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35)
성황의 아이들-35화(35/469)
035. 서쪽 산맥의 아슬란 (2)
죄수는 아슬란이 이끄는 대로 순순히 끌려왔다. 너무 저항이 없으니 오히려 따라오는 척하다 도망칠 속셈인 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아슬란이 힐끔 올려다보았지만, 그의 얼굴은 무심하기 이를 데 없어 도통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목숨을 건졌다는 안도감이나 앞으로의 처우에 대한 불안감 따위 요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그 악명 높은 이단 재판을 받았다더니 머리가 좀 이상해졌나.
“이봐요. 방금 겨우 살아난 줄 알아요. 제롬은 댁처럼 흘러들어오는 뜨내기는 거의 살려두지 않는다고요. 저래 봬도 의심이 워낙 많은 사람이라.”
죄수가 그를 슬쩍 쳐다보더니 답했다.
“그래, 고맙구나.”
아슬란이 그를 위해 번거로움을 기꺼이 감수했음을 아는 눈치다.
근데 뭐지? 이 자연스러운 하대는?
“그래도 고비는 넘겼으니, 시키는 일만 잘하면 여간해서 죽을 일은 없을 거예요. 이왕 이렇게 된 거 통성명이나 하죠. 난 아슬란이라고 해요.”
“네이…….”
네이?
“바트라고 한다.”
가명이구나.
절그럭절그럭.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린다.
죄수는 양팔에 두터운 수갑을 차고 있었는데, 그리 길지 않은 사슬로 연결되어 있어 행동에 제약이 많아 보였다.
“일단 뭔가 시작하려면 이것부터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은데…….”
풀어줘도 괜찮은 걸까 잠시 고민하던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이자가 여기서 도망을 쳐봐야 무슨 소용이겠는가. 악마 숭배자의 낙인이 찍힌 죄수는 이 대륙 어디를 가도 제대로 발을 붙일 수 없을 것이었다.
그들이 향한 곳은 화전촌 구석에 있는 대장간이었다. 작은 화로 하나와 귀퉁이가 망가진 모루 하나 달랑 있는 그곳을 대장간이라고 불러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이건 못 풀어.”
대낮부터 술을 마시다 기어 나온 막스 영감이 붉어진 코를 비비며 말했다.
“풀라고 채워 놓은 수갑이 아녀. 달군 쇠를 그대로 맞물려서 용접해 버린 거야.”
그러더니 죄수의 매끈한 손목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런 걸 채워 놨는데 흉 하나가 없네. 거참, 신기하구먼.”
아슬란이 인상을 썼다. 험하기로 유명한 서쪽 산맥을 수갑 찬 놈을 이끌고 돌아다니라고? 누굴 죽일 셈이냐?
“어떻게 안 될까요? 내일부터 당장 약초 캐러 산을 타야 하는데.”
“뭐, 화로에 잘 달궈보면 두드려 볼 수는 있겠다만…….”
막스 영감은 술병을 들어 올리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러는 동안 저 손모가지가 남아 있겠냐?”
그건 그렇지. 함께 일을 좀 해보자고 하는 건데 정작 일할 손이 없어지면 곤란한 일이다.
아슬란이 차선책을 고심하는 동안 죄수, 바트는 새삼스럽다는 듯 물끄러미 자신의 양 손목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장난을 쳐놓다니…….”
지금까지 차고 있던 장본인인 주제에 마치 수갑을 제대로 보는 것이 처음이라는 듯한 태도였다.
역시 정신이 조금 오락가락하는 모양이다. 앞으로 저놈을 혹처럼 달고 다녀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슬란은 전에 없던 편두통이 이는 것을 느꼈다.
일단 수갑을 연결하고 있는 쇠사슬이라도 끊어버리자, 막스 영감과 아슬란의 의견이 모아졌다. 곧 영감이 대장간 구석에서 묵직한 망치를 들고나오더니 사슬에 정을 끼우고는 망치질을 시작했다.
까앙, 깡, 깡.
한데 거하게 취한 양반이 하는 일이 영 미덥지가 못했다. 두어 번 손이 미끄러지며 아슬아슬하게 죄수의 손을 뭉갤 뻔한 막스 영감을 보다 못한 아슬란이 그에게서 망치를 빼앗았다.
차라리 내가 하고 말지 조마조마해서 못 보겠다.
얌전히 두 손을 모루 위에 올리고 있는 바트가 도리어 침착한 얼굴로 그들이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 좀처럼 위기의식이라고는 없는 인간이었다.
망치를 쥐고 쇠사슬을 조준한 채로 아슬란은 정신을 집중했다. 사슬의 강도를 보아하니 몇 번 두드린다고 끊어질 것 같지는 않아, 서툴긴 하지만 오러를 써서 되도록 빨리 끝을 낼 생각이었다.
제대로 된 수업을 받은 적이 없어 정식으로 입문에 들지는 못했지만, 그는 정신을 집중하면 일시적으로나마 단전에 쌓아 올린 오러를 팔과 무기에 흘리는 것이 가능했다. 혼자서 터득한 걸 생각하면 제법 괜찮은 재능이라 평할 만했다.
호흡을 가다듬고, 내쉬는 순간 힘껏 팔을 휘둘렀다.
쩌엉. 막스 영감과는 차원이 다른 소리가 대장간에 울려 퍼졌다.
쩌엉, 쩡.
두 번 더 같은 요령으로 두드리자 파삭 하고 사슬의 고리 하나가 박살이 났다.
호오. 그새 술 한 모금을 들이킨 막스 영감이 목울대를 한번 꿀꺽 울리더니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걸 쓴 거냐?”
아슬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간혹 무기에 오러를 거칠게 흘리다 깨 먹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에, 이를 수리해 주는 막스 영감은 아슬란의 특별한 재주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를 눈치챈 것은 막스 영감뿐만이 아니었다.
“이런 곳에 오러 유저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바트가 일어서서 손목을 한차례 돌리더니 아슬란을 향해 말했다. 그가 정면으로 아슬란에게 시선을 맞춰 온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어째 묘하게 서늘한 눈동자라고 무심코 생각하면서 아슬란은 조금 멋쩍게 대꾸했다.
“오러 유저라고 할 정도는 아니고요.”
“그냥 망치질을 한 건데, 그걸 알아보시겠소?”
막스 영감이 신기한 듯 묻자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하군. 이 애가 한 번씩 이런 묘기를 부리기는 하는데, 아직까지 이놈이 뭘 했는지 알아본 사람은 이 마을에서 당신이 처음이오.”
그러더니 아슬란에게 소곤거렸다.
“이 친구는 뭐 하던 사람이냐?”
“전직 사제이자 악마 숭배자였던 약제사라고 합니다.”
영감도 뒤늦게야 바트의 뒷목에 드러난 낙인을 발견하고는 혀를 찼다.
“주신이 내린 벌인가. 자네도 여생이 편안하지는 못하겠구먼.”
그는 위로하듯 바트의 등을 툭툭 두드리고는 술병을 흔들며 대장간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두 사람은 그 이후로 화전촌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이미 다른 일을 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었기도 했고, 앞으로 함께 지낼 바트에게 간단하게 마을 구조를 익히게 하는 편이 나으리라는 판단이었다.
마을 놈들에게 어느 정도 안면을 틀 필요도 있었다. 험악한 산적들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보니 혹시라도 바트가 혼자 돌아다니다 수상한 놈이라고 칼 맞는 불상사는 피해야 하지 않겠는가.
마을 놈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술판을 벌이거나 단검 던지기 등을 하며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조만간 아세인발 정기 상단을 털겠다고 큰 소리로 떠들어대는 놈들도 있다.
그들은 바트가 지나가자 한 번씩 시비라도 걸듯 매서운 눈초리를 주기는 했지만, 곁에 있는 아슬란을 보고는 이내 흥미를 잃고 고개를 돌렸다. 우두머리인 제롬이 저 어린 소년의 재주를 아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쪽에 높은 절벽 보이죠? 저기까지가 이 마을의 경계예요.”
로한을 떠난 이후로 줄곧 혼자 지내오던 아슬란은, 이것저것 설명하는 것이 막상 귀찮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째 조금 들뜬 기분이 되었다.
바트가 생각보다 이야기하기 좋은 상대였던 탓도 있었다. 그는 아슬란의 말에 큰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주의 깊게 경청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저기 오솔길을 쭉 따라 올라가면 못쓰게 된 밭들이 나와요. 2년 전만 해도 농사를 지었다고 하는데, 작년에 제롬 일당이 여기에 자리를 잡으면서 완전히 버려졌죠. 어떻게 일부라도 써보려고 했는데, 나 혼자서 산에 불을 지르려니 엄두가 안 나서요. 아, 혹시 농사지어 본 적 있어요, 바트?”
바트는 고개를 저었다.
하긴. 여기저기 검댕이가 묻어 있기는 하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햇빛을 본 적이 없는 듯 깨끗한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머리도 삐죽삐죽 대충 자라 있기는 한데 이상하게 잘 관리된 것처럼 결이 좋고.
허름한 로브로는 미쳐 가려지지 않는 기품 같은 것이 은연중에 배어 나와, 아슬란은 재판을 받기 전의 바트가 혹시 대단히 고위의 성직자가 아니었을까 하고 짐작하는 중이었다.
“농사를 지어보고 싶더냐?”
그래. 무엇보다도 말투가 엄청 묵직해. 나이가 그리 많아 보이지도 않는데.
아슬란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음, 그렇다기보다는 도적질 말고 다른 걸로 먹고 살고 싶다고 생각해요. 사실 여기도 불안한 것이, 마을 규모가 너무 커져서 상단을 터는 간격이 자꾸 줄어들거든요. 언젠가는 여기도 토벌대가 닥치겠죠.”
“…….”
“그런데 머릿속으로는 생각해도, 막상 어떻게 해야 그렇게 살 수 있을지는 모르겠거든요. 어릴 때부터 도적단에서 지냈기 때문에 다르게 사는 방법을 몰라요. 그래도 어릴 때는 나름 다른 걸 해보겠다고 사냥도 배우고 약초 캐는 법도 배우고 그랬는데, 뭔가를 배우면 배울수록 도적단에 점점 발을 들이는 결과가 되더라고요.”
“…그랬군.”
“거기다 빼앗고 죽이고 하는 것이 싫어요. 도적단 사람들은 우리만 빼앗기고 사는 것이 너무 불공평하니까, 우리도 세상에 되갚아 주는 거라고들 했어요. 근데 생각해 보면 죽은 상인들이 우리에게 직접 나쁜 짓을 한 적은 없잖아요? 그래서 양심에 찔리나 봐요. 구스타프는 늘 저보고 양심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했거든요.”
“…….”
“아, 구스타프는 예전에 알고 지내던 사제예요. 토벌대에 휘말려 죽었지만.”
구스타프를 떠올리니 괜히 코가 찡해진다. 아슬란은 콧잔등을 비비며 자기가 왜 이런 이야기까지 하고 있는지 잠시 의아하게 생각했다.
한데 잠자코 듣고 있던 바트의 얼굴이 조금 심각해졌다.
“뭐든 익숙지 않더라도 막상 닥치면 적응을 하는 법이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을 듯하니, 지금이라도 산을 내려가는 것은 어떻겠느냐?”
네? 시간이요?
아슬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닌데, 제롬이 있는 한은 힘들 거예요. 여기 원래 살던 화전촌 사람들 몇몇이 작년에 산 아래로 도망친 적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세요?”
“…….”
“플란도르의 경비대에 잡혀서 바로 즉결 처형당했어요.”
그랬다. 평생 땅만 파먹고 살던 순박한 사람들이 갑자기 외지에서 넘어온 산적들이 시킨다고 당장 도적으로 전향하기는 어려운 일. 결국은 반발한 몇몇이 가족들을 이끌고 몰래 산을 내려간 적이 있었다.
그들의 탈주 소식을 알았을 때 제롬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비릿하게 웃었을 뿐.
놀랍게도 그들은 마을 근처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기다리고 있던 경비대에 의해 체포되어 그 자리에서 목이 베였다. 흉악한 범죄자라는 이유였다는데, 거기에는 손가락을 빠는 어린아이들도 있었다.
그들에게는 신원을 밝힐 기회는 물론, 화전촌을 점령하고 있는 산적들에 관해 발언할 잠깐의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아슬란은 의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플란도르의 경비대에는 실은 제롬과 내통하고 있는 자가 있다고. 제롬이 대담하게 상단을 마구잡이로 털어먹고 있는 데에는 다 믿을 만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라고.
“이제 평생 발 빼기는 글렀다 싶네요. 그래도 여기 와서는 아직 약탈조와 직접 어울린 적은 없어요. 제롬은 그게 불만인 거 같지만 뭐, 저처럼 어린애 손을 빌려야 할 만큼 사람이 궁한 것도 아니고. 제가 사냥도 곧잘 하거든요.”
“그랬느냐.”
“네, 완전히 손을 씻기는 어렵겠지만, 언젠가는 토벌대의 손에 죽겠지만요. 그래도 사는 동안은 떳떳하고 싶다고 생각해요.”
아하하. 내가 처음 보는 사람한테 별소리를 다 하네.
뭔가 부끄러워진 아슬란이 머리를 긁적이며 바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순간 움찔 놀라고 말았는데, 이 냉막한 인상의 죄수가 그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조금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소 온기가 희박하긴 하지만, 그래도 그것은 분명 미소라고 불릴 만한 것이었다.
“어린 나이에 제법 기특한 생각을 하는구나.”
이어서 아슬란의 정수리에 가볍게 손이 올라왔다.
토닥토닥.
“어…….”
아슬란은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사리 분별 못 하는 애새끼 취급을 받는 거 같기는 한데, 그래도 칭찬받는 느낌이라서 기분이 나쁘다고 하기도 뭣했다.
무엇보다도 그가 언제 어른에게 이렇게 순수하게 어린아이처럼 대해진 적이 있었던가.
아슬란은 어쩐지 묘한 감상에 젖어 바트의 손길을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곧이어 수갑에 늘어져 흔들거리던 쇠사슬에 이마를 얻어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