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282)
성황의 아이들-282화(282/469)
282. 임펄스 소프트 (2)
오르토나의 수도, 브린디시.
한때 수준 높은 문학의 중심지였던 아름다운 도시는, 지금은 난민들의 지저분한 천막과 배회하는 걸인들로 뒤덮여 더 이상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그 도시의 중앙에는 반쯤 대파된 마젠다 궁이 있다. 이 역시 예전에는 델크로스 황궁 못지않은 규모와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곳이었으나, 반세기가량을 이어져 내려오던 사르데냐 왕조가 몰락한 후, 이제는 주인 없는 텅 빈 폐허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 황량한 궁의 대회의실.
거대한 탁자 하나를 둘러싸고, 지금 네 사람의 귀족이 한자리에 모여 있다.
그들은 각각 카스티야, 밀로, 벤소, 카보우르 령의 영주들로, 모두가 오르토나의 실세라 할 만한 힘을 가진 자들이었다.
이들은 내전 당시에 종종 이곳에서 공화파에 대항한 전략 회의를 하곤 했으며, 망국 이후에도 때때로 이곳에서 비정기적인 모임을 가지곤 했다.
“먼저 아들의 성혼을 축하하오, 카스티야 백작.”
참으로 오랜만에 마주한 이들이 하는 이야기는 별것 없었다.
카스티야 백작이 아나톨리아 대부호 출신 며느리를 들였다. 그녀는 박색이지만, 몸에 붙은 살집 이상으로 엄청난 지참금을 가지고 왔다더라. 뭐, 그런 이야기들.
“새아기를 본 적도 없으면서 다들 말들이 심하구려. 적어도 그대의 딸들보다는 미색이 뛰어나오, 카보우르 남작.”
당사자인 카스티야 백작이 점잖게 대꾸하자, 옆에서 밀로 백작이 슬그머니 그를 거들었다.
“벤소 남작.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이 지금 누구의 미색을 따질 처지는 아니지 않소?”
그의 첫째 아들이 ‘곰보 알베르토’라는 이명으로 더욱 유명한 것을 꼬집는 말이었다.
그러자 벤소 남작은 불쾌한 표정으로 응수했다.
“아무리 그래도 알베르토 쪽이 댁의 아들들보다는 처지가 낫지. 당신의 아들들에게는 대륙의 그 어떤 가문에서도 혼담을 넣지 않을 거요, 밀로 백작. 델크로스에서 지금 자코모 밀로의 수배령이 내린 것을 알지 않소? 대체 범죄자 아들을 어디에 숨겼소?”
이번에는 밀로 백작이 그에게 화를 낼 차례였다.
“뭣이? 내가 그놈의 행방을 알게 뭐요? 놈은 멋대로 가문의 이름을 빌려 상단을 만들고, 또 그것을 더럽히기까지 한 놈이오! 그놈은 더 이상 내 자식이 아니외다!”
과열되는 분위기를 보다 못한 카보우르 남작이 이들을 살살 달래듯 말했다.
“자자. 괜한 소리들 마시고 다들 솔직해집시다. 어차피 북부 사람과는 사돈을 맺지 않을 테니, 자식들의 혼사 문제로 골치가 아픈 건 다들 마찬가지 아니오?”
그의 말대로, 북부의 영주들은 서로 혼사를 맺는 집안이 없도록 수년 전부터 날 선 경계를 하는 중이었다.
혼란기의 오르토나를 버텨내고 비등비등한 전력이 남은 영주들이다. 이제는 각자가 결혼으로 세력을 연합하는 것을 경계해야 할 때인 것이다.
“그러니 다들 쓸데없는 소리는 말고, 이제는 미래를 위한 이야기를 합시다. 모두가 알지 않소? 언제까지고 북부를 혼란 속에 둘 수는 없소.”
카보우르의 말에, 카스티야 백작이 점잖은 목소리로 입을 보탰다.
“그렇지. 북부를 재건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왕이 필요하오. 지금의 균형을 깨지 않으면서 모든 힘을 하나로 모을 구심점 말이오.”
“하지만 대체 누구를 추대한단 말이오?”
그래. 그것이 문제였다.
오르토나 내전 당시, 브르타뉴를 끌어들여서까지 왕정을 되찾으려 기를 썼던 아메데오 3세는 이미 사망한 지 오래.
그리고 그의 첫째 아들인 비토리오 왕세자는, 나라 따위는 안중에 없이 브르타뉴에 눌러앉아 주색잡기에 여념이 없었다.
어찌나 방탕하기로 소문이 났는지, 아예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하는 폐인이라는 소문이 대륙에 자자했다.
또 다른 왕자인 베니시오는 어떠한가. 생사가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그 베니시오 왕자야말로 왕정의 몰락을 가져온 주범이자 공화파의 수장이 아니었던가.
“더 이상 왕실의 혈통에 뭔가를 기대할 수는 없소. 비록 운 좋게 방계의 후계자를 찾아 정통성을 확보한다 하더라도, 그가 과연 제대로 된 군주가 되리라 보시오? 이제까지 북부의 질서를 유지해온 실질적인 지배자는 바로 우리들이오.”
카보우르 남작의 말에, 밀로 백작이 빈정거렸다.
“자, 이제 본심이 나왔군. 북부의 왕이 되고 싶소?”
“아니, 물론 내가 그러겠다는 말은 아니고…….”
그리고 한동안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모두가 왕좌를 원하지만 어느 누구도 선뜻 나서는 이가 없다. 누구든 한걸음 왕좌를 향해 앞서가는 순간, 사방에서 자신을 사납게 물어뜯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다 카스티야 백작이 오랜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정 답이 없다면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방법이 있지. 바로 우리들이 정당하게 우리의 왕을 선출하는 것이오.”
“선제후가 되자는 말이오?”
“그렇소. 그것이 그나마 지금의 균형을 유지하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 아니겠소?”
콰앙!
그때 대회의실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분노에 찬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왔다.
“감히 ‘선출’이라는 말은 입에 담지도 마시오! 공화정의 그 더러운 잔재를 떠올리기만 해도 속에서 욕지기가 솟구치니까.”
저벅저벅.
그렇게 소리친 거한이, 아무렇게나 자른 산발을 휘날리며 당당하게 대회의장을 가로지른다. 왕당파의 중심 일원인 베르세우스 다시아노였다.
‘선제후 제도는 세 고룡의 시대부터 북부에서 이어져오던 유서 깊은 전통이오. 그 망할 공화파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단 말이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말을 선뜻 입에 담을 수 없었다. 온몸이 피에 젖어있다시피 한 베르세우스의 기세가 자못 위압적이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한 손에는 피 묻은 도끼가, 또 다른 손에는 잘린 사람의 머리채가 여럿 들려 있었다.
뚜둑, 뚝.
잘린 목에서 떨어지는 선혈이 그의 걸음을 따라 점점이 긴 궤적을 그렸다.
“…그 머리는 다 뭐요?”
성큼성큼 다가오는 베르세우스의 기세에 눌려, 영주들을 호위하는 기사들이 허리춤에 손을 얹으며 주춤주춤 주인 가까이로 다가갔다.
그러나 주변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고, 베르세우스는 테이블 위에 피에 젖은 머리들을 내동댕이치며 코웃음을 쳤다.
“하! 겁도 없이 내게 덤빈 도적들이지. 이놈들에게는 불행하게도, 내가 오늘 기분이 좋지 않아서 말이오.”
영주들은 눈을 끔벅거렸다.
“어느 무도한 자가 감히 다시아노 후작의 문장을 보고도 습격하는 간 큰 짓을 벌였단 말이오?”
“글쎄. 이놈들의 눈이 옹이구멍이었나 보지.”
콧방귀를 끼며 그렇게 주억거린 베르세우스가, 갑자기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었다.
“아니면 마차에 처음부터 문장이 아예 없었을지도 모르고.”
“……!”
일행은 충격에 휩싸였다.
그들이 잘못 듣지 않았다면, 베르세우스는 일부러 도적의 습격을 유도했다는 말이다.
“…대체 왜?”
“아까 말했잖소? 내가 오늘 기분이 좋지 않다고.”
베르세우스는 그를 단속하러 온 어르신으로부터, 빼앗긴 종족 열쇠가 결국 성황의 손에 넘어갔다는 사실을 들은 차였다.
순간 치미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기에, 이미 자신의 저택에서도 한차례 난동을 부린 후였던 것이다.
“그리고 최근에 몸이 좀 찌뿌둥하기도 하고. 그저 건강을 위해 식후 운동이 조금 필요하다 싶었소.”
“…….”
그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모두가 질린 얼굴을 했다.
“자자, 이러고 있을 틈이 없소.”
결국 보다 못한 카스티야 백작이 주의를 환기시켰다.
“내가 오늘 모임을 제안한 것은 다름이 아니오. 모두들 상인 연합의 슈미트 지부장이 보낸 서신을 받았으리라 생각하오.”
그 말에 모두가 다른 의미로 침묵에 잠겼다. 그만큼 이번의 제안은 그들로서는 대단히 의외의 일이었다.
혼란을 틈타 바가지 씌워먹기를 일삼고 투자는 꺼리던 상인 연합에서, 갑자기 북부의 경제 안정을 위한 대규모의 계획을 만들고 영주들의 협력을 구한다?
“슈미트 지부장은 일벌레라는 소문을 익히 들었지. 하지만 이렇게 나서서 일을 벌이는 성정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어쨌든 이자의 서신대로라면 단기간에 제법 큰 이득을 볼 수 있소. 문제는 북동부가 그 이득을 대부분 독점한다는 것이지만.”
그러자 밀로 백작이 대놓고 불만을 표했다.
“그렇다면 나는 협력할 수 없소. 북서부는 어쩌라고?”
“아니면 규모를 조금 더 키워보는 것은 어떻소? 오르토나 전역이 골고루 혜택을 볼 수 있도록.”
“음…….”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변수를 최소화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영주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넘기기에는, 슈미트 지부장의 제안은 너무나도 매력적인 것이었다. 정체되어 있는 북부의 힘을 신장시키고, 혹시라도 남들보다 한발 앞서서 치고 올라갈 기회를 잡게 될지도 모르는 제안.
결국 영주들은 이를 받아들이는 대신, 모두에게 공평한 혜택이 돌아가도록 계획의 규모를 더욱 늘리는 궁리를 시작했다.
그렇게 성진이 ‘참연어 전문점’을 위해 만들기 시작한 계획은, 그도 모르는 사이에 눈덩이처럼 불어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흥! 겨우 식탁에 오르는 밀가루의 가격을 조금 내리기 위해 그런 귀찮은 짓을 한다고?”
이를 가만히 듣고 있던 베르세우스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요, 다시아노 후작. 남부의 부호들이 제 병사들을 배불리 먹이는 동안, 우리 북부의 병사들은 하나같이 비루먹은 노새처럼 되어가고 있지 않소? 시간이 갈수록 그 차이는 더욱 커질 거요.”
“그럼 얼마든지 덤비라고 하시지. 내가 모두 이 도끼로 아작을 내어 줄 테니.”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해도, 베르세우스 역시 혼란스러운 북부에서 영지를 성공적으로 지켜온 유능한 영주였다.
한동안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던 그는, 잠시 후에는 제법 매서운 눈으로 손익을 따져가며 서류들을 훑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무엇을 발견했는지, 베르세우스가 갑자기 눈을 부릅뜨며 소리를 질렀다.
“이 괘씸한 도둑놈이!”
“……?”
모두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들었지만, 이미 베르세우스의 눈에는 불똥이 튀고 있었다.
바로 서류 중간에 작게 명시되어 있는 상단주의 이름 때문이었다.
-상단: 베르트란 & 리
-상단주: 로건 클라인, 모레스 클라인
크아아아!
베르세우스는 테이블을 박차고 일어나더니, 의자를 걷어차며 분기탱천하여 소리쳤다.
“예비된 자여! 내 종족 열쇠를 빼앗아간 것도 모자라, 이제는 북부 전체를 가로채려는 것이냐! 이런 괘씸한 놈이!!”
“……?”
“순순히 협조할까보냐! 이 다시아노가 두 눈을 멀쩡히 뜨고 있는 한, 절대로 네 계획은 실행되지 못할 것이다아아아!”
분노로 가득 찬 그의 외침이 폐허가 된 왕궁의 공기를 거세게 뒤흔들었다.
그 와중에 갑자기 거대한 분노를 맞닥뜨린 영주들만이, 영문을 몰라 조용히 서로 눈짓을 할 뿐이었다.
* * *
‘이게 라이칸슬로프 종족의 열쇠란 말이지…….’
진주궁에 돌아온 성진은, 은빛으로 빛나는 손바닥만 한 디스크를 바라보았다.
종족 대표로 지정된 자는 누구나 쓸 수 있다고 하더니 과연, 굳이 영안이 없어도 성진의 눈에 또렷한 메뉴들이 떠올랐다.
〚투표 : 잠김〛
〚종족 : 잠김〛
〚경계 설정 : 잠김〛
물론 하나같이 잠겨있어서 그렇지.
단지 아래쪽에 있는 작은 메뉴 하나만이, 활성화 되어 있음을 알리듯 희미하게 빛나고 있을 뿐이었다.
〚포탈〛
〚-공방〛
〚-잠김〛
〚-잠김〛
〚-잠김〛
⁝
그런데 여느 때처럼 ‘이성진, 이건 규상세계의 물건이야!’라고 외칠 줄 알았던 마왕 놈이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게 뭔지 알겠어, 마왕아? 이오니아의 종족 대표들이 가지고 있는 종족 열쇠란 거야.’
성진의 설명에 마왕이 의아한 듯 말했다.
[그래? 흠. 겉으로는 꼭 규상세계 물건 같이 기능하는데, 아무리 봐도 잘 알 수가 없네.]그러고도 한참을 디스크를 살피며 고심하던 마왕이 말을 이었다.
[역시. 잘 살펴보면, 규상세계의 물건들이 그렇듯 거대한 법칙의 흐름이 느껴지기는 해. 하지만 이건 아무리 봐도 본상세계의 물건처럼 보인다고.]‘그래?’
[응. 내가 어디서 이런 걸 또 봤는데…. 아, 맞아! 네가 들고 있는 그 이상한 보석이랑 마찬가지야! 그것도 아무리 봐도 헷갈리는 물건이니까.]이정표?
그거라면 덱스터에게 들은 적이 있다. 규상세계와 본상세계의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했던가.
확실히 [열쇠]는 종족의 정수를 관장하는 물건이지. 그렇다면 살아있는 종족 정수인 오라클이 만든 이정표와 비슷한 느낌이 날 법도 했다.
‘어쨌거나 이건 나중에 찬찬히 알아보도록 하고.’
성진은 명상도 건너뛰고 주섬주섬 잘 준비를 했다. 이정표가 배기지 않게, 끌어안고 모로 눕는 것이다.
[너, 벌써 자게?]‘응.’
혹여 늦게 접속했다가 오웬을 놓치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그걸 안고 자면 ‘판게아 클로니클’이라는 규상세계로 가게 된다고?]성진에게 어젯밤 일에 대해 설명을 들은 마왕이 물었다.
‘어, 그렇데.’
[어쩐지, 어제는 잠꼬대를 조금도 하지 않더라니.]그랬나? 어쩐지 아침부터 에디스가 묘한 눈으로 힐끔거리더라니.
[궁금하다. 영혼이 여기 있는 게 분명히 느껴졌는데 어떻게 다른 세계로 가는 거지?]‘그러게 말이야.’
[나도 따라가고 싶다…….]마왕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성진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게스트 ID의 접속을 확인합니다.]그리고 잠시 기다리자, 예의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유 ID?
의문을 느낄 새도 없이-
화악.
갑자기 시야가 밝아지며, 어제 접속이 종료되었던 작은 식당의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왔구나, 뉴비!”
그리고 누군가가 성진을 불렀다. 그에게는 이미 익숙해진, 쾌활한 목소리였다.
“마침 제때 왔어! 이제 막 던전에 들어갈 참이었거든! 역시 뉴비는 우리와 함께 다닐 운명이라니까!”
붉은 여우 오웬이 반가운 얼굴로 활짝 웃으며 그를 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