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397)
성황의 아이들-397화(397/469)
397. 피안 (2)
성황은 기도실에서 나오자마자 빠른 속도로 밀린 업무들을 정리했다.
예고도 없이 이렇게나 오래 자리를 비운 건, 2년 전 있었던 이교도의 준동 이후 처음이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그가 오랜 시간 정교하게 조율해 놓은 톱니바퀴들이 탈선하는 일 없이 제대로 굴러갔다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그 기계장치의 중심을 유지하는 것은, 바로 덕망 있고 유능한 황후의 존재였다.
“대단하군. 경황이 없어 제대로 인계를 하지도 못했는데, 거의 손댈 구석이 없이 완벽하게 국정을 돌봤구려. 타티아나.”
성황의 순수한 감탄에 타티아나 황후는 저도 모르게 치솟으려는 입꼬리를 애써 끌어내렸다.
예전부터 그랬지만, 그녀는 전투적으로 업무에 집중함으로써 오히려 생기를 얻고, 여기서 파생되는 성과와 인정을 통해 만족감을 느끼는 유형의 인간이었다.
물론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마주한 두 사람의 머릿속은 완전히 다른 생각들을 하고 있었지만.
‘나중을 위해서라도, 앞으로는 황후에게 정무를 조금 더 맡겨보는 쪽이 좋을 것 같군.’
‘아슬아슬했어. 슬슬 한계다 싶었는데, 폐하께서 하루만 더 늦으셨으면 어쩔 뻔했담!’
타티아나 스스로가 돌이켜보기에도 놀라운 성과이긴 했다.
지금껏 그녀가 성황의 자리를 대신한 적은 많았지만, 이리도 오래, 그리고 성공적으로 모든 업무를 마무리한 적이 있었던가.
“아멜리아 황녀의 도움이 컸습니다. 곁에 있다가 필요한 일에 늘 적절한 도움을 주더군요. 보면 볼수록 참으로 훌륭한 행정 인재가 아닌가 하…….”
기분이 부드럽게 풀린 탓일까, 무심코 칭찬의 말을 내뱉던 타티아나는 흠칫 놀라며 말끝을 흐렸다.
지금까지는 성황 앞에서 다른 아이들을 교묘하게 돌려 까기에 바쁘던 그녀가 아닌가. 갑자기 안 하던 칭찬을 하려니, 어색함을 넘어 이제까지의 속내를 들킨 것만 같은 민망함이 밀려들었다.
“…….”
타티아나가 반사적으로 성황의 눈치를 보았지만, 다행히도 그는 이렇다 할 감정 표현 없이 그저 그녀의 말을 경청할 뿐이다.
“적절하게 사람을 부리는 것 또한 황후의 인덕인 것이지.”
“…….”
타티아나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성황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지극히 감정이 희박한 듯하지만, 오랜 시간 그만을 바라봐 온 타티아나는 알 수 있었다. 그의 눈에 담겨 있는 신뢰와 이해, 애정 그리고 약간의 애석함.
오래전, 타티아나가 어린 황자님을 두고서 꿈꾸었던 미래는 지금과 사뭇 달랐다.
마찬가지로 성황 또한 지금과는 전혀 다른 미래를 바라보았겠지. 어쩌면 그 곁에는 타티아나의 모습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이리도 예상치 못한 형태로 재회했고, 불완전하게나마 서로를 끌어안기로 결심했다.
단지 타티아나가 조금도 예상치 못한 것은, 자신이 생각보다 지금의 상태를 평화롭고 따뜻하다고 느낀다는 점이었다.
“…예.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모두 아멜리아 황녀의 공인 것을요.”
타티아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성황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만일 그녀가 이 자리에서 황녀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더라도, 아마 그녀를 향한 성황의 눈빛이 크게 변하는 일은 없으리라.
그만큼 그들이 오랜 시간 쌓아 올린 관계란 것은, 비록 완벽한 모습은 아닐지언정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견고하고 아름다운 성과 같았다.
성황이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을 완전히 이해하고 보듬으리란 사실을 알고 있기에, 타티아나는 때때로 이렇게 마음이 약해지곤 하는 것이다.
“아마 황녀가 없었다면 저는 절대로 지금처럼 국정을 끌어오지 못했을 겁니다.”
“그렇지 않소.”
“아닙니다. 한동안은 황녀가 제 마음이라도 읽고 있나 의심했을 정도랍니다. 어찌 그리도 사람 속을 훤히 꿰뚫어 보는지요.”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그대의 일이기에 가능했던 것이겠지.”
성황의 대답은 진심이었다.
지금의 아멜리아는 명실상부 신성제국의 가장 고귀한 장미.
하지만 처음 황궁에 발을 들였을 무렵의 그녀는, 그저 수줍음 많고 어설프기만 한 어린 소녀에 불과했다.
그러던 아이가 언제부터인가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그린 듯 권위가 넘치는 미소를 지어 보이기 시작했지.
없는 시간을 쪼개어 되도록 많은 시간을 아이와 함께하려 애쓴 성황은 잘 알고 있었다. 아멜리아가 황후와 황비들을, 특히 고아한 황후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보며 흉내 내려 노력했다는 사실을.
-타티아나 어마마마.
그 예절 바른 아이가 유일하게 친근함을 담아 부르는 호칭에는, 황후가 미처 깨닫지 못한 존경과 애정이 담겨 있는 것이다.
“…….”
“…….”
그리고 두 사람은 각자의 상념에 사로잡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있었다.
“…큼큼”
“으흠! 어흠!”
기다리다 못한 추기경들이 밖에서 헛기침을 해대고, 마침내 루이스가 송구한 표정으로 집무실에 들어올 때까지.
이후로도 성황의 바쁜 일정은 이어졌다.
그는 아렌쟈를 비롯해, 대륙 각지로부터 전해지는 사념을 통해 많은 보고를 들어야 했다.
이어서 다섯 추기경들이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성황의 집무실에 들고, 잠시 후 하얗게 탈색된 얼굴로 비틀거리며 돌아 나가기도 했다.
그렇게 늦은 저녁 무렵이 되어, 마침내 마지막 순간에 이르렀다.
성회의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마기 섞인 오러를 뽐낸다는, 그야말로 희대의 사고를 친 말썽쟁이 아들놈을 대면할 순간이.
“아버지.”
이제는 완전히 건강을 되찾은 아이가, 긴장한 표정으로 집무실 문가에 빼꼼 머리를 들이민다. 뭔가 엄청난 것을 각오한 듯, 어딘가 비장하기까지 한 표정.
성황은 생각했다.
‘그래, 내 어찌 이 아이의 기대를 저버릴 수 있겠는가.’
결심과 동시에 의념이 일어나고, 결과적으로 번개처럼 손이 움직였다.
따콩!
“꾸엑!”
* * *
‘사실 딱밤이란 것도, 그저 이 양반이 신성력을 쏟아내기 위한 구실에 불과한 건 아닐까?’
환한 빛의 폭포 속에서, 성진은 이마를 문지르며 그런 엉뚱한 생각을 했다.
그만큼 성황은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신성력을 쏟아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딱밤의 통증은 어느새 사라진 지 오래인데도.
하지만 성진은 섣불리 성황에게 그만하시라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뭔가 곰곰이 생각에 잠긴 듯한 그의 표정이 무척이나 무거워 보였으니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내키는 만큼 힘을 쏟아냈는지, 성황은 자리에 앉으며 턱으로 슬쩍 맞은편의 소파를 가리켰다.
“앉거라.”
“넵.”
“설명.”
“넵!”
무엇을 설명하라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성진은 이 사고의 발단부터 차근차근 털어놓기 시작했다.
원인은 잘 모르겠지만-아마도 마왕 놈이 뭔가를 했으리라 짐작되지만, 이 부분은 대충 무시하기로 했다-그의 오러와 게헤나의 불이 완전히 결합되며 아예 마기를 숨길 수 없게 되었다는 것.
이를 빌미 삼아, 성회가 그를 시험한다는 명목으로 기사단의 자진 사퇴를 종용한 것.
기껏 공권력을 손에 넣었는데, 저들의 쓸데없는 견제에 괜히 손발이 묶이고 싶지는 않았다는 것.
“그리고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그 시험의 자리를 또 다른 기회의 장으로 삼을 수는 없을까? 차라리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저들이 입을 대기도 까다로운 상대로 새로이 자리매김해보는 건 어떨까?”
물론 썩 고상하고 매끄러운 방식은 아니었기에, 성진은 딱밤 한 대 정도 더 얻어맞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차분히 듣고 있던 성황은, 예상외로 성진에게 가벼운 칭찬의 말을 던져왔다.
“그래. 잘했다. 외통수에 몰렸다 생각되는 상황에서야말로, 상대의 방심을 부르고 허를 찌르는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게다.”
“그럼……!”
“하지만 아비로서 네 행동 방식이 조금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구나.”
뒤이어 말을 덧붙인 성황은, 조금 가라앉은 눈으로 성진과 시선을 맞추었다.
“이를 명심하거라, 모레스. 지금 당장은 네가 그들로부터 손쉽게 승리를 쟁취해 낸 듯 보일 것이다. 하나 세상만사가 그리 단순하게만 움직이는 것은 아니란다.”
성황은 찬찬히 설명을 이어갔다.
어디까지나 정해진 규칙 내에서 이루어지기에, 그것이 온전한 게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한데 생각대로 잘 되지 않는다 하여 아예 규칙을 무시하고서 판을 뒤집어 버린다면, 정작 나중에 그 판이 필요해지는 상황이 왔을 때 이를 이용할 방법이 없다는 것.
“생각해 보거라. 네가 이렇게 아무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매번 판을 뒤엎다 보면, 종국에는 어느 누구도 너를 쉬이 자신들의 협상 자리에 청하지 않게 될 것이다. 너 역시 그런 결말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
“내 말의 뜻을 잘 알겠느냐?”
“네, 아버지.”
성진은 그의 충고를 제대로 납득했다. 하지만 그에게도 피치 못할 사정은 있었다. 그저 성회의 영감들을 한번 이겨먹겠다고 이런 일을 벌인 것은 아니었으니까.
성진에게는 보다 중요한 목표가 하나 남아 있었다.
“실은 그 일과 관련해서 아버지께 따로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부탁.”
“네, 아버지.”
짧게 대꾸한 성진은, 주섬주섬 목에 걸린 아뮬렛을 셔츠 밖으로 꺼내 들었다. 마왕 놈의 붉은 영혼석이 박혀 있는 규상 세계의 물건이다.
“제가 그들에게 마기 섞인 오러를 드러내 보인 건, 실은 이 녀석을 위한 포석이기도 합니다.”
자신이야 아버지의 후광을 빌어 어물쩍 넘어간다고는 해도, 이 녀석만은 도무지 성회에 납득시킬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평생 영혼석에만 가둬두기에는, 마왕 놈이 너무 불쌍하지 않은가.
“아마 이 녀석을 아버지께 보여드리는 건 처음인 것 같네요. 실은 아버지도 다 알고 계셨다고 생각하지만…….”
거기까지 말한 성진은, 눈앞에 희미하게 떠오르는 창에서 선택지를 눌렀다.
?소환수 빨강이?
?*소환* / 해제?
그러자-
뾰용!
어울리지 않게 귀여운 소리와 함께, 작은 불꽃 하나가 나타나 집무실을 환하게 밝힌다.
언제나처럼 하찮기 그지없는 모습. 아니나 다를까, 마왕은 나타나자마자 성진을 향해 징징거리기 시작했다.
[야, 너 인마! 그렇게 다짜고짜 소환 해제를 해 버리면 어떻게 해? 그리고 왜 날 바로 불러주지 않았… 응?]그러다가 묘한 분위기를 눈치챈 마왕이, 슬그머니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살폈다. 그러고는-
“…….”
[……?!]딱딱하게 굳어 있는 성황의 모습을 확인하곤, 사색이 되어 모가지가 꺾인 닭처럼 바람 빠진 비명을 질렀다.
[히이이익! 서, 성황?!]아.
급격하게 얼어붙어 가는 공기 속에서, 빠른 중재의 필요성을 느낀 성진이 부랴부랴 설명을 쏟아냈다.
“그, 네. 이 녀석은 악마가 맞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도 보시다시피 지금은 이렇게 작고 힘없는 소환수일 뿐이에요. 절대로 무해하단 점, 아버지께 분명히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
성황이 할 말을 잃은 채 활활 타오르는 불덩이를 응시하는 동안, 성진은 다급하게 변명을 쥐어 짜내기 시작했다.
“어, 물론 이 녀석이 한때 마왕이긴 했지만, 지금은 제 완전한 권속이 되었어요. 아버지도 전에 그러셨잖아요? 이런 식의 종속 관계는 절대적이기 때문에, 함부로 배신하거나 반항하지 못한다고! 즉, 이 녀석은 언제까지나 제 편이에요! 분명합니다!”
“…….”
“게다가 따지고 보면 제가 녀석을 이런 꼴로 만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녀석은 제가 보살펴야 하는 저의 책임, 어떻게 보면 제 자식…이나 마찬가지인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성황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없자, 성진은 슬슬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다급한 마음에 바짝 얼어 있는 불덩이를 향해 눈짓했다.
자! 마왕아! 어서 귀여운 애교라도 보여 봐라! 네가 내 자식 같은 존재란 걸, 얼마나 무해하고 하찮은 지를 아버지한테 제대로 어필해 보라고!
[으어어……?!]성진의 내적 응원이 통하기라도 한 걸까? 마왕 놈은 불덩어리답지 않게 눈에서 눈물을 찔끔 쏟아내더니, 마침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아, 안녕, 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하…….]하?
[…할아버지?]“…….”
“…….”
쏴아아-
어디선가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완연한 가을날의 저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