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288)
성황의 아이들-288화(288/469)
288. 임펄스 소프트 (8)
“이건 아마 너에게도 흥미로운 이야기일 거야, 덱스터. 바로 이 이정표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 중 하나에 대한 이야기거든.”
“…….”
“글쎄, 놀라지 마! 이 이정표를 사용하면, 판게아 클로니클이라는 규상세계로 접속이 가능해. 마치 온라인 게임과도 같은 독특한 세상이지.”
“…….”
“게스트 ID 유저가 아닌 일반 유저들은, 바로 임펄스 소프트라는 곳의 서비스를 받아 접속한다고 들었어. 느낌으로는 꼭 게임 회사 같은데, 어떻게 규상세계를 게임처럼 제공하는지 모르겠다니까.”
“…….”
“그런데 덱스터, 마침 네가 예전에 임펄스 소프트와 인연이 있다는 말을 했던 게 얼핏 생각나서 말이야.”
“…….”
“…….”
한마디 한마디 내뱉을 때마다 이정표를 쥐고 슬금슬금 물러나는 덱스터에게, 보다 못한 성진이 소리쳤다.
“아, 경계하지 말라고! 그거 안 뺏어간다고!”
그러자 쭈뼛거리며 성진의 눈치를 보던 덱스터가 말했다.
“하지만 유품이라고, 언젠가는 돌려달라고 하지 않았나?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었잖아. 소스 편집기가 망가진 그때의 분위기를 대충 이정표로 무마한 다음, 잊을 만하면 언제고 다시 내놓으라고 할 거라 생각했는데.”
성진은 뜨끔했다.
사실을 말하면, 그에게서 남은 반쪽을 돌려받아 판게아 클로니클의 그래픽이 무사한지 확인해보고 싶기는 했다.
캐시를 모으기는 아직 요원하고, 그렇다고 지금의 스킨으로 던전을 돌자니 절망적일 정도로 시야에 방해가 되니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은 덱스터를 안심시키고 정보를 얻는 것이 먼저였다.
‘당분간은 그놈의 반짝이 유아 스킨에 의존할 수밖에 없나…….’
아쉬운 눈으로 난쟁이 공학자의 손에 들린 반쪽짜리 이정표를 바라보자, 그것을 눈치챈 덱스터가 기겁하며 온몸으로 성진의 시선을 차단했다.
“역시! 그 탐욕스러운 눈빛은 숨길 수 없어! 다 꿍꿍이가 있는 거였군, 이 사기꾼!”
아냐! 안 뺏어간다고! 누구더러 사기꾼이래?
결국 참다못한 성진이 덱스터에게 제안했다.
“좋아. 그렇게 못 믿겠으면 아예 나와 정식으로 계약을 하자.”
너무 늦기 전에 판게아 클로니클에도 접속해야 할 텐데, 이래서야 도통 대화가 진행되질 않잖아.
“내가 이정표를 너에게 일정 기간 임대하도록 하지. 일단 임대 기간은 2년으로 하고, 상황을 봐서 늘려가는 걸로.”
“…….”
“어르신의 명예를 걸고 약속한다. 계약한 내용은 반드시 지킬 거야.”
자세한 사정은 몰라도, 덱스터는 어르신의 공방에서 신세를 지고 있는 걸로 보인다. 또 성황 앞에서도 고개가 뻣뻣한 그가 고분고분 따르는 유일한 인물이 바로 어르신이지.
그러니 어르신의 명예는 이 난쟁이 공학자에게 제법 큰 의미를 가질 터.
‘물론 나한테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명예이긴 하지만.’
성진이 그런 책임감 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 덱스터가 고글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생각해보더니 물었다.
“…그 2년에 대한 조건은?”
“별거 없어. 그냥 나에게 임펄스 소프트에 관해 네가 아는 정보를 공유해줄 것. 그리고 판게아 클로니클의 정체를 파헤치는 걸 도와줄 것. 그 정도야.”
일전에 선물을 만든답시고 잔뜩 부려먹은 걸로도 이미 임대료는 차고도 남을 테니까.
성진이 눈을 또랑또랑하게 뜬 채 진실의 빛을 담아 바라보자, 어쩐지 화들짝 놀란 덱스터가 고개를 돌려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그… 제대로 계약서는 써주는 거지?”
아, 이 친구가 정말! 세상 속고만 살았나!
임펄스 소프트.
그것은 성진이 짐작한 대로 어느 게임 회사의 상호였다. 그것도 덱스터가 살고 있던 본상세계 지구에서는 제법 잘나가는 회사라고.
몇 년 전부터 그 회사에서 서비스하는 인기 게임이 바로 [판게아 클로니클]이었다.
“판게아 클로니클에 관해서라면 우리 어머니가 잘 알고 계실 텐데. 엔지니어팀의 총책임자시거든. 나는 엔진 개발 단계에서 빠져버렸고, 판게아 클로니클은 그 이후에 서비스를 시작한 걸로 알고 있어.”
덱스터의 어머니, 마틸다 로레츠.
그녀는 임펄스 소프트의 핵심 개발진이자 고위 임원 중 하나라고 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덱스터 역시 대학원을 조기 졸업한 후 그 회사에 몸을 담게 됐다고.
학창 시절부터 제법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은 그는, 운 좋게도 당시 비밀리에 진행되던 엔진 개발팀에 소속되었다.
이전에 없던 혁신적인 개념의 엔진, 바로 [호문클루스 엔진]이었다.
“너도 이미 알고 있다시피, 호문클루스 엔진의 요체는 이오니아의 기술이야. 애초에 임펄스 소프트 엔진 개발팀이 했던 일이랄 게 별거 없었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 이오니아의 호문클루스 엔진을 그대로 컴퓨터에 이식하는 작업에 가까웠다 할 수 있어.”
개발팀은 폐쇄적인 공간에서 작업을 시작했고, 모든 작업 내용이 철저한 기밀로 관리되었다.
그러던 중 덱스터는 또 다른 본상세계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개발팀에 소속되어 있는 몇몇 이오니아 공학자들과 안면을 텄다.
어르신과의 인연이 만들어진 것도 바로 그 시절이었다.
“이오니아의 공학자가 남아 있었다고?”
거긴 이미 완전히 멸망한 것이 아니었나? [호문클루스 엔진 편집기]를 제대로 수리할 수 있는 공학자가 하나도 남지 않았다며?
그러자 덱스터가 수염을 잡아당기며 퉁명스레 대답했다.
“이오니아가 완전히 멸망한 건 불과 몇 년 전의 일이야. 그리고 이전부터 꾸준히 붕괴의 조짐을 보여 왔지. 개발팀의 이오니아 공학자들은, 재앙으로부터 거주민들을 안전하게 피신시키기 위해 지구의 회사와 협력한 거야.”
다행히 시간 내에 이식을 완료한 이오니아의 공학자들은, 일족들을 데리고 안전한 규상세계를 만들어 그대로 영영 떠나버렸다.
그들이 차원의 왕이나 오라클이 아닌 다음에야, 차원에서 차원을 가로지르는 여행이 쉬울 리가.
즉 현재 어설프게나마 이오니아의 기계를 만질 수 있는 것은, 임펄스 소프트에 남은 소수의 개발팀 연구원과 덱스터뿐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남긴 호문클루스 엔진으로 개발한 첫 번째 온라인 게임이 아마 판게아 클로니클일 거야. 사실은 게임이 아니라, 게임처럼 접속할 수 있는 하나의 차원을 창조한 거지만.”
하지만 덱스터는 개발팀에 그리 오래 머물지는 못했다고 한다.
“엔진 개발 단계에서 나는 이미 어머니와 사이가 크게 틀어진 후였지. 마침 그때 어르신으로부터 공방을 관리해달라는 부탁을 받았고, 홀가분하게 이곳으로 넘어온 거야.”
덱스터가 본격적으로 어머니와 틀어진 계기는 남동생의 죽음이었다.
애인과 헤어진 후 꾸준히 자신의 유전병을 비관하던 동생이, 약물을 과다복용한 나머지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만 것이다.
그때 덱스터는 동생의 장례식장에서 처음으로 마틸다에게 언성을 높였다.
-어머니의 병은 자식에게 높은 확률로 유전되잖아요! 그걸 빤히 아신다면, 가족 계획이든 뭐든, 뭐라도 할 수는 없었습니까? 이렇게 아이들을 많이 낳을 필요가 있었어요? 왜요?
당시의 덱스터는 이 모든 것이 어머니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역시나 연골 형성 부전을 가지고 있던 마틸다 로레츠는, 그녀의 다섯 아이들 중 셋에게 같은 유전형질을 물려줬으니까
그러자 그의 어머니는 한심하다는 듯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고 한다.
-물론 너희들에게 유전병을 물려준 것은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덱스터. 하지만 나는 그 이상으로 천재적인 머리 역시 너희에게 물려주지 않았니?
-지금 그걸……!
덱스터는 거기서 말문이 막혔다. 자신의 형제‧자매들이 하나같이 뛰어난 인재들인 것만은 분명 사실이었으니까.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동료들 사이에서 인류의 보배라고 칭송받을 정도로 뛰어난 엔지니어였다.
-외모가 전부가 아니라는 틀에 박힌 충고는 하지 않으마. 하지만 나는 너희에게 그런 핸디캡을 상회하는 엄청난 능력과 최고의 교육 기회를 제공했단다. 또 마음껏 능력을 펼칠 수 있도록 경제적인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거기까지 말한 마틸다는, 립스틱을 곱게 바른 입술에 담배 하나를 꼬나물었다.
-너희들 역시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내 경험에 비춰보건대, 인생에서 내 유전병이 가지는 영향은 지극히 미비했으니까.
-…….
덱스터도 차마 그것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매사에 자신감 넘치는 그의 어머니는, 키나 외모에 상관없이 아름다운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간의 성공적인 연애와, 많은 사랑의 결실들이 바로 그 증거가 되리라.
-또 그런 뛰어난 인재들을 여럿 낳음으로써 인류의 발전에도 큰 기여를 했지. 그런 나를, 가장 많은 수혜를 받은 자식인 네가 나서서 비난하는 거냐?
그때 그렇게 묻는 마틸다의 눈에는, 분명 스스로의 발언에 대한 희미한 의구심이 어려 있었다.
하지만 당시 슬픔으로 이성을 잃은 덱스터는 그런 어머니의 사정을 헤아릴 여유가 없었다.
-전부터 늘 그랬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스스로가 남들의 머리 위에 있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타인의 사소한 사정이나 좌절의 감정에 그렇게도 무딘 겁니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소리친 덱스터는, 장례식장의 문을 박차고 빗속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공방으로 오기 전까지, 다시는 어머니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철없는 행동이었지.”
덱스터의 힘없는 목소리에, 성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어.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네가 좀 나빴네.”
“아아. 물론 그때는 내가 많이 어렸고,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점도 있어. 아마도 어머니는 그렇게 스스로를 위안하고 계셨던 거겠지. 하지만 이제 와서 돌이키기에는 어머니와 나 사이에 너무나 깊은 골이… 응?”
그러더니 덱스터는 성진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며 코를 씰룩거렸다.
“근데 잠깐. 뭐지? 왜 내가 너한테 이런 이야기까지 하고 있지?”
“음? 그야, 뭐…….”
내게 숨은 연륜이 있는 만큼, 남에게 의지가 되는 인간이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 황궁에서도 모두가 내게 인생 상담을 해온다고.
성진이 혼자서 으쓱거리는데, 덱스터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을 주섬주섬 뒤지기 시작했다.
“어쨌든 내가 할 말은, 나는 판게아 클로니클에 관해서는 그리 자세히 알지 못한다는 거야. 하지만 임펄스 소프트 사이트를 통해 공개된 게임의 정보를 확인할 수는 있지.”
그리고 그가 잡동사니 사이에서 꺼내든 것은 작은 노트북이었다.
컴퓨터가 있어?!
하마터면 성진은 그렇게 소리칠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그건… 지구의 물건이야?”
“응, 그래. 어르신의 공방은 무척 특수한 공간이니까, 다른 차원인데도 빵빵한 와이파이까지 제공되거든. 지구의 위성과 쉽게 연결할 수 있지.”
그가 전원을 누르자, 작은 모니터에 성진도 익히 아는 파란빛이 들어온다.
로고며 메뉴는 조금 생소하긴 했지만, 어쨌든 그 작동 방식만은 오래전 성진의 세상에서 보던 것과 정확히 같았다.
“…….”
성진이 묘한 감회에 젖어 입을 다물고 있는데, 그것을 깨닫지 못한 덱스터가 노트북 조작에 열중하며 말을 이었다.
“지구인들은 인터넷 없는 세상을 절대 견딜 수 없지. 마치 일족과의 연결에서 떨어져 나간 코른시임이 깊은 우울감에 빠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나 할까. 물론 평범한 델크로스 사람인 너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달칵, 달칵.
그렇게 덱스터가 인터넷 창을 열고 몇 개의 검색어를 치자, 눈앞에 임펄스 소프트 공식 홈페이지와 판게아 클로니클의 서비스 사이트가 나란히 떠올랐다.
“……!”
그리고 그곳에 성진이 찾던 수많은 정보들이 있었다.
임펄스 소프트의 창립자. 게임 개발진과의 인터뷰. 개발 비화 및 이후 업데이트 방향 등등. 그리고 다양하게 산재되어 있는 유저 커뮤니티까지!
“공략…….”
그중, 대부분의 커뮤니티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게임 공략]. 성진은 홀린 듯 노트북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무래도 인기 게임이다 보니 전문 커뮤니티가 많지.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활성화된 것은 공식 사이트의 자유 게시판이라고 하는데?”
성진이 영어와 한글이 뒤섞인 텍스트들을 어렵지 않게 읽고 있었지만, 그것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못한 덱스터가 설명했다.
“자유 게시판?”
“그래. 게임 내에서도 고객지원 메뉴를 통해 쉽게 들어갈 수 있으니, 유저들이 굳이 다른 커뮤니티를 찾지 않는 것도 있을 거야.”
덱스터가 사이트 여기저기를 클릭해보며 대답했다.
‘게임 메뉴로 들어간다고…….’
아마도 게스트 ID 유저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일 것이다. 메뉴가 어지러이 흩어져 있는 데다, 그마저도 제대로 번역되지 않는 부분이 태반이었으니까.
성진은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저기, 덱스터. 혹시나 해서 말인데, 너도 여기서 판게아 클로니클 계정을 만들 수 있어?”
그러자 이후에 닥칠 사태를 짐작조차 하지 못한 공학자가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아마 가능할걸? 지구와는 좀 다르지만, 훨씬 고차원적인 풀 다이브를 제공하는 기계가 공방에 있으니까.”
“그래…….”
그렇게 대답한 성진은 스으윽, 덱스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덱스터.”
처억.
갑작스러운 압박감에 움찔 놀라며 돌아보는 덱스터의 눈에, 입꼬리를 길게 찢은 사악한 소년의 얼굴이 들어왔다.
“너 하루 종일 공방에만 있기는 지겹지 않아? 바람도 쐴 겸, 우리 함께 게임을 하며 친목을 다지지 않을래?”
“뭐? 난 바쁜 몸이야. 게임 따위…….”
“계약. 판게아 클로니클의 정체를 파헤치는 걸 도와줄 것.”
“……!”
속았구나.
덱스터가 뒤늦게 밀려오는 깨달음에 붉으락푸르락하고 있는데, 성진이 달래듯 부드럽게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너한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닐 거야. 기분 전환도 하고, 친구들과 편하게 버스도 태워 줄게.”
그렇게 말하는 소년의 미소는 참으로 화사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덱스터는 등골을 타고 오르는 알 수 없는 오한을 느꼈다.
그리고 그날 밤.
판게아 클로니클에 모여 성진을 기다리던 침묵 빌런들은, 뉴비에 이어 또 새로운 파티원 하나를 맞이하게 되었다.
붉은 여우와 목이 긴 사슴, 그리고 문어가 마주하는 가운데. 산양에게 질질 끌려 온 작은 두더지 하나가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그, 다들 반가워, 친구들. 난 덱스터라고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