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320)
성황의 아이들-320화(320/469)
320. 변화 (5)
신들과 마룡의 시대가 끝나고, 수천 년.
강대한 고룡들이 델크로스 차원을 지배하던 시기를 일컬어, 사람들은 ‘세 고룡의 시대’라 불렀다.
오랜 시간 이어졌던 그 무질서한 시대는, 어떻게 보면 델크로스 차원의 힘이 가장 강대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역사와 전설의 경계가 모호하고, 신화 속 생물들이 생생히 살아 숨 쉬던 때였으니까.
그러나 언제까지나 이어질 것 같던 세 고룡의 시대 역시 결국은 끝을 고했다. 용들이 나이를 먹으며 점차 힘을 잃어가기 시작하자, 그때까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고위 마왕들의 차원 침략이 본격화되었던 것이다.
묵시록의 다섯 마왕 중 하나인 [참회]가 강림하고, 그 여파로 잠들었던 마룡이 부활했다. 대륙은 커다란 혼돈에 빠졌으며, 신화 속 생물들은 다급히 다른 차원으로 몸을 피하기에 이르렀다.
오로지 인간.
그때까지도 변변한 세력 하나 없이 드문드문 모여 살던 인간들만이, 고스란히 죽음으로 내몰려 마왕들의 손에 떨어질 참이었다.
-어찌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당시 델크로스에 남아있던 마지막 신은, 인간들의 비참한 최후를 가만두고 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고위 마왕들과 대립하자니, 승산을 장담할 수도 없을뿐더러 힘겨루기의 여파로 차원 전체가 박살이 나게 생겼다.
결국 고심하던 신은, 남은 네 명의 마왕들에게 이런 제안을 하기에 이르렀다.
-침략을 멈춰라. 그렇게만 해 준다면, 앞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모든 인간의 영혼을 너희에게 넘기겠다.
어차피 늦고 빠르고의 차이가 있을 뿐, 지금 당장이라도 마왕들이 모조리 갈취할 수 있는 영혼들이었다.
-너희에게도 그리 나쁜 제안은 아닐 것이라. 꾸준히 새로 태어나는 영혼들까지 포함하면, 너희가 얻을 수 있는 영혼의 총량은 지금보다 훨씬 많아질 터.
마왕들이 듣기에도 꽤 괜찮은 제안이었다. 신과의 다툼 없이 수월하게 영혼들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
그들의 입장에서는 백 년이든 천 년이든 찰나의 순간에 지나지 않으니, 기다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지금으로부터 천 년, 조금만 더 이 차원을 유지할 수 있게 해 다오. 적어도 인간들이 살아있는 동안만큼은 온전한 평온을 누릴 수 있도록.
그 필사의 계약 덕분에, 델크로스는 이후 마왕들이 강림하기까지 약간의 유예를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태초의 [협약]일세. 델크로스의 주신은 그 계약을 대가로, 자신의 이름을 잃고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지. 이제 그가 존재했었다는 증거라고는, 드문드문 인간들에게 나타나는 신성력 정도가 전부라네.]“그렇습니까?”
[그래. 그 이후로 델크로스 차원에 있는 모든 인간의 영혼은 마왕들에게 종속되었다네. 만일 그들로부터 죽은 자의 영혼을 하나라도 빼돌리려 한다면, 그에 버금가는 커다란 대가를 치러야만 하지.]태초의 협약이 맺어졌던 시기에는, 델크로스 차원에도 엄청나게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오니아와 공명하는 새로운 결계가 만들어지고, 경계의 종족들이 그 관리를 맡았다.
코른시임 일족의 일부가 델크로스 차원으로 건너가기도 했지.
인간들의 영웅, 카드모스가 등장하여 마룡을 쓰러뜨리고 제국을 건국한 것도 바로 그때였다.
“으음. 그랬군요.”
그래봤자 어차피 다른 차원의 역사.
어르신은 점점 집중을 잃어가는 난쟁이 공학자를 향해 서둘러 설명을 이어갔다.
[협약이 적용되는 것은 비단 당시에 존재하던 영혼뿐만이 아닐세. 이후에 태어나는 모든 영혼들, 혹은 우연이라도 델크로스를 방문하는 영혼들까지. 영혼이란 영혼은 모두가 고위 마왕들의 소유란 말일세.]“흠.”
덱스터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내세나 사후 세계에 대해서는 그다지 흥미가 없었으니까.
그가 영혼의 존재나마 믿게 된 것도, 이오니아의 공학자들을 만나 여러 가지 신지식을 접한 덕분이 아니었던가.
지금 그가 궁금한 것은 오직 하나였다.
“그렇다면 델크로스는, 어차피 천 년 후면 멸망할 차원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함께 공명하는 결계를 만들다니요. 이오니아에서 순순히 그것을 허락했습니까?”
[왜 아니겠는가? 두 차원의 공명은 대단히 강력한 힘이 된다네. 게다가 델크로스가 무너지고 나면, 다음 침략은 이오니아의 차례일 것이 빤하지 않나?]또한, 당시 코른시임 일족의 오라클이 새로운 결계를 만드는 데 적극적으로 찬성하고 나섰다 한다.
-천 년의 유예라면, 어떻게든 침략을 타개할 가능성이 있다.
그는 이오니아에서도 가장 현명하다 평가받던 인물이었으니, 중론이 모이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으리라.
어쨌거나, 적어도 한 가지 사실은 분명했다.
[당시에는 설마, 이오니아가 먼저 멸망하리라 여겼던 자는 아무도 없었다네.]하물며 마왕들의 침략도 아닌, 스스로 일으킨 [재앙]에 삼켜질 줄이야. 어르신은 나직하게 탄식하더니, 곧 착잡한 얼굴로 마지막 설명을 덧붙였다.
[알겠나? 덱스터. 자네가 지금 델크로스로 향한다면, 필시 태초의 ‘협약’이 자네에게도 적용될 거란 말일세. 죽어서도 영영 마왕들의 손을 벗어날 수 없게 된단 말이야. 그러니 다시는 그곳에 가보고 싶다는 둥, 그런 소리는 하지 말게.]하지만 어르신의 엄중한 경고에도, 덱스터는 속으로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델크로스 차원의 멸망이 코앞으로 다가왔다고? 그렇다면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말 아닌가!’
지금이라도 빨리 델크로스로 가지 않으면, 그러지 않으면 이대로 영영 오라클을 만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이정표에 대해 더는 알아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성진…….’
비록 꺼림칙한 사기꾼이지만, 그래도 이성진은 그리 나쁜 녀석으로 보이지만은 않았지. 아니, 사기꾼이라는 대목에서 이미 글러 먹은 건가.
어쨌든 델크로스 차원에 커다란 위기가 찾아왔다면, 그곳에 사는 이성진에게도 뭔가 경고를 해 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르신이 들려준 이야기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그에게 전해주는 거다.
‘뭐, 내가 가지 못한다고 해도, 아직 이성진을 만날 방법은 있어.’
난쟁이 공학자는 손아귀에 있는 반쪽짜리 이정표를 세게 움켜쥐었다.
‘대여 기간이 정해져 있으니까. 이것만 가지고 있으면, 이성진은 언젠가 분명 공방을 다시 찾겠지.’
* * *
그날 밤, 성진은 오랜만에 느긋하게 명상을 했다.
그리고 꽤 늦은 시각 잠자리에 든 성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정표를 끌어안은 채 잠을 청해 보았다.
물론 판게아 클로니클에서 눈을 뜨는 대신, 다음과 같은 딱딱한 전자음을 들었을 뿐이지만.
[유저의 접속 기록을 확인합니다. ID의 완전한 말소를 확인하였습니다.]역시, 이제는 게스트 ID를 쓸 수 없는 건가. 조금 실망하고 있는데, 연이어 귓가를 두드리는 희미한 전자음.
[유저의 고유 ID를 확인하였습니다. 동결되어 있는 ID를 활성화시키시겠습니까?]아니? 고유 ID라니, 어쩐지 그건 내키지 않는다고.
성진은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기껏 사기적인 스킬들을 얻었는데 말이지. 지금까지 올린 레벨과 스킬들이 이대로 모조리 사라진 건가?’
아까운 마음이 없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아마 마음만 먹는다면, 판게아 클로니클의 랭커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희귀 아이템도 독식할 수 있었을 텐데.
물론 그런 짓을 저지르면, 암흑의 유스티티아가 오류를 먹어가며 더욱 빠르게 자라나겠지만.
‘일단 공방에 가면 방법이 없지는 않을 텐데…….’
협탁에 고이 놓여있는 은빛 디스크를 발견한 성진이 생각했다.
어르신의 공방에는 풀 다이브 기계도 있겠다, 어쩌면 게스트 ID가 아닌, 정식 유저 아이디를 만들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진은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째서일까. 이상하게도, 지금부터 한동안은 덱스터를 만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뭐, 오웬도 곧 돌아올 테고, 다들 알아서 잘 놀고 있겠지. 덱스터는 나중에 천천히 찾아가면 될 테고…….’
성진이 자세를 뒤척이며 편안하게 고쳐 눕자, 머릿속에 있던 마왕이 의아한 듯 물어왔다.
[음? 너 아직 안 갔어? 이 시각에 별일이네?]‘어. 그냥.’
[그럼 얼른 가. 나도 슬슬 시작할 시간이 됐어.]그러고 보니, 요즘 마왕 놈이 징징거리는 게 눈에 띄게 줄어들었지. 그뿐인가, 최근 유난히 말수가 줄고 조용해진 느낌이란 말이야.
‘왜? 내가 가고 나면 뭐 하려고?’
성진의 물음에, 마왕 놈이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모서리 돌기 놀이 하려고 했어.]‘모서리 돌기 놀이? 그게 뭔데?’
[염상 결정의 모서리를 따라 빙빙 도는 거야. 경로를 최소한으로 겹치게 하면서 모서리 전체를 빠짐없이 도는 놀이지. 이게 오목 24면체다 보니, 생각보다 다양한 루트가 나오더라고. 하다 보면 밤새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겠던데?]‘…….’
[그래서 네가 판게아 클로니클로 가기를 기다리고 있었어. 아무래도 깨어 있을 때 염상 결정을 뱅뱅 돌면, 너도 제법 정신 사나울 거 아냐?]어쩐지 처량한 놀이였다. 성진이 최근 현실에 소홀한 동안, 무료함을 이기지 못한 마왕 놈이 시간을 때우기 위해 자구책을 만든 모양.
뭐라고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데, 마왕 놈이 신이 나서 덧붙였다.
[내가 만든 창의적인 놀이는 그뿐만이 아니야. 뭐니 뭐니 해도 놀이의 마무리는, 염상 결정에 있는 일곱 개의 아치 돌기지.]‘…그건 또 뭔데?’
[응, 점점 가속을 붙여가며 단번에 일곱 개의 고리를 빙글빙글 도는 놀이야. 각각의 곡률이 달라서 커브 돌 때 드리프트 감각도 죽여주고, 가속이 붙다 보면 꼭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 든다고!]‘어…….’
…미안하다, 마왕아.
너 그동안 정말 심심했구나!
성진은 잠자리에 들려던 생각을 고쳐먹고,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글쎄. 염상 결정에서 노는 건 잠시 미뤄 둬. 난 오랜만에 황궁 산책이나 할 거야.’
[뭐? 오늘은 판게아 클로니클로 가지 않아?]‘어. 오늘뿐만이 아니라, 한동안은 그럴 일 없을 거야.’
[그래…….]마왕은 희미하게 대답했지만.
두근두근.
머릿속에서는 놈의 영혼이 기쁨으로 요동치는 감각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흐흠! 이제 너 혼자 놀러 가지 않는 거야?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나도 신나는 염상 결정 레이싱은 잠시 미뤄두는 수밖에.]속내를 감추려 애쓰는 마왕 놈의 투덜거림을 한 귀로 흘리며, 성진은 천천히 테라스의 문을 열어젖혔다.
오랜만에 오러 은폐의 경지도 시험할 겸, 이번에는 청장미궁에나 놀러 가 볼까? 데카론 나이트인 로건에게 들키지 않고, 과연 어디까지 가까이 접근할 수 있을지 알아보는 거지.
‘그나저나 너 말이야. 드리프트니 롤러코스터니 하는 말은 또 어떻게 알아? 넌 게헤나의 마왕이잖아?’
[음? 글쎄?]그러자 마왕 놈 역시 의아한 듯 영혼을 꼼지락거렸다.
[지금까지 딱히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그러고 보면, 나는 침략하기 전부터 이미 시구르트 34지구에 대해 잘 알고 있긴 했어.]어디 지구에 대한 것뿐일까. 생각해 보면 신기한 점은 또 있었다.
델크로스에 날아온 이후부터 쌓았다고 보기에는, 마왕 놈의 인간에 대한 이해도 역시 불가사의할 정도로 높지 않나.
[뭐, 그리 이상할 건 없지. 지식이란 곧 영혼의 격과도 깊은 연관이 있으니까. 내가 워낙 위대하신 마왕님이기 때문에 그런 거 아니겠어?]마왕의 여상한 대꾸에, 어이가 없어진 성진이 헛웃음을 흘렸다.
위대하긴 개뿔.
어쨌거나 한밤의 산책을 시작한 성진은, 꽤나 자유롭게 황궁 여기저기를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간 그의 오러 은폐 실력은 비약적으로 늘어 있었다. 야간 경계를 서는 기사들 곁을 유유히 지나쳐 다녔으니, 말 다 한 거지.
심지어는 상급 기사인 쿠르트 경조차 감쪽같이 속였을 정도다.
[와, 이거 정말 흥미진진하다!]콩닥콩닥.
마왕은 마치 스릴 넘치는 게임이라도 하듯 집중하며 산책을 즐겼다.
[이 정도면 네 보모를 상대로도 성공 가능성이 높겠는데? 어디 한번 시험해 볼래?]‘누가 보모야, 누가!’
하지만 예상했던 대로랄까.
아무리 오러 은폐가 뛰어나더라도, 전직 소드 마스터이자 데카론 나이트의 감각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청장미궁으로 향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성진은 자신을 마중 나온 로건의 피로한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너 지금까지 안 자고 뭐 하고 있어?”
심지어 로건은 기사단 정복도 벗지 않고, 허리춤에는 아르쥬나까지 찬 모습이었다.
설마 이 녀석, 지금까지 일하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그 말 그대로 돌려주지. 이성진, 이 늦은 밤에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야?”
“뭐, 그냥. 잠도 안 오고 해서, 잠시 산책이나 할까 하고…….”
그러자 로건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성진을 바라보았다.
“그래?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니고?”
“어, 아닌데?”
“그럼 어서 돌아가서 자라. 한창 클 나이에는 잠을 잘 자야 하는 법이야.”
“뭐? 너랑 내가 나이 차가 얼마나 난다고 애 취급이야?”
빈정 상한 성진이 부루퉁하게 대꾸하자, 로건이 침착한 목소리로 타일렀다.
“널 위해 진주궁을 경호하고 있는 기사들의 입장도 생각해야지. 게다가 마사인 형님은 또 어떻고? 만약 네가 없어진 걸 알게 되면, 형님이 분명 많이 걱정하실 거다.”
“어, 음…….”
과연 그 지적에는 할 말이 없었기에, 성진은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로건이 이어서 내뱉는 말이 가관도 아니었다.
“자자, 내말 들어, 응? 지금 데려다줄 테니 우리 어서 진주궁으로 돌아갈까? 정 잠이 오지 않으면, 내가 자장 차라도 타 줄게.”
“…뭐, 인마?”
살살 달래는 폼이, 누가 봐도 말 안 듣는 어린애를 상대하는 모습.
성진의 눈이 대번에 뾰족해졌다.
아, 이놈이 틈만 나면 은근슬쩍 손윗사람인 척하네? 그러니까 공공연히 어린애 취급 하지 말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