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327)
성황의 아이들-327화(327/469)
327. 21호의 나날 (3)
오래전 21호 또한, 안 지 얼마 되지 않는 누군가를 보호자로서 마음속 깊이 따르던 시절이 있었다.
그가 아직 엔리케가 아니라, 아명인 키케로 불리던 무렵. 당시 그는 애스트로스 용병단의 도움으로, 내전의 격전지로부터 대륙 이남으로 급히 몸을 피하던 중이었다.
황무지를 빠르게 가로지르는 여정은, 함께하는 용병들에게도 결코 쉽지 않은 일. 당연하게도 어린 키케는 매일매일을 죽을힘을 다해 버텨나가야 했다.
한데 설상가상으로 그 생활을 더욱 고달프게 만드는 자가 있었으니, 바로 그의 아버지인 베니시오 왕자였다.
-이제는 아들인 너조차 날 그런 눈으로 보는구나! 그래, 내가 형제의 왕좌를 질투하고, 기어이 이 나라를 반으로 갈라놓았다! 그러니 너도 내 꼴이 우스워 보이느냐?
퍼억! 갑자기 날아온 술병을 얻어맞은 키케는, 순간 바닥에 넘어져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런 배은망덕한 자식! 꼴도 보기 싫다! 어서 저리 꺼지지 못해?
베니시오는 매일 술에 찌들어 애꿎은 키케에게 손찌검을 하려 들었다.
가장 믿고 있던 친우를 사지에 제물로 던져야 했고, 끝내 그의 전사 소식을 듣고 말았다. 그때부터 공화파의 정신적 지주였던 베니시오는, 예전의 총명함을 찾을 수 없이 처절하게 무너져 버리고 만 것이다.
-아, 아버……!
-아니, 아니지. 그냥 여기서 끝을 내자. 더는 비참한 꼴을 보지 않도록, 나와 함께 예서 죽어버리는 게다! 자, 어떠냐?
비록 술에 취해있기는 했지만, 순간 아버지의 눈에 비치는 것은 선연한 살기. 잔뜩 겁을 먹은 키케는, 어지러운 머리를 가누려 애쓰며 휘청휘청 밖으로 도망쳤다.
-이쪽으로 오렴, 엔리케.
그런 키케에게 유일한 위안이 되어주던 자가 바로 성황, 당시는 ‘바트’라고 불리던 소년이었다.
-형! 바트 형! 들어봐! 방금 아버지가 날 죽이려고 했어!
-그는 많이 취했을 뿐이다. 절대 진심이 아니야. 자, 상처를 치료해 줄 테니, 오늘부터는 용병단의 모닥불 옆에서 자도록 해라.
바트는 전선에서부터 알게 된 용병이었는데, 오르토나어에 능숙한 데다 치유력까지 가지고 있는 신기한 소년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키케를 전혀 귀찮아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버지 대신 살뜰하게 보살펴 주곤 했다.
매번 자신을 아명 대신 꼬박꼬박 ‘엔리케’라고 불러주는 것도 오직 바트뿐이었다.
‘차라리 바트가 내 진짜 아버지거나, 혹은 형이라면 좋았을 텐데…….’
키케는 매일 밤 그 든든한 보호자 옆에서 모포를 덮고는, 곧잘 그런 터무니없는 상상을 하다 잠에 빠져들곤 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이동 중 잠시 휴식을 취하던 애스트로스 용병단원 하나가 뭔가 신기한 광경을 목격한 것은.
-오, 저 여우 좀 봐! 다 죽어가는데, 용케도 저 꼴을 하고 굴까지 기어 온 모양이야.
-저 상처는… 족제비에게 당한 건가?
용병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에, 키케 역시 호기심을 가지고 작은 토굴을 바라보았다.
과연 그곳에는 깊은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는 여우가, 비틀거리며 굴속으로 천천히 기어들어 가고 있었다.
‘가엾게도. 자신의 보금자리에서 눈을 감고 싶었구나…….’
키케가 그렇게 측은한 감상에 젖어 있을 때였다.
켕! 키잉! 킹!
토굴 속에서 갑자기 가냘픈 비명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작은 새끼 여우들의 단말마였다.
-어, 잠깐만! 저거, 저거… 새끼들을 모조리 물어 죽이는 건가?
-쯧. 족제비에게 당한 울분을 새끼에게 푸는 건가. 저래서 짐승들이란!
…뭐라고?
순간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들은 키케의 눈이 충격으로 커다래졌다.
‘다른 데서 다쳐 와서는, 아무 상관 없는 자기 새끼들을 죽인다고?’
울컥.
키케는 가슴 속에서 강한 분노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주변에서 가장 큰 돌을 하나 집어, 이를 악물고 토굴을 향해 힘껏 내던졌다.
어쩌면 빈사 상태로 새끼를 물어 죽인 여우가, 얼마 전 자신을 향해 신경질적으로 술병을 집어 던지던 아버지, 베니시오를 떠오르게 만들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이 더러운 짐승아! 그냥 흙 속에 파묻혀서 그대로 죽어버려라!
퍼억! 후두둑-
충격을 받은 토굴 입구의 흙들이 부스스 무너져 내렸다.
그럼에도 화가 가라앉지 않은 키케가, 씩씩거리며 막 두 번째 돌을 집어 들었을 때였다.
-엔리케.
툭.
바트의 손이 가볍게 그의 어깨를 짚었다.
-나중에 후회할 일은 하지 말거라. 네가 그러지 않아도, 어차피 저 어미 여우는 곧 죽을 거란다.
-그래서 뭐? 그게 어쨌다고?
곧 죽을 처지라고 해서, 불쌍하다고 해서 저런 짓이 용서받을 수 있는가? 자기 목숨이 경각에 달했다고, 애꿎은 새끼들에게 화풀이를 하는 게 진정 허용된다는 말인가?
-바트 형! 저런 못된 짐승은 죽어 마땅해! 어미의 자격이 없다고! 절대 편히 죽게 둘 수 없어!
키케가 분개하며 소리쳤다.
한데 그런 그를 내려다보던 바트가, 대답 없이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이었다. 평소 키케가 틀린 대답을 할 때마다, 애석하다는 듯 보여주던 예의 미소.
순간 키케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아, 또 내가 뭔가를 틀렸구나.
-생각해 보렴. 시기를 미루어 짐작하면, 저 여우의 새끼들은 이제 겨우 눈을 뗀 것이 고작일 게다. 당연히 젖을 떼지도 못했을 테지. 이 상황에서 저것들이 어미를 잃게 되면 어찌 될 것 같으냐.
-……!
-그래. 말라 죽을 때까지 어미의 시체 곁에서 울어야 하지 않겠느냐. 혹은 그 소리를 듣고 온 포식자들에게 잔인하게 잡아먹힐 게다. 어쩌면 어미를 공격한 그 족제비가 직접 찾아올지도 모르지.
조곤조곤 이어지는 목소리.
돌멩이를 쥔 손에서 절로 힘이 빠져나갔다.
-그러니 죽어가는 어미가 새끼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어…….
-결국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어미 여우의 처지가 참으로 가엾지 않으냐.
-그런…….
‘그런 생각은 해 보지 않았는데……!’
후두둑.
격해진 감정이 쌓이고 또 쌓여서일까, 갑자기 키케의 눈에서 예고 없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지금 돌이켜 회상해 보면, 21호는 그때 자신이 정확히 어떤 감정을 느꼈었는지 제대로 기억하지는 못했다.
그저 굴속의 어미 여우가 불쌍했고, 덩달아 아버지 베니시오의 처지가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쩌면 스스로의 고통 속에 깊이 매몰되어, 아들의 괴로움 따위는 조금도 헤아려주지 못하는 아버지에 대한 서러움이 섞여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지던 중.
툭툭, 그저 달래듯 머리를 두드리던 담담한 손길만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
-하지만 세상만사가 늘 그런 식으로 돌아간단다. 그러니 네가 그리 슬퍼할 필요는 없느니라.
* * *
“여! 키케! 요즘 자주 보는구나?”
지부를 나서는데 익숙한 사람 하나가 그의 앞에서 살갑게 손을 흔들었다. 장대한 기골에 어울리지 않는, 한없이 가벼워 펄펄 날아갈 것 같은 행동거지였다.
“…키케가 아니라 21호입니다, 저스틴 지부장님.”
“그래그래, 키케.”
저스틴 애스트로스.
전 애스트로스 용병단의 단장이자, 용병단이 길드로 탈바꿈한 현재는 아세인 지부장을 역임하고 있는 자.
그 역시 성황과 마찬가지로, 21호에게는 제법 오래된 인연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썩 정이 가지는 않는 인간이었지만.
예전에 성황이 고집스럽게 그를 엔리케라고 불렀다면, 저 인간은 또 저 인간대로 장성한 21호에게 꿋꿋하게 아명을 고수하는 중이었다.
그것이 은근히 사람을 애송이 취급 하는 것 같아, 21호는 그를 마주할 때마다 내심 불쾌한 기분이 들곤 했다.
“자주 본다니 도통 영문을 모르겠군요. 저는 지부장님을 몇 달 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만. 듣기로는 요즘 지부에 잘 나오시지도 않는다고 하던데요.”
“뭐? 그건 다들 몰라서 하는 소리야! 나는 늘 지부에 붙어 있었단 말이다!”
“하지만 아슬란도 그랬습니다. 지부장님을 뵌 지 제법 됐다고 했습니다만?”
“하하, 그것도 그 애가 몰라서 하는 소리지. 나는 매일 이곳을 오가며 아슬란을 제대로 살피고 있거든? 단지 걔가 날 눈치채지 못하거나, 만난 걸 아예 기억하지 못할 뿐이란 말이야.”
“……?”
만난 걸 기억하지 못해? 이 인간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21호는 슬그머니 미간을 찌푸렸다.
진지한가 싶으면 갑자기 헛소리를 하고, 또 농담인가 싶으면 대번에 정색을 한다. 어릴 때부터 생각했지만, 저스틴 애스트로스는 좀처럼 속내를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었다.
“그나저나 어떠냐? 요즘은 바트 녀석의 말썽쟁이 아들 때문에 다들 바쁘다며? 어때? 둘이 잘 지내는 듯 보이냐?”
“그랬으면 제가 왜 이 고생을 하겠습니까.”
21호는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어찌나 말썽을 부리는지, 저택이 도무지 조용할 날이 없습니다. 벌써 담당하는 길드원도 여럿 바뀌었고 말입니다.”
“힘들면 적당히 아세인 지부에 맡겨. 그렇게 옆에서 철통같이 경호할 필요가 있냐? 바트 녀석 성격에 그러라고 시킨 것도 아닐 텐데, 왜 네가 자진해서 매번 번거롭게 황도를 오가며 고생하는 거야?”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맡길 수 있습니까? 직접 보고 있지 않으면 오히려 제가 더 불안해서 편히 쉴 수도 없습니다.”
“흠…….”
그러자 저스틴이 눈을 가늘게 뜨며 21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근데 전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어째 넌 그 녀석이 ‘바트’가 되는 걸 꽤 좋아하는 것 같아.”
“네?”
“녀석의 호문클루스를 수행할 때마다, 네 얼굴에 유난히 화색이 돈다고. 너 스스로는 그걸 모르겠냐?”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21호는 단호하게 대꾸했다.
호문클루스를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신경 쓸 게 그렇게나 많은데 그 고생을 좋아하다니, 그게 어디 가당키나 한 소린가!
‘물론 그 사람을 하루빨리 암살해야 한다는 마음의 부담이 조금 줄어드는 면은 없지 않아.’
어차피 호문클루스는 성황의 본체가 아니니, 애써 그의 목숨을 노려본들 아무런 소용이 없지 않은가.
그러니 그냥 옆에서 전속 정보원의 본분을 다하기만 하면 된다. 그저 그뿐인 것이다.
“지부장님도 호문클루스의 신체가 얼마나 약한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폐하께서 그런 점을 딱히 신경 쓰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덕분에 옆에서 그분이 하는 꼴을 보고 있기만 해도 조마조마한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뭐어?”
“위험하니 인형을 사용하는 것도 작작 하시라고, 지금까지 몇 번이나 주의를 드렸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매번 들은 척도 하지 않으신단 말입니다.”
그러자 저스틴 애스트로스는 웃음기가 가신 얼굴을 하고는, 대단히 진지한 어조로 물어왔다.
“이봐, 키케야.”
“21호입니다. 지부장님.”
“그래, 키케야. 너 뭔가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거 아냐?”
“…네?”
“너, 바트 그놈이 정말 약해진 것처럼 보이냐? 잘 망가지는 호문클루스의 몸에 들어와 있고, 또 오러를 제대로 못쓴다고 해서?”
“…….”
“세상에 걱정할 놈이 따로 있지. 야야, 설마 걔가 겉보기에 비실비실하는 것 같으니까, 이번에는 반대로 네가 걜 도와줘야 할 것 같아? 네가 바트의 보호자라도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냐는 말이야!”
21호는 선뜻 그에 대답하지 못했다.
‘보호자라…. 그래, 차라리 정말 그럴 수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21호는 고소를 지었다.
암살자의 길을 걷게 된 이래로, 이렇게까지 무력감을 느낀 적도 없는 까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