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381)
성황의 아이들-381화(381/469)
381. 빨강이 (4)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났다면, 철저히 인간의 몸으로만 움직이며, 인간의 능력을 벗어난 행위를 쉬이 범하지 말 것.
그것이 6인 회의가 요구하는 [협정]의 제약이자, 오라클로 완전히 각성한 성황이 차원에 오래 발을 붙일 수 있는 조건이었다.
그래서 성황은 황궁을 벗어나야 할 일이 있으면, 늘 샤론 경과 같은 영능력자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혹은 호문클루스와 같이 최소한이나마 인간의 성질을 지닌 몸이 필요했지.
[샤론 경.]성황은 다급하게 키프로스에 보내둔 성기사를 찾았다. 하지만 현재 그녀의 상황 역시 그리 녹록지는 않은 듯했다.
[당장 움직이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폐하. 평의회 건물은 비교적 경계가 삼엄합니다. 거기다 상급자의 허락 없이 섣불리 대열에서 몸을 빼려 들었다가는, 키프로스의 병사들보다 토벌대의 동료 성기사들이 먼저 저를 제압할 겁니다.]물론 해결 방법은 있었다. 성황의 영혼이 임하여 그녀의 몸을 직접 움직이는 것.
하지만 공교롭게도 지금의 그는 만사를 제쳐두고서 키프로스로 향할 수가 없었다. 아들의 상태가 극도로 불안정했기 때문.
“모레스.”
만일 성황이 평소처럼 영혼 상태로 이 장소를 벗어난다면, 더는 위태로운 아들의 상태를 곁에서 억제할 수 없게 된다. 찰나의 방심만으로도 그의 아들은 지옥의 불길에 휩싸여 당장 목숨을 잃게 되리라.
문제는 일신의 제약을 벗어던진 아들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니 헤르나와 가데스가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앞뒤 따지지 않고 날뛰려 드는 거겠지.
-와아! 모레스, 진정해! 이러다 정말로 큰일 난다고!
-이거 놔! 날 방해하지 마! 여기서는 내가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일부러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어린 아들의 영혼이 이렇게 외치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들아. 이런 식이라면 너 역시 인과를 크게 어지럽히는 것은 마찬가지다.’
영혼의 힘을 직접 세상에 행사하는 것. 그것은 분명 아들로 하여금 상상 이상의 인과를 소모하게 만들리라.
지금껏 그 아이가 장난처럼 움직인 인과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임이 자명한 일. 이제 더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인과의 소모를 줄여, 되도록 오래 아이들과 함께하고 싶었다.’
그러나 괜히 몸을 사리다, 정작 자신의 아이가 먼저 세상으로부터 배척당하는 결과가 되어서는 곤란하지 않겠는가.
“…오웬.”
잠시 후, 마음을 굳힌 성황이 대자를 불렀다.
“네, 아버님.”
조금 떨리는 목소리가 돌아온다.
오웬 역시 어설프게나마 지금의 위태로운 상황을 감지한 모양. 성황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곳은 걱정하지 말고 내게 맡기거라. 너는 지금 바로 행정부로 가서, 부디 마사인을 이곳으로 데려와 주지 않겠느냐?”
“……?”
순간 오웬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서렸다. 사람을 부르는 일이야 다른 사용인을 시키면 될 일이 아니던가?
하지만 경애하는 대부님의 명이었다. 오웬은 별다른 의문을 표하지 않고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네, 그러겠습니다.”
그렇게 그의 대자가 몸을 움직이자, 성황은 지체 없이 의식을 확장시켰다. 동시에 두 가지 일을 수행하기 위해, 그의 영혼을 구속하고 있는 시간과 장소의 제약을 완전히 풀어버린 것이다.
가히 한 차원을 뒤흔들기에 충분한 권능. 그리고 이로 인한 여파는, 곧바로 현실 세계에 나타났다.
“……!”
막 문을 밀고 나가려던 오웬이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갑자기 등 뒤가 텅 빈 듯 허전하고, 서늘한 이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웬은 곧바로 목도할 수 있었다.
창가에서 내리쬐는 햇살이 급격히 회색으로 빛바래는 광경을-
고요히 움직임을 멈추는 공기의 흐름과, 성에가 번지듯 굳게 얼어붙어 가는 시간을.
또한 오웬은 대부의 이상 역시 알아차렸다.
성황은 여전히 모레스의 손을 잡은 채 강대한 신성력을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멀쩡히 두 눈을 뜨고 있음에도, 오웬은 어쩐지 그가 순간적으로 숨이 완전히 멎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창백하게 굳어 있는 성황의 얼굴은, 생물이 아니라 차라리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조각이라 해도 믿을 만큼 비인간적으로 보였다.
또 생의 증거를 완전히 잃은 채 반개한 눈.
기실 초점이 흐린 성황의 눈동자에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또한 그 시선은, 세상 모든 것을 동시에 응시하는 듯 깊고 아득하기만 했다.
‘…멀다.’
오웬은 무심코 그렇게 생각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성황은 고작 몇 걸음 너머에 있을 뿐이건만, 마치 그와의 사이에 한 꺼풀 회색의 장막이 덧씌워진 듯, 멀게만 느껴지는 것이다.
“아버…….”
놀란 오웬은 그를 향해 되돌아가려 했다.
한데 그 보이지 않는 경계에 한 발을 들이민 순간이었다. 갑자기 아찔한 현기증이 오웬의 머리를 거세게 잠식했다.
정신이 아득하게 빨려드는 기분과 튕기듯 밀려나는 기분이 동시에 느껴지는 괴상한 감각. 온몸의 신경이 일시에 풍랑을 만난 배처럼 요동치는 느낌.
놀라는 것도 잠시, 이내 격렬한 구토감이 치밀어 올랐다.
“우욱!”
입을 틀어막은 오웬은, 비틀거리며 그 자리에서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이게, 뭐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상식으로는, 지금의 상황을 마땅히 설명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오웬은 한 가지 사실만은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성황이 뜬금없는 심부름을 시킨 까닭. 아마도 그는 오웬을 이 괴상한 경계에서 멀찌감치 떼어두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렇다면 이 사태 역시, 어디까지나 대부님의 통제하에 있다는 뜻이겠지.’
그렇게 결론을 내린 오웬은, 보이지 않는 경계 앞으로 다시 조심스레 다가갔다. 그러고는 초조한 얼굴로 성황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버님. 지금 대체 무엇을 하시는 겁니까…….”
* * *
“서둘러 주시오, 로건 황자! 토벌대가 타고 갈 전함은 이미 준비되어 있소이다!”
평의원들은 일제히 목소리를 높였다. 토벌대의 책임자가 어린 황자라는 것을 알게 되자, 일단은 기세만으로 거세게 밀어붙이려 작정한 듯 보였다.
하지만 로건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상황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원합니다. 마수의 종류와 출몰하는 지역, 그리고 그 규모를 자세히 알려 주십시오.”
“가는 동안 모두 설명할 수 있소. 우리 해군에서 일찌감치 상세한 토벌 작전을 입안해 두었소이다!”
“자자, 우리 지금 이럴 시간이 없다오.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키프로스의 시민들은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서 보내고 있음을 알아주시오!”
하지만 신성제국의 황자는 의원들의 압박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모두에게 다급한 사안임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우리 토벌대는 어디까지나 나의 계획하에서만 움직입니다. 그러니 한번에 토벌에 성공하기 위해서라도, 마수에 대한 더 자세하고 정확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
일이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자, 평의원들은 다급히 동석하고 있는 나이 지긋한 부관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로건 황자의 말에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뿐, 딱히 대놓고 존재감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그제야 평의원들은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 로건 황자의 명성이 그저 과장된 허명이 아니라는 것을.
신성제국의 애송이 황자는, 정말로 토벌 작전을 직접 입안하고 시행하는 저들의 지휘관인 것이다.
잠시 시선을 주고받던 평의원들은, 결국 이 만만찮은 황자를 달래기로 마음먹었다.
“급한 마음에 실례를 범했소. 준비된 작전의 신뢰성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시오, 로건 황자. 제대로 설명 드리겠소. 우선 우리 해군이 준비한 [고대의 불]이라는 병기가…….”
바로 그때였다.
끼이이-
묵직한 마찰음과 함께, 굳게 닫혀 있던 회의실의 문이 열린 것은.
“……?!”
“뭐지? 왜 문이 열리게 내버려 두었나? 대체 경비들은 뭘 하고 있기에…….”
갑자기 회의를 방해받은 평의원들이 웅성거린다.
그렇게 열린 문 앞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우중충한 잿빛 정복을 걸친 까마귀 같은 여인이었다.
“…샤론 경?”
로건의 호명에, 동석한 부관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로 쏠린다.
다들 그녀를 바로 알아보았다. 샤론 경은 이번 토벌대에서 유일하게 참가한 성 테르바키아의 엑소시스트였으니까.
“갑자기 여기는 무슨 일로?”
“왜 멋대로 대열을 이탈한 거지?”
하지만 로건의 예민한 감각은, 일순 그녀의 눈이 묘한 은빛으로 번뜩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아바마마?
당황하며 시선을 마주하자, 엑소시스트는 굳은 얼굴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로건 저하.]마치 머릿속에 직접 울려오는 듯, 기이하게 가까이서 들리는 목소리. 예전에 한 번 들은 적 있는 목소리지만, 소드 마스터의 감각은 전과는 어딘가 다른 기묘한 간극을 감지하고 있었다.
[서둘러 주시기를.]그녀의 표정 또한 전과는 어딘가가 달랐다.
예전에는 성황의 영혼을 덮어썼을지언정 사람 같은 느낌이 남아 있었다면, 지금은 마치 완전한 기계인형으로 변하기라도 한 듯 지극히도 무표정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녀가 공들여 한 마디 한 마디 내뱉는 말 역시 매끄러운 문장이 아니었다. 마치 소리를 내는 것이 두려운 듯, 극도로 말을 아끼는 모습.
[성녀께서.]하지만 로건에게는 그 몇 마디 말로 충분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아버지가 왔고, 시슬레에 관해 언급했다. 필시 그의 동생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뜻이리라.
마음이 움직이자, 이내 주위의 모든 오러가 그에게 필요한 정보들을 실어 나른다. 복도에서 느껴지는 기이한 술렁거림과, 어린 동생의 유난히 빠른 심장 박동을.
‘시슬레!’
로건은 곧장 회의장을 박차고 나왔다. 그러고는 모두가 얼이 빠져 있는 사이, 시슬레의 기척이 느껴지는 방향을 향해 주저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 * *
건물 곳곳에서는 마수 토벌을 위한 준비가 한창이었다.
시슬레가 시종의 안내를 받아 걷는 사이에도, 복도 한쪽에서는 인부들이 커다란 나무 상자를 여럿 실어 나르는 모습들이 보였다.
“어이, 거기 좀 조심해서 옮겨!”
“인화성이 강하다고. 되도록 횃불 근처에 다가가지 말란 말이다!”
그 와중에 복도로 쭉 이어진 횃불들은 점점 더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
타닥! 탁! 탁!
그것이 어찌나 신경이 거슬렸던지, 인퀴지터 보리스가 끝내 한마디 내뱉었을 정도였다.
“키프로스는 횃불에 대단히 질 나쁜 기름을 쓰나 봅니다.”
시슬레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아까부터 느껴지는 묘한 불길함이, 점점 두근거림으로 신체화되는 현상을 경험하면서.
‘뭐지? 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바로 그 무렵이었다.
복도 저편에 있던 횃불 하나가 기묘한 움직임을 보인 것은.
화르르륵!
난데없이 높이 솟구쳐 오른 커다란 불꽃은, 마치 나비의 날개처럼 팔랑이는 작은 불씨 하나를 허공에 날려 보냈다.
“……?”
하늘하늘.
바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 홀로 날갯짓하던 붉은 불씨는, 꿈결처럼 느릿느릿한 움직임으로 시슬레의 눈앞을 가로질렀다.
“…음?”
그리고 끝내 그 붉은 나비가 안착한 곳은, 마침 인부들이 한쪽 복도에 놓아둔 커다란 나무 상자 위였다.
“자, 잠깐! 저, 저……!”
인부들이 미처 손쓸 틈도 없었다.
화르르륵!
키프로스 해군이 야심 차게 준비한 비밀 병기, [고대의 불] 위로 거센 불길이 치솟아 오른다.
연이어-
콰아앙!
커다란 폭음이 평의회 건물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