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379)
성황의 아이들-379화(379/469)
379. 빨강이 (2)
거대 악마종이 출현하고, 이에 대한 소문으로 한동안 세상이 떠들썩하던 시기.
대륙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미처 눈치채지 못하는 은밀하고도 신비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소하다면 사소하지만, 이를 접한 이들에게는 미래의 행보를 뒤바꿀 수도 있는 확실한 변화의 계기. 인과와 인과의 결손을 덧대어가는, 미세한 움직임이었다.
그 우연은 먼저 황궁에서 일어났다.
“…이건, 뭐지?”
진주궁.
언제나처럼 비어 있는 황자의 방을 정돈하던 에디스는, 발치에서 굴러다니는 작은 구슬 하나를 발견했다. 바로 텅 빈 영혼석이었다.
“그러고 보니, 모레스 황자님께서 종종 이걸 가지고 다니셨던 것 같기도 한데…….”
황자님의 물건이 대체 어떤 경위로 바닥을 굴러다니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에디스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바로 구슬을 주워들었다.
“일단 가져가서 저하께 여쭤봐야겠다.”
황자의 물건에 함부로 손댄다는 위기감은 없었다. 그녀가 모시는 분은 그렇게 융통성 없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일전의 일만 해도 그랬다. 그녀가 허락 없이 멋대로 황궁 마차를 사용했지만, 모레스 황자는 오히려 에디스를 크게 치하하며 막대한 포상금까지 내려주지 않았던가.
덕분에 향후 수년간은 먹고 놀기만 해도 될 정도의 수입을 얻었지.
‘하지만 내가 일을 쉬면 안 되지. 막스도 돌봐줘야 하고, 가끔 접시 던지기 놀이 하는 것도 재미있으니까.’
에디스는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영혼석을 앞치마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 * *
작은 우연은 어느 극작가에게도 찾아왔다.
“소르본 선생! 이번 작품도 대박이요! 지금 황도의 사교계에서는, ‘머리 탑의 암브로시아’를 재관람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하지. 그대는 정말 신이 내리신 재능을 가지고 있소!”
오페라 극장주가 흥분하며 목소리를 높이자, 귀가 예민한 극작가는 와락 인상을 구겼다.
“빈말은 그쯤 하지. 또 내게 뭘 원하는 게요?”
“빈말이라니, 어디까지나 진심이외다! 그것보다 선생. 우리 슬슬 다음 작품을 시작해야 하지 않겠소? 내 필요한 것은 뭐든 지원해 드리리다!”
“뭐요? 새 작품을 시연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차기작 타령이지? 이봐요, 극장주 양반. 당신 지금, 창작의 고통을 너무 우습게 생각하는 거 아니야?”
그녀의 격한 반발에 당황한 극장주가 말을 더듬었다.
“하, 하지만 선생. ‘머리 탑의 암브로시아’는 어디까지나 키프로스 음유시인들에게서 전해져 오던 오랜…….”
“아, 시끄럽소! 그런 낡은 노래 한 곡을 재료로 4막에 달하는 긴 극을 써내는 게 창작이 아니면, 이 세상에서 과연 무엇을 창작이라 말할 수 있다는 거지?”
신경질적으로 대꾸한 극작가는, 갑자기 양손을 같은 속도로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같은 손가락으로 동시에 극장주의 머리 좌우를 가리키며 버럭 화를 내는 것이다.
“게다가 누누이 말하지만, 내 저택에 올 때만큼은 가르마에 신경을 써 달라 말하지 않았소? 세상의 균형을 어지럽히는 당신의 그 비뚤어진 가르마를 눈앞에 두고 있자면, 찾아오던 작품의 영감도 대번에 진저리 치며 달아날 판이오만!”
“뭐……?”
별 쓸데없는 지적질을 하는 여자였다.
하지만 극장주는 화를 꾹꾹 눌러 참았다. 현재 소르본 선생은 베르트랑 거리에서 가장 유명한 스타 작가다. 그녀의 이름을 단 작품이라면, 설사 대사를 발로 쓴 극이라도 확실하게 흥행할 테지.
선생의 저런 인격적 결함도, 어디까지나 찬란한 천재성과 비례하는 반대급부 아니겠는가.
“자, 잠시만 기다려 보시오, 선생. 내 금방 머리를 고칠 테니, 우리 조금만 더 차기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극장주가 정확하게 가르마를 5:5로 만들기 위해 거울 앞으로 달려간 사이-
투둑!
갑자기 애먼 책 하나가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며 둔탁한 소음을 냈다.
“아, 갑자기 뭐지?”
어디서 바람이 불어온 것도 아닌데, 왜 멀쩡하게 꽂아둔 책이 바닥으로 떨어진단 말인가.
극작가는 급히 책을 주워들어 책장에 도로 꽂아 넣었다. 자신이 정렬해 둔 대칭 구조를 잠시만 벗어나는 꼴을 봐도, 불쾌함으로 가습이 답답하다 못해 내장이 다 뒤틀릴 지경이었다.
한데 그런 그녀의 눈에, 문득 책의 제목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한때 대륙의 문학 사조를 풍미했던, 오르토나 낭만주의의 걸작.
‘[인형의 노래]라…….’
뭐, 이것도 꽤 괜찮은 작품이긴 하지. 구조와 결말을 조금만 손보면, 꽤 근사한 수미상관을 보이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이번에는 고전 문학을 좀 각색해 볼까? 완전히 창작하는 것보다는 완성도 훨씬 빨라질 테고.”
극작가의 무심한 중얼거림에, 오페라 극장주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 * *
바쁘게 길을 재촉하던 청년 하나도 그 작은 우연을 만났다.
“드디어 레지나에 도착했습니다, 케네스 도련님. 이대로 브리즈 강까지 가서 배를 타기만 하면, 키프로스까지는 무사히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그래. 수고했네.”
청년은 마물 은닉 혐의와 후배의 살해 시도, 그리고 사용인 두 사람의 살해 의혹을 받고서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케네스 디고리였다.
조부의 막강한 권력 덕분인지, 그의 모든 범죄는 결국 심신미약으로 인한 우발적 사고로 결론지어진 후였다.
그렇게 대폭 줄어든 형량에 막대한 보석금까지 내고서 풀려난 케네스는, 현재 황도 인사들의 눈을 피해 몰래 다른 지역으로 도주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디고리 추기경께서는 본래 도련님께서 평화로운 아나톨리아로 가시길 바라셨습니다만.”
“고루한 지주들의 아성에서 내가 대체 뭘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난 북부로 갈 거다. 현자님께서는 전부터 항상 말씀하셨네. 대륙의 모든 신비는 저 거칠고 자유로운 북부에 몰려 있다고 말이야.”
잠시 꿈꾸듯 몽롱한 눈을 하던 청년이,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수행원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아까부터 자네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네. 길거리 곳곳에서 이런 게 날아다니던데, 이건 대체 뭔가?”
케네스 디고리의 손에는 작은 전단지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건……?”
“갑자기 바람에 날려서 내 손에 쏙하고 들어왔다네. 마치 세상의 신비가 기꺼이 나를 초대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
수행원이 눈을 가늘게 떠 그 전단지를 살펴보았다. 제대로 된 활자가 아닌, 조잡한 글씨체로 새겨진 등사 인쇄지.
-현자님께서 전하시는 미래의 비밀.
대륙은 머지않아 닥쳐올 무시무시한 지옥의 불길을 앞두고 있다! 들으라! 오직 깨어난 자만이 빛나는 구원의 문을 열게 되리라!
수행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미치광이 현자의 이야기군요.”
“현자?”
그리 낯설지 않은 호칭에, 케네스가 귀를 쫑긋 세웠다.
“네. 수년 전부터 신이 예비하신 지옥을 봤다고 주장하는 정신 나간 자입니다. 지금은 인퀴지터들을 피해 벤소 후작령 인근에 자리 잡았다고 하더군요. 그런 번듯한 전단지까지 뿌리는 걸 보니, 이제는 꽤나 추종자들의 수가 많아진 모양입니다.”
흠.
케네스 디고리는 전단지를 바라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입에서는 엉뚱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이봐. 키프로스 행은 중지다. 우리, 우선 벤소 후작령으로 한번 가 보자.”
“…네?”
갑작스러운 사태에 수행원이 당황하자, 청년은 고른 이를 드러내며 반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랜 시간 지옥을 대비하며 준비해 왔다는 자가 아닌가? 그런 자의 지성과 탐구는 얼마나 치열할 것이며, 또 얼마나 세상의 신비에 가까워져 있겠나?”
* * *
황도에서 멀리 떨어진 아세인 대공가 또한, 그러한 작은 우연을 피해갈 수 없었다.
“참으로 오랜만의 연회가 아닌가요? 아가씨… 아니, 황비님께서 돌아오신 후 처음 참석하시는 연회죠?”
내키지 않는 듯 불퉁한 표정을 하고 있는 황비의 머리를 빗질하며, 시녀들이 애써 그녀의 기분을 풀기 위해 열심히 수다를 떨었다.
“이번에는 아나톨리아의 지주들도 대거 참석한다고 하죠? 그 촌사람들이 리자베스 님의 아름다우신 모습을 보게 되면, 아마도 너무 눈이 부신 나머지 정신을 차리지 못할 거예요!”
“…….”
꺄르르르…….
조금의 변화도 없이 굳어 있는 황비의 표정에, 시녀들의 억지웃음 소리가 점점 무거워져만 갔다.
“그, 그런데 리자베스 님. 오늘은 외출복 장식이 조금 심심한 느낌이 드네요. 늘 걸치시는 적금 장식과는 색이 맞지 않는데, 어디 여기에 어울릴 만한 다른 장신구가 없을까요?”
달그락 달그락.
시녀 하나가 열심히 보석함을 뒤지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그녀의 손에 도로록, 작은 장신구 하나가 굴러들어왔다. 전에는 그다지 본 적 없는, 얼음 조각처럼 하얀 수정이 장식된, 수수한 브로치였다.
“어머? 보석함에 이런 물건이 다 있었네? 리자베스 님! 이게 딱 적당할 것 같아요!”
시녀는 희희낙락하며 그 브로치를 허락 없이 외투에 꽂아 넣었다. 그러다가 뒤늦게야 하얗게 질린 다른 시녀들의 표정을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치떴다.
‘…엉?’
‘야! 이봐! 그만 둬!’
‘응? 왜?’
시녀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자, 동료들이 온갖 인상을 써가며 소리 없이 입술을 움찔거렸다.
‘그거, 리자베스 님의, 쓰레기.’
‘쓰레… 헉!’
리자베스 황비의 쓰레기.
쓰레기처럼 멋대로 방 안을 굴러다니지만, 혹여 누군가가 함부로 손을 대면, 대번에 경을 치는 물건들.
뒤늦게야 사태를 파악한 시녀가 턱을 덜덜 떨며 황비를 돌아보았다. 지금이라도 당장 불호령이 떨어지리라 예상하면서.
“…….”
하지만 의외로 리자베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귀찮은 듯 고개를 돌리고는 가만히 눈을 감았을 뿐.
덕분에 브로치를 도로 떼어내야 할지 놔둬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시녀는, 잠시 우물쭈물하다가 그대로 부리나케 자리를 뜨고 말았다.
* * *
아세인 구석에 자리 잡은 저택 역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우연의 사각지대는 될 수 없었다.
오랜만에 심복 로드리고를 심부름 보냈던 카이엔은, 잠시 후 그의 영혼으로부터 다급한 정보를 전달받았다.
“…경비대에 붙잡혀?”
대체 왜?
그의 영혼이 드문드문 전해오는 정보를 오랜 시간 종합한 결과, 카이엔은 마침내 그 이유를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마침 로드리고는 카이엔의 지시에 따라 흑시에서 희귀한 독약을 구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주머니 끈이 끊어지며, 독약병이 고스란히 길바닥에 나뒹굴게 되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지나가던 경비대원의 눈에 우연찮게 들고 말았다는 모양.
‘아니, 이게 뭐야? 재수가 없으려니, 뭐 이런 일이 다 있담?’
로드리고는 현재 카이엔이 유일하게 온전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영혼. 그러니 어떻게든 그를 감옥에서 빼내야 할 텐데, 뾰족한 수를 생각해 내려면 또 한동안 골치 아프게 생겼다.
‘완전 망했네. 이제 아버지가 오면 뭘 하고 놀아야 하는 거지?’
잠시 고민하던 소년은, 한동안 먼지가 쌓여가던 체스판을 심드렁한 표정으로 뒤적거렸다.
* * *
매일같이 마주하던 누군가가 어느 날부터 갑자기 시선에 계속 들어온다고 하면, 이 역시 우연의 장난질이 가져온 변화라 봐도 좋을 것이라.
성 마르시아스 기사단의 부관, 인퀴지터 루미에의 경우가 그러했다. 언제부터인가 그녀는, 서먹하게 자신들과 동행하는 작은 성녀로부터 도통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선두에서 휴식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잠시 행군을 멈추고 대기하십시오!”
“대기!”
“대기!”
기사 하나가 빠르게 역주행하며 알리자, 루미에가 뒤따르는 인퀴지터들을 돌아보며 지시했다.
“마침 적절한 타이밍이군. 좋다. 당장은 특별한 일정이 없으니, 각자 편하게 휴식들 취하지.”
그러자 곁에 있던 성녀 시슬레가 고개를 끄덕이곤 가볍게 말에서 뛰어내린다.
직책상 부관으로 인퀴지터 루미에와 동급이지만, 성녀는 어디까지나 철저하게 루미에의 지시를 따르는 모양새였다.
어린 황녀와의 치기 어린 알력 싸움을 예상했던 루미에로서는 꽤 의외의 결과다.
‘그나저나 전혀 피로한 기색이 없군.’
루미에는 내심 감탄했다. 숙련된 인퀴지터들조차도 허덕일 정도의 강행군 속에서, 소녀는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자세를 유지하는 중이었다.
깨끗한 수정으로 빚어낸 것 같은, 완전무결한 주신의 피조물.
인퀴지터 루미에가 멍하니 작은 성녀를 바라보고 있자니, 그녀는 총총걸음으로 행렬의 선두를 향해 걸어나갔다. 그러고는 마침 약속이라도 한 듯, 선두로부터 다가오는 로건 황자와 마주친다.
과연 핏줄이 어디 가지는 않아, 그 역시도 그린 듯 단정한 모습의 황자님이었다.
“로건 오라버니.”
“그래, 시슬레. 막간을 이용해 나와 함께 기도를 드리겠니?”
“좋아.”
그렇게 남매는 그 자리에서 경건히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는다.
“아……!”
순간 루미에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단순한 착각이었을까? 어쩐지 기도하는 두 남매로부터, 신성한 후광이 환하게 퍼져나오는 듯 보였던 것이다.
“주신이시여. 당신의 아이들을 지켜주소서.”
“부디 모레스 오라버니가 어서 쾌차하도록 보살펴 주소서.”
남매의 차분한 읊조림이 들러온다.
루미에는 어쩐지 확신할 수 있었다. 만일 만물을 굽어살피는 주신께서 하계를 내려다보고 계신다면,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분명 그들만을 위해 시선을 고정하고 계시리란 것을!
지금 작은 성녀와 로건 황자는, 바야흐로 돌아가는 세계의 중심에 서 있었다.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엉뚱한 생각을…….’
화들짝 정신을 차린 루미에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꺄르륵-!
기분 탓일까. 어쩐지 귓가에서 천진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얼핏 들린 것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