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36)
성황의 아이들-36화(36/469)
036. 서쪽 산맥의 아슬란 (3)
아슬란과 바트가 다시 마을 공터로 되돌아왔을 때는 이미 해가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산속의 밤은 빠르게 찾아오는 법이다.
“일단 내일은 아침부터 약초를 캐러 다닐 거예요. 그래도 제롬에게 보일 정도의 성과는 있어야 하니까 일찍부터 산 탈 각오를 하세요.”
바트는 뭔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산 위쪽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거참, 표정이 없는 사람이야.
“그럼 이제 쉴까요? 지낼 곳이 생길 동안은 일단 제 오두막에서 계세요.”
그를 이끌고 막 자신의 처소로 발걸음을 옮기던 아슬란은,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한 인영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비틀거리며 걷는 마른 체구의 여인이었는데, 어둑어둑한 사위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한 각도로 뒤틀려 있는 왼팔을 보고 아슬란은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마르타. 매일 맞고 사는 제롬의 불쌍한 아내.
가까이서 본 그녀는 젊은 시절 대단한 미모를 자랑했을 것 같은 고운 선이 남아 있는 얼굴이었지만, 고된 화전촌 생활과 제롬의 폭력에 찌들어 실제보다 나이 들어 보이는 아낙이었다.
눈 밑의 검은 기미와 우울한 표정이 그녀를 마치 장기간 앓고 난 병자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녀는 가느다랗게 떨리는 목소리로 아슬란에게 물었다.
“얘야. 아슬란. 혹시 우리 카이엔을 보지 못했니?”
“아, 아뇨. 미안해요, 마르타. 저는 못 봤어요.”
“그 애는 제롬과 함께 나갔단다. 낮에 우리 집에 왔을 때 뭔가 들은 건 없니?”
아슬란은 그녀가 불안해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제롬이 또 어딘가에 카이엔을 끌고 가서 때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슬란은 카이엔 같은 못돼먹은 놈이 어찌 되든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들을 걱정하는 마르타는 딱하게 느껴졌다. 그가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젓자 그녀는 울 것처럼 입술을 꼭 깨물더니 비틀비틀 그들에게서 멀어진다.
아슬란은 그녀에게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하다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저 사람도 참 안됐어요. 젊은 시절에 제롬에게 끌려왔다가 그대로 얹혀살게 됐다고 하는데, 평생을 맞고만 살았거든요. 제롬이 한번 눈이 돌아가면 진짜 장난 아니에요. 아들 때문에 떠나지도 못한 거 같은데, 그 아들이라고 하나 있는 게 참…….”
그런데 바트는 오솔길 쪽으로 사라져가는 마르타의 모습을 한참 쳐다보더니 뜻 모를 소리를 했다.
“저 여인은 아들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구나.”
“……?”
“위험에 처한 것은 너도 마찬가지다, 아슬란.”
바트는 그를 돌아보더니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평소 카이엔이라는 아이에게 원한을 산 적이 있느냐?”
“…에?”
아슬란이 눈을 깜박거렸다.
원한? 그놈은 그냥 모든 사람을 다 싫어하는 거 아니었나?
그러고 보니 아슬란이 지나가면 유독 험상궂은 얼굴로 눈을 부라린 거 같기도 하고?
“잘은 모르겠는데요? 갑자기 그건 왜…….”
멍청하게 되묻던 아슬란은 갑자기 찾아온 서늘한 느낌에 절로 입을 다물었다. 어둠 속에서 바트의 눈이 기이한 빛을 발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맑은 회색이라고 생각했던 눈동자에 지금은 묘한 은빛의 금속성 광택이 흐르고 있었다.
“내일 꼭 저 산을 올라야 한다면, 적어도 평소에 잘 가지 않는 곳으로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할 것이다.”
“…….”
이 마을에 처음 온 당신이 무슨 근거로 그런 소리를 하는가. 그런 식의 반론을 할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그것은 기이한 감각이었다.
마치 아슬란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자의 앞에 서 있는 것 같은 소름 돋는 느낌. 절대로 거부해서는 안 되는 명령을 들은 듯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
그래서 소년은 침을 삼키며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 *
다음 날 아침, 두 사람은 새벽같이 일어나 산으로 출발했다.
전날 바트가 한 말이 조금 신경 쓰였던 아슬란은, 오늘은 평소 잘 가지 않던 버려진 밭 너머를 돌아보기로 결심했다.
바트를 이끌고 공터를 지나 밭으로 향하는 오솔길을 오르고 있는데, 평소와는 달리 그들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
의아해진 아슬란이 돌아보면 그들을 쳐다보던 놈들은 모른 척 고개를 돌리고 자기 할 일을 하는 시늉을 했다. 대부분이 제롬과 함께 로한에서 넘어온 약탈조 패거리들이었다.
‘…뭐지?’
딱히 그들을 향해 뭐라고 하지는 않고 그저 쳐다보기만 하는 터라, 미심쩍기는 해도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불안한 예감을 애써 무시하려 애쓰며 그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새로운 곳을 돌아다니며 채집량을 채우려면 조금 서둘러야 했다.
익숙하지 않은 산길을 타고 오르면서 아슬란은 조금 걱정을 했다. 그래도 새 일행을 데리고 일을 시작했는데, 평소보다 오히려 채집량이 적으면 열 받은 제롬이 바트를 그냥 쳐 죽이지는 않을까.
그러나 그것은 그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바트는 정말 귀신처럼 약초를 찾아냈다. 그가 어딘가를 물끄러미 보고 있으면 희한하게도 그 근방에 귀한 약초의 자생지가 나타나곤 했다.
후각이 좋아서 약초 냄새라도 맡는 건가? 사냥개처럼?
덕분에 온 산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닐 각오를 했던 아슬란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문제는 그가 채집 자체에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바트가 약초 자생지에 손을 가져다 대려 하면 무거운 수갑과 쇠사슬이 근처의 약초를 죄다 뭉개버렸기 때문.
상하는 것은 약초뿐만이 아니었다. 바트가 조금만 손을 움직이려 해도 두터운 수갑이 그의 피부에 묵직한 생채기를 남겼다. 순식간에 긁힌 자국과 멍이 빼곡히 들어찬 손목을 들여다보던 아슬란이 혀를 찼다.
“약초는 제가 캘 테니까 그냥 두고 저기 앉아 있어요.”
그의 말에 바트는 침울한 기색으로 나무 그늘 구석에 쭈그려 앉았다. 눈앞에서 제롬이 사람을 때려죽여도, 손 위에서 눈먼 망치가 날아다녀도 눈 하나 깜짝 않던 인간이 저렇게 풀이 죽어 찌그러져 있으니 조금 웃기기도 했다.
그나저나 대체 이전에는 무슨 수로 손목이 그렇게 멀쩡했던 걸까.
다행히 약초를 찾아다니는 시간이 많이 줄었기 때문에 아슬란 혼자서도 충분히 많은 양을 채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 여유 있는 기분이 되어 부지런히 손을 놀리면서 아슬란은 바트에게 말을 건넸다.
“바트. 전에 역병 연구를 했다고 했죠? 당신도 달리 따르는 학파가 있었나요?”
예전에 알고 지내던 약제사인 시모어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그의 말로는 약제사들 중에서도 간혹 역병 자체에 관심을 가지는 자들이 있어, 그들이 모여 역병회 활동을 한다고 했다.
역병회에는 몇 가지 전통적인 학파가 존재했는데, 그중 가장 급진적인 학파는 몇 년 전 이단 논란이 일어 회원이 죄다 사형을 당했다고 했던가.
악마의 역병회. 어쩌면 바트도 그 급진 학파와 연관이 있어 저런 낙인을 얻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아슬란은 짐작했다.
“혹시 당신도 악마의 역병회 소속이었어요?”
“악마의 역병회가 아니라, 정식 명칭은 크샨트라의 역병회지.”
바트는 무심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는 무릎 위에 턱을 괸 채로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초점이 없는 것을 보면 뭔가를 응시한다기보다는 딴생각을 하고 있는 것에 가까워 보였다.
“평소 이단 논란이 있기는 했지만, 애초에 역병 연구 기록을 모조리 파헤치면 처벌을 면할 학회는 아마 없을 거다. 그들이 무너진 원인은 결국 회원들의 내부 균열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재판에 회부된 결정적인 증거가 된 것이 학회 내부에서 나온 연구 문서들이었다고 한다.
가장 급진적인 학회이다 보니 내부에서도 과격한 논쟁이 잦은 편이었고, 사이가 틀어지다 못해 원한에 가까운 감정을 가지게 된 회원 둘이 서로를 고발했다는 것이었다.
뭐 그런 병신 같은 내막이 다 있나.
“많은 업적을 남긴 학회였는데 결국 그 모든 귀중한 연구 기록이 불타고 말았다. 안타까운 일이었지.”
뭔가 아련한 감상이긴 했지만, 본인이 그 학회의 회원이었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 사건 이후로 대부분의 역병회가 지하로 숨어들어 버렸지. 그들이 다시 양지로 나오는 데는 아마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릴 게다.”
“음, 그렇군요.”
그 이후로도 그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주로 캐고 있는 약초에 관한 것들이었는데, 제롬의 예상대로 바트는 제법 약제사로서는 쓸 만한 인재였다.
시모어에게 오랜 시간 제대로 배웠다고 생각했던 아슬란도, 바트가 가진 지식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고 여길 정도로 그는 약초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다.
“내가 처음 사사한 약제사는 보다 전통파에 가까워서 그러하다. 그자는 평생토록 약초의 효능과 재배 방법을 밝히는 데 일생을 바쳤지.”
바트는 조용한 어조로 설명했다.
“아마도 널 가르쳤다는 약제사는, 약초 자체에 대한 지식보다는 역병의 증상과 약효를 간결하게 연결시키는 아델하이트 학파의 가르침을 받은 듯 보이는구나.”
그 또한 수도의 젊은 약제사들이 주류가 되는 훌륭한 학파라고 한다. 시모어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대단한 약제사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이야기는 흘러 흘러 어느새 아슬란의 과거 이야기로 넘어갔다.
바트는 아슬란이 혼자 떠들어대는 이야기를 잘도 경청해 주었는데, 특히 로한에서 주로 쓰는 사슴 잡는 덫 이야기를 흥미로워했다. 기초 연공법을 주워듣고 혼자서 오러를 터득한 이야기에는 작게나마 감탄사까지 흘렸다.
그러다가 아슬란이 한참을 로한의 토벌대를 피해 달아나던 긴박한 상황에 대해 털어놓고 있던 참이었다.
“아슬란.”
바트가 갑자기 그의 말을 끊으며 이름을 불렀다.
“지금 마을로 돌아가야 한다.”
네? 아직 충분히 캐지 못했는데?
아직 정오의 해가 중천에 오르지도 않았다. 그러나 자리에서 일어나 마을 쪽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이 자못 심각했기 때문에, 아슬란은 서둘러 약초와 도구들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트가 한 번씩 정색을 하고 하는 말에는 어쩐지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거기다 이야기에 열중하며 쉴 새 없이 손을 놀렸더니 생각보다 채집량이 많기도 했고.
그들이 서둘러 걸음을 옮겨 마을 공터에 다다랐을 때, 공터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뭔가를 빙 둘러싼 채 수군거리고 있었는데, 아슬란이 가까이 다가가자 얼굴을 굳히며 그를 노려본다.
“아슬란.”
공터 한가운데 서 있던 제롬이 그를 불렀다.
“평소보다 빨리 돌아왔구나. 혹시 오늘 폭포 근처에 간 적이 있나?”
아슬란은 침을 삼켰다. 마을 동쪽의 폭포는 그가 평소에 비단나비 풀을 채집하러 자주 가던 곳이었다. 그 인근에는 작은 덫들이 놓여 있어 아마도 오늘 한번은 들렀어야 할 곳이다.
“안 그래도 폭포 쪽의 덫을 둘러봐야 해서 일찍 돌아왔습니다. 오늘은 북쪽의 밭 뒤쪽을 돌아다녔는데요.”
“그래.”
제롬이 건성으로 대답하며 주위를 살피자, 몇몇 놈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슬란은 그들 중에서 오늘 아침에 산을 오르기 전 유심히 자신을 지켜보고 있던 놈들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거… 뭐지?’
불길한 예감이 엄습한다.
아슬란의 얼굴을 살피듯 훑어보던 제롬이, 곧 걸음을 옮기며 공터의 놈들에게 지시했다.
“폭포 주변을 샅샅이 뒤져서 첩자의 단서를 찾아라. 오늘 행적이 수상한 놈들은 빠짐없이 나한테 보고하고.”
“예!”
“예, 두목.”
공터에 있던 놈들 대부분이 우르르 빠져나가자, 아슬란은 그제야 그들이 무엇을 둘러싸고 웅성거리고 있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시체였다. 제롬의 약탈조 중 유난히 활개를 치고 다니던 녀석.
콘라드라는 이름이었던가. 어제까지만 해도 술에 거하게 취해 아세인의 정기 상단을 털겠다고 큰 소리로 떠들던 기억이 난다.
그는 등에 단도가 박힌 채 눈을 뜨고 죽어 있었다. 발목 한쪽이 부러져 괴이한 각도로 구부러져 있고 마치 고문이라도 당한 듯 손톱이 죄다 빠져 있었다.
첩자. 제롬은 분명 첩자라고 말했다.
등줄기에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몸이 부르르 떨린다. 가만히 공터에 서서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그때까지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던 제롬의 아들, 카이엔이 다리를 절며 아슬란에게 다가왔다. 그러잖아도 사나워 보이는 삼백안이 유난히 희게 번들거렸다.
절뚝절뚝. 이윽고 아슬란의 바로 곁까지 다가선 카이엔이 입을 비틀며 웃더니,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눈치는 더럽게 빠른 새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