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361)
성황의 아이들-361화(361/469)
361. 입단 (4)
성진은 그림 같은 들판 위에 서 있었다.
새파란 하늘에는 솜사탕 같은 구름이 둥실둥실 흘러간다. 고르게 펼쳐진 초록 양탄자 위로는 알록달록 피어난 꽃들이 어지러이 흔들리고.
이 유치할 정도로 화려한 천연색의 향연.
‘…모여라 친구들?’
자연히 판게아 클로니클의 사악한 유아용 스킨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게 그 ’좋은‘ 꿈입니까, 아버지?’
이곳은 아무래도 성황이 만든 임시 염상 차원인 모양. 딱히 별다른 설명을 듣지는 못했지만, 성진은 어쩐지 그 사실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푹 쉬라고 아예 영혼을 다른 차원으로 보내버리다니, 이걸 아버지답다고 해야 할지…….’
뭐, 영혼을 날리거나 임시 휴식터를 만들어 주는 건 다 좋다 이거야.
그런데…….
‘도대체 대상 연령을 어떻게 잡으신 거지?’
성진은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아버지. 당신한테 나는 대체 언제까지 어린애인 겁니까? 예?
[크흑! 정말 못 해먹겠습니다!]그때, 저 앞에서 어딘가 익숙한 한탄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성진이 매일같이 보는 금발의 기사가 잔뜩 울상을 짓고 있었다.
[매번 이렇게 되고 맙니다. 모레스 저하께서는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마사인 경?’
말끔한 근위대 제복까지 입고 있는 걸 보면 마사인 경이 맞는데.
그럼에도 성진이 그의 정체를 바로 확신하지 못했던 것은, 마사인 경의 모습이 평소보다 훨씬 어려 보였기 때문이다.
성진의 말썽으로 나날이 찌들어가던 얼굴 대신, 어쩐지 파릇파릇한 청소년으로 보이는 마사인 경. 그런 그가 지금, 로건을 향해 참았던 울분을 쏟아내는 중이었다.
[다 이해합니다, 마사인 형님. 형님은 최선을 다하셨습니다.]그리고 그를 옆에서 토닥거리는 로건의 모습은 더욱 가관이었다.
평소처럼 말끔한 성기사단 정복을 차려입고는 있지만, 고작 유치원에 다니면 딱 좋을 정도로 작은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까.
특유의 분위기나 꼬리가 처진 파란 눈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성진은 절대 로건을 알아보지 못했을 거다.
‘…이게 뭐지?’
성진은 당황했다.
분명 느낌으로는 마사인 경과 로건, 두 사람이 맞기는 한데. 어째서 저런 모습들을 하고 있는 거야?
[함께 있을 때, 저 둘에게 가장 익숙하게 기억되는 모습이기 때문이 아닐까?] [육신과 가장 가까운 바이온은, 간혹 기억과 무의식에 따라 변하기도 하니까.]대답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두 개의 작은 구슬 같은 것이 성진의 머리 주변을 각기 다른 속도로 맴돌고 있었다.
[아, 모르니? 바이온은 영혼을 구성하는 3요소 중 하나야.] [영혼 3원설은 어디까지나 그라니우스의 주장일 뿐이지만.]영혼 3원설?
갑자기 튀어나온 소리에 의아해하고 있는데, 두 개의 구슬이 성진에게 가까이 다가오며 재차 사념을 전해왔다.
[우리가 보기에, 영혼은 에이온과 바이온 2요소로 정의하는 쪽이 더 적절해.]파란 구슬이 팔짝팔짝 뛰어오르듯 움직이며 성진의 얼굴 주위를 빙빙 돌았다.
[거기에 다키온을 끼워 넣은 건, 순전히 그라니우스의 정치적 사정 때문이었지.]반면 분홍 구슬은 느긋한 속도로 떨어져 내리더니, 성진의 어깨 위에 얌전히 자리 잡는다.
그리고 두 구슬은 동시에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여긴 성황 아빠가 임시로 만든 염상 결계야!] [깨어나면 모두 잊어버릴 작은 놀이 공간이지.] [깜짝 놀랐지, 모레스?] [너 놀랐구나, 모레스?]목소리에서 전해지는 느낌은 분명 그가 알고 있는 두 사람이 맞는데?
성진은 미심쩍은 목소리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름들을 입에 담았다.
한데 성진의 호명에 대한 두 구슬의 반응은 대단히 열렬했다. 처음에 둘은 놀란 듯 파드득 떨어대더니, 갑자기 왁자지껄한 사념들을 앞다투어 쏟아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와아! 네가 드디어 우리를 알아보는구나?] [알아? 우리는 계속 네 옆에 있었다는 걸.] [우리도 조금쯤은 네 걱정을 했다고.] [물론 엄청 많이 걱정한 건 아니지만.]저 특유의 말투, 아무리 봐도 쌍둥이가 확실했다.
[그런데 오늘은 어째서 이런 변화가 생긴 거지?] [아빠 폐하가 각성한 상태로 보내서 그런가 봐.] [그렇다면 이제는, 밤에 놀러가도 모레스가 우리를 알아볼 수 있는 걸까?] [이름을 입에 담았잖아? 아마 기억하기 충분한 인과가 만들어 졌을 거야.]성진은 정신 사나운 사념들을 대충 흘려들으며 물었다.
[바이온…은 그렇다 치고. 왜 두 사람은 아예 인간의 모습조차 아닌 거야?]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쾌활한 대답들이 돌아왔다.
[그야 우리는 바이온이 아니라, 제대로 분리한 영혼 단말을 이용해 이곳에 왔으니까 그렇지.] [덕분에 다른 사람들은 그저 꿈이라 여기고 잊어버리지만, 우리는 의식을 유지할 수 있다고.] [성황 아빠가 아니더라도, 언제든 우리끼리 여기 올 수 있어.] [물론 아빠 폐하가 만든 곳이니, 반드시 허락이 필요하지만.]쌍둥이의 영혼 단말이 떠들어대는 사념을 통해, 성진은 마사인 경과 로건 역시 성황의 손에 의해 이곳으로 날려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사인 오라버니는 침식이 심해서 제법 위중한 상태였어.] [그런데도 휴식을 취하지 않겠다고 끝까지 고집 부리더라.]결국 보다 못한 성황이 부득이하게 마사인 경을 재웠다고 한다. 꿈의 차원을 만들어, 강제로 영혼을 날려버리면서 말이지.
[어디 그뿐이야? 아멜리아 언니도 그랬어.] [로건 형님이랑 시슬레도 마찬가지였지.]성진은 납득했다.
아, 어쩐지. 성황과 한참 대화를 나누는데도, 기감 좋은 두 사람이 전혀 잠에서 깨어나지 않더라니.
[예전에도 성황 아빠는 이런 차원을 몇 번인가 만든 적이 있었어.] [오웬 형님이 있을 때 주로 그랬지. 그는 심한 악몽을 꾸곤 했거든.]물론 강제로 영혼을 떼어놓는 일이 반복되다 보면, 아무래도 몸과 정신에 큰 무리가 간다나. 그래서 어지간해서는 자주 사용하지 않는 방법이란다.
[그런데 예전과는 놀이터의 모습이 꽤 많이 달라졌네?] [아빠 폐하의 상상 속 이미지에 뭔가 변화가 생겼나 봐.] [너무 알록달록해서 뭔가 이상해.] [새로운 동화책이라도 읽으셨나?]…글쎄, 어쩐지 난 아버지가 무엇을 참고했는지는 알 것 같은데.
어쨌거나 어느 정도 적응을 마친 성진은, 쌍둥이의 영혼 단말을 달고서 느긋하게 주변을 둘러보는 여유도 생겼다.
놀이터라는 말이 어울리게, 이곳은 어린애들을 위한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한쪽에는 제법 푸짐한 다과상이 차려져 있고, 얕은 연못에는 어린아이 혼자 뱃놀이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나룻배들이 떠다닌다.
목마나 인형 같은 아기자기한 장난감들이 널려있는 커다란 천막도 있었다.
그러다가 성진은 어쩐지 괴상한 광경을 발견하게 되었다. 들판 한쪽에 커다란 버섯들이 옹기종기 모여, 허공을 향해 일제히 거센 바람을 뿜어내는 모습을.
‘…저건 또 뭐야?’
사람 몸통만큼 거대한 버섯 대들이, 마치 땅에서 펌프질이라도 하듯 꿈틀거리며 위로 위로 공기를 뿜어내는 중이었다.
휘잉- 후웅-
세찬 바람과 함께 작은 포자들이 하얗게 흩날렸다.
[부웅이구나.] [응. 부웅이야.]…부웅? 그게 뭔데?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성진은 그 버섯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한참 마사인 경을 달래던 로건이, 그를 이끌고 곧장 그곳으로 향했으니까.
[제가, 제가 다시는 모레스 저하의 작은 손에 미스라를 넘기지 않겠노라고, 지금까지 얼마나 각오를 다져왔는지……!] [마사인 형님. 그만 진정하십시오.] [하지만 저하. 저는 요즘 들어 하루에도 몇 번씩 죽다 살아나는 기분입니다! 오러 유저고 뭐고, 이러다가는 정말 제명에 못 죽을 것 같단 말입니다!] [형님 마음 잘 압니다. 자, 이쪽으로 오십시오. 같이 부웅을 하시면 기분이 훨씬 나아지실 겁니다.]두 사람은 영차영차 버섯 위로 기어 올라가더니, 이내 바람을 타고서 붕붕 하늘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번갈아 가며 올라갔다 가라앉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는 게 아닌가!
‘…….’
성진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들이 하는 양을 바라보았다.
아니, 로건은 그렇다 치고. 마사인 경, 저 양반은 나잇값도 못 하고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흠. 이건 어디까지나 꿈에 불과할 따름이니까.] [그냥 영혼이 무의식적으로 원하는 것뿐이니까.] [원인을 따지자면 모레스 때문이라고.] [그래. 알고 보면 모두 모레스 탓이지.] [조심해라, 모레스!] [자중해라, 모레스!]두 사람을 위한 변명이, 어쩐지 성진을 향한 비난으로 끝이 났다.
[어, 그래그래, 알았어. 반성한다고.]성진은 마구 달려드는 쌍둥이들을 대충 떼어놓으며, 놀이터의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쨌든 이곳에 누님이랑 시슬레도 함께 있다는 말이겠지?’
성진은 그들까지 찾아볼 요량으로, 볕이 내리쬐는 들판을 천천히 산책했다.
꿈인 듯 현실감 없는 풍경.
기분 탓인가. 이러고 있으니 오러를 잃은 상실감이 조금은 해소되는 것 같기도…….
그러다가 성진은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인물을 마주치게 되었다.
[으하하하하!]‘…오웬?’
그래. 저건 분명 오웬이다.
판게아 클로니클에서 만났을 때보다 훨씬 어려 보였지만, 구릿빛의 긴 머리카락을 단정치 못하게 흩날리는 꼴은 여전했다.
그는 어디서 그런 기운이 나는 건지, 이리저리 활기 차게 들판을 뛰어다니는 중이었다. 심지어 그의 어깨 위에, 한층 더 작아진 시슬레를 목말 태우고서!
[으하하하! 정말 보고 싶었어, 시슬레! 우리 애기, 우리 막내야!] [오라버니, 난 이제 애기가 아니라고!] [하하하! 그게 무슨 소리야? 여전히 이렇게 작기만 한데?] [그건 그냥 오라버니가 큰 거… 아! 저기 귀여운 토끼가 있다!] [그래? 쫓아가 볼까?]두두두두두!
쏜살처럼 멀어지는 두 사람을 바라보던 성진은, 천천히 이마를 짚었다.
‘어, 혼란스럽다. 이건 정말로 꿈일 뿐이구나.’
바로 그때였다.
[왜 그렇게 기운이 없니, 모레스?]노래하듯 울려오는 맑은 목소리.
묘한 기시감에 뒤를 돌아보니, 거기에는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은 깜찍한 소녀 하나가 서 있었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풍성한 장밋빛 머리카락.
[누님……?]열 살이나 되었을까 싶을 정도로 작은 소녀의 모습이었지만, 그 청초하고 화려한 분위기는 결코 다른 사람일 수가 없다.
성진은 헛웃음을 흘렸다.
[…설마, 나보다 어린 모습의 누님을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그러자 작은 아멜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소리니, 모레스? 너보다 어리다니?] [네?] [내가 누나인걸. 그러니 내 쪽이 너보다 어른인 게 당연하잖아?] [……?]성진은 눈을 깜박거렸다.
어?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 내 눈높이가 이렇게 낮아진 거지?
당황하며 자신의 몸을 살펴보니, 그는 정말로 작은 어린아이의 몸을 하고 있었다.
고급스러운 단추가 달린 작은 소매와, 그 아래 삐져나와 있는 조막만 한 손.
[……?!]이건 또 뭐야?
성진이 당황하며 몸을 더듬고 있으려니, 옆의 쌍둥이들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서 종알거렸다.
[이것이야말로 무의식이 느끼는 적정 연령.] [즉 너의 진정한 정신 연령이라 할 수 있지.] [모두가 알고 있으니 새삼 부끄러워할 것 없어, 모레스.] [빤히 눈에 보이는,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니까, 모레스.]닥쳐, 이 악마들아!
따지고 보면 이곳은 아버지의 상상 속 세상이라고. 그러니 이게 정말 내 정신 연령일 리가 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아버지의 인식, 즉 아버지 탓이란 말이야!
잔뜩 약이 오른 성진이 성가시게 구는 단말들을 잡기 위해 손을 마구 휘저었다.
[이리 와라, 이 녀석들아! 어서 이리 오지 못해?]애초에 너희는 왜 나한테만 이렇게 버릇이 없어? 오냐, 마침 잘 됐다! 오늘 이 형님께서 너희들의 버르장머리를 단숨에 뜯어고쳐 주마!
그러자 쌍둥이들은 마치 숨바꼭질이라도 하듯, 그를 피해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꺄하하하! 모레스 바보!]이 철없는 꼬맹이들은 그저 재밌어 죽겠다는 눈치다.
이놈들! 지금 내가 놀아주는 걸로 보이냐? 어?
[하하, 지금 뭐 하는 거니, 모레스?]그 모습을 동그란 눈으로 바라보던 아멜리아가, 결국 푸스스 웃음을 흘리며 다가왔다.
[누님…….] [괜히 힘 빼지 말고 이리 오렴, 모레스.]터무니없이 어려진 손을 맞잡아오는 작고도 여린 손.
거기서 전해지는 것은, 상실감으로 허전해진 가슴을 조금씩 채워주는 따뜻한 온기였다.
[저쪽에 재미있어 보이는 연못이 있단다. 나와 함께 뱃놀이를 하러 가지 않겠니?]* * *
“폐하…….”
사후 보고를 위해 집무실에 들어온 카트리나는, 어딘가 생소한 성황의 모습에 흠칫 걸음을 멈췄다.
은빛의 기이한 광채가 감도는 눈동자.
일견 무표정해 보이는 얼굴에는, 희미하긴 해도 분명 미소라 불릴 만한 것이 걸려 있다.
카트리나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지금 당신의 아이들을 보고 계신다.’
충직한 기사단장은 마음이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폐하의 안식은 어디까지나 자식들의 곁에 있건만, 이제는 그분들을 보살피는 것조차 뜻대로 하실 수 없는 건가!’
지금은 이미 많은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성황은 카트리나에 눈에 여전히 어린 황자님이었다.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곁에서 보살펴 오던, 세상에서 가장 귀히 여기는 소년.
“수고했네, 카트리나. 보고하게.”
재촉하는 성황의 말이 떨어졌음에도, 잠시 머뭇거린 것은 그 때문이었다.
“폐하.”
이내 마음을 다잡은 카트리나는, 보고를 하는 대신 결연한 얼굴로 그를 향해 고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총력을 기울여 남은 1기의 호문클루스를 압수해 오겠습니다. 저스틴 그자가 대체 어디에 그것을 숨겼는지는 모르나, 분명 황도 근교를 멀리 벗어나지는 못했을 겁니다.”
“…카트리나.”
“그러니 부디 호문클루스를 늘 모레스 저하의 곁에 두시어 시름을 잊으소서. 그것이 정 여의치 않다면, 우선 당장은 샤론 경을 아예 상주기사로 들이는 방안을…….”
“그럴 수 없다, 카트리나.”
말을 자르는 차분한 목소리에 카트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곧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충격을 느꼈다.
성황은 카트리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예전에 어렸던 그가, 베스세바 황비의 방을 나설 때마다 매번 보여주던 것과 같은 표정을 짓고서.
“그런 방식으로 모레스를 지켜봐서는 안 되네.”
“…….”
“그것이 불러올 결과를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럴 수가 없어.”
그것은 오래전부터 포기해야만 하는 것들을 인지했고, 또 그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인 자의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