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313)
성황의 아이들-313화(313/469)
313. 물밑 (4)
성진 일행은 순식간에 보스 룸에 도착했다.
‘오크왕의 미로’처럼 갈림길이 있는 것도 아닌 터라, 이번만큼은 그들도 외길을 달리며 정석대로 던전을 공략할 수 있었다.
[순위권은 확실하고, 잘하면 이번에도 1위를 노릴 수 있겠어.]덱스터가 창을 이리저리 살피며 말한다.
지금까지의 타임 챌린지 성적은 대단히 준수했다. 덱스터의 공략이 주효했던 데다, 성진이 던전 초입에서 시간을 대폭 줄인 영향도 컸으리라.
[아까도 설명했듯, 이곳의 보스는 다양한 정신계 마법을 구사해. 그중에서도 유저를 한 방에 빈사로 만드는 궁극기가 세 개나 되지. 그러니까 모두들 마녀의 공격 범위 내에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덱스터는 설명을 하다 말고 문득 성진을 돌아보았다. 긴장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태평한 아기 산양을.
“왜?”
“음, 아무것도 아냐…….”
덱스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열쇠를 집어들었다.
‘굳이 자세한 브리핑이 필요할까? 저 녀석이라면 벌써 보스에 대해 전부 숙지하고 있을 텐데.’
게다가 사기적인 즉사기 역시 이쪽이 한 수 위지 않은가.
[…가자!]보스 룸의 열쇠가 꽂히고 거대한 석문이 열린다.
드르르르-
내부 기관이 움직이는 둔탁한 소음과 함께, 문틈으로부터 스산한 바람이 새어 나왔다.
우우우우우…….
이어서 들려오는, 신음인지 울음인지 분간할 수 없는 음울한 소리.
풀풀 날리는 회색 먼지와 함께, 웅크리고 있던 거대한 던전 보스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이윽고 일행을 향해 똑바로 선 것은 미이라처럼 비쩍 마른 거대한 여인이었다. 희게 분칠한 얼굴과 시커먼 눈두덩이가, 마치 썩어 들어가는 시체인 양 기괴하기 짝이 없다.
[…B랭크 보스, 회한의 헥센자바트야.]꿀꺽.
덱스터가 마른침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그는 저도 모르게 다리를 후들거리며 뒷걸음질 치는 중이었다.
왜 아니겠는가.
헥센자바트가 풍기는 불길함. 그것은 오크왕 라이가스가 뿜어내던 거센 박력과는 또 다르게, 슬금슬금 몸을 잠식해나가는 질식할 듯한 공포감을 불러일으켰으니.
-썬더스톰 본…….
삐그덕.
마치 고장난 인형처럼 휘청거리며, 헥센자바트가 일행을 향해 다가온다. 놈이 한걸음 한걸음 발을 옮길 때마다, 낡은 레이스로 뒤덮인 모슬린 드레스에서 자욱한 먼지가 일었다.
-이 세상을 가차 없이 죽이고, 또한 죽음으로부터 잔인하게 소생시킬 자여. 대체 너는 무엇을 바라기에, 회한만이 가득한 이곳까지 찾아왔는가?
낡은 쇠를 긁어내듯 기분 나쁜 목소리.
아마도 메인스토리에 관한 이야기리라.
하지만 단지 주어진 대사를 읊조린다기에, 헥센자바트에게서는 어딘가 강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성진은 찬찬히 보스의 움직임을 살피다, 곧 그 위화감의 원인을 찾아냈다.
‘눈…….’
그래. 깊은 이지가 느껴지는 헥센자바트의 눈이 성진을 향해 똑바로 고정되어 있다. 라이가스와 마찬가지로, 이 역시 일반적인 보스 몹의 반응이 아닐 터.
그것을 깨달은 성진이 한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내가 할게. 굳이 오래 때리고 있을 필요는 없겠지.]보스 몹들의 이상한 반응. 지금까지는 단순히 암흑의 유스티티아가 벌인 일이라 생각했었지.
하지만 그것이 완전히 힘을 잃은 지금에도 이러는 걸 보면, 이들의 기이한 반응에는 뭔가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좋은.] [그럼 부탁합니다, 이성진.]일행은 대번에 성진의 말을 알아들었다. 지나치게 처절했던 오크왕 라이가스의 최후를 떠올린 것이리라.
모두가 보스 룸의 입구로 물러서자, 성진은 힐끔 오웬의 얼굴을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성진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평소와 달리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다.
‘설마 이제 와서 불을 무서워하는 건 아닐 텐데…….’
오크 마법사가 거대한 화염구를 날려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달려들던 녀석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이곳에 오기 직전에는, 함께 모닥불을 피우고 공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던가. 도무지 저러는 원인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더는 잃을 것이 없으나, 깊은 원한만은 가슴에 남아 있구나. 네 정녕 세상을 짊어지려 한다면, 이 세상의 원망과 회한, 그리고 분노마저 능히 감당해야 할 것을.
그사이에 꽤 가까워진 헥센자바트는 대단히 성의 없는 대사를 읊조리고 있다. 잠시 망설이던 성진은 곧 마음을 굳혔다.
‘그래. 고작해야 7초.’
오웬에 관해서는 천천히 알아보자.
일단은 빠르게, 그리고 곱게 보스부터 죽여주지.
“…용암지대.”
작은 시동어가 내뱉어짐과 동시에-
화르르륵!
입구 일부를 제외한 보스 룸 전체가 시뻘건 용암으로 둘러싸였다. 범위 제한이 딱히 없는 사기적인 장판기.
덜컥!
순식간에 헥센자바트의 HP 30%가 날아간다. 불길에 완전히 갇혀버린 늙은 마녀가, 그 대단하다는 마법을 펼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성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무자비한 친절이로다…….
2초.
정해진 대사 읊기는 완전히 포기했는지, 헥센자바트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성진에게 말을 걸어왔다. 희게 떠있는 얼굴 위로 휘어지는 검은 입매가 참으로 괴이하기 짝이 없다.
-그리 애석해 마오.
4초.
그럼에도 그녀의 모습은 성진으로 하여금 묘하게 서글픈 감상을 불러 일으켰다. 불길에 휩싸여 타들어가는 얇은 드레스자락이, 마치 날개라도 된 양 하늘거린다.
-이 끝에 기다리는 것이 무언지, 이제 나는 알…….
7초.
HP가 곧장 0에 이른다.
화아악.
보스가 빛으로 화해 완전히 사라지고, 바닥에서 끓어오르던 용암 지대도 순식간에 자취를 감춘다.
보스 룸은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허무한 울림만을 남긴 채 텅 비고 말았다.
[…….]성진과 일행은 헥센자바트가 사라진 허공을 바라보며 잠시 침묵에 잠겼다.
조금의 위기도 없이 쉽게 던전을 클리어 한 셈이지만, 그들 중 기쁨의 기색을 내비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참으로 묘한 기분이군요.]이윽고 하타수 티티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저들은 단지 던전을 이루는 하나의 구성품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어째서인지, 저는 때때로 저들이 정말로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곤 하는 겁니다.]그러자 구릅 역시 고개를 끄덕인다.
[이해를 가졌다. 나 역시 이상한! 보스의 죽음을 접하니, 내장의 깊은 곳이 먹먹하게 울려온다!]이쯤 되니 성진은 대단히 궁금해졌다.
대체 구릅의 내장이란 건 뭐 하는 기관이지? 단순한 소화 기관이 아닌 걸까? 아니면 번역의 문제라든가?
[자, 다들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고.]뾰옥!
성진은 발굽을 맞부딪혀, 어쩐지 침울해진 일행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다들 인벤토리의 여유나 제대로 확인해. 이번에는 제법 보상이 좋을 테니까.]유스티티아를 직접 닦달한 것도 있고, 순위도 상당히 높을 거거든.
이제부터는 그 결과를 직접 확인할 때였다.
* * *
[1등이야! 이번에도 1등이라고!]덱스터가 창을 들어다보며 흥분된 목소리로 외쳤다.
[2위와의 시간차도 제법 큰데? 한동안 우리 기록이 깨질 것 같지는 않아!]아마도 당연한 결과리라. 보스를 무려 7초 만에 잡았으니까.
덕분에 그들이 받은 보상 역시 화려했다.
[황금사자 방패! 붉은사자 시리즈를 능가하는, 현존하는 최고의 방어구가 나왔습니다!]방패 전사 하타수 티티가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황금사자 활! 최고의 활이 왔다! 사용하는 데도 문제없습니다. 이제 덱스터가 강화해 준다!]레인저인 구릅 역시 팔다리를 구불텅거리며 춤을 췄다.
[오, 황금사자 도끼! 오랜만에 대단히 희귀한 무기가 나왔는데?]도끼전사 오웬 역시, 좋은 무기를 받고는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음? 근데…….]파티원들의 성과에 덩달아 함박웃음을 짓고 있던 덱스터의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그는 인벤토리를 심각한 얼굴로 들여다보더니, 이윽고 그곳에서 황금빛으로 빛나는 스태프 하나를 끄집어냈다.
[황금사자 스태프…….]일행이 뭔가 이상함을 느낀 것은 그때부터였다.
[뭐지? 이게 본래 이렇게 자주 나오나?] [하루에 하나 드랍되기도 어렵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래서 경매장에 올라오기 무섭게 팔려나간다고요.] [게다가 획득한 유저의 클래스를 매번 얄밉게도 피해 간다고 하던데…….] [뭐다? 어떻게 이렇게 딱딱 맞는? 이거 혹시 버그다?]머리를 맞대고 웅성거리던 일행들이,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아기 산양을 돌아본다.
때마침 성진은 인벤토리에서 막 금빛의 검을 꺼내드는 중이었다.
[오, 황금사자 검! 역시 좋은 무기는 다르구나! 무강화인데도 풀강 초보자용 검보다 훨씬 성능이 좋은데?]희희낙락하던 성진이 문득 일행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뭐? 왜? 뭐?] […….] [다들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마. 우리 타임 챌린지 1등 했잖아? 이 정도는 나와 줘야지.]그, 그런가?
뻔뻔한 성진의 태도에, 일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들은 이내 각자의 인벤토리에 정신이 팔렸다. 남은 보상들 역시 대단히 만족스럽기는 마찬가지였으니까.
[온통 희귀한 포션들뿐입니다. 쓸데없는 잡동사니들 대신 이렇게 많은 포션이 나오다니! 이 정도면 한동안 일족의 땅은 문제없습니다!] [그거 신기하다? 나는 온통 귀속 무기들뿐인데? 일단 좋습니다! 모두 들고 돌아가서 동료들과 나눈다!] [그래? 나는 아이템보다 캐시가 잔뜩 나왔어.]오직 게임 상식이 있는 덱스터만이, 대단히 미심쩍은 눈으로 성진을 살필 뿐이다.
하지만 성진은 그를 제대로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막 오웬에게 뭔가를 건네던 참이었으니까.
[자. 이거 받아. 이상한 게 나왔는데, 나한테는 필요 없으니까.] […응?]정신없이 보상을 확인하던 오웬은 아기 산양의 말에 아무런 의심 없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차가운 얼음 덩어리가 만져지자, 그것을 손에 쥐고 멍하니 눈을 끔벅거렸다.
[이게 뭐… 으억?]별생각 없이 아이템 정보를 확인하던 오웬이 화들짝 놀라며 괴상한 비명을 질렀다.
뭐야? 그 시답잖은 반응은?
[이, 이건……!] [왜 그러십니까, 오웬?] [뭐다? 나도 본다.]침묵 빌런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다가온다. 덩달아 오웬의 손으로 시선을 돌리던 덱스터가 으힉, 하고 헛숨을 들이켰다.
“잠깐, 이성진! 저걸 왜 저 친구에게… 끄학!”
당황해서 소리치던 덱스터는, 이내 성진에게 발을 세게 밟히고 데굴데굴 바닥을 굴렀다.
“끄아아아……!”
그러는 사이에 침묵 빌런들이 잔뜩 흥분하여 소리쳤다.
[이것 봐! 정말 얼음 심장이야!] [설마 그 귀하다는 전직 아이템입니까?]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다?]모두가 설명을 바라는 눈으로 아기 산양을 바라본다. 하지만 성진은 여상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을 뿐이었다.
[그러게. 그게 정말 나와 버렸네. 나는 필요 없지만, 오웬 너한테는 필요하지 않냐? 너, 여신을 만난다며?]그러자 오웬이 떨리는 눈동자로 성진을 바라보았다.
[저, 정말… 이런 귀중한 걸 나한테 줘도…….]아, 뭐래? 나한테는 쓸모없다니까?
성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휘휘 저어 보이자, 침묵 빌런들이 오웬의 어깨를 두드리며 각자 축하의 말을 던졌다.
그럼에도 오웬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하타수 티티와 구릅을 차례로 돌아보았다.
[다들… 모두 함께 던전을 돌았는데, 정말 이걸 내가 가져도 괜찮을까?] [이성진이 얻은 물건입니다. 그것을 처분할 권한은 당연하게도 이성진에게 있습니다.] [옳은! 나는 전직하지 않는다. 여신, 만나지 않는다.]그 사심 없는 대답에, 오웬이 잔뜩 감동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모두… 고마워!]그렇게 해서 오웬은 서둘러 여신을 만나기 위해 퀘스트 창을 조작했다. 그리고는 곧 흔적도 없이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미리 받아놓은 전직 퀘스트를 완료하자 보상 존으로 자동 이동된 것이다.
아마도 여신을 만나고 나면 본래의 장소로 돌아오게 된다는 모양. 그래서 성진과 침묵 빌런들은 잠시 보스 룸에 앉아 오웬을 기다렸다.
[정말 잘된 일입니다.] [솔직히 고백한다. 오웬은 영원이 이곳을 떠나지 못할 줄 알았다.] [끄응… 아이고, 내 발!]그런데 잠시 후, 다시 스르륵 보스 룸에 나타난 오웬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았다.
[오웬! 여신을 만났다?] [무슨 일입니까? 왜 그러십니까?]“훌쩍…….”
오웬은 입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눈물까지 글썽이는 그의 모습에, 기함한 성진이 이를 갈았다.
‘뭐야? 유스티티아 이 자식! 제대로 조건을 들어달랬잖아! 대체 저 녀석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하지만 그것은 성진의 기우였다.
“드디어…….”
이윽고 입을 연 오웬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사념으로 말하는 것도 완전히 잊은 듯, 동요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였다.
“드디어 갈 수 있어! 퀘스트가 완료되고, 새로운 퀘스트를 받았단 말이야!”
…뭐?
모두가 어리둥절해 있는데, 번쩍 고개를 든 오웬이 기쁨이 겨운 목소리로 외쳤다.
“무려 황도로 가는 퀘스트라고! 알아? 나, 드디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