게 좋겠지.
세 번째 발신자의 이름은 케네스 디고리. 행정부 수장 디고리 추기경의 둘째 아들의 넷째 아들이라나.
뭐지? 이 중요하다고 하기에는 좀 미묘한 포지션은?
마사인 역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교계에서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닙니다만, 이런 정기적인 모임을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군요. 신학 아카데미에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이후에 공식적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적은 별로 없는 걸로 압니다.”
즉 그도 잘 모르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성진은 매끄러운 검은 봉투를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황자를 초청하기에는 어딘지 급이 떨어지는 모임인 것 같은데, 개망나니 황자의 평판을 생각해 보면 또 이 정도는 되어야 모레스를 그나마 사람 취급해 줄 것도 같고.
무엇보다도 서신의 마지막 문구가 신경이 쓰였다.
-황자님의 오랜 벗, 조나단 맥캘핀 역시 저하를 다시 뵐 수 있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모레스 놈에게 친구라고 할 만한 자가 스카르차피노 소공자 외에 달리 또 있었나?
“조나단이라는 사람은 경도 아는 자인가?”
성진의 물음에 마사인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저하의 개인적인 인맥을 자세히 알지는 못합니다. 적어도 사교계에 이름이 알려진 자는 아닙니다만.”
“흠, 그렇단 말이지…….”
마침 모임은 사흘 뒤다. 가장 빠르기도 하고, 그냥 바람 쐰다고 생각하고 가볼까?
그때까지만 해도 성진은 가벼운 마음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후로 시간은 순조롭게 흘러갔다.
어울리지도 않는 탐정 노릇을 때려치운 마사인은 다음날 연무장으로 돌아왔다. 그는 자신이 없는 동안 단번에 오러 4층을 쌓아 둔 제자를 잠시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바라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아니, 이렇게 잘할 수 있는 분이 대체 왜 지금까지…….”
마사인 경, 전에도 한 번 그런 말 하지 않았던가?
뭐, 그의 심정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헌터 이성진이 좀 대단해야 말이지.
아무튼 드디어 오랜 시간 고대하던 오러 연공 입문 과정이 시작되었다.
성진은 수업을 시작하자마자 곧 오러를 자유자재로 흘리며 칼을 휘두를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그러나 금방 그 생각을 수정해야 했는데, 마사인 경은 그야말로 한 동작 한 동작을 천천히 짚어가며 꼼꼼하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한 가지 형을 완전히 익혔다고 생각해도 바로 다음 형으로 넘어가지 않고, 그저 그것이 몸에 완전히 배어들 때까지 반복을 시킨다.
잘 가르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나쁜 버릇이 생길 틈이 없을 정도로 동작에 완벽을 추구하는 건 잘 알겠다.
과연 입문에 들어가면 지겨울 거라고 하더니, 반복 훈련에 이력이 난 성진마저도 답답할 정도로 더딘 진도였다. 이틀간 명상도 줄여가며 수련했는데 아직도 1식을 벗어나지 못했다!
물론 함께 연무장을 쓰고 있던 상주기사들의 의견은 달랐지만.
“황자님, 진도가 정말 빠르십니다.”
막 분통을 터뜨리려고 하는 성진을 향해 쿠르트 경이 달래듯 말했다.
“이 속도면 일주일 안에 1식과 2식이 모두 끝나겠는데요? 그러면 일단 기초는 졸업하시는 겁니다.”
그런가?
쿠르트 경은 몇 안 되는 상급기사 중 하나기도 하고, 평소 빈말을 하지 않는 진중한 성격이었다. 그런 그의 말이라면 제법 신뢰할 수 있지.
“저는요, 저하. 스콰이어로 들어와서 무려! 4개월간 1식만 팠습니다! 그런데 그게 기사단 평균을 생각하면 느린 편도 아니에요!”
마사인 경이 얼마나 갈궜는지 그때 저 진짜 탈영할 뻔했습니다.
동그란 얼굴에 주근깨가 매력 포인트인 클로디아 경이 입을 삐쭉거렸다.
그간 성진은 마리아나 하벤 외에 다른 기사들과도 슬슬 안면을 트게 되었다. 술값 좀 벌겠다고 여기저기서 자원해 파견 온 기사들이 반이 넘는지라, 대체로 격이 없고 유쾌한 성정들이었다.
간혹 처음과 마찬가지로 경멸의 눈으로 노려보는 자도 없지는 않았지만 예전 모레스의 평판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양호한 축일지도. 성진은 조금의 무례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로 했다.
그렇게 연무장에서 수련을 하고 이따금 아동 서적을 읽기도 하는 동안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모임의 날이 다가왔다.
호위로는 단출하게 마사인 경과 쿠르트 경을 거느리고, 성진은 수도 외곽에 있는 한산한 주택가를 향해 떠났다. 그때만 해도 가벼운 나들이 정도의 감상이었다.
시커먼 로브를 뒤집어쓴 대여섯 명의 청년들이 일제히 그를 반기기 전까지는 말이다.
“검은 선지자들의 모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성진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수상쩍기 이를 데 없는 이적 단체가 여기에 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