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354)
성황의 아이들-354화(354/469)
354. 신성한 바람 (5)
사방으로 거칠게 터져나가는, 검은 살점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기둥들.
그것은 마치 머리 여럿 달린 신화 속 괴물의 모습 같기도, 혹은 용암이 거세게 분출하는 무시무시한 자연재해의 장면 같기도 했다.
마기를 잔뜩 머금은 대기가 진동하고, 시커먼 죽음의 대지가 사정없이 뒤흔들린다.
“이대로는……!”
반원진의 한쪽에서 기를 쓰고 신성력을 퍼붓던 엘리 경이, 참담한 결과를 예감하며 침음을 삼켰다.
일견 늦지 않게 펼쳐진 그라니우스식 1형 결계가 악마종을 성공적으로 막아선 듯 보였다.
하지만 처음 결계의 구도와 위치를 잡은 그녀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한번 펼치고 나면 다시 조정하기 어려운 대형 결계의 특성상, 성기사단의 증원 없이 악마종을 완전히 가두는 것은 요원한 일임을.
그리고 신성 결계에 가로막힌 악마종은, 종국에는 반대편 임야를 넘어 다른 영지들을 무자비하게 휩쓸게 되리라.
‘게다가…….’
모레스 황자.
그 어린 소년이 아직 저 마기의 폭풍 속에 남아 있었다.
평소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망나니 황자가 갑자기 검은 살점의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들었을 때, 엘리 경은 하마터면 결계를 지키는 것도 잊고서 그를 향해 달려갈 뻔했다.
황가의 일원을 목숨 바쳐 지키는 것 역시 성기사의 중차대한 임무일진대.
‘그런데…….’
의외로 가장 먼저 달려갈 거라 생각했던 로건 황자는, 그런 돌발 상황에서도 생각보다 침착한 모습이었다.
엄청난 신성력을 쏟아부으며 결계의 중심을 잡는 한편, 한 손으로는 은청의 외기를 두른 아르쥬나를 거머쥔 채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으니까.
그 냉철해 보이는 푸른 눈을 살피던 엘리 경은 순간 의아해졌다.
‘…믿고… 있어?’
저 사고뭉치 황자를?
어째서?
오랜 시간 추종해온 우상의 심경을 잘못 헤아렸을 리가. 엘리 경은 반신반의한 기분으로 저 멀리 내달리고 있는 모레스 황자를 돌아보았다.
쐐애액-
마치 뱀처럼 움직이는 검은 살점들이, 갑자기 흩어지기도 하고 또 예상치 못한 곳에서 뭉치기도 하는 지극히 혼란스러운 상황.
그 속에서 어린 황자는 용케도 악마종의 공격을 피해가며 능숙하게 늑대개를 몰고 있었다.
휘익-
퍼석!
이따금 그가 휘두르는 호두까기에, 검은 살점들이 마기를 흩뿌리며 속절없이 흩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모레스 황자는 기본적으로는 악마종에 정면으로 맞서기보다, 놈을 이리저리 피하면서 마치 교란하는 듯 어지러운 움직임을 보이는 중이었다.
‘대체 왜?’
그러다 순간 깨달은 사실에, 엘리 경은 마치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
지금 그녀의 눈에는 확실히 보였다. 두서없이 사방팔방 퍼져나가는 듯하던 검은 살점들이, 어느 순간 모레스 황자에게 이끌리며 자리에 정체되거나 조금씩 이곳으로 되돌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설마, 놈을 이곳에 잡아두기 위해?’
콰앙!
그때, 또 다른 검은 기둥 하나가 날아와 신성 결계에 부딪친다.
화르륵-
신성력에 정화되며 희게 타오르기 시작한 살점들이,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이리저리 요동치기 시작했다.
콰앙! 쾅! 쾅!
연이어 무지막지하게 결계를 강타하는 엄청난 충격.
‘……!’
하지만 당장 결계가 부서질 것만 같은 엄청난 충격이었음에도, 로건 황자는 손에 쥔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그저 굳건히 자리를 지키며, 결계를 향해 더욱 거세게 신성력을 쏟아낼 뿐.
‘저하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던가!’
비로소 엘리 경은 확신할 수 있었다.
로건 저하께서는 모레스 황자의 목적을 처음부터 알아채었고, 그가 결국은 해내리라는 것에 조금의 의심도 품지 않으신 거다.
그러니 혹여 악마종을 자극할 만한 공격은 일절 하지 않으며, 놈이 이곳으로 모여들 때까지 그저 버티고만 계시는 거겠지!
‘어쩌면……!’
암울하기만 하던 전망 한편에서, 어쩌면 큰 피해 없이 제국을 지킬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생겨났다.
“주신이시여, 우리의 앞을 가로막는 적에게 분노하소서! 하여 당신의 분노가 적의 분노로부터 우리를 구하게 하옵소서!”
전투 중 릴리움 별동대가 가장 자주 읊는 경전의 한 구절을 되뇌며, 엘리 경은 이내 신성 결계에 그녀의 온 힘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 * *
수천 혹은 수만, 어쩌면 그 이상으로 자잘하게 조각났을 공룡의 살점들.
그것들이 일제히 마기를 뿜어내며 두서없이 날뛰는 모습은, 감히 사람의 눈으로 쫓기에 불가능하리만치 어지러운 광경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속에 파묻혀 있는 성진은, 악마종의 움직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복잡한 광경을 보는 중이었다.
‘저 선들……!’
그는 예전에 한번 본 적 있는 실선들을 다시금 눈앞에 마주하고 있었다.
악마종의 살점들이 흩어지고 모이는 엄청난 확률의 구름 속에서, 이들의 움직임을 선명하게 예측하는 은빛의 선들이 이리저리 뒤엉키며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그중에서 유독 선연하게 빛나는 하나의 선. 바로 성진이 나아가야 하는 단 하나의 경로 또한, 당장이라도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휘익-
그 경로를 따라 막스를 가볍게 움직이자, 방금 그들이 있던 자리 위로 검은 기둥이 채찍처럼 내리꽂혔다.
쿠아앙!
빈 땅을 때린 충격으로 잘게 부서진 검은 살점들은, 다시 성진의 양옆에서 뭉쳐들며 좌우로 휘둘러졌다. 쇄애액!
하지만 이를 예측한 성진은 이미 땅을 박차곤 막스와 함께 허공을 날고 있었다.
일순 무방비해진 체공 시간.
그 찰나를 노리고서, 또 다른 검은 기둥들이 성진을 휘감기 위해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친다.
파앙!
순간 성진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박차며 거짓말처럼 소용돌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오러를 실체화시켜, 디딤돌로 삼는 기술.
아까 로건에게 막 배운 재주에 불과했지만, 한번 요령을 파악하고 나니 다급한 상황에도 써먹을 정도로 능숙해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촤아악!
그러고는 바닥으로 내려서는 동시에 정면으로 호두까기를 휘둘렀다.
그 매서운 공격에, 꿈틀거리던 살점의 밑동이 흩어지며 검은 기둥 하나가 부르르 움직임을 멈췄다. 서쪽을 향해 막무가내로 뻗어나가던 줄기 중 하나다.
‘야, 이쪽으로 와라! 너 혼자 멀리 가지 말라고!’
그렇게 기세 좋게 악마종을 몰아가던 성진은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지끈-
너무 현란하게 움직인 탓일까, 잔뜩 혹사당한 눈이 벌써부터 지끈지끈 아려오기 시작한다.
이전과 달리 마왕의 제대로 된 중계를 받고 있는 영안이었지만, 눈앞에 펼쳐져 있는 실선은 거의 기백에 이른다.
그 수없이 많은 가능성들을 동시에 응시하는 시야가, 결국은 과부하를 이기지 못하고 손상되고 있는 거다.
성진은 급한 대로 가슴께 통로에서 찰랑거리는 오러를 끌어올려 눈 주변에 덧댔다.
아버지의 오러가 가진 특성일까. 어쩐지 시원한 느낌과 함께 한결 통증이 가시는 것을 느끼며, 성진은 다시 몸을 움직였다.
‘그럭저럭 할 만한데?’
[야, 이성진……!]마왕이 침음을 삼킨다.
하나 거기까지.
현재 성진의 상태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만, 차마 그의 몰입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마치 칼날 위를 내달리듯 아슬아슬한 순간들. 만일 조금이라도 그 경로를 어긋나는 순간, 이성진은 저 검은 살점들에 뒤덮여 단숨에 갈가리 찢어지고 말리라.
그렇게 한동안 남쪽 방면의 살점들을 유인하던 성진은, 갑자기 방향을 틀어 동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아앗!”
지켜보던 성기사들이 나직한 신음을 흘렀다. 황자가 갑자기 악마종의 살점이 우글거리는 중앙으로 달려드는 듯 보였으니까.
바로 그때-
퍼엉!
멀리서 날아온 은청의 검기가 폭발하며 정면의 장애물을 날려버린다. 로건이 적절한 시점에 오러 폭사를 날려준 것이다.
“조심해! 집중을 잃지 말고!”
로건이 멀리서 외치는 소리를 들은 성진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은빛의 실선은, 실은 로건의 엄호까지도 모두 고려한 경로라는 걸 저 녀석이 알기는 할까.
휘리릭-
그렇게 긴 오러의 레일을 만들어 살점 뭉치들을 빠르게 타넘을 때였다. 성진은 갑자기 섬뜩한 예감을 느끼며 황급히 옆으로 몸을 날렸다.
그 순간-
부르르…….
잠시 떨리는가 싶던 살점들이 일제히 뾰족하게 일어서며, 마치 고슴도치처럼 사방으로 섬뜩한 가시를 세웠다.
촤르르르륵!
살벌한 빛을 흘리는 검은 가시들의 소용돌이. 멀리서 결계를 유지하고 있던 성기사들이 기겁하며 숨을 들이켰다.
“흡!”
한데 긴장한 것도 잠시.
속절없이 가시들에 꿰이리라 생각했던 모레스 황자가, 마치 모든 것을 예상이라도 한 듯 유유히 몸을 움직이는 게 아닌가!
그는 어느새 결계를 향해 똑바로 내달리고 있었다. 자신을 뒤쫓는 한 무더기의 가시들을 꽁무니에 단 채로.
“대체 어떻게…….”
성기사들의 눈에, 어린 황자의 움직임은 이미 신기에 가까웠다.
차르르륵!
그러는 와중, 결계 부근에서 꿈틀거리던 살점들 역시 같은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쐐애액!
마치 비늘이 일어나듯 일제히 솟구친 가시들이, 이쪽으로 달려오는 성진을 향해 힘껏 내쏘아진다.
하지만 성진은 경로를 그대로 유지한 채 가볍게 호두까기를 치켜들었다. 검날을 견고하게 둘러싸고 있는 선명한 오러 블레이드가, 쇄도하는 가시들을 가볍게 쳐낸다.
태앵! 탱!
지금 성진이 만들어내는 오러 블레이드는, 그의 오러층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반적인 방법으로 오러를 응축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신만의 방법으로 실체화 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이것을 잊지 말거라, 모레스. 모든 세계에는 이런 오러와 같은, 근본적인 바탕이 되는 힘이 존재한다.
일전에 아버지는 그렇게 설명했었다.
-만일 네 눈에 발군의 힘처럼 보이는 불가사의한 현상이 보인다면, 언제나 그 기저에 무엇이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하거라.
판게아 클로니클.
염상이 쉽게 정형화되고 또 실체화되도록 만들어진 그 규상세계에서, 성진은 자신의 염상을 재료로 마왕 2호를 간단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곳, 델크로스 차원에서 그 바탕이 되는 재료라고 하면-
‘오러!’
모든 생명이 자연스레 만들어내는 힘, 그리고 의지를 통해 뚜렷하게 실체화시킬 수도 있는 힘.
오랜 기간 검을 수련함으로써 구체화되는, 엄밀하게 말하면 의념이 모여 만드는 염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힘.
‘그리고 나는 아버지에게, 염상을 구체적으로 그리는 법을 배웠어!’
촤아악!
실제 호두까기의 검날보다 한 뼘은 더 길어진 견고한 외기. 그 회색의 오러 블레이드가, 재차 검은 뱀의 몸체를 갈랐다.
비록 로건처럼 신성력이 뒤섞인 오러는 아니었지만, 성유물인 호두까기의 위력은 절대적이었다.
파아악!
검은 가시로 이루어진 뱀이 단숨에 힘을 잃고는 각각이 꿈틀거리는 살점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진다.
찰랑-
동시에 소모된 오러를 채우려든 듯, 가슴으로부터 시원한 물줄기가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전에 없이 풍족한 오러에, 성진은 잔뜩 고양되어 내키는 대로 검을 휘둘렀다.
촤악! 촥!
무력하게 흩어지는 검은 살점들.
성진의 들뜬 기분을 그대로 전달받은 막스 역시, 흥분을 참지 못하고 경쾌하게 짖었다.
웡웡!
-이거 좋아! 나는 본래 강하고 거대했지만, 지금은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하고 거대하다! 그리고 더 빨라졌어!
“아하하하!”
과도하게 분비되는 아드레날린의 영향일까, 절로 쾌활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의념이 실체화된 검을 들고서, 또한 의념이 실체화된 바람을 온몸에 휘감은 채, 성진은 막스와 함께 마기 사이를 마음 내키는 대로 누비며 악마종 몰이를 이어갔다.
쿠르르르르!
사방으로 흩어지던 악마종의 살점들이 조금씩 신성 결계를 향해 모여든다. 그 경이롭기까지 한 광경을, 릴리움 별동대는 그저 넋을 잃고서 바라볼밖에.
“…저것이 바로 신수, [바람]…….”
뒤상 경의 입에서 나직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경전 동화에 나와 있다 했던가. 과연 로건 황자의 설명대로였다.
온몸에 회색의 짙은 바람을 휘감은 채 달리는 저 모습이야말로, 바람을 타고서 위대한 이적을 행했다 전해지던 성 바스티안의 재림이나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신수 바람!’
‘오래전 성인을 높은 설산으로 이끌었다는, 그리고 마침내 손가락 악마를 무찌르게 했다는 바로 그 바람!’
‘모레스 저하께서 지금 그 바람과 함께 하신다!’
경탄은 곧 기이한 열기와 함께, 릴리움의 성기사들 전원에게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성진, 조심 좀 하라니까 왜 저렇게 신이 난 거야.”
그들 중 오직 로건만이, 내심 초조한 심정을 감추기 위해 애쓰며 그 광경을 지켜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