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396)
성황의 아이들-396화(396/469)
396. 피안 (1)
대부분의 원시 종교들이 그러했듯, 수천 년 넘게 이어져 온 주신 신앙에는 어딘가 초법적인 구석이 있었다.
일단 누가 수상하다 딴죽을 걸기만 해도, 별다른 증거 없이 멀쩡한 사람을 종교재판에 회부할 수 있다. 처벌의 수위에도 제한이 없으니, 정말 농담 한마디 잘못 했다가 인생 종 치는 경우도 부지기수인 것이다.
보다 못한 5대 성황이 성법을 정비하여, 경전에 근거한 죄목들과 그에 대한 적절한 처벌을 명시하긴 했다.
하지만 그러한 법조항들도 결국 발췌하여 갖다 붙이기 나름 아니던가.
-저자가 자신의 영지에서 영지민들과 사사로이 예배를 드렸소. 정교회의 허가 없이 멋대로 주신의 성소를 마련하다니, 그야말로 이단의 짓거리가 아니겠소?
이웃한 영주의 무고로 한 영지가 박살 나는 일이 생긴다. 고위 사제들에게 뇌물을 바치는 쪽이, 식량과 병사를 소모하며 영지전을 일으키는 것보다 비용이 훨씬 저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 해에, 이웃을 고발했던 영주는 자신이 거느리고 있던 한 가신에 의해 종교재판에 회부되었다. 정확히 그가 고발한 것과 정반대의 이유 때문이었다.
-옛 성현들께서는 일찍이, 황량한 황무지에서조차 마음속 교회를 세워야 한다 말씀하셨지. 한데 저 무도한 자는 정교회의 허가를 핑계로, 성소에서 제대로 주신을 배알코자 하는 영지민들의 신앙심을 저버렸소!
한데 사태가 이쯤 되고 보니, 오히려 알 만한 자들끼리는 함부로 법 조항을 들이밀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초법적 권력 행사의 부작용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야야. 모든 게 말하기 나름이지. 나도 알고, 너도 알고, 우리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 설마 이번 한 번 이겨 먹자고 이렇게까지 해야겠냐?
-황도의 ‘은총’ 안에 기거한다는 말은, 곧 우리가 인두겁을 쓴 악마가 아니라는 증거지. 서로 이쯤 해 두자. 만약 네가 선을 넘으면, 다른 이들이 그런 널 가만히 내버려 둘 것 같아?
이렇듯 황도 인사들 간에는 어느샌가 암묵적인 합의가 생겨나 있었다. 만인의 눈앞에서 악마 소환 같은 중죄를 공공연히 저지르지 않는 한, 적어도 자신들끼리는 함부로 무고하지 않는 것으로.
모레스 황자가 적나라한 ‘마기’를 드러낸 데다 제멋대로 주신의 사도라 자칭했음에도, 이들이 쉽게 황자를 구금?고문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이건 말도 안 됩니다!”
며칠간 고뇌하던 웨스커 대주교는, 밤늦게 마이어 추기경의 집으로 쳐들어가 하소연을 했다.
그녀야말로, 과거 성황과 함께 악마 처단의 일선에 서 있던 자였다. 그러니 3황자가 내보인 마기에 다른 이들보다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3황자를 그냥 저대로 내버려 둔단 말입니까? 각하! 그것은 명백히 악마의 세력에 속한 기운이었습니다!”
마이어 추기경은 피곤한 눈으로 아끼는 후배를 바라보았다. 기실 며칠간 밤잠을 설친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었으니까.
“하면 어찌하고 싶은 건가, 웨스커?”
“지금 당장 모든 것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마기를 지닌 주신의 사도라니, 정말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지 않습니까? 황자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제대로 조사를 해야 한단 말입니다!”
“어떻게? 지금이라도 성기사단을 이끌고, 본궁으로 쳐들어가 무력으로 그를 압송할 텐가? 폐하의 허락도 없이, 폐하께서 기거하시는 장소에서?”
“그건……!”
따지고 보면 반역이나 마찬가지. 아마도 그것이 영악한 3황자가 아직 본궁에 머물고 있는 이유겠지.
“진정하게, 웨스커. 내 심정도 마냥 편하지는 않으니.”
마이어 추기경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그저 이런저런 논란에 휩싸인 3황자가 당분간 자중하기를 바랐을 뿐이다. 되도록 서로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조심스레 준비한 자리였건만, 오히려 황자 본인이 한발 더 나서서 그 논란에 불을 지펴 버리다니!
‘모레스 황자의 뜻은 명확하다. 겨우 확보해 놓은 입지를 조금도 양보할 생각이 없다는 게지.’
어느 정도 반발은 있으리라 예상했다.
한데 워낙 저돌적인 정면 돌파였던 터라, 오히려 그에 대응할 틈이 없었다. 성회의 모두가 마기에 압도되어 우왕좌왕하는 동안, 거하게 준비한 증명의 자리는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카프란 추기경의 얼굴이 참으로 가관이었지.’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그가 아끼는 후배들의 반응이 극명하게 갈렸다는 점이다.
일단 웨스커 대주교는 전에 없던 경계의 눈초리를 보였다. 지금껏 모레스 황자의 사건 사고들을 그저 귀엽다는 듯 바라보던 것과는 사뭇 다른 태도.
반면 베니투스 추기경은 뭔가 머릿속에 생각이 많아진 듯, 이단재판부 내에 마련된 기도실에 칩거한 채 몇 날 며칠 기도만 드리는 중이었다.
수장의 태도가 이렇게 흐지부지하니, 휘하의 인퀴지터들도 감히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다.
“각하. 아무리 사소한 위험이라도, 그것의 존재를 깨닫는 즉시 배제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 델크로스의 신민들을 위한 길입니다!”
“위험을 그냥 방치하자는 게 아닐세. 적어도 모레스 황자가 가진 [멸악]의 힘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니, 그저 모든 게 명확해질 때까지 추이를 지켜보자는 거야.”
마이어 추기경은 잔뜩 열이 올라 있는 웨스커를 다독였다.
“어찌 보면 진실이 어떠하든, 자네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실리에는 확실히 닿아 있지 않나? 모레스 황자님께서도 말씀하셨지. 자신에게 내려진 시련을 달게 받고, 이 땅에 주신의 왕국이 영원히 번영할 수 있도록 온 힘을 아끼지 않겠다고 했던가?”
“…그 발언의 저의를 각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웨스커가 조금 힘 빠진 목소리로 항변했다.
당시 모레스 황자는 성회를 앞에 두고서, 델크로스를 위해 평생을 봉사하겠다는 기조의 발언을 했다.
하지만 그 속뜻을 생각하면,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이 곧 주신의 행사이니 감히 이를 멋대로 방해하지 말라는 의미인 것이다.
“참으로 당돌하더군요. 끝까지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다니, 여간 보통내기가 아니었습니다.”
“자자, 그쯤 하게. 폐하께서 돌아오시기만 하면 모든 일이 깔끔하게 해결될 걸세. 그러니 더는 마음 쓰지 말고, 자네도 어서 돌아가서 휴식을 취하게나.”
그렇게 겨우 웨스커 대주교를 달래서 밖으로 내보낸 그는, 문득 복도 한편에 서 있는 낯익은 신형을 발견했다.
줄리아 마이어.
어린 나이에 황도 수비대의 부관을 꿰찬, 그가 늘 자랑스레 생각하는 어여쁜 손녀.
퇴근이 조금 늦었는지, 그녀는 아직까지도 말끔한 기사단 정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모두 들었느냐?”
그러자 손녀는 진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명확한 긍정의 의미였다.
“아직은 아무것도 확실한 것이 없다. 그러니 괜한 억측은 삼가도록 해라.”
“네, 할아버님.”
줄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황도에 이미 모레스 황자님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퍼지고 있습니다. 성회에서 무엇이든 제대로 입장을 표명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쓸데없이 민심이 흔들릴까 우려됩니다.”
“…….”
마이어 추기경은 잠시 눈을 끔벅이며 손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답지 않은 걱정의 기색이 묻어난 탓이다.
‘행실이며 성품이며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아이지만, 인간관계만큼은 도통 깊이 유지되지 않아 늘 걱정했거늘…….’
의외로 약혼 이야기가 오가는 모레스 황자와는 제대로 친분을 쌓고 있었던 모양이다.
“얘야. 너는 그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느냐? 황자님을 둘러싼 그 소문들은, 어쩌면 전혀 근거 없는 낭설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추기경의 물음에, 줄리아는 의아한 듯 반문했다.
“이곳은 황도입니다, 할아버님. 어떠한 삿된 기운도 이 신성한 땅에 함부로 발을 들일 수가 없다는 것을 모두가 잘 압니다.”
“…….”
추기경은 잠시 입을 다물고는 어두워진 눈으로 손녀를 응시했다.
“얘야, 줄리아.”
“예, 할아버님.”
“혹여 네 어머니로부터, 우리 가문의 시조에 대해 전해 들은 바가 있느냐?”
“시조… 말씀입니까?”
줄리아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마이어 가문의 현 가주인 어머니는 무척이나 바쁜 사람이었다. 줄리아가 젖먹이를 막 벗어난 시절에도, 잠시 느긋하게 대화할 시간조차 전무할 정도로.
하지만 그녀의 조부가 허튼 질문을 하지는 않았으리라.
“가주님으로부터 따로 들은 바는 없습니다. 마이어 가의 시조께서 이번 일과 뭔가 관련이 있습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추기경의 자줏빛 눈이 부드럽게 휘어지며, 자신을 쏙 빼닮은 손녀의 눈가를 잠시 어루만졌다.
“이 할애비가 괜한 얘기를 했구나. 별일 아니니 그만 잊어버리렴.”
* * *
황궁 안의 공기는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일견 모든 것이 평화로워 보였지만, 그 평온함은 마치 급류 위에 낀 살얼음처럼 위태롭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누구보다도 그 아슬아슬한 분위기를 느끼고 있는 것은 성진이었다. 그래서 그는 몸이 완전히 회복되었음에도, 서둘러 진주궁에 돌아가지 않고 본궁에서 두문불출했다.
“모레스. 내가 우연히 재미있는 일화들을 알게 되었단다. 곧 경전 동화로 발행될지도 모른다고 하니, 시간 있으면 나와 함께 그 이야기들을 읽어보지 않겠니?”
우연은 무슨.
경전을 들고 찾아온 아멜리아의 고운 눈가는 다크써클로 퀭해져 있었다.
아마 성회에서 있었던 일을 들은 뒤, 밤새워 경전을 뒤적이며 성 테르바키아의 일화들을 찾아낸 것이 분명해 보였다.
“감사합니다, 누님. 하지만 누님도 황후마마의 정무를 곁에서 돕느라 많이 바쁘시잖아요? 이건 나중에 제가 잘 읽어보겠습니다.”
죄책감으로 가슴이 아려오는 것을 느끼며, 성진은 그녀가 가져온 경전을 방 한편에 잘 갈무리했다.
워오오오오!
-주인아! 나랑 놀러 가자! 어서 나를 크고 강하고 귀엽게 만들어라!
때때로 방문 앞에 쳐들어온 막스가, 주둥이를 든 채 소리 높여 하울링을 하기도 했다.
절대 안 될 말이었다. 변화된 오러가 녀석에게 어떻게 작용할지 장담할 수 없었으니까. 만약 아무 탈 없이 변신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괜히 남들로부터 의심의 눈초리를 살 뿐이지.
그냥 지금 상태를 유지하면, 만에 하나 성진에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신수]로 인정받은 막스에게는 별 탈이 없겠지.
“안 돼, 막스. 자, 여기 에디스를 던져 줄 테니, 나무 접시랑 같이 얌전히 놀아. 알았지?”
“네? 저하! 네에?!”
어리둥절한 에디스가, 성진에게 떠밀려 늑대개와 함께 정원으로 쫓겨났다.
“아니! 이것들이 뭔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지? 여기서 무슨 증거가 더 필요해? 모두의 앞에서 제대로 [멸악]의 힘을 보였잖아. 그럼 된 거 아닌가? 다들 정신들이 어떻게 된 게 틀림없어!”
이따금 잔뜩 분개한 오웬이 찾아오기도 했다.
최근 특별히 하는 일 없이 황궁을 배회하다 보니, 사제나 사용인들이 주고받는 흉흉한 귓속말을 자주 접하는 모양이었다.
성진은 한심한 눈으로 이 미덥지 않은 첫째를 바라보았다.
“네 생각에는 남들이 바보라서, 그냥 아무런 근거 없이 그런 소리들을 하는 것 같아?”
이런 아무 생각 없는 호구 자식 같으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날 조금은 의심해야 하는 거 아냐? 네가 이러는 걸 남들이 보면 뭐라고 생각하겠냐.
황도에 별다른 입지가 없다면 분위기를 읽는 능력이라도 익히라고. 네가 어찌나 멍청하게 구는지, 반사적으로 딱밤이 날아가려는 걸 겨우 참았잖아!
“엉? 어엉?”
어쩐지 섬뜩한 예감을 느낀 오웬이. 반사적으로 이마를 부여잡으며 고개를 이리저리 휘돌렸다.
“…….”
하지만 개중 성진을 가장 신경을 쓰게 만든 것은 바로 마사인 경의 반응이었다.
언제나처럼 펄펄 뛰며 성진에게 ‘마기’의 출처를 추궁할 것이라 여겼건만, 의외로 그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자신의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마사인은 본궁의 2근위대와 긴밀하게 경호 스케줄을 조율하고, 틈틈이 시간을 내 진주궁의 상주기사들도 점검했다.
간혹 성진을 대신해 마물 전담반 일을 보고 올 때면, 대단히 자세한 보고서를 작성해 와서 하나하나 읊어주기도 하고.
그러고도 시간이 나면, 성진의 옆에 앉아서 조용히 자수를 두었다.
폭, 사락.
폭, 사락.
안정적인 손놀림 아래서, 아름다운 꽃잎들이 하나둘 완성되어 간다.
그 광경은 일견 참으로 평화롭기 이를 데 없어 보였다. 도안을 뚫어져라 노려보는 마사인 경의 눈이 이글이글 불타오르지만 않았다면 말이지.
“저기… 마사인 경?”
“예, 저하, 부디 하명하십시오.”
“…어, 아무것도 아냐.”
그렇게 위태로운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
예전보다도 더욱 예민해진 성진의 기감에, 갑자기 공기 중 오러의 흐름이 일제히 뒤바뀌는 이변이 감지되었다.
누군가 도선에 강한 전류를 흘리기라도 한 듯, 자기장처럼 차분하게 정렬되는 일대의 공기.
성진은 반가움을 이기지 못하고,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