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336)
성황의 아이들-336화(336/469)
336. 살롱 (6)
막스를 데리고서 적당한 사냥 모임에 간다. 그리고 아멜리아 누님이 참석하는 살롱에는 무조건 따라가는 거야!
그렇게 결심한 성진이었지만, 의외로 아멜리아가 고른 것은 머레이나 소르차 가문의 살롱이 아니었다.
“캐도건이요?”
“그래. 캐도건 남작과는 탄신연에서 약간의 친분을 다졌단다.”
캐도건 남작은 황도에서 출판 사업을 주도하는 자다. 주로 성회에서 의뢰하는 ‘경전 동화’를 발간하고, 브르타뉴 왕국과 아세인 공국으로부터 여러 서적들을 수입한다나.
덕분에 그녀의 살롱에는, 대륙 서부와 관련된 행정 실무자들이나 중소상단 자제들이 주로 모여든다고.
“……?”
“캐도건 남작이 주최하는 살롱은 꽤나 알찬 모임이란다. 서부 정세에 대한 최신 정보들이 오가곤 하지.”
하지만 그러한 설명에도 성진은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에게 처음부터 주류 모임을 권유한 걸 생각하면 의외의 선택이라 느껴졌으니까.
물론 아멜리아는 동생을 차기 황태자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처음부터 큰 모임에서 영향력을 넓혀가길 바랐던 것이지만.
반면 그녀 스스로는 황도 고위층 인사들에게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생각은 없었다. 실속이 없기도 하거니와, 자칫 그들에게 황위를 노린다는 인상을 줄 수 있으니까.
아멜리아는 로한을 비롯한 서부 국가들의 정세를 파악할 수 있는 인맥만으로도 충분했다.
‘어차피 나는 클라노스가 될 테니까.’
언젠가는 마사인 경처럼, 황위 경쟁에서 벗어나 순수하게 델크로스를 위해 일하는 것. 그것이 아멜리아의 소박한 꿈이었다.
대개의 황도 인사들은 아멜리아가 브르타뉴나 로한의 왕비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이번 생에서만큼은 타국으로 시집갈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이미 주변국들에 강력한 내정간섭을 하고 있는 신성제국이, 새삼 자신의 국혼으로 얻을 수 있는 이점은 크지 않다고 봤으니까.
‘게다가 타국의 왕족과 결혼을 하게 되면, 레오나드를 향한 복수의 길은 더욱더 멀어지게 될 거야.’
아마도 그곳에서 새로운 기반을 갈고닦기 위해 수년간 허송세월하게 될 테지.
설령 운이 좋아 든든한 입지를 확보한다 해도, 타국에서 온 왕비가 로한을 향해 과연 얼마만큼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까.
반면 델크로스에는 아멜리아의 힘이 되어 줄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황태자가 될 모레스는 말할 것도 없고, 아버님 폐하 또한 물심양면으로 자신을 도와주실 테지.
‘그러니까 클라노스가 되어 정정당당하게 선발 시험을 치고, 외교부에서 차근차근 실력을 키워 갈 거야. 종래에는 홀로 로한의 내정을 총괄하면서, 적절한 순간 강한 압박을 가할 수 있도록.’
델크로스의 위세를 등에 업는 것이 비겁한 짓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정당하게 그녀의 손에 쥐어진 명검을 구태여 아낄 필요가 어디 있는가.
‘조금만 기다려, 레오나드. 제국을 위해, 황위에 오를 모레스를 위해,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 네가 가진 모든 것들을 철저히 빼앗아 주겠어!’
그리고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비참한 죽음을 맞게 해 주리라.
그렇게 모든 복수가 끝나면, 아멜리아는 여생을 델크로스에서 가족들과 보낼 생각이었다.
‘소중한 가족은 결코 먼 곳에 있지 않아. 모레스와 아버님 폐하 그리고 성황가의 모두가 내 곁에서 함께 할 테니까!’
아멜리아는 주먹을 불끈 쥐며 조용히 의지를 다졌다.
한편,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성진은 조금 엉뚱한 생각을 했다.
‘누님, 어쩐지 의욕이 넘치네? 또 어딘가의 성벽을 부수는 상상을 하고 있나?’
* * *
캐도건의 살롱은 타운하우스에서 열렸다. 황도의 어지간한 인사들은 모두 그곳에 집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대개의 모임이나 연회는 곧잘 타운하우스에서 열리곤 했다.
“아멜리아 저하, 모레스 저하. 이렇게 찾아주셔서 더없는 영광입니다.”
캐도건 남작은 서글서글한 인상의 여인이었다. 성황가의 자제가 둘이나 참석했음에도, 그녀는 여유 있는 태도로 성진과 아멜리아를 자리로 이끌었다.
“최근 로한의 주류 산업 성장세는 놀라울 정도요.”
“하지만 아직은 질로 보나 양으로 보나, 브르타뉴의 와인들을 넘어설 수 없지.”
“글쎄, 어떨 것 같소? 증류주만으로는 이미 로한을 따라올 나라가 없는데. 두고 보시오. 아마 앞으로 10년 안에, 로한은 대륙의 주류 산업을 선도하게 될 거요.”
모임은 꽤 격이 없고 편안한 분위기였다. 구성원 대부분이 실무자다 보니, 업계 분위기나 서부 정세에 관한 직접적인 감상들이 가감 없이 오간다.
덕분에 온갖 교양 상식을 방패로, 날 선 귀족 화법이 오가리라 예상했던 성진은 한시름 놓았다. 요 며칠간 줄기차게 최신 오페라들을 열창해 준 브루노 단장한테는 조금 미안했지만.
“캐도건 남작은 황도에서 구하기 힘든 희귀 도서들을 많이 구입해 준단다. 어디 그뿐이니? 새로운 ‘경전 동화’가 발행되면, 가장 먼저 은장미궁으로 보내주곤 하지.”
“그렇군요.”
누님이 동화책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도 이 사람 덕분인 모양.
그렇게 살롱의 주인과 아멜리아가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성진은 무알콜 음료를 홀짝거리며 편안하게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놀랍게도 이 세상은 인쇄술이 비교적 발달되어 있었다. 책 가격이 꽤 높긴 하지만, 그래도 필사 시대에 비할 바는 아니라는 말이다.
심지어는 판화로 새겨진 정교한 삽화까지도 존재했다. 문학과 사상이 활발하게 꽃피던 옛 오르토나의 영향이었다.
“역사에 다시없을, 진정한 인문학의 요람이었습니다. 작금에는 그 역할을 브르타뉴가 일부 하고 있습니다만.”
오르토나의 멸망이 안타까웠던 캐도건 남작은, 그곳에서 도망친 인쇄 기술자들을 대거 받아들여 출판사의 덩치를 키웠다고 한다.
“아, 아멜리아 저하! 그러고 보니 마침 좋은 때에 방문해 주셨습니다!”
한동안 대화를 이어가던 남작이, 갑자기 뭔가를 떠올렸는지 집사에게 슬쩍 눈짓을 한다.
지시를 받은 노집사가 잠시 후 그들에게 가져온 것은, 성진에게도 꽤 익숙한 종류의 동화책이었다.
“오늘 새로운 출판물이 나와 가져 왔습니다.”
“또 다른 경전 동화군요?”
“네, 그렇습니다.”
인문학의 요람이었던 오르토나나 유명한 대학이 많은 브르타뉴와 달리, 델크로스의 서적 출판은 그 가짓수가 상당이 제한되어 있었다. 일단 성회의 검열을 거쳐야 했고, 조금만 구미에 맞지 않아도 이단 재판부의 소환을 받았으니까.
덕분에 경전의 일화를 재미있게 재구성한 ‘경전 동화’ 정도가, 황도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출판할 수 있는 유일한 책이었다.
그래도 쉬운 구성과 아름다운 삽화 덕에, 황도 신민들에게 제법 인기를 얻고 있다고.
-성 바스티안과 손가락 악마
아멜리아가 새 책의 제목을 쓸어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스티안 성인의 이야기요? 의외로군요. 이번 출판물은 분명 성녀 그라지에의 일화일 거라 생각했는데요.”
성 바스티안은 경전에서도 극적인 장면들을 많이 만들어내기로 유명했다. 아름다운 외모까지 더해, 출판 동화로 대단히 인기가 많은 성인이지.
그럼에도 ‘경전 동화’는 다섯 성인들을 비교적 골고루 다루려 노력했다.
이는 제국 각 부처나 성기사단에서 주력으로 밀고 있는 성인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었다. 자신의 성인이 조금이라도 소홀한 대접을 받는다고 생각되면, 추기경이나 사제들로부터 항의가 빗발치니까.
아멜리아가 의아해하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성 그라지에의 축일이 지난 지가 오래였지만, 돌연 ‘은총의 기사’ 이야기가 화제가 되면서 그라니우스의 [신기한 대륙 탐방기]에 출판 순번이 밀리고 만 것이다.
“정교회의 특별한 요청이 있었습니다. 마침 성 바스티안의 축일도 머지않았으니, 이해 못 할 일은 아닙니다만.”
남작의 설명에도 의문은 쉬이 가지실 않았다.
‘새로운 성녀의 취임도 있었고. 이번에야말로 그라지에 성녀의 동화가 출판될 거라 생각했는데…….”
그리고 책을 두어 장 넘겨본 아멜리아는 더더욱 당황하고 말았다.
-거대한 개는 성인을 태우고 바람처럼 달렸습니다.
-손가락 악마의 부하들을 훌쩍 뛰어넘고 다섯 개의 언덕을 쏜살같이 지나, 마침내 성 바스티안은 대륙의 가장 높은 설산에 도착했답니다.
아멜리아가 고운 아미를 슬그머니 찌푸렸다.
“…개?”
“왜 그러십니까, 누님?”
“아니, 내용이 조금 의외구나.”
“……?”
여전히 영문을 모르는 성진을 위해, 캐도건 남작이 설명해 주었다.
“경전에서는 성인께서 바람을 타고 설산으로 날았다고 간단히 기술하고 있죠. 물론 민간에서는 ‘바람’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짐승이었다는 구전도 전해지긴 하지만요.”
짐승을 타고 달렸다는 내용이 일반적인 해석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바람이면 바람이고, 짐승이면 짐승이지. 왜 콕 집어서 개?
“…성회에서 정식으로 출판 승인을 받은 도서입니다. 아무 문제 없는 내용이지요.”
남매의 의아한 얼굴을 마주한 캐도건 남작이 지레 대꾸했다. 하지만 스스로도 그리 자신이 없는 듯 부쩍 힘이 빠진 목소리였다.
“흠…….”
성진은 아멜리아의 어깨 너머로 동화책을 들여다보였다.
솔직히 말하면 내용의 사실 여부를 떠나, 성진은 일단 이 이야기가 꽤 마음에 들던 차였다. 정교하게 그려진 삽화 속 개의 이미지가, 어딘가 막스를 많이 닮아 있었으니까.
“그림이 귀엽네요. 우리 막스에게도 보여주고 싶습니다.”
“아? 정말 그렇구나! 네가 데려온 늑대개와 많이 닮았어,”
성진의 말 한마디에 의문을 완전히 던져버린 아멜리아가, 마치 꽃이 피어나듯 화사한 웃음을 보인다.
“다시 보니 그냥 바람보다는, 개 쪽이 귀엽고 좋은 것 같구나.”
“그렇죠? 더욱 극적인 이야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 누님.”
“그래. 대담하게 각색한 이유가 다 있었던 거야.”
황녀의 빠른 태세 전환에, 캐도건 남작은 내심 어이가 없었다.
‘풍문과 달리 두 분이 친하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하지만 아름다운 남매의 사심 없는 미소를 정면에서 마주하게 되자, 남작은 저도 모르게 그들을 따라 웃고 말았다.
“이것이 마음에 드신다면, 모레스 저하를 위해 한 권 더 가져오겠습니다.”
* * *
대화는 꽤 늦게까지 이어졌다.
덕분에 성진과 아멜리아가 살롱을 막 나섰을 때는, 어느덧 깊은 밤이 되어 하늘에서 밝은 별들이 총총 빛나고 있었다.
“어떠니, 모레스? 이런 작은 살롱의 분위기도 꽤 괜찮지 않니?”
아멜리아의 물음에 성진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작은 살롱이고 뭐고, 애초에 이런 모임 자체가 처음이었으니 비교할 것이 있나.
물론 예전에는 자신이 리카르도 스카르차피노의 모임에 자주 다녔다고 들었지만, 기억에 아예 남아있질 않으니까.
“나름의 성과는 있었습니다.”
성진은 어깨에서 미끄러지는 그녀의 외투를 추슬러주며 대꾸했다.
그래. 귀여운 동화책도 얻었고. 무엇보다도 ‘사교 모임의 저주’ 징크스가 사라졌다는 것이 꽤 고무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잠시 입구에 서서 신선한 공기를 음미하고 있을 때였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요? 캐도건 남작. 앞으로도 두 분이 계속해서 우리 모임에 나오시는 거요?”
멀리서 심상치 않은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제법 먼 거리에서 이뤄지는 대화라, 오러로 청력을 한껏 돋워야 했지만.
“예의상 보낸 초청에 정말로 응해주실 줄은 몰랐소. 하지만 두 분 저하께서는 아마 모임의 좋은 구성원이 되실 거요.”
“하! 설마 그럴 리가? 우리 모임의 장점은 어디까지나 격식 없는 의견 교환에 있었소! 종교와 제도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대화의 장이었지. 한데 이제는 다 끝이오!”
“진정하시오, 앨튼 상단주. 두 분 저하께서 자리를 뜨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았소.”
성진은 비교적 무난한 만남이었다고 생각했지만, 살롱의 오랜 멤버들의 생각은 조금 달랐던 모양이었다.
“우리 모두가 신성 제국의 민낯을 알지 않소! 주신에게, 그리고 강력한 신의 대리자에게 억압되어 어떠한 정신적 자유도 가지지 못하는 황도 신민들을! 한데 이제는 이런 사사로운 모임에서까지 성황가의 눈치를 봐야 하는 거요?”
“상단주. 성황 폐하께서는 신민의 자유를 제한하는 어떠한 행위도 하지 않으셨소.”
“과연 그럴까? 타국을 오가는 상인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소! 지금 황도의 상황이 절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수위를 넘어서는 범죄는 절대 일어나지 않고, 신민들 모두가 그저 온순한 양이 되어 주신을 연호할 뿐이오! 이게 과연 정상이라 보오?”
“그건 그렇지. 다른 나라들은 절대 이렇지 않아. 어디 신민들뿐인가? 성황가 사람들도 이상한 것은 마찬가지네. 황위 계승권자들이 이렇게나 많음에도, 지금껏 잡음 하나 들리지 않는 것이 가능하냔 말이지.”
저자들이! 발언의 수위가 조금씩 강해지자, 성진은 인상을 쓰며 아멜리아의 팔을 끌어당겼다.
당장 이 자리를 뜰 생각이었다. 혹시나 저들의 언성이 높아져, 누님이 듣게 되는 사태만은 막고 싶었으니까.
“모레스.”
한데 아멜리아가, 그런 성진의 손을 다독이며 희미하게 웃어 보이는 게 아닌가. 그녀는 그들의 대화를 진작 듣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은 수련 기간이 길지 않아 오러 총량이 많진 않으나, 아멜리아가 오러를 이용하는 능력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러니 청력을 한껏 돋우는 것쯤은, 그녀에게도 그리 어렵지 않은 일.
“저들의 말에는 너무 신경 쓰지 말렴.”
하아.
아멜리아가 시원한 공기를 들이켜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델크로스의 현재 상황이 얼마나 이상한 건지 모르지 않는단다. 공화정을 열었던 오르토나는 차치하고라도, 키프로스나 브르타뉴, 심지어는 로한조차도 이미 제도나 문화에서 오래전에 제국을 앞서 나가고 있어. 그럼에도 어째서 그들은 속절없이 낡은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걸까?”
“…….”
“강력한 군사력? 아니란다. 조각조각 나뉘어 좋을 대로 움직이는 기사단들을 보렴. 이처럼 비효율적인 군대를 운용하는 곳은 제국 외에 다시없어. 주신을 향한 강한 믿음? 그것도 아니지. 타국의 왕족들은 주신을 그저 내정간섭의 구실로밖에 여기지 않거든.”
성진은 쓸쓸하게 울려 퍼지는 아멜리아의 목소리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바로 아버님 폐하란다.”
“…….”
“이 비효율적이고 불완전한 제국을 지탱하는 힘이, 신민들의 마음을 한데 규합하고 이끌어가는 힘이, 아버님 폐하, 오직 그분에게서 나오기 때문이야.”
지구에서 살았던 성진은, 부조리로 가득한 천년의 제국이 아직도 존속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기이한 현상인지를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그렇기에 협정에 묶이기 전의 아버지는, 어떻게든 제국의 근본을 바꾸기 위해 급진적인 정책들을 펼치려 들었으리라.
‘만약에…….’
만일 이 세상에 성황이 없었다면, 아니, 지금이라도 그가 제국의 유지를 완전히 포기하게 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여기저기서 동시다발적으로 갈등이 싹틀 것이다. 제국은 순식간에 형체도 없이 무너져 내리리라. 그럼에도 그것이 정말로 정상적인, 인간들의 세상인 것이다.
“한데 얼마나 다행한 일이니.”
허공을 향한 아멜리아의 눈동자가 고요히 타올랐다. 온화하고 상냥하기만 한 평소와 달리, 절제된 분노와 광기가 혼재한 깊고 깊은 눈동자.
“이 모든 부조리를 눈앞에 두고도, 내가 마음 편히 거기서 눈을 돌릴 수 있다는 사실이.”
레오나드.
아멜리아는 그자가 시작하여 마침내 대륙 전체를 집어삼켰던 무자비한 전화를 기억한다. 그 피로 물든 하늘과, 죽음만이 가득했던 대지.
델크로스가 내재한 어둠이 아무리 깊고 거대하더라도, 단연코 그때의 세상보다 더 나빠질 수는 없으리라.
“그자가 조금도 의심할 여지 없는, 세상 최악의 해악이라는 것이 이렇게나 기쁜 적이 없었단다.”
성진에게는 갑작스러운 말이었지만, 아예 짐작 가는 바가 없지는 않았다.
그는 수개월 전의 일을 떠올렸다. 아마도 아멜리아와 처음으로 식사를 함께하며, 그녀의 상담을 진지하게 들어주었던 일을.
-끝에 이르지 못한 복수는 그저 허망한 것이라 여겼단다. 하지만 진정한 복수란 것은 결과뿐만이 아니라 그 과정 자체로도 삶을 풍족하게 하는 것이구나.
복수.
그날의 대화 이후, 줄곧 누님을 사로잡고 있던 단 하나의 명제.
“그래서 내가 제국의 안위보다도 ‘복수’를 우선한다 해도, 마음에 한 점 거리낌이 없구나.”
그 혹독했던 지그스문트령의 일들조차 이미 잊어버리다시피 넘어갔던 아멜리아다.
그런 그녀를 이렇게 불타오게 만드는 자가 누구란 말인가. 대체 누님에게 무슨 짓을 했던 거지?
“…네. 맞습니다.”
하지만 성진은 그놈이 누구인지 굳이 묻지는 않았다.
복수의 과정은 오롯이 누님의 몫. 그녀가 베어 물 달콤한 과실이다. 내가 아는 아멜리아 누님이라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빈틈없는 복수를 해낼 테지. 난 알 수 있어.
‘그리고 그자가 누구든, 그렇게 죽음에 이르게 된다면…….’
그다음이 바로 나의 차례.
놈의 영혼은 영원히 안식에 들지 못하리라. 내가 아는 인간들 중 가장 가엾고도 가여운 영혼이 되어, 언제까지고 지독한 고통 속을 헤매게 될 테지.
‘놈에게는 지그스문트 백작 부인에게 베풀어진 그 일말의 자비조차 허락되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