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387)
성황의 아이들-387화(387/469)
387. 충돌 (4)
“검토해 주실 건은 이 케이스가 끝이에요, 마사인 경.”
지브릴의 말에 마사인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던 서류 작업이 드디어 막바지에 이르렀으니.
그녀로부터 마지막 서류를 받아들며, 마사인은 무심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나저나 이렇게 둘만 남아 있으니, 어쩐지 이곳이 텅 빈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
그리 넓지 않은 사무실을 허전하다 느끼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하지만 평소에는 모레스 황자와 발레리 경, 샤론 경, 심지어 로건 황자까지 함께 복작거리던 공간이 아니었던가.
잠시 묘한 상념에 젖어 있던 마사인은, 이내 잡생각을 휘휘 털어내고 마지막 집중력을 쥐어 짜냈다.
“…내용을 보면 단순히 열병이 돌았던 모양이군요. 회색 역병과는 초기 증상부터 감별점이 뚜렷합니다.”
“역시 그렇죠? 확인만 해 주시면 그 건은 바로 되돌려 보내겠습니다.”
지브릴의 순순한 대답에, 마사인은 아까부터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을 물었다.
“지브릴 의원. 이런 명확한 케이스는 라이오라 역병회에서 먼저 걸러 주는 쪽이 좋지 않겠습니까? 이것들이 구별 없이 모조리 마물 전담반으로 올라오는 이유가 뭡니까?”
“글쎄요? 일단 의심 사례 보고는 모조리 가져오라는 모레스 황자님의 명이 있었으니까요.”
마물 전담반은 애초에 회색 역병 조사를 위해 발족된 기관. 따라서 대륙 각지에 퍼져 있는 라이오라 학파의 역병 의사들은, 아직도 꾸준히 회색 역병 의심 사례에 대한 보고서를 황궁으로 보내오고 있다.
그러면 그것들을 마물 전담반에서 모조리 취합해, 조사가 필요하다 싶은 부분은 따로 뽑아서 관리하는 것이다.
“게다가 모레스 저하는 서류 처리가 의외로 빠르시거든요.”
“흠.”
마사인은 침음을 흘렸다.
하긴. 평소에는 모레스 황자가 휙휙 넘기듯 처리하던 일이라, 이렇게 살펴볼 구석이 많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오늘만 해도 그렇지. 자신은 고작 한 달 치 서류를 붙잡고서 하루 종일 끙끙거렸지만, 만일 모레스 황자가 있었다면 차 한 잔 들이켤 시간에 모조리 해치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저하께서는 지금쯤…….’
의식의 흐름에 따라 마사인이 또다시 멍한 얼굴을 하고 있자, 지브릴이 알 만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또 저하를 걱정하고 계시는 거군요, 마사인 경.”
“…그렇게 보입니까?”
“네. 아까부터 틈만 생기면 계속해서 본궁 방향을 쳐다보고 계시잖아요?”
“…….”
물론 걱정으로 일이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겠지.
하지만 모레스 황자가 고열에 시달릴 때, 정작 마사인은 그의 곁에서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런 잡일이라도 처리해 드리는 쪽이, 나중에 저하께 더 큰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아, 그리고 마사인 경. 이왕 오신 김에 봐주셨으면 하는 것이 있어요. 발레리 경이 저하께 드리는 보고입니다.”
“네? 그는 지금 토벌대와 함께 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직 마수 토벌은 시작도 하지 않았을 텐데, 대체 뭘 보고하겠다는…….”
“보고라기보다는 단순히 징징거리는 서신에 가깝지만요. 계속 저하께 보내오고 있으니, 이걸 좀 어떻게 해 주시겠어요?”
그렇게 해서 마사인의 눈앞에 내밀어진 서신은 다음과 같았다.
-모레스 저하. 토벌대와 함께 키프로스로 향하던 도중 무척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글쎄 스스로를 선지자라 칭하는 웬 미친놈 하나가, 세상의 종말이 도래하였다는 둥 지옥의 불이 다가오리라는 둥 헛소리를 하며 순진한 백성들을 현혹하고 있다지 뭡니까? 이런 일이야말로 우리 마물 전담반이 나서야 하는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실이라면 인퀴지터의 신경을 긁기 딱 좋은 사안이겠군. 마사인은 납득하며 다음 서신을 읽었다.
-저하! 소문을 듣고 있자니 갈수록 가관입니다. 글쎄, 저 미치광이 놈이 구원을 받기 위해 자신을 찾아오라 대대적으로 광고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주신의 종을 자처하지 않고, 스스로를 새로운 구원자로 우상화 하다니, 이것이야말로 곧 신성모독이요, 이단의 짓거리가 아닙니까? 급한 사안입니다. 조사에 착수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과연, 신성모독과 이단이라는 표현까지 나왔다. 마사인은 지끈지끈 두통이 이는 것을 느끼며 다음 서신을 펼쳤다.
-저하! 부디 재고해 주십시오! 그 정신 나간 현자라는 놈이 이미 벤소 후작령을 중심으로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다니, 배후에 암흑 교단이 암약하는 것은 아닌지 합리적인 의심이 듭니다. 이 발레리, 저하께서 허락만 해 주시면 당장 토벌대를 떠나 후작령으로 달려갈 수 있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날아든 서신.
발레리 경의 초조한 마음을 대변하듯, 서신의 어투 역시 갈수록 다급해지고 있다. 보고 있자니 절로 골치가 아파 왔다.
‘이것 역시 저하가 계셨다면 명쾌한 답을 주셨겠지만…….’
잠시 고민하던 마사인은, 결국 이렇게 답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모레스 저하께서는 아직 병석에 계시오. 틈이 생기면 내가 따로 보고를 드리겠으니, 경은 일단 마수 토벌을 제대로 마치고 돌아오시오. 도착하는 대로 함께 조사 방안을 궁리해 봅시다.
물론 머릿속은 이런저런 생각으로 복잡했다.
이 보고를 내 선에서 처리해도 되는 걸까? 혹시 보고를 받고도 조사를 미뤘다며, 나중에 이단 재판부에서 괜히 모레스 저하를 책잡는 것은 아닐까?
‘차라리 발레리 경에게 원하는 조사를 하도록 허락하는 쪽이… 아니, 하지만 저하께서 직접 발레리 경에게 토벌대에 합류하라 명하셨는데…….’
고민하다 보니 또다시 속이 쓰려온다.
마사인이 가슴을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나니, 지브릴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장미 향수가 든 작은 분무기를 고이 챙겨 주었다.
“저런. 그렇게 저하께서 걱정되시면 어서 돌아가 보세요. 부디 치료실 주변의 방역도 잊지 마시구요.”
그렇게 저녁때가 다 되어 본궁으로 돌아온 마사인이 발견한 것은, 고열에 시달리는 황자가 아니라 진수성찬이 펼쳐진 어수선한 치료실이었다.
모레스 황자는 물론 오웬 황자와 전담 시녀 에디스까지, 방 안에 격식 없이 음식들을 펼쳐놓고는 왁자지껄 환담을 나누고 있는 게 아닌가!
마사인의 눈이 당혹감으로 잘게 흔들렸다.
“아니, 저하? 이게 무슨……!”
그러자 냠냠 식사에 열중하고 있던 황자가 밝은 얼굴로 그를 반긴다. 얼마 전까지 죽도 못 넘기고 빌빌거리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활기찬 모습이었다.
“마사인 경, 어서 와! 늦게까지 일하느라 식사도 못 했을 텐데, 경도 빨리 여기 앉으라고!”
“저, 저하. 대체 이게 다 뭡니까?”
“응. 에디스가 ‘베르트란 & 리, 참연어 전문점’에서 직접 사 들고 온 음식들이지. 오웬한테도 맛보여줄 겸, 대표 메뉴란 메뉴는 모조리 포장해 오라고 했거든.”
그렇게 설명한 황자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쓴웃음을 흘렸다.
“맛있는 건 지금 다 먹어둬야지. 아마 한동안은 또 곰 고기만 줄기차게 먹어야 할 거 같으니까.”
“…네에?”
지금까지 좋아서 찾으신 게 아니셨습니까?
얼떨떨해진 마사인이 엉거주춤 그들 사이에 끼어 앉자, 오웬이 잘 구워진 참연어 스테이크 접시를 옆으로 밀어준다. 또 반대편에서는 에디스가 어느새 새 식기 한 벌을 냉큼 펼쳐 주는 게 아닌가.
“너무 걱정 마십시오, 마사인 형님. 모레스는 이제 정말 괜찮아진 모양입니다. 오후 내내 열이 한 번도 나지 않았거든요.”
“…그게 정말입니까?”
마치 꿈만 같은 말이었다. 아직도 현실감을 찾지 못한 마사인이 멍하니 되묻자, 모레스 황자가 얼른 음식을 삼키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아버지가 괜히 자리를 비우신 게 아니라니까?”
“폐하께서…….”
“응, 밀린 숙제를 하러 기도실로 가셨지. 아버지 일은 너무 걱정 마. 카트리나 경이 곁에서 제대로 보좌하고 있고, 밀린 정무는 황후께서 맡아주실 테니까.”
“……!”
폐하께서 오랜만에 기도실에 드셨다.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를 상기하자 마사인의 머릿속이 서서히 맑아지기 시작했다.
가끔 정무 회의도 미루고서 치료실을 지키시던 폐하께서, 황후께 일을 맡길 정도로 오랜 시간 기도실에 드신다.
이제는 마음 놓고 모레스 저하의 곁을 비울 수 있다고 판단하셨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저하께서는, 이제 정말로…….’
갑자기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강한 안도감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울컥!
속에서 복받치는 강렬한 감정을 숨기기 위해, 마사인은 얼른 고개를 돌리며 참연어 한 점을 입에 넣었다.
“그나저나 도통 영문을 알 수가 없네. 내가 계속 옆에 있었는데, 대체 너랑 아버님이 언제 그런 대화를 나눴다는 거냐?”
“아까 설명했잖아? 조용히, 잘 이야기했어.”
“…뭐? 그게 말이 되냐?”
“시끄러워! 쓸데없는 소리 할 시간 있으면 이거나 좀 먹어봐. 이게 키프로스 전통의 참연어 조리법이래. 네가 남부에서 이런 귀한 걸 먹어볼 수나 있을 거 같아?”
“아니, 귀하면 귀한 거지, 왜 음식 가지고 잘난 척이냐? 응?”
“다 자랑할 만하니까 그런 거야. 내가 이걸 들여오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네가 짐작이나 할 수 있겠어?”
마사인이 눈시울을 붉히는 사이, 형제들은 당연하다는 듯 서로를 사이좋게(?) 핀잔주기 여념이 없었다.
‘흠. 모레스 녀석. 나더러 촌뜨기라고 눈치 주는 건가? 그런 것치고는 꽤 세심하게 이것저것 먹어보라고 권해주는 것 같단 말이지. 이걸 좋아해야 할지, 화내야 할지.’
둘 중 하나는 내심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고-
‘오웬 녀석. 평소에는 호구처럼 대충 넘어가면서, 간혹 이상한 데서 까다롭게 군단 말이지. 시끄러우니까 딱밤이나 한 대 때려줄까? 나중에 아버지한테 들키더라도, 한 번 정도면 그냥 눈감아 주실 것 같은데.’
또 다른 하나는 잠시 폭력 행사의 가능성을 심각하게 타진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금 마음을 진정시킨 마사인은, 겨우 깊은 안도감에서 해방되며 서서히 몇 가지 문제점을 인식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저하. 그런데 아직 저하의 단전에서 미약한 열기가 느껴지온데…….”
“괜찮아, 마사인 경.”
그의 주저하는 질문에 황자는 이렇게 확답했다.
“오러의 성질이 조금 바뀌어서 그래. 곧 괜찮아질 거야.”
“…그렇습니까.”
마사인은 그렇게 대답했지만, 어쩐지 석연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
오러의 성질이 바뀌다니…. 거기다 듣도 보도 못한 열기로 화하다니.
오랜 시간 기사단장을 역임하며 스콰이어들의 연공을 봐줬지만, 지금껏 그런 경우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하면, 저하.”
그리고 그보다 더욱 중대한 문제점이 하나 남아 있었다.
“저하의 오러의 활성도가 왜 아직도…….”
전처럼 회복되지 못하고, 그리 약하기만 합니까? 마사인은 그렇게 물으려 했다.
조금 조심스러운 문제였지만, 당연히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었다. 그는 모레스 황자의 검술 스승이기도 하며, 자신의 제자가 얼마나 오러 연공에 열중하고 있었는지를 잘 아니까.
한데 황자는 그가 채 질문을 마치기도 전에 단호하게 대꾸하는 게 아닌가.
“회복 중이라서 그래. 시간이 조금 지나면 다 다 괜찮아질 거야.”
“…….”
마사인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최근 모레스 황자를 곁에서 보필하며, 이따금 찾아들곤 했던 어딘가 선뜩한 느낌.
그리고 그 기시감은, 식사를 모두 마친 후에 뚜렷하게 가시화되었다.
“오늘은 이만 일찍 쉬고 싶어. 그러니 오랜만에 마사인 경도 방으로 돌아가서 푹 쉬도록 해.”
오웬 황자와 에디스를 물리며, 어린 황자는 마사인에게도 자리를 피해줄 것을 은근히 요구해 온 것이다.
“네? 하지만 저하. 아직은 이릅니다! 적어도 완전히 병세가 안정된 것을 확인하려면 오늘까지는…….”
하지만 황자의 태도는 강경했다.
“괜찮으니 내 말대로 해, 마사인 경. 거의 한 달이 넘게 치료실 소파에서 선잠만 자지 않았어?”
“…….”
“경이 그렇게 고생을 하고 있으니, 내가 모처럼 편히 쉬고 싶어도 쉴 수가 없잖아.”
뭔가 있다. 분명히 있다!
마사인은 확신했지만, 더는 황자의 명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하면 근처에 머물고 있겠으니,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저하.”
하지만 치료실을 나서는 그의 눈빛은 굳은 결심으로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오늘은 밤새 치료실을 감시해야겠군. 브루노 단장도 부르는 것이 좋겠지. 그리고 근위대 대원들에게 일러, 본궁 경계를 한층 더 강화하라고 지시해야겠다!’
* * *
그렇게 마사인까지 완전히 내보낸 후, 성진은 침상에 얌전히 누워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
본궁을 드나들던 고위 사제들이 모두 돌아가고, 성 아우렐리온 기사단 역시 모조리 기도실 경계에 한창일 지금.
마침내 적당한 시간이 되었다고 판단하자, 성진은 소리죽여 일어나 침상 옆에 고이 숨겨놓았던 붉은 영혼석을 끄집어냈다.
?빨강이의 영혼석?
떨리는 마음으로 떠오르는 글귀를 거듭 확인한 성진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마왕의 영혼을 현실에 소환하는 거다. 마기가 얼마나 퍼질지 알 수 없어. 본래라면 성직자 출입이 전면 금지된 진주궁에 가서 시험해 보는 게 더 좋았겠지만.’
아버지가 자리를 비운 지금, 어쩐지 혼자 섣불리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그가 성진을 보살피느라 잔뜩 밀린 일을 처리하러 갔는데, 무사히 돌아오는 모습을 보지도 않고서 혼자서 돌아가 버릴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렇다고 진주궁으로 돌아갈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만도 없어.’
성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네브라스카의 아뮬렛을 집어 들었다.
달칵.
긴장으로 미약하게 손끝이 떨렸지만, 다행히도 마왕의 영혼석은 제자리를 찾아가듯 아뮬렛의 홈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러자 일전에도 한 번 경험했듯이, 눈앞에 새로운 안내창이 솟아오른다.
?소환수 빨강이?
?소환 / 해제?
아아. 다행이다.
이제 성진의 머릿속을 맴도는 걱정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이것으로 소환한 마왕이, 과연 내가 알던 그 마왕 놈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헤이즈는 생전의 선한 인상과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었고, 바즈라 역시 약간의 변화를 겪은 듯 보였으니까.
일전에 성황도 이런 충고를 하지 않았던가.
-아마도 영혼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종류의 물건이다. 귀한 것임에는 분명하나, 사용에는 조금 신중을 기하는 것이 좋을 듯하구나.
하지만 그에게 남은 마왕의 흔적은 이제 이것밖에 없다.
‘그렇다면 달리 방법이 없잖아?’
성진은 마음을 다잡으며 결심했다. 이번만큼은 설령 호러 영화 분위기를 풍기더라도 평정심을 유지하겠노라고.
하찮은 마왕 따위에게 겁먹기에는 헌터 이성진의 체면이 있지 않은가.
?*소환* / 해제?
그렇게 조심스럽게 선택을 누르자-
뿅!
그것은 마치 물방울이 떨어지듯, 허공 한가운데서 갑자기 짠 하고 나타났다. 언젠가 영혼의 눈으로 몇 차례 본 적이 있는, 작고 붉은 불꽃의 형태로.
‘……!’
방 안을 가득 채우는 연기도, 불길한 마기도 없었다.
그저 이전보다 크기가 조금 커지고, 영안이 아닌 눈으로도 보일 정도로 뚜렷하게 실체화되어 있다는 정도가 차이점일까. 그곳에 있는 것은 여전히 볼품없고, 여전히 하찮은 빨간 불꽃이었다.
[…엉?]갑자기 나타난 마왕 놈은, 뭔가 불안한 듯 붉은빛을 깜박거렸다. 영락없이 예의 얼빠진 마왕 놈이 할 법한 행동이다.
[어엉? 엉?]성진은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비록 가시적인 형태로 변하긴 했지만, 놈이 가진 영혼의 본질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게 뭐지? 주마등인가? 내가 지금 인간들이 말하는 그 주마등을 보는 거야?]“…주마등은 무슨, 살다 보니 별 같잖은 소리를 다 듣겠네.”
툭 하고 갈라진 목소리를 내뱉자, 불꽃이 움찔 놀라며 빤히 성진을 바라본다.
그리고 잠시 후-
[이, 이성지이이이인!]놈은 호들갑스레 소리를 지르며, 성진에게로 와락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