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392)
성황의 아이들-392화(392/469)
392. 담판 (2)
신성력을 느끼지 못하는 성진은, 그 힘이 작용하는 방식 따위 알지 못했다. 그것이 어떤 식으로 악을 멸하고, 혹은 어떻게 악을 정화할 수 있는 건지도.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단언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강대한 신성력조차 그를 해하지 않는데, 이 세상 어느 누가 감히 그를 정화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이렇게 안심하고 입을 털 수 있는 것이다.
“어디, 자신 있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그대들이 한번 나를 정화해 보든지.”
대회의장이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진다. 저 제안이 내포하는 의미는 생각보다 컸으니까.
성황조차 손쓰지 못한 자를 정화하려 시도한다? 혹은 성황이 허락한 자를 부정하고 그를 정화하려 든다?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지든, 이는 신의 대리자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신성모독!
“…….”
물론 신성모독을 차치하고라도 산적한 문제는 많았다.
만약 정말로 정화가 불가능하면? 자신의 능력 부족을 만인 앞에서 시인하는 꼴이 되는 데다, 괜히 나서서 저 삿된 것을 주신의 사도로 인정하는 데 앞장서는 셈!
‘…이건 절대 피해야 하는 역할이다!’
웅성웅성.
사제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며 수군거린다.
하지만 어디에고 앞뒤 재지 않고서 달려드는 자는 있게 마련이니-
“이익! 어디, 하라고 하면 내 못 할 것 같은가?”
베니투스 추기경이 씩씩거리며 단상에서 내려와 성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불경하기 그지없는 태도에 마사인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지만, 그의 손이 채 검에 닿기 전에 성진이 조용히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참아, 마사인 경. 우리는 어디까지나 저들을 평화적으로 설득하러 왔다고.’
‘…그거 진심이십니까?’
방금 오러를 있는 대로 뿜어내며 사제들을 압박하신 분이?
마사인의 황당한 시선을 모른 척하며, 성진은 자신의 앞으로 깡마른 노인의 손이 뻗어지는 것을 태연히 바라보았다.
“이 삿된 것아! 지금 당장 이 경건한 주신의 전당에서 사라져라!”
화아악!
잿빛 정복을 움켜잡은 손에서, 곧 신성한 하얀빛이 터져 나온다. 신성제국 5대 추기경 중 하나이자, 한때 악마 토벌로 위명을 떨치던 베니투스의 강대한 신성력이었다.
‘…대단하군! 이제는 쓸모없는 뒷방 노인네라고만 여겼거늘…….’
고위 사제들이 그를 다시 보게 되는 순간이었다.
물론 성황의 신성력을 매일같이 접하던 성진에게는 빛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힘이었지만.
“……?!”
신성력에 직격당하고도 성진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베니투스는 잠시 당황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이내 오만상을 다 써가며 자신의 영혼을 쥐어짜내기 시작했다.
“이이이이익!”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결국 모든 기력을 밖으로 쏟아낸 불쌍한 늙은이는, 숨을 헐떡이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자, 다들 보았겠지?”
탁.
주름진 옷깃을 절도 있게 잡아 펴며, 성진이 대회의장을 빙 둘러보았다.
“이렇게나 명확하지 않나? 나는 제국의 적이 아니며, 그대들이 퇴치해야 할 상대도 아니다. 주신께서 내려주신 힘이 주신의 확고한 뜻을 표한 것이다.”
“……!”
어떠한 결과가 나오든 결코 삿된 것의 궤변에 현혹되지 않으리라. 그 자리에 있는 사제들이 공통적으로 떠올린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눈앞에서 의외의 결과가 펼쳐지자, 그들의 뇌리에는 생각보다 강한 반향이 일어났다.
‘…잠깐. 설마 했지만, 혹시?’
‘가능성이… 있는 건가? 그 옛날 성녀 그라지에가 받았던 ‘오해의 시련’처럼, 정말로 모레스 황자에게 주신의 손길이 닿은 건가?’
대회의장의 공기가 고요히 술렁이는 가운데, 마이어 추기경은 가라앉은 눈으로 모든 광경을 지켜보았다.
‘이것은 좋지 않은 흐름이야. 모두가 의구심을 느끼고 있지 않는가.’
악마종이 황도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지 어언 10여 년. 젊은 사제들 중에는, 이제 악마와 악마 계약자의 속성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들도 속속 생겨나고 있었다.
‘그러니 황자의 말에 저렇게들 흔들리는 것이겠지.’
베니투스 추기경이야, 모레스 황자가 절대 ‘인간이 아닌 무언가’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모양이었지만.
‘모레스 황자는 어쩌면 고위 악마와 연결된 악마 계약자일지도 모른다.’
악마 계약자는 악마를 직접 몸에 강림시키기 전까지는 어디까지나 인간에 불과하다.
따라서 주신의 은총 속에 거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악마와 오래 소통하지 않고서 마기 자체를 흐릿하게 지우는 것도 가능한 것이다.
“…각하.”
웨스커 대주교 역시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전에 없이 불안한 눈빛으로 마이어 추기경을 마주 본다.
“모레스 황자님은 어쩌면…….”
“쉿! 확실치 않은 일을 섣불리 입에 담는 우를 범하지 말게, 웨스커. 만일 저하가 모종의 계약 관계에 놓여 있었다면, 아까처럼 악마의 힘을 강하게 드러내 보인 시점에서 이미 침식 현상을 보였을 거야.”
그래. 그것이 문제였다.
악마를 강림시키거나 악마의 힘을 강하게 방출한 계약자는, 결국 빠르게 침식에 휘말리며 영혼을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보라.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도, 모레스 황자는 지금까지 멀쩡해 보이지 않는가.
문득 두려운 가정 하나가 마이어 추기경의 뇌리를 스쳤다.
모레스 황자가 차라리 주신의 도구나 사도라면 다행한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저것’은 이미 주신의 권능을 능가하는 무언가라는 뜻일 테니.
“…하지만 각하.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제대로 모레스 황자님을 조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웨스커 대주교가 떨리는 목소리로 재차 소곤거리자, 마이어 추기경이 작게 혀를 찼다.
“조사? 대체 어떻게?”
정체를 감추려 들면 일반인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계약자는 보통 어떻게 조사하는가.
본래라면 간단했다. 혐의가 있는 자는 일단 이단재판부로 끌고 가서, 실토할 때까지 계속해서 고문과 치료를 반복하면 되는 거지.
하지만-
“폐하께서 총애하시는 아들을 무턱대고 고문실에 처넣을 수 있을 리가 없잖나! 거기다가 황자 본인이 주신의 시련을 받았다 주장하며, 스스로 마기를 당당하게 드러내 보인 다음에야…….”
“그, 그럼. 정말로 황자님의 말씀이 맞을 가능성은 있습니까?”
“글쎄…….”
거기에 대해서 마이어 추기경은 회의적이었다.
성녀 그라지에가 받았다는 ‘오해의 시련’은, 말 그대로 그녀가 마녀로 몰려 이단재판부로 끌려왔던 일화를 의미했다. 성녀가 마기 따위를 풍겨댔다는 기록은 전무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단순한 모함만으로도, 그녀는 결국 3세트에 이르는 ‘성녀의 시련’을 모두 견뎌내야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고 모레스 황자더러 성녀가 했듯이 증명해보라 말하기도 애매하다. 이미 폐하께서 직접 금지하신 시련들이 아닌가. 황자가 스스로 나서지 않는 한, 우리 쪽에서 먼저 시련을 받으라 강권할 수는 없는 노릇.’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답답한 상황. 만일 저 어린 황자가 여기까지 생각하고서 일을 벌였다면, 참으로 영악하다 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렇게 마이어 추기경의 고민이 깊어지는데, 누군가가 점잖은 목소리로 혼란스러운 대회의장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여러분.”
바로 의회의 수장, 카프란 추기경이었다.
그는 이 일련의 사태에도 전혀 동요하는 기색 없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잠시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 오늘 이 자리는 모레스 황자님을 모종의 혐의로 고발하기 위한 자리가 아닙니다.”
“지금 그게 무슨 소리요? 저리 삿된 기운이 풀풀 흐르는 걸 빤히 보고도, 그런 소리가 잘도 입에서 나오는구려?”
“진정하십시오, 베니투스 추기경 각하. 우리는 그저 저하께서 가지신 [멸악]의 힘을 증명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 점을 잊지 마십시오.”
카프란은 오히려 평온해 보였다.
그래. 황자가 삿된 것이든, 아니면 정말로 주신의 시련을 받은 사도이든 무슨 상관이랴. 저런 사악한 기운을 풍기는 순간, 이미 18대 황위로부터 멀찌감치 밀려나버리고 만 것을.
“그, 그래! 그것이 있었지!”
번쩍!
그의 지적에, 흐려져가던 베니투스의 눈이 생기를 되찾는다.
맞아. 절대 실패할 수 없는 함정을 만들어 두지 않았던가. 주신께 맹세코, 저 삿되고도 위험한 것을 절대 주신의 사도라는 영광된 이름하에 내버려 두지 않겠노라!
“자! 어서 증명해 봐라! 어서!”
그는 허둥지둥 단상으로 달려가, 준비해 두었던 작은 조각상들을 와르르 품에 그러모았다.
“네까짓 것이 진정 주신의 사도라면, 아마 이 시험을 능히 통과할 수 있을 터! 자, 어서 이것들을 해결해 봐라!”
후다닥!
빠른 걸음으로 되돌아온 그는, 안고 있던 물건들을 거칠게 성진의 손아귀에 내동댕이쳤다.
후두두둑!
“성 테르바키아에 대해 말했는가? 삿된 기운은 삿된 방식으로 대처한다 했더냐? 그렇다면 증명해라! 이 사악한 물건들을 모두 정화하여, 그 잘난 [멸악]의 능력을 만천하에 보이란 말이다!”
“…….”
성진은 손바닥 위에 놓인 조각상들을 슬쩍 눈으로 훑었다.
그것들은 손가락 두 마디만 한 크기의 나무 조각들이었는데, 일견 괴물의 형상 같기도, 혹은 공룡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래, 어쩐지 이럴 거 같더라니…….’
대형 악마종이 나타났던 날, 놈으로부터 흘러나온 마기가 황도의 곳곳으로 끌려가는 기현상이 목격되었다.
성기사들이 그 장소를 오래 물색한 끝에 찾아낸 것이, 바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악마종의 씨앗’, 즉 이 작은 나무 조각상들인 것이다.
듣기로는 사제들이 몇 차례 정화를 시도했으나 절대 파괴되지 않았다던가. 성회에서는 극비리에 취급하는 정보라며 다샤가 조심스레 알려주었었지.
한데 지금 보니 그럴 만도 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규상 세계의 물건들이니까.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한, 본상 세계의 힘으로 쉽게 없앨 수는 없지.’
그래. 결국은 이것을 꺼내들지 않을까 하는 짐작은 있었다.
저들이 어떻게 [멸악]의 힘을 시험하겠나. 명색이 성직자란 자들이 나서서 황도에 악마를 소환할 수도 없는 노릇인데.
혹여 가능하다 하더라도, 악마는 소환된 순간 황도를 둘러싼 은총을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소멸하고 말 터.
‘그렇다면 처음부터 성공할 수 없는 과제를 던지는 거지. 만약 내가 정말로 힘을 증명해 낸다면, 소환한 본인들의 입장이 꽤나 곤란해지니까.’
짐작한 바와 같이, 베니투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고위 사제들이 어딘가 묘한 열의를 가진 채 이쪽을 응시하고 있다. 성진을 소환하기 전에 이미 성회 선에서 이야기가 모두 끝나 있었던 모양.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내가 절대 해결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들 하는군.’
절로 실소가 흘렀다. 예상치 못한 바는 아니었지만, 정말이지 다들 의도가 투명하게 보이지 않는가.
자신만만하게 자신을 쏘아보는 베니투스 추기경의 시선을 무시하며, 성진은 손가락으로 조각상 중 하나를 슬쩍 건드려보았다.
우웅-
의지를 일으킴과 동시에 성진의 동공에 희미한 붉은빛이 어린다. 그리고 곧, 예상했던 대로 그의 눈앞에 희미한 창 하나가 떠올랐다.
?스피노메갈로사우르스 소환권?
?스프링벨리의 필드 보스, 스피노메갈로사우르스를 1회 소환할 수 있습니다. 공룡을 소환한 직후, 소환권은 사라집니다. 파괴를 선택하면 역시나 아이템 창에서 삭제됩니다.?
?물리저항B. 물저항B.?
?몬스터 등급 : B+?
?*현재 노스랜드 서버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일전에 바서스트령을 휩쓸었던 악마종은 규상 세계의 법칙을 따르는 놈이었지.
대체 어디서 그런 괴상한 공룡이 튀어나왔나 했더니, 아마도 이런 식의 소환권으로 만들어낸 모양이었다.
‘소환을 하거나 아예 파괴할 수도 있단 말이지?’
가만히 응시하고 있으려니 아니나 다를까, 그 옆에 또다시 작은 선택창이 연이어 떠오른다.
?소환권을 파괴하시겠습니까??
?삭제 / 취소?
그래.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짐작조차 할 수 없겠지만, 지금의 성진이라면 정말로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고 손쉽게 이것들을 부숴버릴 수 있다.
이렇게 쉬운 증명 방법이 세상에 또 있을까?
?기가노토알로사우르스 소환권?
?아르히노모사사우르스 소환권?
다른 나무 조각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가만히 의식을 집중하고 있으면 다들 비슷비슷한 설명창이 떠오른다.
“무리라면 지금 포기해도 좋습니다, 모레스 저하. 아무도 어린 성황가의 자제분께 능력 밖의 일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멀리서 카프란 추기경의 여유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짐짓 부드럽게 달래는 듯 들리지만, 그 속에 숨어 있는 감정은 손자의 경쟁자가 이대로 몰락하기를 바라는 들뜬 희열.
성진은 입꼬리를 씨익 끌어올렸다.
뭐, 굳이 망설일 필요가 있을까? 판이 이렇게나 예쁘게 깔려 있다면, 걸음걸음 가뿐이 즈려밟아 주는 것이 인지상정.
“모두 아집으로 멀어 있는 그 두 눈에 똑똑히 새기는 것이 좋을 거다.”
성진은 턱을 거만하게 치켜들고는 선언했다. 목청껏 외치지 않아도, 오러가 실린 또렷한 목소리는 대회의장 구석까지 쩌렁쩌렁 울려 퍼진다.
“이것이야말로 주신께서 내리신 사도의 힘, 바로 주신의 기적이다!”
조각상 하나를 높이 치켜들며 주위를 한차례 일별한 성진은-
?소환권을 파괴하시겠습니까??
?*삭제* / 취소?
미련 없이 눈앞에 떠오르는 선택창의 [삭제] 버튼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