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363)
성황의 아이들-363화(363/469)
363. 입단 (6)
언제까지고 한결같을 것만 같던 꿈속의 놀이터.
그곳에서도 예외 없이 시간은 흘러, 결국은 어두운 밤이 찾아들었다.
[저길 보렴, 모레스. 밤하늘의 벨루나와 그녀의 아이들이야.]초롱초롱 쏟아질 것만 같은 수많은 별들을 가리키며, 아멜리아가 어쩐지 감회에 젖은 얼굴을 했다.
[어릴 때는 저 밤하늘을 바라보며, 아버님 폐하와 단둘이 들판에서 잠들곤 했었지. 무척 그리운 추억이구나.]정말 있었던 일은 아닐 것이다. 누님의 어린 시절에, 실제 아버지는 그녀의 곁에 없었으니까.
‘다락에서 이정표를 끌어안고 꿨다는 그 꿈 이야기겠지.’
하지만 성진은 아멜리아에게 사실을 일깨워주는 대신, 이렇게 대꾸했을 뿐이었다.
[그리울 게 뭐 있습니까?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아버지와 함께 밤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데요.]언제 한번 밤늦게 본궁에 놀러가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제가 몇 번 해봐서 잘 압니다.
아마 아버지는 누님이 한밤중에 찾아가도 평소처럼 기쁘게 맞아줄걸요?
그렇게 덧붙이자, 아멜리아가 성진을 향해 배시시 웃음을 흘린다. 기쁨으로 상기된 양 볼이 밝은 달빛을 받으며 희게 빛났다.
[후후. 그래. 네 말이 맞구나, 모레스.]그러는 동안 어느새 놀이터 한가운데는 커다란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누구도 피운 적 없는데, 언젠가부터 자연스럽게 나타난 모닥불이었다.
또 그 불을 빙 둘러가며, 푹신한 침구들이 하나하나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성황 아빠가 드디어 우리를 깨우기로 결정했나 봐.] [그럴 만하지. 지금 델크로스는 아침이 되었으니까.]쌍둥이의 영혼 단말들이 모닥불 주위를 각기 다른 속도로 맴돌며 설명했다.
[이제 여기서 잠들면, 모두 현실에서 눈을 뜨게 될 거야.] [여기서 놀았던 기억은 없이, 즐거웠던 심상만이 남겠지.] [힘들었던 하루 일을 모조리 털어버려, 모레스.] [마음속에 그저 안정감과 평화로움만이 남도록.]…그렇구나.
성진은 약속이나 한 듯 꾸물꾸물 침구로 기어 들어가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이걸로 꿈이 끝나는 건가. 이 따스한 한때가 기억에 남지 않는다니, 조금은 아쉽다는 생각이 드는걸.
그런데 아이들이 모두 잠에 빠지고, 가장 마지막으로 성진이 자리에 누웠을 때였다.
헤르나와 가데스의 영혼 단말들이, 차례로 성진의 양옆에 살포시 붙어오는 게 아닌가. 그러더니 그의 귓가에 엄청난 비밀을 속삭였다.
[그거 알아, 모레스? 인형사는 지금 키프로스에 있어.] [이대로라면 로건 형님과 시슬레가 곧 그를 만나겠지.] [그래서 우리도 전부터 걱정이 커, 모레스.] [물론 넌 괜찮을 거라고 판단한 걸 테지만.] […뭐라고?]정신이 번쩍 드는 소리다.
성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잠깐! 너희들, 인형사의 행방을 알고 있었어? 그걸 왜 이제야 말해주는 거야?!] [그거야…….]뽀로롱 성진의 눈앞으로 떠오른 영혼 단말들이, 조금 난처한 듯 파르르 흔들렸다.
[어차피 모레스는 이미 알고 있었는걸?] [매번 스스로 잊어버리는 걸 어떻게 해?] [이번에도 장담할 수는 없지.] [응. 또 잊어버릴지도 몰라.]알지만 잊어버려? 뭐야, 그게?
[게다가 인과를 걱정하는 건 성황 아빠만이 아니야.] [그래. 많은 것을 알수록, 더 많은 제약이 생기니까.] [리브가도 분명 성가시게 굴 테고.] [리브가는 쓸데없이 간섭이 심해.]리브가, 꽤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덕분에 성진은 그를 기억해 내는 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그렇다면 지금은? 왜 하필 지금 굳이 내게 그걸 말해주는 건데?] [이제부터 네가 우리를 기억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래. 아까 네가 우리 이름을 제대로 불렀으니까.]파랑과 분홍의 영혼 구슬들이 심란한 듯 불규칙한 빛으로 점멸했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곳은 델크로스 차원이 아니니까, 조금은 자유롭기도 하고.] [응. 눈을 뜨면 곧 사라질 세계니까, 다소의 인과 불균형은 그대로 없어지겠지.] [그래서 이번 기회에 한 번쯤은 모험을 해 보기로 했어.] [넌 어디까지 인과를 거스르고 기억을 지킬 수 있을까?] [아, 아닌가? 정확히는 얼마만큼 기억을 지키느냐가 아니라, 네가 어디까지 허용할까의 문제겠지.] [그렇군. 우리로서는 모레스 네가 뭘 기준으로 이 모든 걸 판단하는지 짐작할 방법이 없으니까.]인과, 그리고 기억…….
성진은 터무니없이 작아진 손을 잠시 내려다 보다 저도 모르게 대꾸했다.
[특별한 기준이 있는 건 아니야. 그저 그에 따른 결과를 대충 알고 있을 뿐이지.]그러자 쌍둥이가 놀란 듯 움찔하더니, 곧 동시에 꺄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봐봐! 늘 이렇다니까! 모레스는 정말 음흉해!]시끄럽다, 이 악마들아!
음흉하긴 누가? 너희들이 세계를 짊어진 내 고충을 약간이라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아?
성진은 뚱한 얼굴로 도로 자리에 누었다. 그러자 쌍둥이가 양쪽 베개맡에 자리를 잡으며 종알거린다.
[결과가 문제란 말이지? 그렇다면 이번에는 기대할 만하지 않아?] [응. 어차피 다 기억한다고 해도, 모레스는 아무것도 못 할 테니까.] [뭐? 왜 그런데?]성진의 질문에, 대번에 쾌활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거야, 모레스는 외출 금지니까!] [응, 한동안 절대 외출 금지니까.] [덕분에 인과가 어그러질 일도 없으니까!] [응, 당분간은 아무 사고도 못 칠 테니까.]어, 그건 조금 곤란할지도.
마지막으로 그렇게 생각한 성진은, 잠시 고르게 숨소리를 내는 아이들을 바라보다 이내 천천히 눈을 감았다.
곧 쏴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릿속에서 뭔가가 깨끗하게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또 이런 식이구나.
별로 기대도 하지 않았다고.
[…훌쩍, 훌쩍.]그리고 처음 정신을 차린 성진이 들은 것은, 머릿속을 울리는 작은 훌쩍거림이었다.
‘…마왕아?’
[…이성진? 이, 이성진!]화들짝 놀란 마왕이, 곧 잔뜩 소리를 죽이며 소곤거렸다.
[너 괜찮아, 이성진? 게헤나의 불이 통로를 넘어와서, 난 이대로 네가 영락없이 죽는 줄 알았다고!]‘어, 그래. 이제 괜찮아.’
끄떡없다고.
너도 곁에 있었으니 잘 알 거 아냐? 아버지가 벌써 다 봐 주셨는데.
[끄떡없긴 뭐가! 이게 대충 넘어갈 문제야? 지옥의 겁화가 네 오러에 완전히 동화되어 버렸다고! 이제는 영영 저걸 없애버릴 방법도 없단 말이야! 이제 어쩌면 좋으냐고!]흠.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던 성진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마왕 놈이 다시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훌쩍! 아무래도 뭔가 잘못 생각한 거 같아. 이곳에 남는 게 아니었는데. 만일 그때 내가 게헤나로 완전히 떠나버렸다면, 결과가 조금은 달라졌을까?]글쎄. 설사 달라졌다고 한들 그것이 마왕의 탓은 아닐 것이다. 놈에게 이곳에 남으라고 권유한 것은 성진이 아니었던가.
거기다 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어떠한 결과가 발생하든 그것을 결정한 것 역시 나라는 모양이니까 말이야.
한데 마왕 놈은 어째서인지, 답지 않게 깊은 죄책감에 휩싸여 있었다.
[인간의 몸에 게헤나의 겁화가 들어오다니, 일이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됐는데… 훌쩍!]‘…….’
그런데 이놈은 대체 언제부터 혼자서 울고 있었던 거지? 벌써 날이 환하게 밝았는데.
[훌쩍, 훌쩍.]‘아, 난 괜찮다고! 그러니까 이제 청승 좀 그만 떨어!’
잔뜩 낙담한 녀석을 보다 못한 성진이 괜스레 윽박질렀다. 가만히 놔두면 하루 종일 울고 있을 기세다.
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이놈은 한 차원의 마왕이었다는 놈이 너무 자주 우는 거 아냐?
‘자, 뚝 그쳐! 기분이 영 나아지지 않으면 전처럼 운동이나 하던가.’
[훌쩍. 응, 그래. 그게 좋겠다.]붕붕붕.
곧 염상 결정 모서리를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기척이 느껴지면서, 놈의 울음소리도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제야 조금 안심한 성진은 멍하니 밝아진 방 안을 둘러보았다.
깜박.
그때 성진의 뒤척임을 느꼈는지, 곁에 누워 있던 아멜리아가 천천히 눈을 떴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사이로, 언제나처럼 다정한 회색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진다.
“안녕, 모레스.”
* * *
감동적인 형제자매들의 해후는 잠깐이었다.
성진은 순식간에 기세등등해진 모두에게 둘러싸여 잔뜩 잔소리를 들었다.
“모레스! 전부터 네 몸을 좀 소중히 여기라고 했잖니! 다시는 위험한 곳에 뛰어들지 않겠다고 나와 약속까지 했으면서!”
“그러게 말입니다, 아멜리아 저하. 부디 모레스 저하께 따끔하게 한 말씀 좀 해 주십시오!”
“소용없습니다, 마사인 형님. 충고를 해도 좀처럼 들어먹질 않으니 말입니다.”
“모레스 오라버니. 다들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오라버니는 좀 깊이 반성할 필요가 있어.”
“어…….”
성진은 문득 대단히 억울했다.
아니, 부상으로 여기 실려 온 게 어디 나 혼자야? 로건도 엄청 위험했잖아? 마사인 경은 또 어떻고?
“그건 모두 너를 지키기 위해서였잖니!”
아멜리아에게 정곡을 찔린 성진이, 급히 반항기를 지우곤 얌전히 시선을 내렸다.
“네가 다치면 크게 심려하실 아버님 폐하와 성황가 사람들을 생각하렴. 알겠니, 모레스? 네 몸은 이미 너만의 것이 아니란다. 성황가는 물론, 델크로스의 모든 신민들이 널 우러러보고 아낀다는 것을 늘 명심해아지!”
아멜리아의 꾸지람은 전에 없이 엄했다.
왜 아니겠는가. 이미 그녀는 마사인 경으로부터 성진의 만행을 똑똑히 전해 들은 뒤였으니까.
-목숨이 경각에 달한 긴박한 상황에서, 모든 오러를 뽑아내어 늑대개를 감싸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찌 이러실 수 있단 말입니까?
-…마사인 오라버니.
-오러를 가진 자라면 그 누구든, 위기 앞에서는 반사적으로 자신을 보호하는 법입니다. 한데 모레스 저하를 보고 있자면, 마치 자신의 안위는 전혀 안중에도 없는 사람 같습니다!
사실 아멜리아는 이미 그런 모레스의 행동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빗발치는 화살비 속에서, 자신의 안전을 도외시하고 오직 그녀를 위해 모든 힘을 쏟아낸 적이 있지 않았던가.
당시에는 모레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오러 연공을 이해하게 된 지금에는 확신할 수 있었다.
먼 거리에서 떨어져 내리는 아멜리아를 받아낸 것은, 아마도 실체화된 모레스의 오러였으리라.
그때 모레스는 쥐어짤 수 있는 오러를 한 줌도 남기지 않고서 모두 아멜리아를 향해 쏟아내며, 당시 그의 경지로는 불가능했을 묘기를 부린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수많은 화살에 꿰뚫린 채 맞이한 비참한 죽음이었다.
지끈-
또다시 아려오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아멜리아가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하지만 너는 본래 그런 아이였으니까…….”
“…네?”
쓱쓱.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당황하고 있는데, 아멜리아가 어쩐지 결연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니 앞으로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려면, 우리 성황가가 더욱 힘을 키워야 한다는 말이겠지.”
“……?”
“모두 모레스를 지켜보고 있어 주렴. 나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단다. 성회에 사후 보고도 해야 하고, 바서스트 백작 부인의 장례식에도 참석해야 해.”
황도 근교에서 일어난 사고이니만큼, 성황가의 일원이 얼굴을 들이미는 쪽이 남들 보기에 좋다나.
그러자 로건이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 누님. 그런 일이라면 제가…….”
그러나 곧바로 아멜리아의 단호한 제지를 받았다.
“로건. 오늘은 이곳에서 가만히 요양하렴.”
“네? 누님. 하지만…….”
“제대로 휴식을 취하는 것도 두 사람의 의무란다. 너희들이 어제 얼마나 큰일을 해냈는지 아직도 모르는구나.”
그녀의 위엄 넘치는 목소리에, 로건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도로 자리에 앉았다.
“그러니 조금은 더 고생했다는 생색을 내렴. 성회는 물론이거니와, 델크로스의 모두에게 확실히 보여줘야지. 두 사람은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그러자 시슬레도 아멜리아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잠시 다녀올게. 오라버니에게 기사단 수련을 절대 게을리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까. 나도 어서 강해져서, 두 번 다시 오라버니들만 위험한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그러고는 꼬맹이는, 오후에 성 그라지에 기사단을 따라 구호 활동을 하겠노라 덧붙였다.
“구호 활동?”
“응. 성 마르시아스의 기사가 되었지만, 아직은 성녀로서의 입지가 더 강하잖아? 그러니 성녀로서 제대로 바서스트령의 사람들을 보살펴야지.”
갑작스럽게 대형 악마종 출현이라는 엄청난 재난을 겪은 사람들이었다.
실제 인명 피해가 거의 없다고는 하지만, 그런 보여주기식 구호의 효과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것이 바로 꼬맹이 시슬레였다.
오랜 시간 봉사 활동을 이어오며 민심을 다독인 경력이라면, 아마도 그녀가 성황가 제일일 테니까.
“모레스 오라버니만이 아니야. 두 사람 역시 아직은 움직이기 이르다고. 그러니 쭉 여기서 지내면서, 한동안은 더 폐하의 치료를 받도록 해.”
듣자 하니 황궁으로 실려 왔을 때, 로건과 마사인 경의 상태 역시 가관이 아니었단다.
마사인 경은 온몸에 침식이 일어나 목숨이 경각에 달한 상황이었고, 로건 역시 신성력을 무리하게 쥐어짠 통에 한동안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고.
그런 두 사람은 성황의 신성력을 한차례 받은 후, 일어나자마자 사이좋게 딱밤을 나눠 맞았다나.
“…딱밤?”
“응. 폐하가 그렇게 무서운 표정을 지으시는 건 나도 처음 봤으니까.”
시슬레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아마 로건 오라버니는 처음 맞아 봤을 거야. 오라버니가 말썽 부린 건 이번이 처음이지?”
“와…….”
성진이 믿을 수 없는 눈으로 로건을 돌아보자, 그가 쑥스럽게 이마를 어루만진다.
“정말 맞았냐?”
“…응.”
“너, 소드 마스터잖아. 그런 너조차도 딱밤을 피하지 못한 거야?”
“뭐, 아바마마셨잖아. 살기가 전혀 없었던 데다가, 반사적으로 움직일 틈도 없을 만큼 빨랐으니까…….”
거기까지 말한 로건이, 슬그머니 말끝을 흐렸다.
“거기다가 어쩐지 피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때 아바마마의 기세는 뭐랄까,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났거든.”
어, 과연.
아버지의 분노의 딱밤 앞에서는, 소드 마스터건 뭐건 없는 거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