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383)
성황의 아이들-383화(383/469)
383. 빨강이 (6)
세대교체는 이미 일어났다.
하지만 처음에는 마왕 역시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어떻게 지옥의 겁화로부터 살아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영혼이 멀쩡히 보존되지 않았던가.
완전히 소멸하지 않는 한, 자신은 어디까지나 불의 마왕이라 생각했었지.
간혹 자신의 상태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없진 않았다. 하지만 무슨 까닭인지, 그는 점점 거기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언젠가 이성진이 지나가듯 이름에 대해서 물었을 때도 마찬가지.
‘내 진명에는 많은 것들이 걸려 있다. 함부로 이 이름을 입에 올렸다가는, 아마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그런 애매한 두려움이 영혼을 강하게 잠식하고 있었기에, 마왕은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 채 대충 얼버무리고 말았던 것이다.
‘어제 자정쯤에 내가 뭘 했지? 잤나?’
물론 때때로 눈에 띌 정도로 기억에 공백이 생긴다는 사실을 감지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마왕은 그저, 자신의 영혼이 너무나도 무료한 나머지 잠깐씩 수면을 취하고 있다고 생각했더랬지.
참으로 이상하지 않은가. 본래라면 진작 이상을 감지하고 고민했어야 할 일들, 아마도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마왕의 영혼에 직접 개입하며, 그의 의구심과 위기감을 처음부터 거세하고 있었음일 것이라.
예를 들자면 마왕은, 언젠가 얼뜨기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던 적이 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빨강이 님은 악령이 아니라, 실은 저하의 충직한 종이라고요.
감히 위대한 마왕이신 자신을 한낱 인간의 종이라 칭하다니! 마왕은 즉시 분개했지만, 이상하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실을 전혀 개의치 않게 되었다.
또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이성진에게 영안을 빌려주며 규상세계의 물건들을 살피던 때였던가.
?소환수로 소환 가능한 영혼의 목록 2/4?
?1. □□□□ (비활성)?
?2. □□□ □□ (비활성)?
?3. 헤이즈 마틴 (활성)?
?4. 빨강이 (활성)?
언제나 객관적인 정보만을 보여주는 규상세계의 물건이, 자신을 마왕이 아닌 이성진의 소환수로 표기한다고?
그때 마왕은 너무나도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체통도 잊은 채 잠시 훌쩍거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또다시 이성진이 제공하는 곰 고기를 먹으며 대충대충 넘겨 버리지 않았던가.
그 모든 일들에 일찌감치 의문을 가졌어야 했는데.
왜 이성진에게만은 처음부터 [영혼 탐지]가 통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인간인 이성진이 어떻게 자신의 감각을 마음대로 탈취하는 것이 가능했는지를 말이다.
그러다가 결국 그 일이 일어났다. 지그스문트령에서 이성진이 웬 정신 나간 노부인과 마주쳤던 날.
몹시도 분개한 이성진은, 잠시 스스로에게 걸어 둔 제한을 풀어버리곤 모두의 눈앞에서 그가 가진 권능의 일부를 드러냈던 것이다.
-너는 앞으로도 영원히 네 죄를 용서받지 못한다. 너는 죽을 때까지 편히 잠들 수 없을 거다. 죽은 이후에도 네 영혼은 결코 쉴 수 없을 거다.
인간의 영혼에 깊이 아로새겨져, 감히 저항할 생각조차 할 수 없을 강력한 저주.
그 무거운 한 마디 한 마디는, 저주의 대상이었던 노부인은 물론 곁에 있던 오르덴의 영혼에도 큰 충격을 남겼다.
그러니 영혼 상태로 생생하게 그 광경을 목격한 마왕은 어땠겠는가.
그날 마왕은, 이성진으로부터 자신이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아득한 [격] 같은 것을 느꼈다.
감히 한 차원의 마왕인 그조차도 헤아릴 수 없었던 불가사의한 기운. 월등한 격을 가진 고위 마왕의 시선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듯한 충격.
그리고, 영혼을 단숨에 압살해 버릴 것만 같은 끔찍한 압박감.
오랜 시간 두려움에 떨던 마왕은, 결국 이성진에게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너, 정말 이성진이야?
그때 이성진이 뭐라고 했던가.
-괜찮아. 아버지가 다 고쳐주셨어. 이제 다 괜찮아졌어, 마왕아.
전혀 괜찮을 리가 없었다.
한데 그러한 이성진의 대답에, 마왕은 이상할 정도로 안도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어느새 그는 이성진의 일거수일투족은 물론, 그의 감정 상태에까지 지나치게 큰 영향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이상하다. 이성진과 나의 관계에는 설명하기 힘든 이상한 구석이 있어…….’
마왕이 이성진의 세계를 멸망시킨 원수이듯, 이성진 또한 마왕의 모든 것을 빼앗은 원수일진대…….
한데 어째서 마왕은 이성진의 말 한마디에 그리도 기뻐하거나 슬퍼하며, 그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어 안달했던가. 왜 그의 안위를 위해 자진해서 영안을 공유하는 수고까지도 마다하지 않았던가.
[그리고…….]거기까지 말한 마왕은, 잠시 깜박임을 멈추고는 성진의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나는 왜 이성진, 널 죽이고서 게헤나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두고도, 굳이 너와 이 세계에 남고 싶다고 생각했던 걸까?]‘…….’
[물론 금제가 풀린 지금은 확실히 알 수 있지. 아마 그때 네가 불길에 휩싸여 사라졌다면, 마왕의 격을 잃은 나 역시도 그리 멀쩡히 살아남지는 못했을 거라는 걸.]그래. 그랬을 터다.
지금의 마왕은, 부주의한 손짓 한 번만으로도 훅 하고 꺼져버릴 위태로운 촛불 같은 상태니까.
[넌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거겠지? 그러니까 그때, 나한테 돌아가지 말라고 했던 거야. 대체 왜 그랬어? 왜 이제 와서 날 살려둘 마음이 든 거지?]왜 그랬냐니, 달리 이유랄 것은 없었다. 그때 마왕 놈이 먼저 성진을 살리겠다고 결심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놈이 먼저 보여준 호의에, 동일한 호의로 응했을 뿐.
‘말했잖아? 넌 내 옆에 붙어 있다가 언젠가 함께 길동무가 되어 줘야 한다고.’
심드렁하게 대꾸하자, 마왕은 조금 당황한 듯 빠르게 빛을 점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너는 꽤 쓸모가 있단 말이야. 영안을 빌려줄 수 있고, 거짓말 탐지기가 되기도 하고, 심지어 정찰용 드론이 될 수도 있잖아?’
[하지만 이성진. 처음부터 내가 없었다면, 넌 오히려…….]‘처음부터, 뭐?’
[그러니까…….]‘뭐? 왜? 뭐?’
[…….]성진의 퉁명스러운 태도에 잠시 멍해져 있던 마왕은, 이내 고개를 젓는 것처럼 영혼을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었다.
[…아니. 나의 새로운 군주는 어울리지 않게 자비로운 구석이 있구나. 전혀 악마답지 않게도 말이지.]그야 마왕아, 난 악마가 아니기 때문이야.
성진은 무심코 그렇게 생각했지만, 허투루라도 그 소리를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함부로 자신의 존재를 규정해서는 안 되니까.
더욱이나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하는 일을 미리 부정한다는 건 어불성설 아닌가.
[어쨌거나 그날 이후, 나도 나름대로 게헤나의 불을 제어하기 위해 애를 써봤어.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뜻대로 되지 않았지. 그래서 점차 깨닫게 된 거야. 내가 이미 게헤나의 불에 대한 통제를 완전히 잃어버렸다는 사실을.]본래라면 이러한 깨달음 또한, 평소처럼 금제 속에서 서서히 흐려졌으리라.
하지만 최근에 성진의 상태가 극도로 불안정해진 탓일까. 금제 또한 덩달아 불안정해지며, 마왕은 지금까지 의식 한편에 미뤄 두었던 의문들을 서서히 되새기게 된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어중간한 상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어.]듣고 싶지 않다.
성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들어야 했다. 더는 기억을 잃고 싶지 않다는 마왕의 바람을, 그리고 놈이 성진에게 간절히 전하고자 하는 말들을 들어주겠노라, 암묵적으로 허락하고 말았으니까.
[이성진. 그날 힘의 저울이 완전히 기울었을 때, 이미 우리의 세대교체는 시작되었어.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그 과정이 그리 깔끔하게 끝나지는 않았지.]왜냐하면 아직 내 영혼이 남아 있잖아?
마왕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하늘하늘 영혼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죽기 전에 게헤나의 불에 마지막으로 명령했다. 이성진과 함께 세상의 모든 것을 불태우라고. 심지어는 겁화의 주인인 내 영혼까지도 남김없이 모두 말이야.]하지만 어째서인지 둘의 영혼은 살아남았다. 그래서 게헤나의 겁화는, 지금까지도 마지막 목표로 지정된 이들을 불사르기 위해 저리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물론 지금 우리 둘이 함께 저 불에 휩쓸린다면, 아마 네 영혼보다는 초라한 내 영혼이 먼저 불타서 소멸하게 될 거야. 그리고 넌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아, 결국은 지옥의 겁화에 대한 통제권을 거머쥐게 되겠지. 즉, 이 모든 건 어차피 일어나게 될 일이라는 뜻이야.]‘…….’
[그래, 잘 알고 있어. 아직까지도 내 영혼이 이 세상에 남아있는 것은, 그저 새로운 군주로 내정된 자가 베풀어 주는 작은 자비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하지만 그 유예가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는 없겠지.]마왕의 영혼이 향한 곳은 바로 모레스의 단전 쪽이었다. 아직도 살아 있는 작은 게헤나의 불씨가, 언제든 다시 몸을 일으킬 기회를 엿보며 혀를 날름거리는 장소.
성진은 그제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마왕 놈이 최근 계속해서 훌쩍거리며 우울해했던 이유.
아마도 놈은 그때부터 이미 자신의 끝을 결심하고, 천천히 이 상황을 준비하고 있었던 거다.
‘잠깐만, 마왕아. 너 지금 뭘……!’
성진이 화들짝 놀라며 다시 놈을 통제하려 해 봤지만, 이미 금제를 벗어난 마왕의 영혼은 게헤나의 불을 향해 저만치 멀어져 가고 있었다.
오직 쓸쓸하게 울리는 놈의 사념만이, 귓가로 점점 또렷하게 전해질 뿐.
[그거 알아? 본래 악마들의 행동 원리는 꽤나 단순하지. 자신의 고통을 타인에게 전가하고, 그의 불행을 원동력 삼아 스스로의 고통에서 벗어나려 들거든.]성진은 빠르게 놈을 따라 영혼을 움직였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애를 쓰면 쓸수록 놈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기만 했다.
[조금이나마 인간의 생리와 감정에 대해 알게 된 지금은 이런 생각도 든다. 소중한 것은 그 무엇이든 멀쩡히 간직할 수 없는 악마의 영혼이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영혼이 아닐까?]아마도 일전에 성황이 무언가 손을 쓴 모양이었다. 게헤나의 불길이 성진의 영혼과 최대한 멀어지도록, 그만의 방법으로 시간과 공간을 완전히 비틀어 버린 것이다.
[그렇기에 이성진, 나는 아직도 너에게 진심으로 사과할 수는 없어. 차원을 파멸시키고 삼키는 것은 어디까지나 악마인 나의 본성이다. 만에 하나라도 내가 마왕의 힘을 되찾을 방법이 있다면, 나는 언젠가 또다시 영혼의 깊은 공백을 메우기 위해 그런 일을 반복하게 될 테지.]거기까지 말한 마왕은, 잠시 움직임을 멈추곤 성진을 향해 희미한 불빛을 깜박였다.
[하지만 이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오랜 세월 마계의 왕으로 군림해 왔지만, 너와 함께한 지난 몇 개월간의 시간만큼 밀도 있고 충실한 경험을 한 적은 없다는 걸 말이야. 그 기억들이야말로 내게는 절대로 잃고 싶지 않은,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몰라.]결국 놈을 따라잡기를 포기한 성진이 소리쳤다.
‘야, 인마! 뭐 하는 거야? 당장 그만둬!’
하지만 마왕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유언처럼 들리는 말을 계속해서 전해왔다.
[그래서 네게는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이성진. 누군가를 권속으로 삼는다는 것은, 그가 지닌 업 또한 등에 함께 짊어진다는 의미지. 네 덕분에 잠시나마 나는 악마의 본성에서 벗어나, 정말로 인간이라도 된 것처럼 많은 감정들을 경험할 수 있었다.]‘너, 내 권속이라며? 그럼 명령을 들어! 거기 멈추라니까!?’
[행복한 기억이 충분히 쌓이도록, 내 영혼에 긴 유예를 줘서 정말 고마워.]‘…그러지 마라, 마왕아.’
[그리고 내가 소멸하는 한이 있어도, 언제까지나 잃고 싶지 않다 느끼는 것을 만들게 해 줘서 고맙다.]거기까지 말한 마왕의 영혼은, 마지막으로 환한 빛을 뿜어내며 고해왔다.
[안녕, 이성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