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295)
성황의 아이들-295화(295/469)
295. 유스티티아 (7)
[처음부터 당신이 이곳에 들어와서는 안 되는 것이었소. 테마 던전 출입에 인원 제한을 둔 이유, 그리고 게스트 ID 유저가 여태껏 셋을 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유심히 생각해본 적은 있소이까?]성진은 자신을 나무라는 듯 하소연하는 눈앞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마치 고대의 신화 속 인물 같은 우아한 복식과, 금빛으로 물결치는 긴 머리카락. 피눈물로 젖은 섬뜩한 안대를 제외하면, 분명 판게아 클로니클 메인 화면에 있던 그 ‘유스티티아’의 모습이 확실했다.
세상의 율법을 수호하기 위해, 스스로의 눈알을 뽑아냈다고 전해지는 숭고한 영웅.
결국 신적인 존재가 되어 세상을 관리하게 된, 판게아 클로니클 세계관의 가장 중심에 있는 여신.
‘하지만…….’
지금 성진의 등에 거머리처럼 붙어있는 이 이상한 여자 또한 ‘유스티티아’라고 했지.
심해의 해초처럼 뒤엉킨 검은 머리에, 밀랍처럼 기분 나쁜 피부의 감촉.
이건 여신이 아니라, 마치 저온 상태로 오랜 세월 방치된 익사체 같은 꼴이 아닌가.
‘어느 쪽이 진짜 유스티티아지?’
어쩌면 둘 다일까.
왠지 그런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갑자기 이런 식으로 내 앞에 나타난 이유가 뭐지?]성진은 당장이라도 눈을 뽑을 기세로 매달려오는 축축한 손을 뜯어내며 물었다.
어느 쪽이 진짜든 무슨 상관일까. 일단 한쪽은 아예 대화가 통하지 않을 것 같으니, 좀 더 멀쩡해 보이는 쪽과 의사소통을 해볼 밖에.
[방금 말했지 않소? 더 이상 혼돈을 불러들여 유스티티아를 자극하지 마시오.] [남의 이름을 부르듯 하지 말고. 너 역시 유스티티아겠지, 아닌가? 둘 다 눈알이 없는 건 피차 마찬가지 같은데.] […….]성진의 날 선 대꾸에 여신은 입을 앙다물었다. 하지만 이미 빈정 상한 성진은, 여신이고 거머리고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사이트에 있는 설정집이 맞는다면, 이 세상을 관리하는 건 어디까지나 너잖아? 한데 왜 일을 엉망으로 해놓고 이제와 남 탓을 하지?] [당신이 불러온 혼돈이기에, 당신에게 책임을 묻고 있소.]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지 마. 그렇게나 게스트 ID 유저의 테마 던전 출입을 막고 싶었다면, 아예 처음부터 제대로 조건을 지정하지 그랬나? 인원수 제한 같은 허술한 방식 말고.] [이미 상위의 조건을 제한했으니, 하위의 조건을 재차 규정하는 것은 의미가 없소. 이 모든 것은 순전히 당신의 존재로 인해 발생한 혼돈이니, 당신이 잠재울 수밖에 없는 거요.] [그럼 정중히 부탁을 해보든가. 게다가 뭐든 사람을 설득하고 싶었다면, 좀 더 대화하기 적절한 분위기를 조성할 수는 없었나?]적어도 이런 흡혈 거머리가 있는 곳은 아니지 않느냔 말이야.
성진이 신경질적으로 미역 같은 머리를 한 움큼 뜯어내자, 귓가에서 또다시 뭔가를 물어뜯는 소리가 들려왔다.
까드드득.
아, 허락도 없이 아무거나 물어뜯지 마라, 이것아!
[이 상황에 대해서는 심히 유감이오. 하나 본래라면 게스트 ID 유저인 당신과 나는, 몇 가지 제한적인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만날 일이 없었을 터. 이미 규정된 조건은 세계의 관리자인 나조차도 피해갈 수 없소.]자박, 자박.
여신이 몇 걸음 앞으로 걸어오며 말했다.
[하여 허상이 씌워지고 벗겨지는 순간, 그 찰나의 비틀림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소. 바로 당신이 키워온 그 혼돈을 매개로 내게 지워진 규칙을 피해야 했던 거요. 물론 그 대가는 그리 작지는 않소만.]동시에 여신의 눈에서 흘러내린 피가 후두둑, 하얀 드레스 위로 번지며 으스스한 무늬를 그려낸다.
이런. 앞에서는 유혈 쇼가 펼쳐지고, 뒤에는 익사체 거머리가 매달려 있다니!
‘최악이다!’
평소에도 공포 영화라면 질색이었던 성진은 진저리를 쳤다.
그래도 이것들은 그나마 손으로 만질 수 있으니, 주먹질이 통한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을까.
[이 상황이 정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남은 방법은 단 하나뿐이오. 그대가 지금이라도 당장 이 세계를 떠나면 되는 게지.]그때 차갑게 대답한 여신이 바짝, 성진의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어서 그녀의 붉은 입술에서, 마치 유혹과도 같은 부드러운 속삭임이 이어진다.
[아니면 이제라도 당신의 고유 ID를 행사하겠소? □□□ □□. 예전처럼 거슬리는 것을 모두 없애버리는 거요.] [……!]이번에는 성진이 입을 다물 차례였다. 여신의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후벼지듯 뜨끔한 느낌이 들더니, 이내 속에서 뭔가가 세차게 술렁거렸던 것이다.
두근
이것은 분명, 언젠가 성진이 경험해본 적 있는 동요였다.
하지만.
‘…아니, 아직은 때가 아니야.’
설명하기 어려운 강한 예감이 동시에 밀려든다. 성진은 심호흡과 함께, 알 수 없는 감정의 파도를 애써 가라앉혔다.
그러자 뭔가 김이 빠졌는지, 여신은 천천히 몸을 뒤로 물리며 대답했다.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겠소. 자 어쩌겠소이까? 지금이라도 이곳을 떠나시겠소? 이 세계는 당신들의 존재를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곳이오.]불안정해? 판계아 클로니클은 전형적인 규상세계인데?
성진의 의문을 깨달은 것인지, 여신이 무뚝뚝한 설명을 덧붙였다.
[이 세계는 채 준비되기도 전에 억지로 알에서 깨어날 수밖에 없었소. 하여 터무니없이 약해진 기조를 보완하기 위해 수많은 규칙이 무질서하게 덧대어졌지. 그러한 거대한 혼돈 속에서 결국 세계의 뒤틀림이 생겨났다오.]뚜둑, 뚝.
몸을 뒤로 물리며 말하는 동안에도, 여신의 눈에서는 쉴 새 없이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대로라면 숫제 그녀의 드레스가 온통 핏빛으로 물들 것만 같았다.
[그리고 □□□ □□, 그대는 이 혼돈의 범람을 가속화시키다 결국은 세계의 붕괴를 초래하게 될 거요.] […….] [그러니 아무쪼록 이 세계를 위해, 지금 당장 이곳에서 나가주시오.]그래. 잘은 몰라도 게임 존폐의 문제라는 말이지?
‘이 성가시기 짝이 없는 세상을 떠나라니, 그야말로 바라던 바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성진은 자신의 목을 개껌 삼아 바작바작 이를 갈고 있는 찰거머리를 뒤로 밀어내며 말했다.
[조건이 있다. 일단 게스트 ID 유저 하나를 만나준다고 내게 약속해, 유스티티아.] [게스트 ID 유저?] [그래. 그리고 그가 원하는 아이템을 뭐든 순순히 넘겨. 그렇게만 해준다면,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지 못할 이유도 없지.]자신이 나가야 한다면, 적어도 오웬은 함께 빼내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이곳에 계속 접속하는 이유는, 아마도 유스티티아 여신을 만나 필요한 물건을 얻기 위해서야.
물론 유스티티아를 만난다고 해서 오웬이 수행하는 퀘스트가 완전히 깨지리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여신을 만난답시고 괜히 삽질하는 것만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성진의 말을 들은 여신의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오. 아까도 말했지 않소? 이미 규정된 조건은 나조차도 피해갈 수 없다고. 게스트 ID 유저는 신전을 출입할 수 없고, 나를 만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까다로운 조건을 만족해야 하오.]아니, 그럼 대체 어쩌란 말이야?
이제 성진은 성가심을 넘어, 불쾌함으로 서서히 머리에 열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쪽의 조건을 들어줄 생각이 없다면, 성진 역시 저쪽의 일방적인 헛소리를 더 이상은 들어줄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헛소리는 집어치워! 난 목적을 이룰 때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는다!] [당신 때문에 이 세계가 무너질 거요!]여신이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지만, 성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내가 알게 뭐지? 이딴 괴상망측한 게 들러붙는 세상이라니, 이대로 내버려 두는 게 더 큰 문제를 초래할지도 모르잖아?] [그런 자기중심적인……!] [자기중심적이라는 비난은 오히려 이쪽에서 해야지. 적어도 제대로 된 대화를 원한다면, 지금 당장 내 생명인지 힘인지를 먹고 있는 이거나 어떻게 해봐라!]사람을 더는 피곤하게 만들지 마! 나는 내일 아침 수련만큼은 절대 빼먹지 않을 셈이라고!
화악-
순간 성진의 기분에 반응이라도 하듯, 그로부터 거센 영압이 일어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치지지직!
그것이 어찌나 강력했던지, 일순 사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노이즈가 일었을 정도.
유스티티아 여신이 놀란 기색으로 비틀거리며 성진을 바라보았다.
‘…방금 내가 뭘 한 거지?’
스스로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성진 역시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더 황당한 게 있었는데, 이 상황에서도 찰거머리는 그의 뒤에 붙어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까득까득.
‘이런 징글징글한 놈!’
성진의 질색하는 시선을 알아챈 여신이, 체념한 듯 말했다.
[처음부터 그것을 떨쳐낼 수 없을 거라 하지 않았소? 나로서도 어찌할 방법이 없소이다. 그것은 거대한 혼돈 속에서 태어난 또 하나의 유스티티아. 그 자체로 이 세계의 법칙이 된 자라오.]혼돈이든 법칙이든 알게 뭐냐, 어서 나한테서 떨어져라!
성진이 재차 뒤쪽을 향해 팔을 휘두르자-
화악! 화악!
아까보다 한층 날카로워진 영압이 찰거머리를 수차례 강타했다.
캬캬캬캬!
그러자 찰거머리가 뻥 뚫린 눈구멍을 가늘게 휘며 성진을 비웃었다. 마치 쓸데없는 시도를 한다는 듯이.
[듣지 않았는가? 나는 이미 이 세계의 법칙이 되었다!]피에 젖은 입술이 뻐금거리며, 마치 녹슨 쇠가 갈리는 듯 불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가 나를 피할 수 없다! 너희들은 이미 나를 통해 보고, 듣고, 또 호흡하고 있거늘! 나는 이 세계를 지탱하는 또 하나의 기반, 세계의 대기나 마찬가지란 말이다!]‘…대기?’
바로 그때였다.
성진의 뇌리에 떠오르는 강렬한 기억 하나가 있었다.
-모레스, 만일 네가 그 새였다면 어찌했을 것 같더냐.
바닷속에 빠진 새.
그에 대해 조곤조곤 설명하던 친숙한 목소리.
-새에겐 다른 기관들 역시 원하는 대로 적응시킬 능력이 있었단다. 단지 그에게 있어 바닷속 물은 여전히 극복해야 할 외부의 힘이었고, 자연스럽게 호흡할 무언가로 인식되지는 못했던 게지.
아버지는 그때 내가 물속의 새와 마찬가지라 했었지.
하지만 다른 차원의 대기라는 것이, 비단 델크로스만을 의미했던 걸까?
-그리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모레스.
또 다른 기억이 떠오른다.
음악소리와 함께 나직하게 울리던, 작은 웃음과 같은 진동.
-그저 기억을 토대로 강한 의념을 일으켜 완전한 염상을 만드는 것이다. 그곳에 실린 오러가 염상을 따라 자연히 흘러갈 수 있도록.
알고 있어.
의념을 일으켜 염상을 만드는 방법을, 나는 이미 배운 적이 있다.
화르륵!
그리고 성진이 미처 의식하기도 전에, 자연스럽게 떠오른 기억과 함께 눈앞에 작은 불꽃이 피어났다.
그에게는 무척 익숙한, 모든 것을 불태우는 게헤나의 겁화.
‘…마왕 2호!’
언뜻 보기에는, 마치 마왕의 본체인 듯 하찮기만 한 불꽃이었다. 하지만 그 위력만큼은 틈새에서 본 것과 완전히 같았다.
비실비실.
마치 먼지가 떨어지듯, 마왕 2호가 하늘하늘 거머리의 손 위에 떨어지자-
화르르르륵!
목표를 붙잡은 불꽃은 순식간에 커지며, 성진의 뒤쪽으로 빠르게 번져나갔다.
[이게 무슨! □□□ □□이여! 지금 무엇을 하는 거요!]당황한 유스티티아 여신의 외침과 함께-
끄아아아아!
갑자기 찢어지는 듯한 거머리의 비명 소리가 울렸다. 여유가 넘치던 아까의 태도와는 완전히 다른 반응.
하지만 성진이 채 결과를 확인하기도 전에, 순식간에 그의 시야가 확 멀어지며 어둠이 밀려나갔다.
“…비!”
…응?
“뉴비야!”
그리고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를 붙잡고 거세게 흔드는 것이 느껴졌다. 성진은 잠에서 깨어나듯 천천히 눈을 깜박거렸다.
“왜 그래? 갑자기 왜 멍하니 서 있어?”
흐릿하던 시야가 밝아지며, 눈앞에 아른거리는 구릿빛 머리카락이 보인다.
“…오웬?”
“순간 선 채로 기절한 줄 알았잖아. 괜찮냐?”
“오웬이야?”
“갑자기 무슨 소리야? 너 진짜 어디 아프냐?”
성진은 황당한 얼굴로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본래 붉은 여우였어야 할 녀석이 지금은 완전히 처음 보는 모습으로 뒤바뀌어 있었기 때문이다.
‘뭐지? 목소리는 분명 오웬이 맞는데?’
지금 성진의 눈앞에 있는 것은, 목소리만큼이나 쾌활한 인상을 가진 건장한 청년이었다.
길게 늘어진 구리빛 머리가 마치 풍성한 여우 꼬리 같았는데, 머리 여기저기에 갈색의 깃털이 장식된 조금은 생소한 차림새.
성진은 천천히 손을 들어, 작은 발굽으로 눈을 문질렀다.
뭐지? 내 아바타는 또 멀쩡한데?
“오웬, 너…….”
“응? 왜 그래?”
청년이 걱정스러운 듯 되물었다.
아아, 목소리를 들으니 확실하게 그 얼빠진 여우 자식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녀석의 스킨이 사라지고, 그래픽이 멀쩡해졌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