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309)
성황의 아이들-309화(309/469)
309. 마왕 2호 (7)
시구르트는 온갖 차원을 돌아다니며 기상천외한 이적들을 경험했다.
한 선지자가 숨 쉬듯 손쉽게 견고한 염상들을 만드는 것을 보았다.
어느 고위 마왕이 내뱉은 여상한 한숨이, 강한 염상으로 변모하며 이윽고 하나의 완전한 차원이 되는 광경을 직접 목도한 적도 있다.
“그러나 세상 그 어디에서도, 차원을 형성하는 법칙 그 자체를 만들어 내는 자를 본 적은 없었소이다.”
규상세계의 법칙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빛이 있으라.
코드를 그리 지정하면, 세상에는 언제까지나 일정한 강도의 빛이 내리쬔다.
이곳에 생명이 있으라.
코드를 그리 조작하면, 발생과 진화의 과정을 까마득하게 건너뛴 괴상한 생명들이 살아 움직였다.
심지어 그 코드들에는 물리적인 한계도 없었다.
좌표를 지정하면 지정하는 대로, 시간을 가속하면 가속하는 대로. 그저 창조자가 원하기만 하면 어디까지고 뻗어나가는 무한한 세계들.
“그중에서도 가장 불가사의한 것이 무엇인지 아시오? 그 아름다운 코드들을 만든 오라클이, 그저 일개 인간이라는 사실이었소.”
신도, 혹은 어딘가의 고위 마왕도 아니다.
코른시임의 오라클.
평범한 예언자 중 하나라 생각하여 지나쳤던, 어느 소수 일족의 영적 지도자.
“오라클. 그는 자신이 인간들 중 가장 특별한 존재라 믿어 의심치 않던 시구르트 시구르슨에게 있어, 정면에 내던져진 오연한 도전장이나 마찬가지였다오.”
불을 지정하는 코드는 불을, 물을 지정하는 코드는 물을. 동일한 코드는 언제나 동일한 염상을 만들어낸다.
그 정형화된 규칙들을 관찰하던 시구르트는, 문득 자신의 이야기에 심취하던 사람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희극을 노래하면 흥분과 유쾌함을, 비극을 노래하면 비탄과 좌절을…. 모두가 내가 원하는 심상을 고스란히 떠올리곤 했다.’
그래서 시구르트는 이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어쩌면 나에게도 가능하지 않을까?’
같은 이야기를 듣는 자들이 일으키는 심상은 언제나 비슷하다.
하면, 나의 이야기 자체를 하나의 코드처럼 기능하도록 만들 수는 없는 것일까?
‘이야기를 모으고 또 모아서, 마침내 세상을 구성하는 거대한 규칙이 되도록 만들 수는 없는 것일까?’
그 일말의 가능성은, 오랜 유희에 일종의 권태를 느끼고 있던 이야기꾼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을 만큼 강렬한 매혹이었다.
‘그래! 나는 단발성의 꿈을 좇는 유희자가 아니라, 영원토록 기억될 위대한 이야기가 되고 싶다! 세상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이야기, 단 하나의 규칙이 되고 싶다!’
그렇게 해서 천 개의 꿈을 거닐던 이야기꾼은, 이야기의 재료를 찾아 열정적으로 본상세계들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던 것이다.
거기까지 들은 성진은 혀를 찼다. 들을수록 어이가 없었으니까.
대체 그게 뭐 하자는 거야?
“고작 그런 게 시구르트 시구르슨이 바라는 궁극의 목표라고? 농담이지?”
“…원대하고도 아름답지 않소?”
이사벨라의 물음에, 성진은 인상을 쓰며 코웃음을 쳤다.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하등 쓸데없는 일에 목을 매는 거 같은데? 그 시간에 차라리 잠이라도 쳐잤으면, 적어도 시간이 아깝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지.”
그러자 이사벨라는 쓴웃음을 지으며 성진을 바라보았다.
“그 반응만큼은 변하지 않았구려. 기억을 잃기 전의 그대 역시, 이 이야기만큼은 조금도 공감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오.”
“…….”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소?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은, 단지 그대가 다음 대의 오라클이기 때문은 아닐지. 이미 한계를 넘어설 것을 약속받은 자이기에, 이 모든 것에 무심할 수 있는 것은 아닐지 말이오.”
글쎄, 어떨까.
성진은 뚱한 표정을 지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야기를 하는 새에 제법 시간이 흘러, 마차는 어느새 타운하우스로 향하는 길목에 도달해 있었다.
“시구르트 시구르슨은 유구한 세월을 살아왔소. 그 어떤 선지자들보다 많은 지식을 쌓았고, 그 어떤 마왕들에게도 견줄 바 없는 예술적인 염상들을 만들어 낼 수 있었지. 하나 다른 차원의 왕들이 볼 때, 그의 한계는 어디까지나 명확했다오.”
그저 특출한 인간.
스스로를 아무리 ‘꿈의 마왕’이라 부르짖고 다녀도, 누구 하나 그 말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는 자는 없더라.
“하여 그는 평생을 한낱 인간이 되길 거부하며 살아왔소. 그런데 오라클이라는 더욱 특출한 인간이 존재한다 하면, 우선은 그자를 넘어서야 진정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지 않겠소?”
그때 성진은, 그녀의 목소리에 섞인 미미한 자조의 감정을 귀신처럼 감지해냈다.
“그런 너 역시, 그 자식의 꿈이 조금은 어리석다고 생각하고 있잖아. 아닌가?”
“……!”
그러자 이사벨라는 입을 다물고 동그래진 눈으로 성진을 바라보았다.
“시구르트 시구르슨은 구제할 수 없는 바보 자식이야. 되지도 않은 목표를 위해 너무나도 많은 잘못을 저질렀지. 하지만 적어도 그 짓을 멈춘 지금의 너는, 그놈보다는 훨씬 나은 입장이라고.”
“…….”
“그러니 그런 변변찮은 꿈 따위는 그만 잊어 버려! 대체 언제까지 그런 정신병자의 사고에 물들어 있을 참이야? 놈은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
“…그리 어리석다 생각지는 않소. 나 역시 한때는 그 이상에 강하게 매료되어 있었으니까.”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한 이사벨라는, 성진의 시선을 따라 창밖으로 스쳐가는 풍경들을 아스라이 바라보았다.
“거기다 가장 강렬한 열정은 대개 단순한 동기로부터 오는 법이라오. 오랜 세월을 무료하게 살아온 시구르트 시구르슨이, 그 꿈에 정신없이 매달리게 된 것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
“…….”
“그저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지금은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는구려. 그대가 말했듯, 이야기꾼은 다시는 내게 돌아오지 않을 모양이니 말이오.”
그리고 두 사람은 그것으로 대화를 멈추고 각자 침묵에 잠겼다.
시구르트 시구르슨에 대한 것은, 성진에게도 또 이사벨라에게도 그리 유쾌한 주제는 아니었던 까닭이라.
덜커덕.
곧 타운하우스 저택에 도착한 마차가 멈춰 선다. 성진은 먼저 마차에서 내려, 뒤늦게 몸을 일으키는 이사벨라를 향해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에티켓. 그러나 그것이 이사벨라에게는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온 모앙이었다.
설마 진심으로 레이디로 대우받지는 못하리라 생각하고 있던 이사벨라는, 놀란 표정으로 주저하며 성진의 손을 맞잡아왔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지.”
가볍게 그녀를 바닥에 내려준 성진이 입을 열었다.
“일전에 황도에 퍼졌던 회색 역병, 그건 시구르트 시구르슨의 짓이었나?”
그러자 이사벨라는 잠시 묘한 눈빛으로 성진을 바라보았다.
“그대는 궁금한 게 없는 척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질문은 놓치지 않는구려.”
“…….”
“뭐, 좋겠지.”
작게 한숨을 내쉰 이사벨라는, 잠시 뜸을 들이며 말을 골랐다.
“회색 역병에 관해 내가 아는 것들을 자세히 말해줄 수는 없소. 그것 역시 어디까지 시구르트 시구르슨의 향후 계획과 긴밀하게 맞닿아있기 때문이오. 그러나…….”
여름의 녹음을 연상케 하는, 선연한 청록의 눈동자가 성진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한다.
“적어도 사람에게 직접 마물의 알을 심는 무식한 짓은 그의 소행이 아니었다오.”
그러자 그때까지 녀석의 말을 숨죽이고 듣고 있던 마왕 놈이, 성진이 묻기도 전에 답을 주었다.
[진실이야.]‘…그래.’
성진은 방금 이사벨라의 대답이, 인형사가 정한 선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갔음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적어도 저 녀석이 성진에게 협조하겠다는 말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레이디 이사벨라.”
성진은 그녀의 손을 얼굴 가까이로 살짝 들었다 놓아주었다.
“아무쪼록 앞으로도 아멜리아 누님의 일에 많은 도움을 주리라 기대하겠어.”
그렇게 점잖은 인사를 건네며 한쪽 입꼬리를 씨익 끌어올리는데, 이사벨라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하게 질리는 게 아닌가!
“히, 히끅! 히끅!”
“……?”
눈에 띄게 부들부들 떨기 시작하는 이사벨라를 보며, 성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당분간 살려준다는데. 아니, 저 녀석은 왜 잘해줘도 저렇게 쪼는 거야?
[너 제발, 남들에게 웃어 보이기 전에 먼저 거울을 한번 보지 그래?]뭐라는 거냐. 어쨌든 대놓고 협박은 안 했잖아? 그럼 된 거 아닌가.
[…방금 그게, 누님의 노예가 되어 알아서 기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협박이 아니었다고?]닥쳐라, 이 얻어먹은 곰고기 값도 못 하는 배은망덕한 마왕 놈아!
넌 대체 누구 편이냐? 어?
* * *
그날 밤.
독침 사건을 의논하느라 늦게까지 볼란타 부족에 머물렀던 오웬은, 평소보다 조금 늦게 판게아 클로니클에 접속했다.
일행과 만나는 접선 장소에 도착하니, 늘 보던 친구들과 최근 합류한 두더쥐 공학자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오웬, 오늘은 좀 늦었군요.] [어서 옵니다! 기다리고 있는!] [반가워, 친구!] [여, 다들 기다려 줬구나!]오웬은 쾌활하게 손을 흔들며 자리에 착석했다.
[근데 뉴비는?]그러자 구릅이 대뜸 머리카락을 들어 식당 반대편 구석을 가리킨다.
오웬이 돌아보니 과연, 구석자리 창가에 오도카니 앉아 멍하니 밖을 바라보는 작은 산양이 보였다.
[이성진은 아까부터 뭔가 생각할 것이 있다고 했다!] [다 모이면 부르라고 했습니다만, 어쩐지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아 건드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래?]그들의 말대로, 아기 산양이 휘감고 있는 공기는 어딘가 진중하다 못해 무겁기까지 했다.
‘뉴비 주제에, 간혹 답지 않게 저렇게 무게를 잡는단 말이지…….’
삐걱.
오웬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산양을 향해 다가갔다. 조금은 녀석을 우려하는 마음을 가지고서.
‘뉴비 녀석. 혹시라도 무슨 걱정이 있나? 그렇다면 혼자 끙끙거리지 말고, 모두에게 속 시원하게 털어놓으면 좋을 텐데.’
한편. 모두의 걱정과는 달리, 성진은 그저 이런저런 것들을 의식의 흐름대로 떠올리며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곧 뭔가가 일어날 것만 같다는 묘한 예감에 젖은 채로.
‘이사벨라가 그랬지. 동일한 코드는 언제나 동일한 염상을 만들어낸다고…….’
그녀의 말을 빌면 그랬다. 규상세계의 형상은 곧, 완벽하게 정형화된 염상이라는 것.
그 본질은 역시 견고한 염상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도 얼마 전 그런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있어.’
아마도 성진이 새벽에 불쑥 찾아갔던 날일 거다.
성황은 오래전 베르트랑 거리에서 이름을 떨치던 한 마법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단 논란에 휩싸여 자취를 감추기 전까지는, 황도의 명물로 인기를 얻었었다고.
-그자는 손에서 오색의 불을 뿜어내는 위력적인 마법을 선보이곤 했지. 꽤나 장관이었느니라.
-하지만 이 세상에 마법이란 건 없지 않습니까?”
당시 성진은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적어도 그는 델크로스 본상차원에서 ‘마법’이라 할 만한 현상을 본 적은 없었으니까.
심지어 마법의 물품이라 알려진 황궁 보고의 물건들도, 하나같이 이오니아에서 만든 규상세계의 물건들일 뿐.
아니나 다를까, 성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실제로 그자는 능숙한 오러 유저였다. 약물을 배합하여 만든 불꽃을, 외기와 동시에 일으켜 사람들을 현혹시켰을 뿐이니라.
-뭐야. 그건 그냥 사기 아닙니까?
성진이 어이없어 하는데, 성황이 희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언제나 이것을 잊지 말거라, 모레스. 모든 세계에는 이런 오러와 같이 근본적인 바탕이 되는 힘이 존재한다. 만일 네 눈에 발군의 힘처럼 보이는 불가사의한 현상이 보인다면, 언제나 그 기저에 무엇이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하거라.
그래.
성진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세계에는 마치 게임과 같은 마법이 있고. 오러와 같은 특수 스킬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 근본은 모두 염상일 뿐이야. 오직 그것이 전부이지.’
마치 예전 틈새에서 보았던 아버지의 참연어처럼.
검은 유스티티아를 불태웠던 나의 마왕 2호처럼.
화르륵.
어느 순간 성진의 눈앞에 선명한 불꽃이 솟아오른다. 마왕처럼 작고 보잘 것 없지만, 한번 불이 붙으면 절대 꺼지지 않는 검붉은 겁화.
바로 마왕 2호였다.
[헉? 뉴비야!]다가오던 오웬이 기겁하며 달려오고-
[마법? 마법이다?] [이성진! 누군가의 공격입니까? 하지만 여기는 그린 존인데?]다른 침묵 빌런들 역시 화들짝 놀라 성진을 바라본다.
“하하하…….”
생각보다 수월하게 일어나는 현상에, 성진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오라클에 의해, 정형화된 염상이 쉽게 실체화되도록 구성된 것이 규상세계라면…….’
내 의식 속에서 완전히 정형화 된 마왕 2호 또한, 쉽게 나타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