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317)
성황의 아이들-317화(317/469)
317. 변화 (2)
자코모 밀로 사건의 공판일이 정해졌다.
죄인은 아직 검거되지 않았지만,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사실상 그의 사형은 이미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고, 밀로 상단의 정리 또한 모조리 끝나가고 있었으니까.
재판이라기보다는, 놈의 처분에 대한 공표나 마찬가지일 뿐.
“로건 황자님 덕분에 현재 죄인들의 심문은 아주 순조롭습니다. 이대로라면 아마도 공판일 전에, 자코모 밀로의 추가 죄목과 증거들을 더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퀴지터 발레리의 보고를 듣고 있던 로건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발레리 경이 말하는 ‘순조로운 심문’이라는 것이, 피와 비명으로 점철된 끔찍한 과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현재 심문받고 있는 죄인들의 운명은, 실제로는 로건의 지목으로 인해 극명하게 갈린 것이나 마찬가지.
하지만 발레리 경은 눈치도 없이 싱글싱글 웃으며 덧붙였다.
“저하께서 혐의자 수를 대폭 줄여주지 않으셨습니까? 덕분에 한동안 바빠질 거라 긴장하고 있던 심문관들이 완전히 맥이 빠졌지 뭡니까.”
“…….”
“그 대신이라고 하긴 뭣하지만, 약 오른 심문관들이 소수의 죄인들에게 더 시간과 정성을 할애하며 고문에 집중하고 있… 끄헉?”
기습적으로 세게 발을 밟힌 날라리 인퀴지터가 바닥을 구른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마물 전담반의 모두가 화들짝 놀라는 가운데, 성진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발레리의 보고서를 낚아채며 타박했다.
“실없긴. 그게 일부러 보고할 만한 일인가? 발레리 경. 요점만 간단히 해. 애초에 자넨 쓸데없는 말이 너무 많다고.”
“아니, 저하…….”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확인할 테니, 자네는 이만 쉬어.”
한동안은 운신이 힘들 거야. 내가 오러를 실어서 좀 세게 밟았거든. 물론 자네에게 별다른 사감이 있는 것은 아니네.
칙칙-
지브릴 의원이 발레리 경의 발에 애꿎은 향수를 뿌려주는 동안, 성진은 보고서를 휙휙 넘기며 주요 사항을 확인했다.
은총의 기사를 날조하는데 집중했던 덕일까, 이제는 이 정도의 공식 서류는 막힘없이 읽을 수 있는 문해력이 생겼지.
그러던 중, 죄수들의 자백 기록에서 유난히 성진의 시선을 잡아끄는 대목이 있었다.
“어? 여기 작업장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작업장?”
“응. 한 달에 한 번 상단주로부터 원료 같은 걸 받았대. 그걸 작업장이라는 곳에 전달했지만, 정작 자신은 뭐에 쓰는 건지 몰랐다나?”
“상단에서 자체 제작‧유통한 물품이 있다는 말이군.”
성진은 지금까지 보고받은 내역들을 찬찬히 상기해 보았다. 밀로 상단이 취급하던 품목이나, 거래 내역은 전부 파악되어 있다. 오로지 입수 경로를 밝히지 못한 물품은 단 하나뿐.
그러자 로건은 성진이 하고 싶은 말을 빠르게 눈치챘다.
“…약차 건이구나.”
“어, 역시 그런 것 같지?”
이제까지 약차의 입수 경로는 신기하리만치 베일에 싸여 있었다. 지그스문트령에 한정해 소량 공급했던 데다, 상단 내에서도 차의 출처를 아는 자가 없었기 때문.
그나마 기대할 만한 곳은, 지그스문트와 밀로 상단의 독점 거래를 처음 주선한 스카르차피노 가문이었다.
‘오르덴이 처음 약차 건을 의뢰했을 때만 해도, 분명 유통 초기에 리카르도 스카르차피노로부터 직접 물건을 전달받은 정황이 있다고 했었지…….’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이제까지의 강도 높은 조사에도 불구하고, 밀로 상단과 스카르차피노를 연관 지을 증거가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마치 누군가가 중간에서 흔적을 싹 지워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물론 시구르트 시구르슨이 그리 허술하게 일을 처리하지는 않았겠지만…….’
자코모 밀로의 수배령이 떨어진 것은, 놈이 예기치 않게 리카르도와 이사벨라를 버리고 도주한 이후의 일. 절대로 놈의 소행일 리가 없다.
짐작건대 스카르차피노의 입김이 닿아있으리라. 대륙 최고의 부호인 스카르차피노 가문이, 악마 계약자의 죄목에 연루될 가능성을 사전에 없애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겠지.
어쩌면 거기에는 또, 권세 높은 가문을 굳이 들쑤시고 싶지 않았던 이단 재판부 내부의 조력이 있었을지도 모르고.
‘누구냐? 스카르차피노의 누가 손을 쓴 거지?’
그때 문득 성진의 뇌리에, 탄신연 행사에서 마주쳤던 스카르차피노의 장자 도미니코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이사벨라와 닮은 듯 닮지 않은, 냉정하기 짝이 없는 그 얼굴이.
‘일단은 그 자식 쪽을 건드려 볼까.’
잠시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던 성진이 입을 열었다.
“어쨌든 약차에 대한 단서라고는 이것뿐이니까. 공판일 전까지는 이 작업장이라는 곳을 좀 더 파 봐야겠어.”
그러자 로건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그 건은 내가 조사해 보지.”
“어, 네가? 너 바쁘지 않냐? 기사단 일은 어쩌고?”
“그럭저럭 병행할 수 있어. 잠을 좀 덜 자고 틈틈이 처리하면 되니까. 릴리움의 기사들도 옆에서 많이 도와주고 있고.”
“…….”
어이가 없어진 성진이 멀뚱히 로건을 살폈다. 그렇지 않아도 신성력과 오러만 믿고 과로하는 놈이, 여기서 더 일거리를 늘린다고?
“게다가 이렇게 꼭꼭 숨겨져 있는 걸 보면, 아마 공개적으로 수사한다고 해서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은 아닐 거야. 인퀴지터들을 동원하는 것보다 내가 혼자서 움직이는 쪽이 빠르겠지.”
물론 로건은 마기에 대단히 민감하고, 거짓말도 귀신같이 알아채긴 하지. 게다가 데카론 나이트니까, 그 어떤 베테랑 정보원들보다도 기척을 잘 지우며 숨어들 수 있을 터.
하지만 기분 탓일까? 어쩐지 이 녀석이 무리하게 조사를 서두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성진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요즘 뭐가 그렇게 급해? 너, 무슨 일 있어? 혹시 또 황도 밖으로 토벌하러 가냐?”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로건이 움찔 놀라며 성진을 바라보았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
…뭐? 정말이야?
“아직 결정된 사항은 아니다. 하지만 요즘 키프로스 연합에서 해상 마수 퇴치 요청이 꾸준히 들어오고 있어. 아무래도 당장 가볍게 움직일 만한 전력이라면 역시 릴리움 별동대니까, 내가 토벌대를 꾸리는 건 기정사실이 될 거야.”
“…….”
“조만간에 성회에서 정식 인가가 나면, 나도 그 준비로 지금보다 더 바빠지겠지. 그래서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마무리 지어 놓고 가야겠다 싶어서.”
“아니, 이 큰 제국에 인재가 너밖에 없어?”
정말 어처구니가 없네.
칠순이니 어쩌니 혼자 주장하긴 하지만, 로건은 누가 보더라도 아직은 새파랗게 어린 애라고! 집에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그 멀리까지 토벌을 보내?
“다른 놈들더러 가라고 해! 탱탱 놀고 있는 기사단도 많잖아?”
그러자 로건이 당황한 표정으로 성진에게 주의를 주었다.
“이성진. 황자가 다른 사람 앞에서 그런 말을 하면 안 돼. 제국의 기사들은 모두가 각자 주어진 임무에 성심성의껏 임하고 있다. 그들의 노고를 모욕하지 마.”
“뭐? 네가 지금 다른 기사들 입장을 생각할 때야?”
“뿐만 아니라 제국의 입장도 걸려있다. 잘 생각해 봐. 키프로스 연합 정도 되는 거대 해상 세력이, 굳이 마수 토벌을 제국에 요청한다는 사실도 고려해야지.”
발끈한 성진을 다독이듯, 로건이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그들은 지금 어중간한 도움을 원하는 게 아니야. 실제 전력이야 어떻든, 대륙에서 가장 이름 높은 토벌대가 와주기를 바라는 거지.”
“토벌대의 명성이 더 중요하다고?”
“그래. 그래야만 도움을 청한 쪽에서도 체면이 서고, 제국도 그들로부터 정치적 우위를 손쉽게 고수할 수 있는 거야. 타국에서 릴리움 별동대의 명성은, 제국의 명성 그 자체나 다를 바가 없으니까.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던 로건이, 희미하다 못해 조금은 서글퍼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오르토나 난민들 중 많은 수가 키프로스에 유입되었다는 사실도 내게는 중요해. 그들은 어업의 최하층에 종사하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해상마수를 토벌하여 어업을 안정시키는 것은, 결과적으로는 그들을 위한 일이기도 한 거야.”
“…….”
성진은 완전히 말문이 막혔다. 로건의 설명을 납득했기 때문이 아니다. 아까보다 더더욱 어이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아니, 네가 뭔데? 대체 왜 너 혼자서 제국의 명성과 망국의 백성들을 모두 짊어지고 있어?’
그게 한 사람에게 가당키나 한 무게야? 너처럼 재능 넘치는 녀석이, 인생을 채 피워보지도 못하고 철저히 매몰되어버릴 정도의 가치냔 말이야!
기껏 새로운 삶을 얻었잖아! 아버지의 위세에 기대면서, 황자라는 신분을 즐기면서, 조금은 스스로의 안위를 위하며 살 생각은 없어?
성진은 도무지 로건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저 속에서 솟구치는 짜증스러운 심정만이, 그를 향한 여과 없는 비난으로 표출되었을 뿐.
“…미련하긴.”
“응?”
“너 말이야, 인마! 너 진짜 미련하다고!”
“…….”
그러자 로건이 눈을 깜박이며 성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쩐지 성진의 말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낀 까닭이다.
하지만 생각은 그리 길지 않았다.
-당신이 쓸데없이 미련하다는 말입니다.
오래전, 자신을 향해 날 선 목소리로 미련하다 비난하던 소년. 그때와 똑같은 회색의 눈동자를 가진 소년이, 바로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지 않은가.
“하하.”
로건은 어딘가 후련해 보이는 표정으로 웃었다.
“그 말은 정말이었나 보네. 예전에 누구한테서 또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거든. 아직까지도 평가가 그대로인 걸 보면, 사람은 여간해서는 쉽게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물론 그 태평한 반응에, 성진의 속이 더 뒤틀린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웃지 마, 이 자식아!
“샤론 경!”
성진의 갑작스러운 호명에, 한창 고개를 처박고 서류와 씨름하던 엑소시스트가 시선을 들었다. 언제나처럼 눈가에 다크서클이 진하게 내려앉은 초췌한 모습.
“예에, 저하?”
“경은 자코모 밀로의 공판일이 지나면 한동안은 한가하지?”
“네에. 아마도 그렇습니다. 물론 저하께서 따로 일을 시키지 않으신다면 말입니다만…….”
“좋아. 그럼 경에게 새로운 임무를 주지.”
성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단호하게 말했다.
“경에게 키프로스 해상 마수들에 대한 조사를 명한다. 릴리움 별동대를 따라가라. 가서 해상에서 나타나는 마수들에 대해, 자네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조사해 오도록!”
“…네에?”
마수 조사라니?
뜬금없는 성진의 지시에, 엑소시스트가 당황하며 눈을 끔벅거렸다.
“저기. 저하…….”
그때 구석에서 신성력으로 스스로의 발을 치료하고 있던 빨강머리 인퀴지터가 손을 들어올렸다.
“외람되오나, 마물 전담반은 엄연히 담당 분야가 정해져 있는 부서입니다. 바로 [마물] 전반에 대한 것이지, 마수들에 대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물론 저희들이야 저하의 명을 따르는데 조금의 주저함도 없습니다만, 다른 기사단과의 협조는 조금 다른 문제입니다. 해수 토벌에서 우리가 맡는 업무를 제대로 명시하고, 토벌대와의 공조 관계 역시 명확히 하지 않으면 차후에 큰 문제가 생길 겁니다.”
분명 일리 있는 지적이었다.
자코모 밀로의 재판 문제만 해도 그렇지. 지금 이단 재판부 쪽에서는, 악마 계약자 사건에 마물 전담반이 은근슬쩍 끼어든 걸 두고 얼마나 못마땅해하고 있는가.
“무슨 헛소리야? 발레리 경. 나를 뭘로 보나? 내가 사사로운 목적으로 행정부 산하 부서를 마음대로 부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그럼 아니십니까?
차마 그렇게 되묻지 못한 발레리 경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성진은 당당했다.
“해상 마수의 조사는 마물 전담반 일의 연장이다. 당연하지 않나.”
“…네?”
“자, 잘 생각해 봐. 발레리 경. 지금까지 나타난 해상 마수들이 정말로 마수인지, 아니면 아직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마물인지, 그걸 자네가 어떻게 장담하지?”
“네? 저하. 하지만 마수는 마수입니다. 해상 마수들은 예로부터…….”
“전부터 마수라 알려져 있으니 마수일 거라, 그건 대단히 편협한 시각이다. 일례로 글래쳐 트롤만 해도 그래. 오랜 세월 마경의 마수로 분류되었지만, 지금도 그것이 단순한 마수라고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말할 수 있나? 일단 놈들에게는 마기가 전혀 없는데?”
“…어?”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자신감이 사라진 인퀴지터에게, 성진이 냉랭한 어조로 쐐기를 박았다.
“발레리 경. 이계 묵시록의 열람이 허락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어. 이제야 겨우 성회가 경전 해석의 한계를 인정하고, 마수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삿된 것들에게 [마물]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거야.”
“…….”
“하면 마물 전담반의 궁극적인 임무는 무엇이겠나? 아직도 우리가, 단순히 마물 관련 사건의 뒤처리를 하는 부서에 그친다고 보나?”
어느샌가 발레리 경은 물론이거니와 로건과 샤론 경, 심지어는 지브릴 의원까지 압도된 표정으로 성진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니, 절대 그렇지 않아. 우리는 지금 아무도 걸어보지 않은 지평에 발을 디디는 선구자나 마찬가지네. 그러니 우리 부서의 진정한 임무는 바로, 마수와 마물의 모호한 경계를 명확히 하고, 다른 이들에게 그 기준을 제시하며 나아가는 것이 아니겠나?”
그때 머릿속에서 한숨과도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최근에 말수가 부쩍 줄어든 마왕 놈이었다.
[헛소리에 이 정도로 크게 공을 들이는 미친놈은 또 처음 보네…….]닥쳐!
성진은 내심 찔렸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발레리 경에게 덧붙였다.
“어때? 자네도 샤론 경을 따라갈 텐가? 현재 [이계 묵시록]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건 발레리 경, 자네니까 말이야. 아무래도 마물과 마수를 비교 분석하는 데 가장 뛰어나지 않겠어?”
“어…….”
날라리 인퀴지터가 솔깃한 표정을 짓는다.
“……?”
그렇게 모두가 긴가민가하고 있는 동안, 성진은 아직도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로건을 의기양양하게 바라보았다.
자, 로건. 그러니까 너도 이번에는 샤론 경과 아버지를 달고 가 봐라.
네가 쓸데없이 과로하거나 허튼짓할 때마다, 아마 아버지가 기꺼이 너에게 딱밤을 때려 주실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