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337)
성황의 아이들-337화(337/469)
337. 사슴 사냥 (1)
의식과 무의식을 가르는 둑은 생각보다 높지 않아서, 강하게 밀려드는 감정이나 의지에 때때로 쉽게 범람이 일어나곤 한다.
“…모레스.”
아멜리아는 아까부터 어딘가 낯설어 보이는 동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언제부터였을까. 표정이 씻겨 내려가기라도 한 듯 순식간에 무표정해진 그의 얼굴은, 무감각함을 넘어 무기질적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그 생기 없는 얼굴에서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하나. 이따금 허공을 향해 일렁이는 희미한 은회색의 안광뿐.
“모레스.”
아멜리아가 재차 이름을 부르자-
깜박.
그에 반응하듯 눈꺼풀이 천천히 움직이나 싶더니, 잠시 감춰졌다 드러난 눈동자에 일순 강력한 감정이 어린다.
그것은 묘한 절박감이었다. 마치 어딘가에서 벗어나려는 듯, 동시에 뭔가를 끝끝내 놓치지 않으려는 듯 보이기도 하는 양가적인 감정.
깜박.
하지만 그가 두 번째 눈을 깜박였을 때, 황자의 눈은 어느새 평소의 말간 회색빛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네, 누님.”
“…….”
“왜 그러십니까?”
아멜리아는 불안한 얼굴로 그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뭔가 고민이라도 생겼니? 갑자기 표정이 지나치게 어두워 보여서 걱정했단다.”
“……?”
성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내가 방금 무슨 생각을 했더라?
“아! 별거 아닙니다. 그저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전에 누군가에게 복수하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그러면 평소 누님이 부수고 싶어 하는 성벽의 주인이 혹시 그 복수의 대상인가요?”
아멜리아는 일순 당황했지만, 곧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단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했죠. ‘나중에 누님이 성벽을 때려 부수는 힘으로 그놈을 치시면, 조금 곤란하지 않을까?’ 하고요.”
“그러니?”
물론 아멜리아 역시 이 분노의 감정을 쉽게 이해받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아직은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대한 복수심이니, 동생에게는 꽤 뜬금없이 느껴지기도 했을 테지.
그런데 이어지는 그의 말이 의외였다.
“누님. 복수할 상대가 누구든, 부디 손속에 사정을 두고 살살 치십시오. 안 그러면 몇 대 못 때리고 놈이 죽어버리지 않습니까?”
응?
아멜리아가 눈을 깜박거렸다.
“살살?”
“네. 설마 한 대만 때리고 마실 건 아니죠? 치료해 가면서 두드려 줄 수 있다고 해도, 상대가 일격에 죽어버리면 그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
“……!”
아아, 그렇구나.
아멜리아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 상대가 기대 이상으로 약할 수도 있다는 거구나! 하지만 적당히 때리고 치료해 주면, 꽤 오래 복수할 수 있는 거야. 넌 정말 대단해, 모레스!”
하하, 뭘요.
아마 로건이나 시슬레에게 말씀하시면, 걔들은 기꺼이 누님을 도우려 할걸요?
“아니면 마물 전담반의 날라리 인퀴지터, 발레리 경을 빌려드리죠. 복수의 대상이 누가 되었든, 아마 진정한 지옥의 끝을 선사해 줄 수 있을 겁니다.”
“좋은 생각이구나. 고마워, 모레스.”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나란히 미소 짓는 남매의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워, 남작가의 사용인은 힐끔힐끔 그들을 훔쳐보며 내심 경탄해 마지않았다.
오직 멀리서 남매의 속삭임을 듣고 있던 마사인 경만이 조용히 식은땀을 흘리며 이렇게 생각했을 뿐.
‘지금까지 모레스 황자님을 보필하는 데 있어서 부족함이 너무도 많았구나! 이제부터는 저하의 정서 교육에도 더욱 신경 쓰지 않으면……!’
두 분의 사이가 전보다 좋아진 것은 다행이지. 한데 어째서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일방적으로 나쁜 영향만을 미치는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 *
‘일이 모조리 틀어져 버렸어!’
다음날 오전.
부지런히 교외의 접선 장소로 향하던 앨튼 상단주는, 초조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며 입술을 짓씹었다.
‘이대로는 [인형사]가 어떻게 나올지 예상할 수 없다!’
앨튼 상단주, 캐런 로슨은 악마계약자였다.
상인 연합에 소속되어 있는 상단주 대부분이 그러하듯, 그녀는 젊은 시절 악마와 계약하여 현재의 부를 거머쥐었다.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빠르게 요직에 오른 후, 상단주와 후계자들을 차례차례 저주로 죽여 자연스럽게 상단주 자리를 꿰찬 것이다.
한데 그것이 다였다.
일단 상단주가 되자 그녀는 수시로 황도를 오가야 했는데, [은총]의 범위 안으로 무사히 들어오기 위해서는 오랜 기간 악마와의 소통을 자제할 수밖에 없었다. 악마의 힘을 이용할 수 있는 기회는 자연스레 줄어갔다.
순수하게 자신의 수완만으로 상단을 키우기에는, 들어가는 노력과 시간이 영 만만치가 않았다. 그렇게 상단 운영에 지지부진하던 차에, 악마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한 그 [인형사]가 접근해 온 것이다.
‘대륙 서부의 국가들, 특히 로한을 오가는 상단주와 행정부 실무자들을 원합니다. 그들을 조종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인형사는 목표물들이 한데 모이는 캐도건 남작의 살롱에 참석하여, 특별한 지령을 수행할 것을 의뢰했다. 그녀가 절대 거부할 수 없는 달콤한 보상을 제안하며.
그렇게 캐런은 [인형사]와 손을 잡고, 다시 한번 부를 거머쥐기 위한 도약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랬는데……!’
설마, 설마.
그날 하필이면 성황가의 자제들이 둘이나 참석하게 될 줄이야!
덕분에 회원 전체를 저주로 옭아매려던 계획은 완전히 무산되었다. 캐런은 발을 동동 굴렀지만, 결국은 대단히 낭패한 심정으로 접선 장소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군요.”
그리고 그런 캐런을 마주한 것은, 싸늘한 표정을 한 반가면의 남자.
바닥에다 뭔가 복잡한 도형들을 그리고 있던 로메인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차갑게 타박했다.
“당신을 믿고 중요한 일을 맡겼습니다만, 무척이나 실망스럽습니다. 약속을 아무렇지도 않게 구겨버렸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다고 봐도 좋겠습니까?”
“자, 잠깐! 나에게도 다 사정이……!”
한데 그녀가 섣불리 로메인에게 다가서려 들자, 그가 휙 고개를 돌리며 날카롭게 외쳤다.
“건드리지 마십시오!”
“……!”
“이 회로를 절대 망가뜨려서는 안 됩니다. 규상 세계의 법칙에 속하는 회로지만, 임시로 그린 만큼 지금은 대단히 불안정한 상태란 말입니다!”
규상 세계?
캐런은 당황한 얼굴로 오두막 바닥에 그려진 복잡한 그림들을 바라보았다.
[규상 세계의 법칙! 그 불가해한 것들을 인간이 맨손으로 그려냈다고?]머릿속에서 그녀와 계약한 악마가 경악한 듯 소리쳤다. 황도를 멀리 벗어난 접선 장소에 이르자, 임의로 그녀와의 연결을 회복한 것이다.
[분명 이오니아 멸망과 함께 사라진 기술일 텐데. 대체 저 ‘인형사’의 정체는 뭐지?]하지만 캐런은 그런 것 따위는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반가면의 남자가, 당장이라도 뭔가를 저지를 듯 위험한 기세를 풍기기 시작했으니까.
“자, 앨튼 상단주. 잘도 제 계획을 망쳐 주셨습니다. 혹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헉!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캐런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잠깐만! 내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오! 당신의 지령은 절대로 시행 불가능한 일이었단 말이오!”
“변명은 됐습니다. 고작 작은 마법 물품 하나를 몰래 발동시키는 것이, 그렇게나 어려운 일이었나 하는 생각밖엔 들지 않는군요.”
“모르는 소리! 어제저녁 모임에 누가 참석했는지는 알고 있소? 바로 성황가의 1황녀와 3황자가 왔단 말이오!”
“호오……?”
그제야 남자의 기세가 눈에 띄게 누그러졌다.
“인형사, 당신도 분명 알 것 아닌가! 델크로스 차원의 인간과 계약하는 악마들에게 절대 금기시되는 것들을!”
첫째. 악마의 힘으로 인간을 해치되, 인간의 능력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말 것.
둘째. 악마의 힘으로 사회를 혼란시키지 말 것.
셋째.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성황의 아이들을 함부로 건드리지 말 것.
특히 세 번째 사항을 어긴 악마는,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끔찍한 최후를 맞지 않았던가!
“아시겠소? 내가 거기서 계획대로 일을 벌였다간, 과연 성황이 어떻게 나왔을 것 같소?”
그런 소규모 모임에서 황자‧황녀를 만나다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어찌나 당황했던지, 주최자인 캐도건 남작에게 과하게 화를 낸 감도 없지 않았으니까.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약속은 어디까지나 약속.”
로메인은 자신이 완성한 회로를 마지막으로 찬찬히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그것도 그대의 군주 앞에서 직접 맹세했던 약속이 아닙니까?”
“……!”
캘런 로슨의 얼굴이 공포로 파랗게 질렸다. 로메인의 지적에, 그녀와 계약한 악마가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상인 연합의 인간들은 대부분 부와 명예를 위해 악마와 계약하기 마련. 따라서 그들이 계약한 악마들은 대부분 탐욕, 즉 [기아의 군주]의 권속들이었다.
그리고 탐욕은, 자신의 명을 어긴 권속을 곱게 내버려 둘 정도로 어진 군주가 아니었다.
“해명을! 부디 기아의 마왕께 한 번만 해명할 기회를 주시오! 나는, 나는……!”
그녀의 필사적인 외침에, 로메인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상대가 델크로스의 성황이었으니까요. 저는 당신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니 특별히 만회할 기회를 드리죠.”
마침내 회로를 모두 검토한 듯, 로메인이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반가면 아래의 입술이 흡족한 듯 크게 휘어진다.
“하지만 명심하십시오, 이제 당신에게 다음 기회란 것은 없습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렇게 사정사정해서, 캐런은 겨우 [인형사]로부터 풀려날 수 있었다. 탐욕께 잘 말해 주겠다는 약속과 더불어, 그의 다음 요청은 무엇이든 [수락]하라는 새로운 지시와 함께.
도통 영문을 알 수 없는 지령이었다.
‘대체 그 작자는 무슨 생각이지?’
하지만 의문이 풀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창 마차를 타고 이동하고 있던 그녀의 눈앞에, 갑자기 흐릿한 창 하나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로 향하는 □털이 열□습니다. 이동하시겠습니까?〛
〚수락/거절〛
캐런 로슨은 눈을 비볐다.
‘…이게 뭐지?’
반사적으로, 무엇이든 [수락]하라는 인형사의 지시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이런! 어서 거절해라, 캐런! 완전히 깨져버린 법칙이 아니냐!? 저런 불완전한 코드에 휘말리게 되면, 자칫 [미궁]에 빠져 영원히 탈출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뒤늦게 귓가에서 악마의 외침이 들려왔지만, 이미 끝난 일이었다. 그녀의 의식은 저도 모르게 [수락]을 선택하고 있었으니까.
시야가 순식간에 휙 하고 멀어져간다.
‘헉!’
뿅!
아찔한 추락감이 끝난 뒤 질끈 감았던 눈을 떠 보니, 놀랍게도 캐런은 아까의 접선 장소로 돌아와 있었다.
먼지투성이인 바닥에 주저앉은 채 고개를 드니, 반가면의 남자가 싱글싱글 웃음을 흘리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손에는 커다란 수정 구슬을 소중히 들고서.
“이게 대체……?”
“흠. 좋습니다. 이제야 제대로 작동하는군요.”
로메인은 지금까지 수차례 ‘임시 포털 생성기’를 사용해 이단 재판부의 죄수를 이동시켰다. 그러나 그들 중 절반가량의 영혼을 놓쳐버리는 통에, 이동 장소를 특정하는 데 결국 실패하고 말았지.
그렇다고 너무 많은 죄수들을 빼돌리면, 성황이 눈치를 챌 것이 빤했다.
그래서 다음으로 생각해 낸 것이, 이동 장소를 한쪽으로 왜곡시키는 보조 회로였다. 성공 가능성은 대단히 희박했지만, 수일간의 삽질 끝에 결국은 성공하고 말았지.
‘이제 이것으로 황녀를 빼돌리기만 하면 되는 거야.’
단지 장소를 특정할 수는 있어도, [수락]을 선택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의지.
‘그렇다면 아예 선택의 여지를 없애면 되는 거지.’
레오나드가 황녀를 구슬릴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녀의 마음을 빼앗는 데 실패한다면-
‘어떻게든 황녀를 막다른 길로 몰아, 어쩔 수 없이 [수락]을 선택하도록 만드는 수밖에…….’
* * *
한편 같은 시각, 황궁.
찻잔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던 네이트가, 뭔가에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음?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아들놈이 천진한 얼굴로 물어온다.
“아니, 아무것도…….”
어째서인지 등줄기에서 오한이 일었다.
왜지? 아이들은 얌전히 황도에서 보호받고 있고, 최근에는 삿된 것들의 움직임도 상당히 뜸해졌건만. 왜 이렇게도 불길한 예감이 드는 걸까?
“네가 또 뭔가를 한 게냐, 모레스?”
“…네?”
그러자 사고뭉치 아들놈이 잠시 어리둥절하더니, 곧 해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네. 그러니까 방금 사냥 모임 가겠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저 사슴 사냥하러 갈 겁니다.”
“사슴…….”
“네. 마침 요즘이 이른 사슴 사냥철이라던데요? 그러니까 먼저 가서 사슴이란 사슴은 싹 쓸어 오려고 말입니다.”
“…….”
어쩐지 대단히 불안한 기분에 휩싸인 네이트가 물끄러미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아비의 속도 모르는 이 철없는 아이가, 상기된 얼굴로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아, 걱정 마십시오. 저 이번에는 정말 사고 안 칩니다! 마사인 경이랑 상주기사들이 알아서 다 해줄 거예요. 저는 절대 직접 사냥하지 않고, 그냥 막스랑 사냥터에서 놀다 오기만 할 거라고요!”
괜찮은 생각이죠?
뿌듯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한 아들놈이 호로록 차를 들이켜더니 아, 하고 덧붙인다.
“가능하면 멧돼지도 잡아 오라고 할게요!”
“…….”
정말, 정말 이 아이를 이대로 보내도 괜찮은 것일까…….
네이트는 천천히 한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