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3)
성황의 아이들-3화(3/469)
003. 성황가의 망나니 3황자가 되었다. (2)
그것이 분명 마지막이었을 텐데.
* * *
‘이게 대체 무슨 꼴이야…….’
영혼까지 불태워졌을 자신이 왜 멀쩡히 침상에 누워서 남이 떠먹여 주는 죽을 씹고 있어야 하는 것이며.
[우하하하! 완전 웃겨! 애기냐? 이 턱받이 어쩔 거야!]‘…냅킨이다. 이 새끼야.’
비장하게 자기 영혼을 불태우겠다던 마왕 새끼는 또 왜 남의 머릿속에서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것인가.
시간은 하루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젖은 물수건이 이마를 훔쳐내는 감촉에 눈을 떴더니, 화려한 옷차림을 한 웬 장년의 여인이 그를 바라보며 눈물짓고 있었다.
“모레스! 아가! 엄마를 알아보겠니?”
“오오! 황자님! 드디어 정신을 차리셨군요!”
성진은 호들갑을 떠는 사람들 틈에서 어리둥절하여 눈을 깜박거렸다.
고풍스럽고 화려한 방. 시중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극진한 보살핌.
처음에는 사후세계인가 했더랬지.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의 머릿속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였다.
[야, 멍하니 있지 말고 빨리 정신 차려! 아직 잠이 덜 깼냐?]이 방정맞은 목소리는, 설마?
‘…마왕?’
[어, 이 몸을 알아보는구나! 하도 눈을 안뜨기에, 영혼이 완전 망가진 줄 알았지. 너도 알다시피 게헤나의 염화가 오죽 화끈하잖아?]이 자식이 왜?
그때 완전히 끝장낸 게 아니었단 말인가?
[워, 워. 흥분하지 말고 진정해. 너 지금 정신 바짝 차려야 해. 아직은 영혼이 불안정하게 안착되어 있는 상태라고. 겨우 들어온 몸인데, 잘못하면 여기서 다시 튕겨 나간다?]뭐라고 떠드는 거냐.
게헤나의 겁화도, 내 주먹질도 부족했던 거라면 얼마든지 다시 없애 주마.
이를 바드득 갈며 몸을 일으키려던 성진은, 그러나 털썩하고 다시 몸을 뉘일 수밖에 없었다. 주변 사람들이 기겁하고 붙잡은 탓도 있지만, 이상하게 그의 몸이 나른하고 무거웠던 것이다.
숨쉬기가 힘들다. 팔다리가 너무 무거워.
“모레스! 왜 그러니? 아가, 어디가 아프니?”
“황자님! 조금만 진정하사옵고…….”
이거 놔라! 마왕 저놈이 아직 살아 있어! 어서 저 새끼를 죽여야…….
[…어, 이봐? 너 지금 혈압이 심하게 오르는데? 그러다간 되살아나자마자 또 죽어요. 자, 심호흡을 해봐! 응? 흡-하. 흡-하.]이 마왕 놈이 뭔 헛소리야! 이 사람들은 또 뭔데 날 붙잡는 거냐!
놔라! 놔!
“컥!”
순간 뒷골이 심하게 땡기나 싶더니 갑자기 눈앞이 핑 돌았다.
“모레스!”
“황자님!”
사람들의 다급한 외침 소리가 확 멀어지며, 바로 눈앞이 캄캄해졌다.
성진은 얼마 후 다시 정신을 차렸는데, 여전히 같은 장소에 누워 같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고 어디서 들려오는지 모를 그 빌어먹을 마왕 놈의 목소리도 그대로였다.
[와, 성깔 한번 지랄 맞다 생각은 했는데, 넌 진짜 정도가 심한 거 같다.]‘너, 이 자식…….’
빠드득.
성진이 흉흉하게 이를 갈자, 마왕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어, 미안미안. 이제 싫은 소리 안 할 테니 진정 좀, 응? 우리 대화를 하자, 대화. 좋잖아?]‘뭐? 이 새끼야?’
둘의 대화는 아직은 요원한 듯 보였다.
그러나 화를 못 이겨 죽어버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과하게 분노를 표출하던 이성진은, 의외로 한나절이 채 지나지 않아 빠르게 진정되었다.
마왕의 육신은 이미 전소되었으며, 겨우 영혼의 일부만이 찌꺼기처럼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화를 내봐야 목소리만 들리는 놈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막막하기도 했고.
그는 분노를 삭이며 묵묵히 마왕의 설명을 들었다.
최후의 전투 후 게헤나의 불꽃은 마왕과 함께 성진의 육체 또한 완전히 소멸시켰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성진의 영혼에는 별다른 피해를 주지 못하고 슬그머니 사그라지고 말았다고 한다.
어쩌면 염화가 예상 외로 빨리 진화된 덕분에 자신의 영혼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마왕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정작 고결한 내 영혼은 대부분 불타 없어졌는데, 왜 네놈이 무사한지 도무지 알 수 없단 말이지.]“…….”
[아무튼 그렇게 되어서 나는 거의 모든 힘과 격을 잃어버렸다는 거다. 지금 남은 것은 근원적인 인격의 잔재 정도일까.]요는 결코 이전의 강대했던 마왕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 진작 어딘가로 꺼져버릴 것이지, 왜 남의 머릿속에서 말 걸고 지랄이야?’
퉁명스러운 성진의 대꾸에 마왕이 한숨을 쉬었다.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나는 뭐 시도를 안 해본 줄 아느냐? 근데 도망칠 수가 없어. 네놈에게서 조금이라도 떨어지려고 시도하면 주변의 신성한 기운 덕분에 지독하게 고통스럽다고. 그건 근원 자체를 압살하는 무서운 통증이야. 그대로 시간이 흐르면 아마도 남아 있는 영혼의 조각마저 완전히 사라지게 되지 않을까?]‘결론이 났군. 그냥 깔끔하게 소멸해. 간단하네.’
[이 자식아! 너 같으면 그러겠냐? 어?]성진은 물론 그 남아 있는 영혼을 티끌 하나 없이 깔끔하게 없애고 싶었다.
그러나 애초에 실체가 없는 것을 어떻게 잡아 죽이겠는가. 지금 당장 게헤나의 염화를 다시 불러올 수 있을 리도 만무하고.
이성진은 목적이 있는 한 주위를 살피지 않고 돌진하는 경향은 있었지만, 적어도 불가능한 것에 목맬 정도로 꽉 막힌 인간은 아니었다.
일단 그러한 처지를 받아들이고 나니, 옆에서 종알거리는 놈이 의외로 쓸모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꼴에 전직 마왕이랍시고 아는 것이 많았으니까.
성진보다 하루 먼저 정신을 차린 마왕은, 발 빠르게도 이 새로운 세계와 성진의 상황에 대한 정보를 제법 수집해 둔 상태였다.
무려 다른 사람의 영혼에 직접 접촉하여 기억을 엿보는 효율적인 방식이라나, 뭐라나.
덕분에 침상에 누워서 사람들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는 동안, 성진은 놈이 떠드는 소리를 바탕으로 현재 자신의 상태에 대해 빠르게 습득하기 시작했다.
마왕 놈의 말에 따르면 이곳은 지구나 마계와는 동떨어진, 완전히 다른 차원의 세계라고 한다.
[우리는 엄청 운이 좋은 케이스지. 그대로 보이드 너머로 산산이 흩어질 가능성이 높았는데, 희한하게도 본상세계로 흘러오게 되다니.]본상세계?
[상위 차원이라는 말이야. 적어도 시구르트 34지구나 게헤나 같은 염상세계보다는 두어 단계는 높은 차원이지.]‘염상세계? 시구르트 34지구는 또 뭐야?’
마왕이 혀를 찼다.
[와, 이런 미개한 지구인 클라쓰. 자기 차원의 명칭도 몰라. 너네는 아예 차원에 대한 개념이 없구나? 어째 죽자고 달려들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와… 이 무식한 것들.]마왕의 대가리 정도는 남겨둘걸 하는 후회가 일었다. 적어도 깐죽거리기 전에 후려 팰 수는 있지 않을까.
뭔가 섬뜩한 기운을 느꼈는지, 마왕의 영혼이 부르르 떨려왔다.
근데 놈의 영혼이 이렇게 직접적으로 느껴지다니, 이거 어쩐지 기분이 더러운데.
[심하다. 너 진짜 야박한 놈이구나. 그래도 이제는 영혼의 동반자가 되었는데…….]‘…닥쳐!’
어쨌든 상위 차원에 속한 이곳은 신성제국 델크로스.
대대로 주신의 가호를 받는 성황이 통치하는 국가로, 휘하에 많은 왕국과 대공령이 복속되어 있는 강력한 제국이다.
현재 성황은 17대이며, 이 몸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되시겠다.
즉 이성진은 지금 황자가 되어있는 거였다. 어째 사람들의 태도가 지극히 공손하더라니.
[지금 네 이름은 모레스 클라인이야. 3황자이고 올해 15세가 되는 성황의 넷째 자식인데…….]‘자식인데?’
[엄청 유명한 망나니란다.]그의 어머니인 1황비 리자베스 아세인은 세가 드높은 아세인 대공의 여식으로, 황궁의 여인들 중에서는 가장 대단한 출신 성분을 가진 황비였다.
성황이나 황후의 앞에서도 당당하기 이를 데 없는 그녀는, 황가의 자식들 중 제일 고귀한 피를 이어받은 자신의 아들이야말로 성황의 뒤를 이을 황태자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그 기대는 곧 과도한 교육열과 감정적 애착으로 변질되었다.
다행히 모레스 황자는 어릴 적만 해도 어머니의 기대를 따라가려 노력하는 황자님이었다.
다른 형제들에 비해 월등히 뛰어난 편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착실하게 황자로서의 소양을 습득해 나갔다.
한데 7세 경부터인가, 갑자기 이유 없이 버럭버럭 화를 내는 일이 잦아지더니 점점 안하무인이 되어갔다고 한다.
하녀와 시종들에게 욕을 퍼붓거나 이유 없는 폭력을 일삼았다. 심심하면 식기며 물건들을 집어 던져 박살을 내놓고, 호위 기사들 역시 심하게 골탕 먹이거나 괴롭히기 일쑤.
수업 시간에는 또 교사들에게 되지도 않는 모욕을 주고 조롱을 하더니, 황비의 꾸지람을 몇 번 듣고는 아예 수업에 출석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마왕은 마치 성진의 흉을 보는 것인 양, 신이 나서 이 망나니 황자의 흑역사를 떠벌렸다.
‘근데 고작 하루 만에 얻은 정보치고는 지나치게 상세한데? 이거 믿을 만한 거냐?’
[어허! 본좌가 주위 사람들의 영혼에 직접 접촉하여 탐지해 낸 정보들이다. 너 혼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단시간에 모으기 불가능한 양질의 정보지. 감사한 줄 알도록.]‘…….’
그 후, 황자의 일상은 내리막길로 곤두박질쳤다.
깔끔하던 예법은 사라지고 극도로 몸을 움직이는 것을 귀찮아하기 시작했다.
결국은 그나마 좋아하던 검술 수업도 때려치우더니, 침상에 드러누워 매일 빈둥거리며 줄기차게 간식들만 주워 먹었다고.
사람들은 도무지 그가 돌변한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추측건대 어린 황자가 지금까지는 얌전하게 욕심 많은 황비를 따르고 있었지만, 어쩌면 알게 모르게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짐작만 했을 뿐.
그러기를 수년, 가장 고귀하던 황자는 무식하고 성격 더러운 데다 굴러다니는 게 빠를 정도의 고도 비만 돼지가 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쓰러진 거지.]이변이 생긴 것은 나흘 전.
전날 멀쩡하게 밥 잘 먹고 잠자리에 든 모레스는, 새벽부터 갑자기 원인 모를 고열에 시달리더니 그날 오후에는 완전히 의식을 잃고 말았다. 중독의 증거는 없었고 질병이라기에는 생소한 증상이었다.
솜씨 좋은 황실 의원들이 앞다투어 황자를 위해 달려들었으나, 황자는 도무지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
성황이 국정을 미뤄가며 병실을 찾았고, 황비는 눈물로 밤새 병상을 지켰다.
그리고 열병이 시작된 지 4일이 지나, 모레스가 아닌 이성진이 이 몸에서 깨어난 것이다.
‘그럼 진짜 모레스의 영혼은 어디 간 거지?’
성진이 가장 궁금했던 것은 그것이다.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의 몸에 빙의를 한 형태가 되었는데, 영적인 지식이 전무한 그가 생각하기에도 이 상태는 정상적인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멀쩡한 사람의 몸을 무단 점거한 덕분에, 본래 집주인이 피해를 보는 것이라면 큰일이 아닌가.
그렇지만 마왕의 반응은 영 신통치가 않았다.
[글쎄? 내가 깨어났을 때는 이 몸 안에 우리 말고 다른 영혼은 없었는데. 열병으로 이미 죽어버린 거 아닐까?]병으로 막 사망한 사람의 몸에 타이밍 좋게 들어온 것이란 말인가.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나간다면?’
[왜? 나가게? 어차피 영혼 없는 몸이니 높은 확률로 죽어버릴 거 같은데?]‘…나갈 방법은 있고?’
마왕의 대답은 가차 없었다.
[왜 없겠어. 콱 죽으면 되지.]‘…….’
이성진은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예상치 못하게 되살아 난 것은 분명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마왕과 함께 죽음을 맞을 때만 해도 소멸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알았고, 마계를 박살 냈다는 성취감에 취해─미처 다 타지 않은 쓰레기 찌꺼기가 남긴 했지만─이것으로 충분하다 생각했었다.
그러나 막상 다시 깨어나고 보니 인내와 고난, 그리고 결핍으로 점철되어 있던 지난 생이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 것이다.
마계를 없애기 위해, 싸우기 위해 그저 자신을 깎고 깎아내는 삶.
성진의 지난 인생은 좋은 말로도 행복했다고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그는 과연 타인의 몸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도 되는 것일까?
이 기적적인 우연을, 불행했던 지난 삶에 대한 보상이라고 여겨도 좋은 것일까?
성진이 고민에 빠져 있자니, 그 복잡한 심정을 알 길이 없는 마왕 놈이 옆에서 염장을 지른다.
[아무튼 돼지면 어떠냐? 나라에서 제일 높으신 분의 아들이 되었는데? 와, 축하한다. 인생 폈구나, 너.]그래, 이것도 문제였지.
성진은 침상에 퍼져 있는 비대한 몸뚱이를 보며 침음을 삼켰다.
누운 자세임에도 불구하고 시야를 가리는 불룩 솟은 뱃살과, 관절이 완전히 접히지도 않을 만큼 빵빵하게 살이 찐 두툼한 팔다리를.
잠시만 몸을 뒤척여도 숨이 차고 지치는 것이, 단순한 열병의 후유증만은 아닐 것이다.
하필이면 들어와도 이런 형편없는 육체라니. 강대한 근육으로 덮여 있던 예전의 육체를 떠올리며 성진은 한숨을 쉬었다.
‘이게 잘된 건가…….’
이것이 지난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성진은 화려한 침상에 누워, 목에 예쁘게 냅킨을 두르고, 리자베스 황비가 떠다 나르는 죽을 아기 새라도 된 것처럼 꾸역꾸역 받아먹는 중이었다.
“자 모레스, 한 번 더 아- 하렴.”
민망해서 죽을 지경이었지만, 애틋한 황비의 얼굴에 성진은 마지못해 또 입을 벌린다.
마왕이 거의 숨이 넘어갈 듯 처웃는 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푸하하하하하! 나 미쳐! 나 죽어! 날 웃겨 죽일 셈이냐! 우하하하하하!]저놈의 새끼, 내가 언젠가 기필코 없애고 만다.
이성진은 죽을 대충 삼킨 다음, 당장 다음 죽을 뜨려는 황비를 만류했다.
“어… 어머니? 이제 배가 부릅니다. 힘드실 텐데 그만 떠 주셔도 될 거 같아요.”
“모레스…….”
황비는 잠시 서글픈 표정으로 아들을 응시하더니, 이내 고개를 숙이고 화려한 레이스가 달린 소매 끝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래, 새삼 네가 기억이 온전치 않다는 것이 실감이 나는구나. 나를 한 번도 어머니라고 부른 적이 없었거늘.”
“어, 음…….”
미치도록 어색하다!
일단 괜한 의심은 피하고자 아프기 전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고 대충 얼버무려 두긴 했지만, 황비와 대화하는 매 순간 성진은 그가 모레스가 아니라는 사실을 들킬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이번에도 성진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어물거리는데, 그새 황비의 영혼으로부터 기억을 엿본 마왕이 귀띔을 해 주었다.
[평소에는 꼬박꼬박 어마마마라고 불렀나 본데?]어씨, 알게 뭐냐.
차마 어마마마 소리가 나오지 않아, 성진은 결국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네가 죄송할 게 무에 있어. 그렇게나 지독한 고열이었단다. 폐하께서 직접 손을 쓰셨음에도 좀처럼 열이 떨어지지 않아, 이 어미는 뭔가 큰일이 나는 게 아닌지 마음 졸였거늘.”
황비는 우아한 손짓으로 소매를 가다듬더니 조심스레 모레스의 손을 잡아 왔다.
“네가 이렇게 건강히 일어나 준 것만으로 어미는 기쁘기 그지없단다.”
보드랍고 따뜻한 손이 닿아오자, 성진은 표정을 굳히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써야 했다. 자신의 어머니가 아닌 사람에게 아들인 척해야 하는 이 상황이 지독히도 죄스러웠기 때문이다.
진짜 아들은 이미 죽어 영혼마저 사라져 버렸는데, 이 사람은 그 사실을 알 수 없으니 애도조차 할 수 없는 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모레스의 몸을 차지한 다른 영혼이라는 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 말을 믿어 줄 리도 없거니와, 만약 믿어준다고 해도 문제다.
당장 퇴마해 버리겠다고 덤비면? 그리고 정말로 그의 영혼이 몸 밖으로 쫓겨난다면?
여분의 삶에 큰 미련은 없지만, 굳이 그런 거창한 방법으로 자살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아프고 나니 좋은 점도 있구나. 내 아이가 이리 얌전히 어미와 마주 앉아 있다니, 이게 대체 얼마 만인고.”
“하하하…….”
모레스 이 미친 망나니 자식. 평소에 어떻게 살면 네 어머니가 이런 소소한 걸로 행복해할 수 있는 거냐.
이성진은 어색한 얼굴로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