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300)
성황의 아이들-300화(300/469)
300. 코드 제로 (5)
미로로부터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오크들의 물결.
그러나 반복되는 기계적인 소탕 끝에, 결국은 놈들도 마지막 장궁 부대 하나만을 겨우 남겨두고 있었다.
[이곳은 이제 구릅, 너한테 맡기지!]오웬의 갑작스러운 외침에, 단검을 휘두르던 레인저가 화들짝 놀라며 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뭐라고 한다? 오웬! 너도 알다시피 궁수 부대의 상성은 근거리……!] [거의 생명이 바닥인데 뭐. 구릅, 너 칼질도 꽤 잘하잖아?] [앗? 잠깐! 기다리다, 오웬!]그러나 오웬은 다급한 마음에, 구릅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그대로 보스룸 앞으로 달렸다.
[뉴비! 티티!]하지만 그런 오웬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의외의 광경이었다.
피에 젖은 거대한 오크의 왕이, 작은 산양 앞에 무릎 꿇은 채 마지막 대사를 읊고 있었던 것.
-이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는가, 썬더스톰 본…….
놈의 만신창이가 된 몸뚱이는, 희미하게 빛을 발하며 점점 흐릿해지는 중이었다.
-이것은 필연인가. 아니면 그저 나의 힘이 모자랐던 것인가. 일족의 모든 지혜를 모아 너를 저지하려 했건만, 예언된 운명의 수레바퀴는 기어이 너의 별을 파멸의 궤도로 올려놓고야 마는구나!
성진은 대답 없이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 놈의 어둡게 가라앉은 눈동자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끼면서.
-하나 감히 자만하지 말라, 썬더스톰 본. 네가 저지른 죄악과, 네가 저지르기로 예정된 죄악. 그 모든 것들은 결코 여신의 예언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것을.
[…….]-그럼에도 감히 신에게 대적코자 한다면, 내 흔쾌히 너를 비웃어 주리라! 세상에 이보다 어리석은 자는 다시없으리라고…….
비통하게 절규하던 아까와 달리, 묘한 침착함이 느껴지는 어조다.
그래서 성진은 놈에게 물었다.
[언제부터 알았지?]-…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시치미 떼지 마. 스스로도 자기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걸 알고 있었잖아?]처음에 날 봤을 때도 그랬고, 또 전투 중에도 몇 차례인가 왔다 갔다 하지 않았어?
성진은 그렇게 추궁하며, 겨우 멀쩡하게 남은 놈의 오른 눈을 마주 보았다. 언젠가 미궁에서 만났던, 라이칸슬로프 로드 네브라스카를 떠오르게 만드는 그 눈을.
동시에 성진의 눈동자에, 잠시간 은회색의 밝은 광채가 어렸다 사라진다.
[뭔가 개수작을 부린 건 분명 유스티티아겠지만, 열리지도 않은 보스룸을 냅다 밀고 나온 건 순전히 네 녀석의 의지였지. 그렇지 않나?]그러자 오크 왕은 눈꺼풀을 몇 차례 끔벅거려, 눈가에 고이는 핏물을 털어냈다.
-이제 와 무엇을 감추리. 그렇다. 경보가 울리기에 적이 있음을 알았고, 내 기꺼이 문을 열고 나가 네놈을 맞이하였노라. 사지 멀쩡한 자가 어찌 가만히 자리에 앉아 적이 쳐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으리.
그래. 아마도 그것이 적절한 대응이겠지. 이곳이 규상세계가 아니었다면 말이야.
조건을 충족하지 않은 문이 열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세상의 규칙에 완전히 위배되는 현상이 아닌가.
그러자 오크 왕이 묘한 표정으로 성진을 바라보았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하면 그것은 결국 모두 너의 탓이 아닌가? 썬더스톰 본. 판게아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모든 것을 파멸로 이끄는 자. 여신이 예언한 그대로이건만.
그러나 처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음에도, 오크 왕의 어조에 더 이상 분노의 기색은 남아있지 않았다.
놈은 담담한 눈으로 허공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한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군. 막상 생의 끝을 목전에 두니 기이한 일이 생기는구나. 그토록 명확하던 것들이 흐릿하게 형체를 잃어가고,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이리도 또렷하게 눈앞에 떠오르다니.
[…….]-여신이 내게 예언을 남긴 것은 언제였던가. 내가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판게아의 질서란 결국 무엇이었던가. 그 모든 것이 지금은 너무나도 모호하기 짝이 없다…….
거기까지 말한 그의 눈동자가 빙글. 또다시 성진을 향해 돌아왔다.
-반면에 썬더스톰 본. 이제는 너의 또 다른 모습이 확실히 보인다. 너는 마치 이제 막 세상에 발을 디딘 애송이 같기도, 또 한편으로는 오랜 세월 전장만을 헤쳐 온 흉흉한 악귀 같기도 하구나.
치직.
마침 성진의 시야에 또다시 작은 노이즈가 일었다.
-…아아, 그렇군!
그때 갑자기 오크 왕의 성한 한쪽 눈이 경악으로 커다래진다. 마치 믿을 수 없는 무언가를 본 듯, 놈의 확장된 동공이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래! 그렇게 되는 거군! 너는 분명 ■■■…….
[…뭐라고?]성진이 뒤늦게 되물었지만-
파스스…….
이미 때는 늦었다. 그 마지막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오크 왕 라이가스는 한줌 빛줄기가 되어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동시에 성진의 눈앞에 작은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당신의 파티는 대단히 훌륭한 성적으로 ‘오크 왕의 미로’를 클리어했습니다. 파티원의 기여도에 따라 소정의 보상이 차등 지급됩니다. 지금 보상을 받으시겠습니까?〛
〚수락/거절〛
‘…….’
성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창을 노려보았다.
어이, 잠깐만. 지금 장난치냐?
방금 놈이 내게 뭔가 중요한 말을 하려고 했던 거 같은데, 왜 하필 지금이야? 어?
그때 뒤에서 잠자코 바라보고 있던 오웬이, 슬그머니 성진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너무 낙심하지 마. 뉴비.”
“음? 뭐가?”
“아니. 너 뭔가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잖아.”
이 녀석은 또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지?
어이가 없어진 성진이 뚱한 얼굴로 그를 노려보는데, 녀석의 이어지는 말은 더욱 가관이었다.
“괜찮아, 뉴비. 나도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아무런 원한 관계없는 생면부지의 적들을 죽여야 해서 고뇌가 컸거든? 하지만 다들 그러더라. 이것들은 진짜 생명이 아니라고.”
“…….”
“오크 왕이 유난히 생생한 반응을 보인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던전에 있는 몹들이 살아있다는 의미는 아니지. 다음에 들어가면 또 똑같은 놈이 멀쩡하게 나타날 걸? 그러니까 너무 애석하게 생각하지는 말라고.”
놈의 뜬금없는 위로에 성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갑자기 이게 뭔 소리야? 그걸 모르는 사람도 있어? 이런 실없는 놈을 봤나.
성진의 황당한 심정은 그대로 그의 손끝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뾱!
“어억!?”
졸지에 예상치 못한 딱밤을 얻어맞은 오웬이 데굴데굴 바닥을 구른다. 잠시 후 몸을 추스른 그는, 대단히 상처받은 얼굴로 항변했다.
“아니! 또 왜 때려? 이번에는 내가 뭘 잘못했는데?”
“지금 누구한테 훈수를 두는 거야? 헛소리 하지 말고 이제부터는 네 앞가림이나 잘 해!”
“뭣? 지금 정말 훈수를 두는 게 누군데? 뉴비 네가 언제부터 날 봤다고 벌써부터 그런 잔소리를…….”
오웬은 버럭 소리를 지르다 갑자기 화가 피시식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비단 자신의 앞으로 당당하게 내밀고 있는 귀여운 발굽 때문만은 아니리라.
딱밤을 되갚아 주려 해도 눈앞의 산양이 좀 작아야 말이지. 게다가 방어력도 파티원 중 가장 형편없지 않은가!
“이걸 진짜, 어디 불안해서 한 대 칠 수도 없고.”
물론 성진은 대반에 코웃음을 쳤다.
“오래 살고 볼일이네. 세상에 그런 느린 주먹을 맞아주는 놈이 다 있구나?”
“뭐? 오래 살아? 이 꼬맹이 놈이 어디서 그런 건방진 소리를!”
“누가 꼬맹이냐? 너 인마, 이 어르신이 어디의 누구신지 제대로 알기는 해?”
“어르신 좋아하네! 네가 어르신이면, 난 어르신 할아버지다!”
한편, 그런 둘을 바라보며 하타수 티티와 구릅이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어린 친구들은 정말로 금방 친해지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두 사람이 동향 출신이기 때문인 거겠죠?]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이것은 팀의 사기에 무척 도움이 되는!]물론 성진과 오웬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해서 벌어진 오해였다. 두 사람이 한창 제국어로 말씨름을 하고 있었으니까.
바로 그때.
[어이! 다들 이것 좀 봐봐!]혼자서 이리저리 창을 조작하고 있던 덱스터가, 갑자기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거 믿어지냐? 지금 우리 파티가 전 서버 타임 챌린지 1등이야! 그것도 2위와는 압도적인 시간차라고! 우리가 해낸 거야!]* * *
그날 성진 일행은 조금 이른 시간에 접속을 종료하기로 했다.
본래라면 곧장 B 랭크 던전으로 달릴 예정이었지만, 여러 차례의 돌발 사태가 빚어낸 긴장감에 모두가 짙은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덱스터도 이에 순순히 동의했다.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공략에, 자잘한 여러 가지 마찰이 빚어졌기 때문.
특히나 갑자기 보스룸이 열리게 된 사태에 관해서는 정확히 조사해야 했다.
이번 한 번은 넘어가더라도, 상위 던전에서 또다시 이런 사고가 일어나면 그때야말로 모두의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 기록은 앞으로 여간해서는 깨지지 않을 거거든.]덱스터는 대단히 뿌듯한 얼굴로 눈앞에 열린 순위창을 들여다보았다.
[보스룸이 갑자기 열린 게 득이 됐어. 방어전과 동시에 보스전을 치른 셈이니까.]알람을 죄다 누르고 오든, 아니면 성진 일행처럼 알람을 피해 달리든. 어느 파티도 그들만큼 빠르게 미로를 통과하지 못하리라.
거기다 곧장 치러진 보스전. 이대로라면 아마도 이번 타임 챌린지는, 판게아 역사상 전후무후한 기록으로 남을 터였다.
[타임 챌린지 1등은 과연 보상이 다르군요. 하루 종일 던전을 돈 것보다 성과가 좋습니다.] [동감이다. 어서 이것들을 가지고 돌아간다!]침묵 빌런들 역시 잔뜩 들떠 있었다.
물론 오웬 하나만을 빼고.
“뉴비야. 너도 꼭 가야 해? 급한 일 없으면 나랑 좀 놀아주면 안 되냐?”
성진은 답지 않게 불쌍한 척하는 덩치 큰 녀석을 어이없다는 눈으로 쏘아보았다.
야야, 난 바쁘단 말이다.
“게임을 더 하고 싶으면 혼자서 놀아.”
“하지만 상태창 씨는 게스트 ID 유저를 혼자 두지 않아. 모두가 나가버리면, 나도 덩달아 튕겨 나갈 게 뻔하단 말이다.”
“그럼 이참에 오늘은 일찍 쉬던지.”
그러자 오웬이 시무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 싫은데. 이대로는 분명, 꿈자리가 사나울 거라고.”
“……?”
뭔가 신경 쓰이는 반응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녀석의 징징거림을 들어주기에는 당면한 문제가 너무 중요했다.
여러 차례의 돌발 사고도 그렇거니와, 아까부터 유스티티아가 그에게 했던 말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기 때문.
-그대는 그것을 떨쳐낼 수 없을 거요. □□□ □□. 유스티티아는 이미 이곳의 대기로 녹아들어, 더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다오.
치직. 칙.
던전을 나오자 노이즈의 빈도 역시 한층 잦아졌다. 결코 감각으로 느낄 수는 없지만, 아마도 그 껄끄러운 것이 다시 그에게 달라붙으려 애쓰는 거겠지.
“뉴비야. 응? 응?”
“아, 좀!”
성진은 기를 쓰고 매달리는 다 큰 어린애를 겨우 떼어 놓은 후, 덱스터에게 넌지시 일렀다.
“야, 일단 서둘러 공방으로 가자. 너와 긴히 의논해야 할 것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