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368)
성황의 아이들-368화(368/469)
368. 돌아온 탕아 (3)
정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음에도, 다샤는 한동안 임시 치료실을 떠나지 못했다. 모레스 황자의 상태가 생각보다 위중해 보였기 때문이다.
‘폐하께서 본궁에 붙잡아 둘 정도로 상태가 나쁘다는 것은 이미 들었지만…….’
멀쩡히 대화하던 사람이 갑자기 고열로 쓰러지는 광경을 보게 될 줄이야.
하지만 어찌할 줄 몰라 당황한 그녀와는 달리, 치료실에 있는 모든 이들은 이런 일을 겪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듯 일사불란하게 몸을 움직였다.
“열이 내리면서 땀을 많이 흘리셨습니다. 갈아입으실 옷을 가지고 올 테니, 잠시만 쉬고 계십시오.”
마사인 경의 호출로 달려온 에디스가, 모레스 황자를 바로 뉘인 후 빠른 손놀림으로 척척 흐트러진 침구를 정리했다. 전담시녀로서의 소양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지만, 적어도 체력 하나만큼은 남다른 여자였다.
“슬슬 저녁 바람이 차가워질 때가 되었지. 일단 커튼은 모두 닫아 두는 게 좋겠다.”
로건 황자가 한쪽에서 가볍게 손짓을 하자, 두꺼운 커튼이 스르륵 소리를 내며 저절로 밀려 나간다.
대륙 최연소 소드 마스터가 탄생했다고 소문이 자자하긴 했지만, 설마 오러 실체화라는 전설적인 경지를 이런 식으로 확인할 줄은 몰랐지.
“저하! 괜찮으십니까? 바로 물수건을 올려드리겠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어이없는 것은 단연코 마사인 경이었다. 어느새 황자의 보모로 전락한 전직 황궁 기사단장은, 급한 마음에 장갑 낀 손으로 물수건을 쥐어짜며 발을 동동 구르는 중이다.
화아악-
그러는 와중에도 황자의 머리 위에서는 엄청난 양의 신성력이 연신 쏟아져 내렸다.
“아버지, 그만하셔도 될 것 같은데요? 이제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지금은 제법 멀쩡해 보이는 모레스 황자가 만류했음에도, 성황은 못들은 척 그의 머리 위로 기적을 펑펑 쏟아 부었다. 참 낭비도 이런 낭비가 따로 없었다.
“신성력 아깝게시리 왜 자꾸… 꾸웳?!”
말하던 중에 톡, 하고 이마를 밀린 황자가 혀를 씹으며 괴상한 소리를 낸다.
그러자 성황이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의 충격에도 그리 정신 못 차리는 걸 보니, 아직 네가 기운이 많이 없는 게구나. 그러니 잔말 말고 얌전히 누워 있거라.”
“아니, 아버지의 딱밤 위력을 정말 모르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거기다 예고도 없이 그렇게 때리시면 누구든지……!”
“그럼 이번엔 예고해 주마. 준비하렴.”
“…네?”
톡.
“꾸엑!?”
“이것 보거라. 예고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 않느냐.”
”아니, 이 양반이 진짜……!”
잔뜩 약이 오른 황자가 팔을 버둥거리며 항의하자, 성황은 그의 이마를 지그시 누르며 아무렇지도 않게 또 한 차례 신성력을 쏟아낸다.
‘…폐하. 이런 분이셨던가?’
평소 다샤가 아는 성황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능청스러운 태도다.
‘음?’
그러던 중 다샤는 뭔가 묘한 허전함을 느끼고 조심스레 주위를 살폈다. 그러고 보니 눈앞에 응당 있어야 할 것이 아까부터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런 그녀의 눈이, 어느새 성황의 손에 들려 있는 갈레노의 진료 노트를 발견했다. 다샤는 화들짝 놀라며 입을 열었다.
“저기, 폐하. 그것은…….”
하지만 다샤는 더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시선을 눈치챈 성황이,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기 시작했으니까.
“…….”
자체적으로 빛을 뿜어내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형형한 은회색의 눈.
그 지독히도 무기질적인 시선에 무언의 압박을 느낀 다샤는, 하는 수 없이 모레스 황자를 향해 머뭇거리며 인사를 건넸다.
“하면 저하. 지금은 때가 좋지 않은 것 같으니,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갈레노의 건은 추후에 다시 보고드리는 것으로…….”
“응?”
그런데 그 말을 들은 모레스 황자가, 마치 거짓말처럼 고개를 갸웃하는 게 아닌가!
“무슨 보고? 갈레노가 뭔데?”
“……!”
당황한 다샤가 저도 모르게 성황을 향해 휙 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정작 의구심 어린 시선을 받은 성황은, 여상한 태도로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보고는 다음에 해도 늦지 않겠지. 사람이 많은 자리가 제법 불편한 듯 보이니, 저자는 이만 보내주는 것이 좋겠구나.”
‘…알고 계시는구나!’
방금 모레스 황자님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그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 폐하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그래서 저하의 눈에 띄지 않도록, 갈레노의 노트를 손수 회수하신 거다!
문득 다샤는 처음 모레스 황자에게 배정받은 날, 브레만이 그녀에게 해준 충고를 떠올렸다.
-알았나? 어디까지나 저하께서 원하시는 임무만을 수행해라. 딱 거기까지가 네 역할인 게다. 그 이상의 일은 생각할 필요도, 또 걱정할 필요도 없다.
그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흘려 넘겼던 말. 한데 지금은 어쩐지 그 의미가 조금은 다르게 느껴졌다.
다정한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온화하고도 아름답기만 한 광경.
하지만 그 완벽한 세공의 가운데를 마치 센터 스톤처럼 장식하고 있는 모레스 황자는, 미묘하게 축이 어긋난 보석처럼 어딘가 희미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불편할 게 뭐 있어? 어차피 다들 알고 있는데 그냥 마음 편하게 있어, 다샤. 오랜만에 얼굴 보는 건데, 조금 더 있다 가지 그래?”
날카로운 눈매와 대비되는 순진해 보이는 회색 눈동자.
평소 모레스 황자의 과격한 성미를 아는 다샤로서는, 아무래도 그에게서 강한 이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목구멍까지 솟구치는 의구심을 애써 집어삼키며, 다샤는 천천히 황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저하. 저는 이만 물러가겠으니 부디 보중하십시오.”
* * *
백작 부인의 장례식은 생각보다 늦게 공표되었다.
그녀가 흙더미 아래로 깔리는 광경을 목격한 자가 여럿이었지만, 바서스트 백작이 끝끝내 생존의 희망을 버리지 않고 수색대를 닦달했던 탓이다.
하지만 무너진 흙더미 아래 처참하게 짓이겨진 시신을 발견하자, 결국엔 그도 사랑하는 부인의 죽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은 사고 수습으로 어수선한 영지 분위기 속에서, 백작 부인의 장례는 그렇게 조용하게 치러졌다.
성황가 대표로 장례식을 찾은 것은 아멜리아 황녀.
두 황자가 모두 큰 부상으로 본궁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지금, 성황가에서 바서스트령에 보낼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조의의 표시였다.
“바쁘신 중에 이리 찾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멜리아 저하. 성황가에 언제나 주신의 은총이 함께하기를.”
백작 부인의 젊은 시절을 쏙 빼어 닮은 소녀가, 서글픈 표정으로 아멜리아를 맞이했다.
바서스트 백작 영애, 마가렛.
탄신연 당시만 해도 티파티 소식을 알리며 천진하게 웃던 소녀였지만, 영지의 재난과 모친의 죽음을 연이여 겪은 탓에 지금은 한층 성숙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바서스트 영애. 백작 부인은 참으로 아름답고 기품 있는, 그야말로 훌륭한 귀족의 표상 같은 사람이었어요. 제국이 너무도 아까운 분을 잃었습니다.”
“어머니를 그리 기억해 주시니 더없는 영광입니다.”
그렇게 대답한 마가렛은 슬픈 눈으로 어머니의 관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두터운 베일에 꽁꽁 감싸인 백작 부인이 누워 있다. 흙더미에 짓이겨진 그녀의 처참한 시신은, 아무리 다듬어도 남들에게 보일 만한 것이 못 되었기에 한 조치였다.
“우선 사과드릴 게 있습니다. 저하께서 모처럼 참석해 주시기로 한 티파티를, 아마 예정대로 열지는 못할, 것 같아… 너무나, 송구…….”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왈칵 눈물을 쏟아내는 불쌍한 영애를, 아멜리아는 다정하게 끌어안으며 한참동안 달래 주었다.
그 자리에는 며칠 만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윌리엄 바서스트도 자리하고 있었다. 본래라면 어린 마가렛 대신, 영지의 주인인 바스서트 백작이 친히 황녀를 맞이해야 했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그의 불경을 탓하지 못했다. 부인을 잃은 백작은 며칠간 식음을 전폐한 데다, 멍청히 허공만 쳐다보는 모습이 숫제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으니까.
아마도 사제들이 신성력으로 계속 그를 보살피지 않았다면, 백작 부인에 이어 백작까지 나란히 장례식을 치렀을지도 모른다.
“백작의 상심이 대단히 큰 모양이오.”
“사람의 관계란 참으로 겉보기와는 다르군요. 평소 티격태격하는 듯 보였는데, 부부가 생각보다 금슬이 좋았던 모양입니다.”
장례식에 참석한 모두가, 그가 부인을 잃은 슬픔에 상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멜리아만은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 백작의 눈에서 이따금 타오르고 있는 광망은, 아직 목표를 특정하지 못한 극도의 분노.
사랑하는 사람을 눈앞에서 허망하게 잃어버렸을 때의 심정을, 아멜리아는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저 갈데없는 슬픔과 분노를 어디로 이끌어야 할지도 잘 알고 있었다.
“백작 부인은 참으로 유능한 사람이었습니다. 백작인 그대조차 미처 모르는 세세한 일들을 살펴가며, 영지의 안팎을 빈틈없이 관리해 왔죠. 때로는 그녀가 백작의 작위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그렇기에 아멜리아는 평소의 그녀답지 않은, 다소 도발적인 인사를 백작에게 건넸던 것이다.
“…….”
백작이 조금의 반응도 보이지 않자, 아멜리아는 조금은 차갑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이렇게 덧붙였다.
“그리고 영지의 미래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할 정도로 용기 있는 사람이기도 했죠.”
번쩍!
순간 조용하던 백작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거 아는가? 사실 백작 부인은 자살한 걸지도 모른다는군. 그녀 스스로 쏟아져 내리는 흙더미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지, 아마?
-뭐어? 세상에 주신이시여! 아니, 대체 원인이 뭐라고 하나?
부인의 죽음을 목격한 사람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퍼져나간 소문은, 어느새 그녀의 죽음을 ‘자살’로 단정하고, 그 원인에 대한 근거 없는 추측까지 재생산하기에 이르러 있었다.
아무리 눈과 귀를 막아왔다 한들, 백작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단지 믿고 싶지 않아 지금껏 부정하고 있었을 뿐.
“그럴 리 없소! 황녀께서 뭔가를 잘못 알고 계신 게요……!”
백작은 당장이라도 아멜리아의 멱살을 잡을 기세로 벌떡 일어났다.
사랑하는 부인이 절대 그럴 리 없다. 마가렛을, 그리고 나를 두고 어떻게 쉽게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가 미처 불경죄를 저지르기 전에-
쿠웅!
갑자기 황녀로부터 엄청난 기세가 쏟아져 내려, 백작은 그 자리에서 바짝 굳어버렸다.
“……!?”
지금의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늘 한 떨기 장미처럼 연약하기만 한 줄 알았던 황녀가, 언제부터 이런 기세를 뿜어내며 사람을 압박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일까.
“바서스트 백작.”
전에 보지 못한 냉정한 눈을 한 황녀가, 얼어붙은 백작을 향해 나직하게 경고했다.
“이제 그만 정신을 차리고 현실을 보세요. 부디 백작 부인의 깊은 뜻을 더는 헛되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
“1급 대형 악마종이 바서스트령에 나타났습니다. 다른 곳도 아닌, 바로 백작의 사냥터에 말입니다. 만일 백작 부인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누가 가장 먼저 이단 재판부의 의심을 샀으리라 보십니까?”
아멜리아 황녀의 지적은 정확했다.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인명 피해가 백작가에서 나왔기에, 그리고 성황가가 기꺼이 그 죽음에 애도를 표했기에. 바서스트 백작가는 겨우 피해자의 위치를 고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문제는 하나 더 있습니다. 사냥터 서쪽에서 발견된 붉은 저주의 흔적이, 영지의 중앙을 가로질러 백작저까지 똑바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큰 재난을 겪은 바서스트령의 신민들과, 고귀한 희생을 선택하신 백작 부인의 명예를 위해 따로 이 사실을 공표하지는 않았습니다만.”
격렬하게 흔들리는 바서스트 백작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아멜리아는 오랜 과거의 일을 떠올렸다.
지금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머나먼 미래이기도 한 기억.
당시 아멜리아는 로한의 왕실에 자주 드나들던 차가운 얼굴의 여인을 기억하고 있었다. 로메인의 곁에서 마치 심복처럼 서 있곤 하던, 지금은 관에 들어가 있는 낯익은 여인의 얼굴.
-저 제국인은 대체 누구길래 로한의 왕실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거지?
-델크로스에서 온 바서스트 백작이라지? 독거미 같은 여인이오.
-맞아. 독거미가 아니면 뭐겠소? 남편은 물론, 백작위의 정당한 후계자인 딸까지 제 손으로 죽였다고 하니.
소문에 의하면 여인의 남편과 딸은 악마 숭배자와 접촉한 혐의를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사랑하는 가족들을 스스로의 손으로 처단한 후, 이단 재판부로부터 그 공로를 인정받아 바서스트가의 작위를 지킬 수 있었다고.
-세상에! 제 손으로 직접?
-아무리 그렇다곤 해도 쉽지 않은 선택이오. 참으로 독한 여자로군.
아멜리아가 다른 곳을 제쳐두고 바서스트 백작 영애의 티파티에 참석 의사를 표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결국 로메인의 부하가 되는 바서스트 백작, 즉 지금의 백작 부인의 미래를 아는 까닭에.
‘그래서 천천히 이들과 가까워지며, 백작 부인이 그러한 무정한 선택을 한 이유를 알아보려 했었지.’
설마 부인이 스스로 죽음을 택하리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어쩐지 그녀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미래에도 유능하기로 소문났던 여자였으니, 악마종의 출현으로 차후 영지가 어떠한 위기를 맞을지 충분히 예상했을 테지.
그리고 어쩌면.
‘그녀는 이미 로메인의 지배를 받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아. 붉은 저주의 문양이 저택까지 이어진 것은 아마 우연이 아니겠지. 그러니 그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선택한 걸지도 모를 일이야.’
괴상한 술수로 곧잘 사람을 홀리곤 했던 로메인이다.
미래에 그의 심복이 되었던 백작 부인 역시 그런 과정을 거쳤을 가능성을, 아멜리아는 충분히 염두에 두고 있었다.
“저주라니, 그런…. 부인은 그런 일과는 아무런 상관…….”
연신 믿기 힘들다는 듯 중얼거리던 백작은, 순간 뭔가 짐작 가는 것이 있는 듯 천천히 말끝을 흐렸다.
불현 듯 자신을 향해 외치던 부인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떠올랐던 것이다.
-윌리엄! 저택에 찾아오는 수상한 손님을 조심하세요. 그는 오래전부터 바서스트 백작가를 오가며 뭔가를 꾸미고 있었어요!
누군가가.
이 사태의 원흉이 된 누군가가 있다!
백작의 눈에 서서히 초점이 돌아오는 것을 확인한 아멜리아가,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안심하십시오. 고인에 대해 괜한 의심을 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백작 부인의 명예를 믿고 있으니까요.”
그렇게 단언하는 아멜리아의 얼굴에는 조금의 의혹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 백번이고 믿어줄 수 있으리라. 이미 죽은 사람만큼 무해한 자가 세상에 또 어디 있으랴.
“하지만 바서스트 백작. 이 모든 일들이, 그저 우연히 발생한 재난이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붉은 저주를 이용해 바서스트령에 악마종을 소환하고, 백작 부인을 기어이 죽음으로 내몬 자가 지금도 어디선가 이 영지를 지켜보고 있다는 뜻입니다.”
“…….”
“황궁에서는 이번 일을 끝까지 추적할 생각입니다. 이미 성 아우렐리온 기사단이 붉은 저주를 바탕으로 조사에 착수했으며, 조금씩 그자들의 정체에 대한 실마리를 잡아가고 있어요. 그들의 음모를 파헤치고 이를 사전에 완전히 막아내는 것, 그것만이 제 일생일대 과업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아멜리아는, 백작을 향해 쏟아내던 기세를 거두어들이며 부드럽게 제안했다.
“그러니 바서스트 백작, 내게 부디 협조해 주겠습니까? 제국을 뒤흔들려는 음흉한 세력들을 막고, 억울하게 유명을 달리한 백작 부인의 넋을 위로할 수 있도록.”
윌리엄 바서스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며칠 동안 바짝 말라버린 백작의 모습은 이미 반쯤 죽어버린 시체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직 그의 눈동자.
슬픔과 의문, 그리고 분노가 뒤섞여 복잡한 빛으로 일렁이는 형형한 눈빛만이, 백작의 몸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부분이었다.
“…저하!”
마침내 결심을 굳힌 바서스트 백작이 황녀의 앞에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사랑하는 부인을 둘러싼 의혹을 기꺼이 눈감아 주겠노라며 손을 건넨, 의심할 여지없는 성황의 대변자를 향해.
“부디 제가, 이 바서스트가 그 과업에 동참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백작.”
“저의 충성을, 필요하다면 영지의 모든 것을 저하께 바치겠습니다! 제국의 안위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겠나이다! 그 대가로 많은 것을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저 저하의 과업이 끝나는 그날…….”
거기가지 말한 윌리엄 바서스트는, 열렬한 눈빛으로 황녀를 올려다보았다.
그 강렬한 눈동자에 번뜩이는 것은, 언젠가 아멜리아가 성황에게 보였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광망이었다.
“오직 부인을 죽게 만든, 그자 하나만을 제 손에 넘겨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