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296)
성황의 아이들-296화(296/469)
296. 코드 제로 (1)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성진은 잠시 상태창을 이리저리 조작해 보았다.
〚오브젝트 – 스킨 ‘모여라, 친구들’〛
〚*켜짐*/꺼짐〛
〚오브젝트 – 스킨 ‘모여라, 친구들’〛
〚켜짐/*꺼짐*〛
그러나 아무리 스킨을 껐다 켰다 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외부 오브젝트는 물론이거니와, 플레이어의 그래픽 스킨까지 깡그리 날아간 느낌.
물론 이 상황에서도 성진은 여전히 작은 산양으로 남았다는 것이 열 받는 점이었지만.
“정말 괜찮겠어, 뉴비?”
낯선 얼굴을 한 오웬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재차 물어온다.
변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치직.
간혹 불쾌한 노이즈가 일긴 했지만, 그래도 주변의 풍경이 이전과 달리 제법 현실적인 모습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처음에 그래픽이 형편없이 깨졌던 것이 단순히 이정표가 부서진 탓은 아니었다는 거겠지.
-너희들은 이미 나를 통해 보고, 듣고, 또 호흡하고 있거늘!
문득 악착같이 눈을 잡아 뜯던 익사체의 목소리가 떠올라, 성진은 등줄기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역시 그놈 때문이겠지?
마왕 2호가 놈을 제대로 해치웠을까?
[이성진, 아직 고려해야 할 불안 요소가 남아 있습니까? 만약 리더인 당신이 반대한다면, 지금이라도 테마 던전 돌기를 보류할 수 있습니다.]하타수 티티. 아니, 하타수 티티의 목소리를 가진 방패 전사가 물었다.
이쪽 역시 겉으로는 멀쩡한 사람으로 보였다. 물론 비정상적으로 얇고 길쭉한 인상과, 삐걱거리는 사지의 움직임만은 그대로였지만.
[덱스터를 믿습니다, 이성진. 괜찮다.]가장 의외인 것은 바로 구릅이었다. 녀석은 결 좋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무척이나 전형적인 미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레인저답게 날렵해 보이는 팔다리가 조금 흐느적흐느적 움직이는 게 흠이었지만.
‘뭐야. 본래 세상에 다리를 두고 왔느니 어쩌니 하길래, 아바타도 영락없는 연체동물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멀쩡하잖아?’
잠시 그렇게 속을 뻔했다.
구릅의 긴 머리카락이 홀로 스르륵 움직이며, 성진의 눈앞에 친절하게 포션을 내밀지만 않았다면 말이지!
‘……!?’
[상태 이상 물약. 마셔 봅니다?]경악한 성진이 얼떨떨하게 포션을 받아들었다.
‘이건 또 뭐야? 머리카락에 구동되는 관절이 있어?’
구릅. 너, 대체 어떻게 되먹은 아바타야?
[어쩔래, 뉴비? 몸이 안 좋으면, 이번 던전은 좀 쉴래?]그런 와중에도 오웬의 모습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후줄근한 옷 위에 대충 갑주를 걸치고, 아무렇게나 흩날리는 구릿빛 머리를 질끈 뒤로 묶고 있는 자유분방해 보이는 모습.
성진은 포션을 든 채로, 잠시 그를 못마땅한 눈으로 쏘아보았다.
‘단정치 못한 것도 정도가 있지. 머리에 까치집처럼 꽃은 그 깃털들은 또 뭐야? 너는 인마, 명색이 델크로스의 1황자라면서 좀 더 제대로 된 차림새를 하고 다닐 수는 없어?’
하지만 아직 서로의 정체를 밝히지 않은 상황에서, 이런 잔소리를 함부로 내뱉을 수도 없고.
[왜 그래, 뉴비?] […아니, 아무것도 아냐.]그래. 이교도들과 오랜 시간 전장에서 지냈다고 했던가? 그럼 이해해야 할지도.
아무래도 정갈한 차림의 황궁 사람들과 오래 부대끼다 보니, 오웬도 그와 비슷할 거라고 지레짐작하고 있었나 보다.
‘이번엔 넘어간다. 하지만 너 이 자식, 나중에 황궁에 돌아와서도 그 꼴을 하고 다니기만 해 봐라!’
[……?]찌릿.
영문도 모르고 성진의 매서운 눈총을 받은 오웬이, 난감한 듯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거렸다.
* * *
[C 랭크 던전, ‘오크왕의 미로’는 전체적으로 놓고 보면 그리 어려운 던전은 아니지. 미로라는 이름답게 구조가 복잡하지만, 그래도 ‘조건’만 잘 풀어내면 이전 던전들처럼 난이도가 확 내려가거든.]작은 두더지가 고글을 만지작거리며 설명을 이어갔다. 모두의 외형이 바뀐 와중에도, 덱스터만은 여전히 귀여운 동물 친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스킨을 직접 구입한 계정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아바타의 변화가, 단순히 겉모양만 덧씌운 게 아니라는 방증일까.
[원거리와 근거리, 그리고 마법 계통의 오크들이 미로 사방에 골고루 포진되어 있어. 각각의 상성도 제법 명확한 편이라, 거기에 맞춰 차근차근 뚫어나가면 큰 문제가 없지.]그러자 하타수 티티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순박한 사슴에서 갑자기 진중한 전사의 외형으로 변하니, 아직도 낯설기가 그지없었다.
[처음 설명 그대로입니다만, 덱스터. 이것을 다시 언급한다는 것은, 혹시 앞서의 계획대로 공략을 할 생각이 없다는 뜻입니까?] [그래. 모두와 그걸 의논해야 해.]두더지는 고글을 고쳐 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와서 기록을 보고 안 사실이지만, 다른 팀의 타임 챌린지 기록이 예상했던 것보다 무척 빨라.] [그 말뜻은…….] [만일 정석대로 했다가는, 우리는 이 기록들 근처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지.]‘오크왕의 미로’는 세 방향에서 복잡하게 얽힌 미로들을 모두 뚫고, 보스 룸으로 향해가는 방식의 공략이 정석이었다.
군데군데 있는 함정과 알람을 피해가며,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미로들을 순차적으로 모두 밟아야 하는 까다로운 구조.
[물론 미로의 일부를 포기하고 바로 보스 룸으로 갈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시간은 단축되더라도 클리어 점수가 형편없이 낮아지게 돼.] [뭐? 그럼 다른 녀석들은 대체 어떻게 했다는 거야?] [이해가 어렵다. 모든 미로를 돌지 않는다. 그런데 모든 몹을 잡는다. 어떻게?]바로 그때, 가만히 듣고만 있던 성진이 담담하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처음부터 아예 알람을 모조리 밟는 거군.] [……!?]모두의 경악한 시선이 한데 모였다.
덱스터 역시 놀란 눈으로 성진을 바라보더니, 이내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잘도 알아챘네. 내가 내린 결론도 바로 그거야. 다른 파티 녀석들은 아마도, 몹을 일부러 진로로 끌어들여 클리어 시간을 최대한 줄인 거겠지.] [하지만 그게 가능합니까? 상성에 따라 차근차근 공략하면 모를까, 한꺼번에 모든 미로의 몹들이 쏟아져 나온다면 클리어 난이도가 극악으로 올라갑니다.]하타수 티티의 말에, 모두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온갖 타입의 몹 수백 마리가 동시에 한자리에 쏟아진다니. 그때부터는 단순히 저렙 몹이라고 치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게 된다.
[각각의 타입마다 풀어내야 할 ‘조건’도 있지 않나? 유스티티아의 조건이 C 랭크부터는 제법 복잡해진다며? 그걸 순차적으로 지키면서 수백의 오크를 상대하다니…….]오웬이 무겁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가 있군. 여러 차례 시도할 수 있는 일반 유저라면 모를까, 우리로서는 완전히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무모한 도전이야.]판게아 클로니클은 초보의 칼질에 고렙 유저가 비명횡사하기도 하는 대단히 현실적인 게임.
사방에서 온갖 공격이 한꺼번에 쏟아진다면, 아무리 방어가 높은 자라도 오래 버틸 재간이 없을 터였다.
[하지만 덱스터는 똑똑한. 분명 방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구릅의 지적에 두더지가 조금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계산에 따르면, 이론상으로 완전히 불가능한 건 아니거든. 한번 들어나 볼래?]그렇게 해서 덱스터가 제안한 것은 일종의 방어전이었다.
보스룸이 있는 삼거리까지 최단거리로 달린 후, 그곳을 중심으로 각 방향에서 쏟아지는 공격을 상성에 맞게 번갈아 막아내자는 것.
[…스위치?] [그래. 이번 방어의 핵심이지. ‘오크왕의 미로’에 걸린 ‘조건’은, 같은 속성의 공격으로 총 HP의 30%에 달하는 대미지를 넣는 거야.]즉, 근거리 몹에게는 근거리로, 마법사 몹에게는 마법으로 공격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
반면에 그 조건을 깨고 나면, 정작 약화된 몹에게 전혀 다른 타입의 공격을 해야 방어력 측면에서 이득을 볼 수 있다는 점이 까다로웠다.
예를 들어 마법사가 마법사를 약화시키면, 다음에는 레인저가 놈들을 죽어라 두드려야 한다는 거다.
[레인저에는 근거리 전사가, 그리고 근거리에는 마법사가 각각 알맞은 상성이지. 그러니까 삼면에서 오는 부대를 맞아 각자 조건을 깬 다음, 상성에 맞게 공격 위치를 빠르게 전환해 나가야 하는 거야.] [흠…….]언뜻 듣기에는 그럴싸했지만, 거기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존재했다.
구릅이 머리카락으로 화살통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빠듯하다. 세 방향에서 동시에 같은 몹이 쏟아지면 어쩐다? 겹칠 수 있다.] [그건 최단 시간에 보스 룸까지 도착에서 알림을 울리면 해결되는 일이야. 오크들의 소부대는 제법 고르게 포진되어 있어서, 동시에 보스 룸으로 출발한다고 생각하면 웬만해서는 겹칠 일이 없으니까.]거기다 상성이 맞지 않는다고 해서, 공격이 아예 먹통인 것은 아니니까. 결국 먼저 해치운 쪽이 다른 통로를 지원하면 자연히 해결될 문제라고 덱스터가 덧붙였다.
[하지만 가는 길에 마주치는 녀석들은 어떻게 합니까? 결국 미로는 시간에 따라 구조가 바뀝니다. 보스룸에 도착할 무렵에는, 우리를 뒤쫓아 온 부대가 마구 뒤섞일 텐데요.]하타수 티티의 지적에 덱스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은 마주치는 족족 조건을 깨면서 나가야지. 이왕이면 달리는 중에 최대한 놈들의 숫자를 줄이는 것도 좋을 거야. 그러면 적어도 우리가 지나온 통로만은, 나중에 방어하는 데 훨씬 여유가 생길 테니까.] [그래도 상당히 빠듯하게 들립니다만.]여전히 걱정이 가시지는 않는다는 반응.
하지만 침묵 빌런들의 얼굴은 처음보다는 훨씬 밝아져 있었다. 덱스터의 설명을 듣는 동안 점점, 어쩌면 정말로 가능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오크 전사는 색적 범위가 좁고 원거리 목표를 인식하는 데 약간의 딜레이가 있어. 또 오크 마법사는 전방에 원거리 부대가 있으면 일단 버프 모드로 전환된다는 특징도 있지. 그런 허점을 최대한 이용하는 거야.]덱스터는 자신감이 넘치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게다가 모두의 전력은 어제와 또 다르다고. 다들 고급 강화 무기를 손에 넣었잖아? 나는 충분히 해볼 만하다고 봐.] [그래. 결국 미로에서 헤매지 않고, 얼마나 빠르게 보스 룸에 도착하느냐가 1차 관건이 되겠군.]팔짱을 끼고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던 오웬이, 갑자기 성진의 표정을 슬그머니 살피며 물었다.
성진은 대답 없이 초보자용 검을 말아 쥐었다.
본래라면 앞뒤 생각할 것도 없이 반대를 외쳐야 했겠지만-
‘가능할 것 같은데?’
왠지 그런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덱스터의 계획은 이미 성진의 머릿속에서 정교한 도면으로 그려지는 중이었다.
간혹 손발이 맞지 않아 박자가 엇나갈 수는 있겠지만, 성진의 예상으로는 어디까지나 자신이 대응할 수 있는 허용 범위였다.
‘시야를 가리는 방해물이 사리진 지금이라면…….’
아마도 전과 달리 마음껏 실력을 펼칠 수 있으리라.
게다가 무조건 반대하기에는, 아까 들었던 말이 어딘가 마음에 걸렸다.
-그대는 이 혼돈의 범람을 가속화시키다 결국은 세계의 붕괴를 초래하게 될 거요.
유스티티아의 경고를 생각하면, 성진이 이곳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어쩌면 그리 길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동안에 저 여우 자식을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해보자.]이윽고 무겁게 내뱉어진 성진의 대답에, 모두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래, 잘 생각했어, 모… 이성진!] [뭐야? 뉴비. 반대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화끈한데?] [이성진이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면, 이 계획은 분명 승산이 높은 겁니다!]그래. 멋대로들 생각해라.
성진은 침묵 빌런들이 신이 나서 떠들어대는 것을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차라리 긴장하지 않고 움직이는 쪽이, 계획의 성공률을 더욱 높이는 길이 될 테니까.
‘게다가 여차하면, 최후의 도피 수단도 남아 있고.’
성진은 구릅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만약 계획에 문제가 생기면, 일단 구릅뺘랍구르릅 비뺘릅릅이 우리를 붙잡고 천장에 매달려 줄 거야. 그렇지?]그리고 헤이즈 놈을 소환해서, 인식 거리에 있는 몹들을 모조리 쓸어버리면 되는 거다.
그러자 구불텅구불텅 기쁨의 춤을 추던 미녀 레인저가, 늘씬한 팔을 번쩍 들어 보이며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미로는 춥지 않다! 구릅, 언제까지고 강하게 매달릴 수 있습니다!]좋아, 구릅.
그나마 여기서 네가 제일 믿음직스럽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