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29)
성황의 아이들-29화(29/469)
029. 검은 선지자들 (4)
케네스 디고리의 모임이 있는 날 오전, 성진은 언제나처럼 연무장에서 명상을 하고 1식의 수련에 매진했다.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수련을 마친 그는 샤워를 끝내고 간단하게 외출할 채비를 했다.
그동안 대대적인 옷 수선이 한차례 더 있었는데, 이제는 어느 누구라도 성진을 보고 예전의 그 뚱땡이를 떠올릴 수 없을 것이었다.
아직 덜 자란 팔다리는 군살 없이 길쭉해졌고, 지방이 사라진 신체 여기저기에 보기 좋은 근육들이 탄탄하게 자리 잡았다.
제법 날렵해진 옷맵시에 성진은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이렇게 보니 모레스도 상당히 잘생긴 놈이 아닌가. 뭐, 선남선녀 부모의 유전자가 어디 가는 건 아니지.
호위로는 단출하게 마사인 경과 쿠르트 경 두 사람만을 대동한 채, 성진은 수도 외곽에 있는 모임 장소를 향해 마차를 달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가볍게 바람이나 쐬고 온다는 정도의 마음가짐이었다.
마차는 시내 중심가를 벗어나 두어 개의 언덕을 오르내리더니, 드문드문 낡은 저택들을 지나치기 시작했다. 상태 나쁜 노면 때문에 마차가 심하게 덜컹거렸다.
“수도 귀족들이 주로 머무는 동네는 아니군요. 이런 곳에 사교 모임이 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습니다.”
조금은 을씨년스러운 낡은 집들을 바라보며 마사인 경이 인상을 썼다. 그때 뭔가 이상한 것을 알았어야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성진 일행은, 좋게 말하면 고풍스럽고 객관적으로 보면 당장 귀신이 튀어나올 것 같은 어느 거대한 저택에 도착했다. 정원사의 손이 미치지 않은 듯한 정원에는 수풀이 우거져 있고, 비쩍 말라붙은 담쟁이덩굴이 담장과 저택을 완전하게 뒤덮고 있었다.
“…….”
“사람 사는 곳이 맞기는 할까요?”
늘 점잖은 쿠르트 경의 얼굴에 드물게 초조한 기색이 어렸다.
폐가인가 하고 살피고 있는데 곧 입구에서 하인 하나가 나타나 그들을 저택 안으로 안내했다.
일행은 제대로 청소도 되지 않아 거미줄이 군데군데 걸려있는 낡은 복도를 한참 동안 걸은 끝에 연회장에 도착했다. 뭔가 잘못되어 간다는 불안감이 조금씩 커져간다.
호위 기사들은 회장 입구에서 제지당했는데, 항의하려 하는 마사인에게 성진은 가만히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적어도 무슨 모임인지는 확인해야 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만약을 대비해서 성진은 허리에 병기고에서 빌린 진검 하나를 차고 있었다.
비록 검술은 초보이지만 그는 이래 봬도 수십 년간 싸움에 이력이 난 마물 헌터다.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제 한 몸 정도는 빼낼 자신이 있었다.
삐걱.
무거운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이윽고 연회장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안으로 들어선 성진은 순간 움찔 놀랐다.
시커먼 후드가 달린 로브를 코끝까지 뒤집어쓴 여섯 명의 청년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대낮인데도 두꺼운 커튼에 싸여 빛 한 점 들지 않는 연회장. 그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마호가니 테이블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여기저기 희미하게 밝혀져 있는 촛불들 아래, 청년들의 긴 그림자가 여러 방향으로 늘어져 음산하게 흔들거린다.
뭐지? 이 당장이라도 악마 소환진을 펼칠 거 같은 음침한 집단은?
“검은 선지자들의 모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가장 선두에 선 청년이 후드를 벗으며 말한다.
이게 어디서 나타난 악마 숭배자들의 우두머리인가 했는데, 드러난 얼굴은 생각보다 멀쩡하고 호감 가는 인상이었다.
약관을 겨우 넘긴 듯한 어린 얼굴은 반듯하게 잘 생겼고 성실해 보인다. 생긴 건 꼭 교회 오빠 같은 놈이 이게 대체 뭐 하는 짓거리일까.
“말씀은 많이 전해 들었습니다. 저는 케네스 디고리라 합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하.”
인사를 하는 목소리는 분명 정중한데, 성진을 향해 간단한 약식 예도 취하지 않는다.
모레스를 우습게 여기는 것인지, 아니면 이 집단 자체가 과한 예를 배제하는 분위기인지는 좀 두고 봐야 할 것 같았다.
성진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이며 찬찬히 나머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대체적으로 덤덤한 반응들인 걸 보니 모레스와 실제로 안면이 있는 놈은 없는 것 같았다.
아, 저기 왼쪽 끝 놈은 빼고.
성진과 시선이 마주치자 눈에 띄게 당황하여 허둥거리는 저 통통한 로브.
아마도 저놈이겠지? 이 단체와 모레스의 연결 고리는.
“나도 자네 얘기를 많이 들었어. 이렇게 함께하게 되어 기쁘네, 케네스.”
성진은 후드를 벗은 청년에게 간단히 인사를 건넨 후, 통통한 로브를 향해 다가가며 양팔을 벌렸다.
“조나단, 조나단 맥캘핀!”
그는 환하게 웃으며, 이제는 슬슬 뒷걸음질 치는 녀석의 어깨를 꽉 잡아 눌렀다.
너 맞지? 어딜 도망가려고? 모레스를 이런 수상한 단체에 꾀어낸 원흉 자식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조나단의 어깨에 한 팔을 걸어 고정한 성진은, 나머지 사람들을 둘러보며 미소 지었다.
“자, 그럼 이제 슬슬 여러분들을 정식으로 소개 받고 싶은데?”
검은 선지자들의 모임 회원들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성진은 놀라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첫째로 케네스를 포함한 이 시커먼 여섯 청년들은 모두가 신학 아카데미 동기, 혹은 선후배라는 것이었다. 조나단 맥캘핀 또한 케네스의 두 해 후배란다.
“성직자들은 그 누구도 떠오르는 의문을 설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믿으라고 말하고, 그렇지 못한 자는 누르고 억압할 뿐이죠!”
“…아아, 그래. 뭐든 이유 없이 맹신하라 강요하는 것은 나쁘지.”
“그렇게 이 대륙을 뒤덮은 종교적 세뇌와 억압이, 사람들을 무지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하?”
“어, 참으로 문제라고 생각하네.”
“바로 그렇습니다!”
대체 평소 교육 과정이 어떻기에 애들이 이렇게 화가 나 있어?
이대로 괜찮은 거냐? 신성 제국 신학 아카데미여?
둘째로 이들 대부분은 신정일치 사회인 이 델크로스에서 나름 부유한 고위 사제들의 핏줄이라는 것이었다. 단지 에두른 방계이거나, 직계라고 해도 많은 자녀들 아래에 치여 주목받지 못하는 소외된 놈들이라는 것.
그래, 둘째 아들의 넷째 아들 어쩌고 하는 케네스처럼.
“신정일치의 사회는 시대의 흐름에 크게 뒤떨어진 구식의 사회구조입니다. 델크로스에 복속된 수많은 왕국과 공국들을 보세요! 그들은 델크로스에서 파견된 추기경이 정치에 관여할 수 없도록 안간힘을 씁니다. 그 결과 어떻습니까? 로한이나 브르타뉴처럼 눈부시게 발전하는 나라들을 보십시오!”
“…그럼그럼. 종교와 정치는 당연히 분리되어야 하는 것이 옳네. 아무렴.”
신정 분리를 꾀했다기보다는 델크로스의 내정 간섭을 피하기 위해서겠지만.
“고위 성직자들의 직계 자제들이 능력에 상관없이 고위직을 대물림받는 이 세태! 이 고리를 끊어내지 못한다면 델크로스의 미래는 결코 밝지 못할 겁니다!”
팔을 휘두르듯 과열된 웅변을 토하는 시커먼 놈을 보며 성진은 가만히 고개만 끄덕여 주었다.
옳은 말이었다. 단지 저놈은 고위 성직자의 가족으로 수혜는 받았지만, 그 대물림 순위에는 들지 못해서 더 화난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셋째로 성진은 조나단이 멍청한 모레스를 꾀어냈다고 짐작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모레스가 일 년가량 이들 집단을 소개해 달라며 조나단 맥캘핀에게 매달렸다는 것이었다.
아니, 정말 뭐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고 다닌 거냐. 이 개망나니가!
“저희 모임의 성격상, 신성 제국의 황자님을 이곳에 초대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저희가 지금도 얼마나 큰 부담을 느끼고 있는지, 저하께서 충분히 이해해 주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케네스는 차분한 어조로 말하며 이따금 성진을 살피듯 힐끔거렸다.
“그러나 회원인 조나단과 막역한 친구 사이라 하셨던가요. 또 저하께서 지난 일 년간 저희 검은 선지자들의 활동에 많은 금전적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음을 참작해야 했습니다.”
성진은 너무 놀라 하마터면 입을 크게 벌릴 뻔했다.
모레스가 후원한 단체가 또 있었어?
”그래서 모임에 방문하고 싶다는 황자님의 요청을 더 이상 외면하기 어렵다는 데에 회원들의 의견이 모이게 되었습니다.”
옆자리에 앉아 있는 조나단이 눈에 띄게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한다. 성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황궁 자금을 빼돌린 외부 조력자를 적어도 하나는 찾은 거 같은데, 여기서 나가면 일단 저놈을 자세히 족쳐 봐야 될 것 같았다.
“지금에 와서 고백하자면, 사실 황자님을 둘러싼 여러 질 나쁜 소문들을 은연중에 믿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조나단 저 친구도 수줍음이 많은 편이라 오해를 풀기에는 조금…….”
조나단의 얼굴이 이제는 새파래진다.
짐작건대 그다지 모레스를 이 단체에 소개하는데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되지만. 뭐, 그 소문들이 다 사실이었으니 딱히 저놈을 탓할 것도 못 되나.
“그러나 오늘 이렇게 직접 황자님을 뵈오니, 저희의 편견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네, 편견으로부터 오는 무지를 타파하고자 선지자를 자처하는 우리 회원들 역시, 세간의 풍문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크게 반성하고 있습니다.”
“저하야말로, 성황가의 일원 중 유일하게 이 제국의 비틀림을 제대로 직시하고 계시는 단 하나의 지성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뭔가 토로하는 족족 열심히 맞장구를 쳐줬더니 그새 회원들의 성진을 향한 호감도가 대폭 상승한 모양이다.
그리고 넷째. 사실 앞서 알아낸 사실들은 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황자님을 뵙기까지 오랜 망설임이 있었습니다만, 오늘 우리 회원들은 이 자리에서 결심하였습니다.”
케네스의 담담한 선언에 조나단을 제외한 나머지 네 명의 회원들이 다시 시커먼 후드를 코밑까지 내려쓴다. 조나단은 뒤늦게 후드를 둘러썼지만, 통통한 얼굴에는 울고 싶은 표정이 역력했다.
“안에서부터 곪고 있는 이 델크로스라는 썩은 고기로부터, 친히 그 고름을 터뜨리고 대륙에 새로운 미래를 가져오고자 노력하시는 모레스 황자님을 정식으로 검은 선지자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려 합니다!”
시커먼 로브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들 중 하나가 성진에게 그들과 같은 검은 로브를 내밀었다.
“어… 그대들의 결단에 감사하네.”
성진은 당황한 표정을 감추기 위해 황급히 로브를 둘러 걸쳤다.
“자, 그럼 황자님. 마음의 준비를 해 주십시오.”
케네스가 엄숙한 목소리로 말하며 후드를 덮어쓴다.
“이제 검은 선지자로서 이 세계의 신비에 입문 할 시간입니다.”
“…….”
성진의 머릿속은 이제 한없이 복잡해지고 있었다.
얘들 그냥 사회에 좀 불만이 있는 중2 감성의 청춘들이 아니었어? 세계의 신비는 또 뭐야?
케네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검은 로브 하나가 회장 구석에 놓인 빈 책장을 힘주어 밀었다.
끼익. 책장이 빙글 돌더니 곧 작은 골방 같은 것이 나타났다. 지하로 내려가는 어두컴컴한 계단이 있는 비밀의 공간이었다.
이거 뭔가 분위기 진짜 이상해지는데.
곧 작은 촛불을 든 검은 선지자들이 일렬로 지하실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성진은 열의 가운데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그들을 따라 묵묵히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로브 아래에 감춰진 검 손잡이를 이따금 쓰다듬으며, 성진은 끝도 없이 이어지는 듯 보이는 좁은 계단을 내려갔다.
빛이 들지 않는 계단은 점점 어두워지고 작은 촛불에 의지하기에는 발아래가 불안했지만, 얼마가지 않아 주위에 초록색으로 발광하는 작은 이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계단의 끝에 이르자 곧 이끼로 뒤덮인 축축한 돌벽이 이어진다. 기이한 빛을 내는 녹색 포자들이 잔뜩 떠다니고 있어, 성진은 가급적 그것들을 들이마시지 않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그들은 또 한참을 돌벽에 싸인 통로를 따라 걸었다.
통로는 조금씩 넓어지더니 이윽고 거대한 석벽 앞에서 끝이 났다. 석벽 중앙에 있는 커다란 문에서 일행이 잠시 멈춰 서자, 가장 뒤에서 걷고 있던 케네스가 천천히 문 앞으로 다가오더니 성진을 향해 돌아선다.
“보십시오, 황자님.”
문을 뒤쪽으로 밀면서도 케네스의 시선은 성진의 얼굴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나직하게, 마치 연극을 하는 듯 조금 과장된 어조로 그에게 고했다.
“이것이, 이 나라가 종교라는 틀 아래에 감추고 있는 진실, 바로 세계의 신비입니다!”
끼이이이.
천천히 석문이 열리며 드러난 광경에 성진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그래. 가장 중요한 네 번째.
이 악마 숭배자처럼 보이는 놈들이 진짜로 이 세계에 뭔가를 소환하기는 했다는 사실이다.
방이라기보다는 거대한 공동으로 보이는, 석벽으로 둘러싸인 넓은 공간.
이끼들에 둘러싸여 초록색으로 빛나는 그 공간 가운데에, 마치 거대한 구더기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시커먼 덩어리가 불길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