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318)
성황의 아이들-318화(318/469)
318. 변화 (3)
졸지에 마물 전담반 인력 절반을 장기 출장 보내게 되었다.
그럼에도 성진은 어째 마음이 편치 않았다. 로건이 해수 토벌을 위해 매년 바깥을 나돌았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이번 토벌행은 유난히 찜찜하다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신경 쓰이면 너도 같이 가면 되잖아?]답답한 황도를 벗어날 구실이 생겨서일까, 마왕 놈이 넌지시 물어왔다.
‘뭐, 마음 같아서는 나도 그러고 싶지만…….’
하지만 성진에게는 아직 정리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자코모 밀로의 공판 전에, 놈을 잡을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겠지. 지그스문트 변경백의 꿍꿍이도 따로 조사를 해야 하고.
어디 그뿐인가. 다샤에게 맡겨 놓은 이적 단체 조사들도 슬슬 가시적인 성과를 보이는 중이다.
‘게다가 로한의 레오나드…….’
가장 마음에 걸리는 건 역시 그놈이었다. 누님의 곁을 맴도는 기분 나쁜 양아치 자식.
지난 탄신연에 성진에게 과하게 친한 척을 한다 싶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황도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만남을 요청하는 서신을 하루가 멀다 하고 보내오고 있다.
아멜리아 누님에게 불순한 마음을 품고, 성진이 중간에서 다리를 놓아주길 바라는 것이 눈에 빤히 보였다.
‘역시 지금은 내가 황도에 있어야 해. 조만간 오웬도 돌아올 테고 말이지.’
[오웬? 1황자 말이야? 걔가 돌아오는 걸 네가 어떻게 알아?]‘어, 그런 게 있어.’
대충 대꾸한 성진은 가만히 미간을 찌푸렸다.
아, 정말 찜찜하다. 아무래도 불안해. 뭔가 방책을 더 강구해야 하는데 말이지.
* * *
그런데 의외로 그런 예감을 받은 것은 성진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짬이 나, 시슬레의 수련이나 들여다볼까 하고 찾은 성 마르시아스 기사단의 연무장.
까앙!
입구에 채 도달하기도 전에, 굉음과 함께 힘차게 허공으로 날아가는 갑옷이 보인다. 아마도 시슬레가 한창 수련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모양.
“우와! 정말 멋져요, 시슬레 님!”
연무장 한쪽에서는, 신이 나서 응원하고 있는 서이서가 보였다.
쟤는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명색이 성녀인데, 변변한 공식 일정도 없나?
“…아? 모레스 오라버니!”
그때, 멀리서 성진의 기척을 알아챈 시슬레가 플레일을 붕붕 휘두르며 살벌한 인사를 건네 왔다. 그새 꼬맹이의 기감이 부쩍 좋아졌단 걸 알 수 있었다.
“요즘 전담반 일로 바쁘지 않아? 여긴 어쩐 일이야?”
“음, 그냥 지나가다가 들렀어.”
못 본 사이에 시슬레의 수련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듯 보였다.
일단 꼬맹이는 거추장스러운 성녀복을 벗어던지고, 제대로 된 기사단 복장을 하고 있다.
거기다 조막만 한 손에 쥐인, 스파이크가 이리저리 튀어나온 흉흉한 플레일.
이전보다 한층 무거워 보이는 무기를 들고도 제법 자세가 안정되어 있는 걸 보니, 그간 꼬맹이가 얼마나 치열하게 수련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갑옷의 비거리가 평소보다 1.5배는 늘었습니다. 엄청난 힘이군요.”
“타격이 점점 정확해지시는 거지. 매일 늘고 있는데 뭘 새삼스럽게?”
“하지만 오늘은 유난히 힘이 들어간 느낌입니다. 성녀님께 무슨 고민이라도 생긴 걸까요?”
“그러고 보니 오러 운용에 전에 없던 조바심이 느껴지기는 하는군.”
가장 큰 변화라면 역시나 함께 수련하는 인퀴지터들일까. 그들도 어느새 이런 광경에 익숙해졌는지, 이제는 변변찮은 잡담을 할 정도로 여유가 생겨나 있었다.
그리고 성진은 시슬레로부터, 수련에 조바심을 내는 이유를 바로 들을 수 있었다.
“이번에 로건 오라버니를 따라가려고.”
“네가? 토벌대에 지원한다고?”
“응. 아직은 많이 부족한 경지지만, 토벌대 활동에 방해되지 않을 만큼은 된다고 생각해. 설령 기사 한사람분의 몫을 다 하진 못하더라도, 치유사로서 나름 토벌대에 기여하는 방법도 있고.”
“흠.”
“말릴 생각은 하지 마, 오라버니. 평소에 내가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는 건 다른 이유가 아니야. 다 이런 일에 대비하기 위해서라고.”
성진은 시슬레의 결연한 표정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물론 꼬맹이는 이전에도 성녀로서 봉사 활동을 다니긴 했지. 하지만 이번 토벌행 결정은 아무래도 갑작스럽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왜? 뭔가 예지몽이라도 꿨어?”
그러자 시슬레가 움찔 놀라며 성진을 바라보았다.
“아? 음,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럼?”
연이은 재촉에, 시슬레는 잠시 고민하는 얼굴을 하더니 이윽고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지금 내 상황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오라버니밖에 없겠지.”
“델크로스 연대기에 관한 거구나?”
“응. 맞아.”
최근 시슬레는 예지몽을 빙자한 악몽을 꾸지 않았다. 성진이 그것을 믿지 말라 강하게 충고하기도 했고, 오웬이 준 토끼 안대가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수년간 되풀이해서 곱씹었던 델크로스 연대기의 내용은, 아직도 시슬레의 뇌리 한편에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그거 알아? 오라버니가 마물 전담반 일을 시작하면서, 연대기와는 정말 많은 것들이 바뀌었어.”
시슬레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읽은 내용 중 북부에서 라이칸슬로프들이 준동하는 사건은 없었다고 한다. 대신 같은 기간에, 다수의 해상 마수가 키프로스 해안을 어지럽히는 일이 발생했다고.
그래서 연대기 속 로건은 지그스문트령에 가는 대신, 언제나처럼 토벌대를 꾸려 키프로스로 향했었다는 모양이었다.
“그게 이번에 문제를 일으킨 것들과 같은 마수들이야?”
“그건 알 수 없어. 연대기는 거의 황도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됐기 때문에, 간단한 토벌 결과만이 서술되어 있었을 뿐이거든. 하지만 시기가 비슷한 만큼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해.”
“토벌 결과는?”
“로건 오라버니가 하는 일이잖아? 물론 말끔히 정리하고 돌아왔어.”
그렇게 대꾸한 시슬레는, 조금 심각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토벌행에서, 오라버니를 열성적으로 따르던 릴리움 기사 두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고 해. 그래서 이후 로건 오라버니가 한동안 우울해했다고 되어 있지.”
“그래?”
열성적으로 따르는 기사들이라.
일단 떠오르는 건 극성맞은 오토, 엘리, 뒤상 삼총사 정도인가.
“어쨌거나 토벌대에서 사망자가 나오다니, 이례적인 일이군.”
릴리움 별동대의 명성이 그토록 높은 가장 큰 요인을 꼽자면, 단연 사상자의 수가 전무하다시피 하다는 것일 터다. 매년 솔선수범하여 대규모 해수 토벌을 시행하면서도, 기적이다 싶을 만큼 피해가 적은 것이다.
세간에서는 이를 두고, 주신의 축복이 릴리움에 함께하는 증거라 공공연히 떠들곤 하지. 물론 성진이야 로건의 진짜 무력을 잘 알고 있으니 당연한 결과라 여겼지만.
‘그런데 소드 마스터인 로건이 두 눈을 멀쩡하게 뜨고 있는데도, 릴리움의 기사들이 목숨을 잃었단 말인가?’
이것은 시사하는 바가 컸다.
델크로스 연대기가 어느 정도 현실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고 볼 때, 이번 해상 마수들의 준동이 매번 발생하는 평범한 난동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
어쩌면 그 규모가 보고된 것을 훨씬 웃돌고 있는지도 모르지.
“아니면 연대기에는 따로 서술되어 있지 않아도, 로건 오라버니 본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는 말일 수도 있는 거야.”
그렇게 말한 시슬레는, 맑은 회색 눈을 들어 먼 북동쪽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래서일까? 오라버니. 토벌대가 꾸려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자꾸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어. 저기 키프로스의 검은 해안에서, 기분 나쁜 뭔가가 로건 오라버니를 집어삼키려 몸을 도사리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
“물론 괜한 걱정일지도 몰라. 하지만 이대로 있기보다는, 뭐든 할 수 있는 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성진은 시슬레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역시 아까까지만 해도, 어딘지 불안한 예감에 초조해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방금 시슬레의 결정을 듣는 순간 깨달았다. 뭔가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고 있다는 것을.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게 뭐든, 네 눈으로 직접 보고, 또 막고 싶은 거구나.”
“응. 이럴 때를 위해 열심히 수련했어. 어디까지나 나를, 그리고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힘을 기르는 거니까.”
시슬레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아귀의 플레일을 꼬옥 움켜쥐었다.
강대한 신성력 덕에 여간해서는 상처가 생기지 않을 텐데도, 꼬맹이의 작은 손은 고된 수련으로 이미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거 알아? 처음에는 오라버니가 이 모든 변화들의 열쇠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어떻게든 옆에서 오라버니를 도와야겠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성 마르시아스 기사단에 들어오고, 매일을 수련에 매진하는 동안 점차 깨닫게 되었어.”
거기까지 말한 시슬레는, 고개를 돌려 성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저 누군가가 변화를 가져다주길 기다리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걸. 생각해보면, 델크로스 연대기를 바꾸기 위해 내가 가장 손쉽게 움직일 수 있는 말이 과연 누구겠어. 바로 나 자신이잖아?”
“…….”
“그러니 내가 먼저 스스로 변하지 않으면, 어떻게 감히 연대기의 긍정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있겠어?”
성진은 제법 의젓한 소리를 하는 동생을 잠자코 내려다보았다.
뭐랄까, 지금까지는 마냥 보살펴야 할 꼬맹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말이지. 이제 보니 생각보다 든든한 아군이 아닌가.
“…시슬레.”
가급적 델크로스 연대기의 내용을 떠올리게 만들고 싶지 않았지만, 잠시 고민하던 성진은 곧 마음을 정하고 입을 열었다.
“사실 너한테는 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던 게 있어.”
“응? 뭔데?”
“혹시 말이야. 그 델크로스 연대기에 지그스문트 변경백도 등장해?”
“지그스문트 변경백?”
“그래. 현 변경백인 헨드릭 지그스문트 말이야. 주인공 오르덴의 아버지니까, 아마도 자주 나왔을 거 같은데.”
그러자 잠시 곰곰이 기억을 되짚던 시슬레가 고개를 저었다.
“글쎄? 간혹 대공자와 사소한 마찰이 있었던 정도일까? 그다지 그의 행보가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 걸 보면, 아직까지는 크게 중요한 등장인물이 아니었던 거 같아.”
흠. 그렇단 말이지? 어쩌면 변경백의 꿍꿍이를 알아낼 단서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그자가 돌이킬 수 없는 큰 죄를 짓도록 그저 방관하고 있다.
아버지는 그때, 분명 그런 사념을 흘렸었지.
-네가 그것을 안다면 분명 나를 막으려 들지 않겠느냐.
그렇다면 먼저 변경백의 속셈이 뭔지를 알아야, 아버지가 계획한 것을 사전에 막을 수 있다는 말이다.
한데 성진의 낙담하는 기색을 알아챈 시슬레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중요한 일이야? 그럼 지금부터라도 한번 알아볼까?”
“음? 어떻게?”
“다시 예지몽을 꾸는 거야. 그 꿈속에 들어가서, 델크로스 연대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거지.”
…뭐?
성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시슬레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는, 먼저 예정된 미래를 온전히 알아야 하잖아.”
“하지만 시슬레. 전에도 말했듯, 그건 제대로 된 미래가 아니야. 그저 너의 파멸을 노리는 나쁜 놈의 농간이라고.”
“만일 정말 예지몽이 아니라고 해도 그래. 오라버니의 말처럼 단지 누군가의 농간이라면, 내용을 모조리 숙지하는 것이야말로 그자의 노림수를 알아낼 단서가 되겠지.”
성진 역시 그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단지 그걸 권하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는데, 시슬레에게 있어 델크로스 연대기가 어떤 의미인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진정 무자비한 죽음의 선고였으리라. 눈앞의 작은 꼬맹이는, 누군가에게 속 시원하게 털어놓지도 못하고 수년간 홀로 죽음의 공포를 견뎌왔을 테니까.
그런데 그걸 처음부터 다시 겪는다고?
“괜찮아, 오라버니.”
성진의 복잡한 표정을 헤아렸는지, 시슬레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연대기 속의 난 이미 죽었잖아? 가장 마음 졸이던 이야기가 끝났으니, 이제부터는 조금 편안한 심정으로 세상이 멸망하는 과정을 읽어나가면 될 뿐이야.”
“…….”
“물론 성황가 사람들의 최후를 하나하나 마주하는 것은 여전히 무섭지만.”
그래도 사실이 아니라고, 미래를 막기 위한 일이라고 되뇌면 견딜 만한 것이 되리라.
시슬레는 그렇게 말하며 오히려 성진을 위로하려 들었다.
‘어…….’
성진은 새삼 깨달았다. 우리 꼬맹이는 외부의 압력에 여간해서는 굴하지 않는, 정말로 강한 정신을 가진 아이라는 사실을.
결국 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기로 결정한 성진은, 꼬맹이에게 이렇게 대꾸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물론이야. 잠을 잘 자야 수련에 지장이 없으니까. 한 번씩 한가한 날에만 안대를 빼고 잘 거야.”
푸스스 웃음을 흘린 시슬레가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들은 이야기가 있다? 폐하께서 대대적인 토벌을 하기 전, 그러니까 황도에 아직 암흑 교단의 세력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때 말이야. 그때 교단의 배교자들은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 위해, 대대적으로 인신 공양의 희생자가 되길 자처했다고 들었어.”
분명 인신 공양은 허용할 수 없는 이단.
그래도 당시에 얼마나 삶이 힘들었으면,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바랐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시슬레가 덧붙였다.
“이건 오라버니니까 하는 말이지만, 때때로 죽음은 어떤 의미에서 ‘안식’과도 의미가 상통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 나만 해도 그래. 일단 연대기에서 한 번 죽음을 겪고 나니,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
바로 그때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누군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들의 대화를 방해했다.
언제 다가왔는지, 서이서가 매서운 눈으로 성진을 노려보고 있었다. 본래 다갈색이던 그녀의 눈동자는 어느 틈엔가 환한 금빛으로 돌변해 번쩍이고 있다.
카드모스가 나타난 것이다.
[네 속셈은 뭐냐! 대체 네놈은 어디까지 내 후손들을 쥐고 흔들려는 것이더냐!?]하지만 뒷방 노친네의 호통 따위는 성진의 귀에 조금도 들어오지 않았다. 중요한 깨달음이 순간 머리를 강타했던 것이다.
‘…오호라!’
성진이 씨익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자, 움찔 놀란 카드모스가 또다시 버럭 화를 냈다.
[왜 날 그렇게 보는 거냐! 또 무슨 꿍꿍이냐, 이 삿된 것아!]‘그래, 카드모스.’
이제야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느낌이 든다.
시슬레가 가게 되면, 결국은 저 녀석도 토벌대에 딸려가는 거지? 이거 제법 든든한 인선이 되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