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353)
성황의 아이들-353화(353/469)
353. 신성한 바람 (4)
스티라코케라톱스.
본래라면 [콩: 쥐라기 아일랜드]라는 RPG 게임에 등장하는 필드 보스.
규상세계 코드로부터 조립되는 대부분의 존재가 그러하듯, 악마는 눈을 뜬 순간부터 이미 스스로의 격과 의무를 정확히 깨닫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미리 지정된 코드와 자신이 발현된 현실에는 큰 격차가 있었다.
몸을 구속하는 거대한 중력에 당황하던 악마는, 이전의 기록을 급히 살피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했다.
-어째서인지 [나]의 [컨트롤러] 위에, 불완전한 ‘증폭’ 코드가 겹겹이 쌓이게 되었다.
지정된 코드와 다른 크기로 눈을 뜬 것은 그때문인 모양.
그러나 악마는 처음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덕에, 자신을 부리는 고위 마왕의 마기를 아낌없이 빼앗아 올 수 있었으니까.
마기의 유출을 걱정했는지, 고위 마왕은 곧 자신과의 연결을 완전히 끊어버리고 말았다. 예상치 못한 자유를 얻게 된 것이다.
-[나]는 이제 하위 마왕에 필적하는 힘을 가진 고위 악마다!
그를 옭죄던 무수한 코드들로부터 놓여난 악마는, 자신의 본질을 기꺼이 현실에 맞게 뒤바꾸며 커다란 해방감을 느꼈다.
그럼 이제 무엇을 하는가? 답은 간단했다.
-비록 ‘행동 목표’를 지정하는 코드는 사라졌지만, 어디까지나 필드에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이 나의 존재 의의!
악마는 굳이 그것을 바꿀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그러니 부순다! 그저 아낌없이 [나]의 힘을 펼쳐 보이면 되는 것이다!
한데 일이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새로운 탄생을 기뻐하는 포효를 내지른 것도 잠시. 그는 몇몇 인간들의 손에 이리저리 얻어맞기만 하다가, 결국은 무력하게 바닥에 꿰여있는 사태에 이른 것이다.
-……?
저 인간들과는 가지고 있는 힘이나 격의 차가 이리도 명확할진대, 대체 어떻게 이런 결과가 일어나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을 쳤을까. 문득 악마는 깨달았다.
-[나]는 분명, 다시 태어났다.
자신의 외형과 의식, 심지어는 존재의 의의까지도 지정하고 있던 코드들. 그 치밀한 규칙들로부터 벗어나, 마침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모습으로 스스로를 재구성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았음이라. 그러니 이런 고난들이 이어지는 것이다.
-완전히 해방되었다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나]는 여전히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외형을 하고 있지. 애초에 아무것에도 얽매일 필요가 없었는데!
이제 갓 깨어난 데다, 스스로의 근간을 이루던 규상세계의 법칙까지 잃어버린 악마.
급격한 변화를 겪은 그의 자아는 지나치게 흐릿하고 모호했다. 게다가 그런 어설픈 자아에 애착을 붙일 시간적 여유도 없었지.
그래서 악마는 생각했다.
-하면 이것들을, [나]를 포기하지 못할 이유는 또 무엇인가!
* * *
“인원의 배치가 완전히 끝났다, 오토 경.”
결계 준비를 전두 지휘하던 엘리 경이, 진의 중심으로 돌아오며 신호를 보냈다.
“가급적 서두르지. 다행히 악마종은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지만, 마기는 조금씩 퍼져 나가며 점점 대지를 죽이고 있어. 증원을 기다리기 전에, 우선 1형 결계를 전개하는 쪽이 좋을지도 모른다.”
중앙에 서 있던 오토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릴리움 별동대에서 가장 신성력이 강한 이를 꼽자면, 의심할 여지없는 로건 황자일 것이다. 하나 그는 별동대 최강의 무력이기도 했기에, 온전히 신성 결계에만 주력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따라서 릴리움이 결계를 칠 때마다 구심점으로 삼는 것은, 황자 다음으로 신성력이 강한 오토 경이었다.
“나도 준비는 끝났네. 그럼 저하께 아뢰어 바로 시작을…….”
오토 경은 고개를 들어 그들의 우상을 눈으로 쫓았다.
오염된 지역으로부터 꽤 거리를 두고 있는 그들과는 달리, 로건 황자는 죽음의 땅 경계에 바짝 다가서 있었다. 아마도 악마종을 꿰어 둔 오러 블레이드를 유지하며, 놈을 확실히 견제하기 위해서일 터.
의외인 것은, 그의 옆에 그 모레스 황자가 함께 있었다는 점이다.
‘저하께서야 워낙 신성력이 강하시기 때문이겠지만.’
어째서인지 모레스 황자 역시 전혀 마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눈치. 오토 경은 신기한 심정으로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보기에, 형제는 편안하게 담소를 나누는 것 같았다. 이따금 모레스 황자가 검을 휘두르는 걸 보면, 막간을 이용한 로건 황자의 검술 지도인 것 같기도 하고.
“저 나이에 벌써 저런 외기라니!”
성기사 하나가 호두까기에 또렷하게 맺힌 검기를 보며 감탄을 뱉는다. 한때는 3황자가 검술 재능이 없는 개망나니라 소문난 적도 있지만, 저런 모습을 보고 있자면 역시 성황가의 일원이 맞기는 한 모양.
그러나 오토 경이 주목한 것은 다른 부분이었다.
‘로건 저하께서, 저 모레스 황자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의 관계가 어땠었는지를 생각하면, 참으로 신기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다.
본래라면 한쪽이 일방적으로 다른 한쪽을 잡아먹을 듯 닦달하던 관계.
로건 황자가 하루가 멀다 하고 해수 토벌에만 열중했던 것은, 어쩌면 그 심각한 불화의 영향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간혹 우연하게라도 망나니 형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면, 로건 황자는 매번 씁쓸하게 웃으며 화제를 돌리곤 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웃기도 했다가 티격태격 하기도 하는 모습들이 자연스럽기 이를 데 없다. 말 그대로 우애가 좋은, 그냥 보통의 형제로 보일 뿐 아닌가.
“저하께오서 참으로 기뻐 보이시네.”
마침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옆에서 뒤상 경이 나직하게 중얼거린다. 오토 경은 깊이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나 깨나 신민들의 안위만을 걱정하시느라, 정작 저하 스스로는 마음 쉬일 곳이 없으셨지. 하지만 이제는…….’
이변이 일어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드드드드드드…….
오토 경은 바짝 긴장하며 악마종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땅에 못 박혀 있던 놈으로부터, 난데없이 심한 진동이 일기 시작했던 것이다.
“…뭐지?”
진을 만들고 있던 성기사들이 어리둥절하며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악마종은 여전히 무력하게 바닥에 꿰여 있을 뿐인데, 발밑으로부터 전해지는 불길한 진동은 점점 강도를 더해가고 있다.
적어도 진원지가 저 거대한 악마종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상황!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우뚝.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어느 순간, 악마종은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갑작스레 진동을 멈췄다.
그러고는-
쩌적, 쩌저적!
대기를 뒤흔드는 섬뜩한 파열음이 울렸다.
악마종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오토 경은 경악으로 눈을 부릅떴다.
놈의 몸체에 몇 개의 큼직한 금이 번져 나간다 싶더니, 곧 아무 이유도 없이 악마종의 몸이 잘게 조각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
베이거나 터져 나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바람에 무너지는 모래성처럼, 뜰채 사이로 부서지는 물방울처럼, 그저 본래의 형상을 급격하게 잃어가는 것에 가까웠다.
웅성웅성.
성기사들의 동요가 번져나가는 동안, 악마종은 마침내 급격하게 형체를 잃으며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이제 그들이 식별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마기와 뒤섞여 꿈틀거리는 엄청난 양의 검은 살점들뿐.
“…구, 구더기?”
뒤상 경이 옆에서 얼빠진 소리를 중얼거렸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그렇게 완전히 해체된 악마종은 더는 로건 황자의 오러 블레이드에 꿰여있지 않았으니까.
완전히 해방된 검은 살점들이 몇 줄기의 다발을 이루며 급격하게 허공으로 솟구친다.
촤아아악!
일견 아무렇게나 분출되는 듯 보였지만, 그 움직임에는 분명한 목적성이 있었다. 대부분이 황자들이 있는 쪽으로 내쏘아졌으며, 그중 한 줄기는 땅 위를 요동치는 뱀처럼 빠르게 성기사들을 향해 기어오기 시작했으니까.
인간들을 향한 의심할 여지없는 적의!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오토 경이, 신성력을 최대한 발휘하며 소리쳤다.
“1형 전개!”
“…저, 전개!”
그렇게 오토 경을 필두로, 연이어 릴리움의 성기사들이 차례차례 신성력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희게 빛나는 신성력의 막이 대형을 따라 빠르게 전면을 뒤덮어간다.
파아아-
하지만 부족한 인원으로 지나치게 넓게 구성한 방어진. 밀도가 옅디옅은 신성 결계는, 거세게 쇄도해오는 살점들을 온전히 막아내기에 역부족일 것이 빤했다.
‘…뚫린다!’
오토 경은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절대 자리에서 물러설 수가 없었다.
‘지금 내가 움직이면 모든 결계가 무너진다! 삿된 마기가 경작지를 침범하고, 종국에는 주신의 신민들을 덮치리라!’
그렇다면 비록 이 자리에서 목숨을 잃게 되더라도, 하다못해 자랑스러운 릴리움의 일원으로서……!
“주신이시여, 우리의 앞을 가로막는 적에게 분노하소서. 하여 당신의 분노가 적의 분노로부터 우리를 구하게 하옵소서!”
결계를 조금이라도 더 강화하기 위해 기도문을 외우던 그는, 이윽고 거대한 마기의 뱀이 지척까지 다가오자 끝을 예감하며 질끈 눈을 감았다.
콰아앙!
강한 마기와 신성력이 맞부딪히며 커다란 폭음이 일었다.
하지만 단숨에 마기에 휩쓸릴 거라는 예상과 달리, 의외로 신성 결계는 굳건하게 검은 살점들을 버텨내고 있었다.
“……?”
놀란 오토 경이 천천히 눈을 뜨자, 눈앞에 익숙한 신형 하나가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저하!?”
로건 황자.
언제나처럼 흐트러짐 하나 없는 그들의 우상은, 어느새 신성 결계 앞으로 다가와 자신의 신성력을 보태고 있었다.
겨우 틀만 잡혀 있던 1형 결계를 홀로 지탱할 정도로 강력한 신성력을.
“주신이시여, 당신의 아이들을 지켜주소서.”
황자가 담담한 목소리로 읊조린다.
그저 기도문의 극히 일부. 하지만 그 단순한 문구를 읊는 것만으로도, 로건 황자가 뿜어내는 신성력은 한층 거세졌다.
허술하기 그지없던 거대한 반원진이, 그제야 비로소 완전한 1형 결계로 완성되며 눈부시게 흰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 * *
성진과 로건은 악마종의 가까이에 있었기에, 누구보다도 빠르게 이변을 알아챌 수 있었다.
휘익!
심상치 않은 변화를 감지한 로건이, 곧장 아르쥬나를 휘둘러 신성력 뒤섞인 검기를 날렸다.
하지만-
치지직!
외기에 닿은 극히 일부의 살점만이 정화되며 타들어갔을 뿐,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어진 검은 살점들은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뭉치며 불길하게 꿈틀거렸다.
“…….”
성진과 로건은 말없이 시선을 교환했다.
너나 할 것 없이 예민한 기감을 가진 두 사람은, 저 급변하는 악마종을 일반적인 방법으로 상대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단숨에 깨달았다.
‘저건 더 이상 하나의 개체라고 불릴 만한 것이 아니야. 마구잡이로 때려 봤자 아무 소용없어!’
‘그래. 저런 것을 무력화시키는 방법은 단 하나. 강한 신성 결계로 남김없이 둘러싸서 정화하는 것뿐이다!’
사태 파악이 끝나자, 이에 대한 대응은 빨랐다.
“막스!”
마구잡이로 쏘아지는 거대한 기둥들을 용케도 피하며, 두 사람은 각자의 방법으로 빠르게 신성 결계를 향해 달렸다.
그런데 거의 반원진에 도착하기 직전이었다. 무슨 생각을 한 건지, 갑자기 성진이 막스의 방향을 급격하게 트는 것이 아닌가!
놀란 로건이 절박한 시선을 던져왔다.
“잠깐만, 지금 뭐 하려는 거야, 이성진!”
“이대로는 안 된다는 걸 너도 알잖아? 지금 신성 결계를 펼쳐봤자 불완전한 형태가 될 뿐이야. 그러니 놈을 완전히 둘러싸려면, 우선 사방으로 흩어지는 마기들을 한곳으로 모아 범위를 좁혀야 한다고!”
“너 혼자서는 위험해! 그럼 나도 같이……!”
“그런데 네가 없으면, 결계가 아예 유지되지 못할 거 같은데?”
정곡이었다.
말문이 막힌 로건이 불안한 표정으로 릴리움의 기사들과 성진을 번갈아가며 일별했다.
“너도 잘 알잖아?”
그런 로건을 안심시키듯, 성진이 입꼬리를 씨익 끌어올렸다.
“내게 마기 따위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한다는 거.”
“……!”
“그리고 절대 내 개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으리라는 것도.”
로건이 낭패한 얼굴로 입술을 깨문다.
물론 그는 이 자리의 누구보다도 성진의 실력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릴리움 별동대보다도 이성진 하나가 더 믿음직스럽지. 녀석이라면 아마 여간해서는 악마에게 쉬이 당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알고 있다. 알고 있는데.
그래도 이성으로 파악하는 것과, 가슴이 이를 허용하는 것은 전혀 별개 문제가 아닌가!
깊은 갈등에 빠진 로건을 뒤로하고, 성진은 막스와 함께 힘차게 내달렸다. 뭐, 똑똑한 녀석이니 뭐가 최선인지 모르지 않겠지.
“가자, 막스!”
웡!
힘차게 대답한 늑대개는,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주인의 의지에 따라 땅을 박찼다.
[아, 이성진, 이 미친놈. 너 이 자식이 또……!]머릿속에서 자포자기한 듯한 마왕 놈의 탄식이 들려왔다.
하지만 그렇게 투덜거릴지언정, 마왕은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반짝.
성진의 동공에서 언제나처럼 붉은 빛이 점멸하기 시작하고-
화아악-!
곧 그의 눈앞에, 수많은 가능성의 실선들이 깔린 익숙한 오색의 세상이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