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401)
성황의 아이들-401화(401/469)
401. 피안 (6)
소환된 영혼의 외양은, 성진이 기억하는 광신도 교구장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두툼한 근육을 감싸는 단단한 갑주.
어지간한 척추동물의 등뼈 따위 한 방에 으스러뜨릴 것 같은 흉흉한 곤봉.
만약 피부를 뒤덮고 있는 오랜 고행의 증거들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성진은 그녀를 절대 알아보지 못했으리라.
“…벨린다?”
반신반의하며 묻자, 영혼으로부터 지극히 정중한 대답이 돌아온다.
[네, 그렇습니다. 주인이시여. 당신의 충실한 종, 벨린다입니다.]그래. 저 은은하게 돌아 있는 눈동자나, 19호가 남긴 목의 검상을 보면 그녀가 맞는 것 같긴 한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왜 참회 교단 녀석이 뜬금없이 내 소환수가 되어 있지? 왜 아무 거리낌 없이 날 ‘주인’이라 부르고 있는 거람?
[흐음.]그때, 새 소환수를 흥미롭게 구경하고 있던 마왕 놈이 뭔가를 짐작한 듯 입을 열었다.
[죽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나 보네. 순수한 영혼 상태가 되니, 그간 육체의 한계에 가로막혀있던 깨달음들을 얻은 거야.] [네, 정확합니다.]벨린다의 영혼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이시여. 죽음을 맞은 영혼은 그동안 멀어 있던 영안이 트이며, 세상의 진리를 조금이나마 엿보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살아생전 그리도 갈구하던 ‘피안’의 실체를 알게 되었습니다.]피안의 실체?
[아아! 그 감당키 어려운 진실 앞에서 제가 느껴야 했던 두려움과 절망을, 어찌 말로 다 설명 할 수 있으리까! 만일 주인이 아니셨다면……!]우웅-
벨린다가 동요함에 따라, 방안 가득 들어차 있던 그녀의 강력한 기운이 함께 일렁거린다.
[당신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저는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깨달을 새도 없이 티끌처럼 스러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성진은 자신 앞에 무릎 꿇은 광신도의 영혼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살아생전 스스로를 담금질하는 데 한 시도 게으름이 없었던 단단한 정신의 소유자다.
만약 영혼의 모습이 그 인간의 본질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하면, 그녀가 두르고 있는 저 훌륭한 갑주야말로 영혼으로서의 격과 견고함을 드러내는 지표라 할 수 있으리라.
[주인이시여! 저는 당신으로 인해 마침내 진정한 영혼의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감읍하지 않겠나이까!]“…뜬구름 잡는 소리는 그만하고.”
이야기가 길어질 것을 직감한 성진이, 침상에 편하게 걸터앉으며 명했다.
“처음부터 좀 자세히 설명해 봐. 네가 어쩌다가 내 소환수가 된 건데?”
[예, 주인이시여. 예비된 분이시여. 기꺼이 당신께 모든 것을 고하겠나이다.]그렇게 대답한 벨린다는, 고개를 들어 반짝이는 눈으로 성진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려면 먼저, 제 죽음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부터 설명 드려야겠군요.]* * *
그날, 벨린다는 19호의 손에 목이 베이며 죽음을 맞았다.
‘아아……!’
몸을 벗어나자마자 그녀가 느낀 감정은 격렬한 환희.
벨린다는 기쁨에 휩싸여 칠흑 같은 어둠을 헤쳐 나갔다. 강력한 이끌림에 따라, 자신의 영혼이 곧장 [참회]를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벧엘라! 기나긴 고행의 끝에, 마침내 내 영혼은 주신의 곁으로……!’
지금이야 ‘암흑 교단’이라 배척받고 있지만, 지하 교단의 본질 또한 주신을 향한 경배와 찬양.
단지 그들은 정교회와 달리, 지상에 내려오신 주신의 현신을 함께 떠받들 뿐이다. 각각 [애열], [파종], [참회], [안식]이라 불리는 네 명의 현신을.
그중에서도 벨린다는, 인간과 함께 끝없이 고행하시는 [참회]께 깊이 감화되어 있었다. 그래서 철이 들면서부터 매일같이 스스로를 향한 채찍질을 멈춘 적이 없었지.
‘벧엘라……?!’
한데 [참회]께, 주신의 곁에 당도했다는 기쁨도 잠시. 벨린다는 이제 막 밝아진 영안이 보여주는 진실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주신이 있는 곳도, 심지어는 피안의 세계도 아니었으니까.
‘…음?’
텅 비어 있는 검은 우주 공간.
그 가운데, 스스로의 밀도를 이기지 못하고 주위의 모든 것을 끌어들이며 붕괴해 가는 거대한 존재가 있었다.
‘…참회시여?’
벨린다는 일순 자신의 영안을 의심했다.
저것이 정말로 자신이 그리워마지않던 그 ‘주신의 현신’인가?
아니, 신은커녕 제대로 된 인격인지도 의문이었다. 벨린다의 눈에 그것은, 그저 헤아릴 수 없을 만치 많은 톱날이 달린 커다란 바퀴로 보였으니까.
비대하다 못해 한눈에 다 들어오지도 않는 거대한 가시 바퀴가, 메아리치는 비명과 폭포처럼 쏟아지는 핏물에 휘감겨 그녀를 맞이한다.
-참회하라.
어쩌면 주신께서 내리신 또 다른 고행이나 시련이 아닐까? 벨린다는 잠시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다.
어디선가 빨려 들어온 영혼 하나가, 그 가시 바퀴에 걸려 순식간에 갈가리 찢어지는 광경을 보기 전까지는.
[끄아아아……!]마지막 단말마마저 제대로 내뱉지 못한 영혼은, 눈 깜짝할 사이에 바퀴에 갈려나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
급격하게 불안해진 벨린다는, 영한을 부릅뜨고 그 불가해한 존재를 제대로 바라보려 노력했다. 이럴 리가, 이럴 리가 없어!
‘…참회여! 나의 주신이시여!’
하지만 소용없었다. 처음에는 하나의 형상이라고 생각했던 가시 바퀴가, 시선을 집중하면 할수록 제대로 된 형체와 경계를 잃어가기 시작한다.
그것은 하나이되, 하나가 아니었다.
거대한 가시 바퀴는 또 다른 수많은 피의 바퀴가 모인 집합체였고, 그 피의 바퀴 속에는 더욱더 많은 고통의 바퀴들이 가득 들어차 제멋대로 돌아가고 있었으니까.
차라리 바닷가의 모래알을 한눈에 담는 것이 훨씬 수월하리라.
바로 그때, 우주의 별만큼이나 많은 그 가시 바퀴들이, 일제히 형형한 눈을 깜박이며 벨린다를 짓이기듯 마주 응시해 왔다.
-참회하라.
아! 저것을 누가 감히 ‘피안’이라 칭할 수 있는가. 오롯이 ‘고통’만을 위해 존재하는 보이는 저것을.
일찍이 역사 속에 수없이 등장했던, 그리고 미처 등장하지 않은, 영혼을 끔찍하게 담금질하는 모든 고문과 고통들의 총합체.
‘아니야! 담금질이라고?’
어림도 없는 소리! 저것의 실체를 단 한 순간이라도 버틸 영혼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것은 자살하는 모든 이들의 좌절감이요, 도시와 나라, 심지어는 문명 그 자체를 기꺼이 불사르게 만드는 지독한 후회였다.
별을 땅으로 떨어뜨리고 은하마저 스스로 빛을 잃게 만들 비통함이었다. 죽음 이후에도 스스로에게 참회의 기회를 허락하지 못할 참담함이었다.
그것은 감히 인간의 감각으로 형언할 수 없는, 온 우주가 내지르는 회한의 비명이었다.
‘아…….’
충격으로 덜덜 떨리는 영혼에 무자비하게 때려 박히는,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수만 수억의 목소리.
-참회하라. 참회하라.
‘아아아아…….’
-네가 존재함으로써 범하는 너의 원죄를 알라. 감히 뉘우치려 시도조차 하지 말고 그저 온몸으로 피눈물을 흘려라! 모든 죄를 남김없이 그 영혼으로 끌어안고, 그대로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세상에서 스러져라!
벨린다는 극심한 공포와 좌절에 휩싸였다. 차라리 영혼을 거듭 죽여서라도 당장 이 모든 것을 끝내고 싶을 정도로.
그래. 아마도 저것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곧바로 그렇게 되리라. 그녀의 영혼은 저것의 존재를 감당하지 못하고, 한순간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 것이다.
벨린다의 영혼이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아냐! 저것은, 저것은 나의 주신이 아니야!]아아그래인간을현혹시켜끌어당기는자비롭게마중나오는저무자비하고증오스러운톱날은황홀하고아름다운세례는위대한주신이라할지라도아니면참회그자체라할지라도수천수만번을두드리고귀한피로서칭송하며결국은흔적도없이사라지게만들어버릴고행이니만물에온전히깃들게하는축복이니그것만이영혼에유일하게허락된피안이며더는영혼을위한장소따위…….
바로 그때였다.
휘리릭-
갑자기 벨린다의 시야를 가로막는 검은 장막이 있었다.
[당장 눈을 돌리시오, 자매여!] [아, 아아……!] [저것을 똑바로 마주 봐서는 안 됩니다. 지금 자매가 느끼는 감정은 오롯이 자신의 것이 아니니, 더 이상 현혹되어선 안 되오. 우선 시선을 완전히 닫아 보도록 해요.]그녀의 눈을 가린 것은 검은 로브를 입은 비쩍 마른 사내였다.
그래도 벨린다가 충격으로 덜덜 떨며 영혼을 가누지 못하자, 그는 결국 직접 그녀의 영혼을 이끌어 어딘가로 빠르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참회하라!
머릿속에서 끔찍하게 공명하던 목소리가 서서히 멀어져간다.
[…다, 당신은?]‘그것’에게서 얼마나 멀리 도망쳤을까, 조금씩 이성이 돌아오기 시작한 벨린다가 반사적으로 희미한 의문을 떠올렸다.
그러자 남자는 고개를 돌려 거뭇한 눈가를 부드럽게 휘었다.
[나는 마지막 안식의 형제이자, 모든 영혼들의 주인께서 임명하신 세 번째 사도라오.] [안식의…….] [그렇소. 내 영혼의 주인의 뜻에 따라 당신을 도우러 왔으니, 지금 그대의 영혼은 구원받았소.]그렇게 벨린다는 처음 보는 남자에게 이끌려 또 다른 불가해한 세계에 발을 디디게 되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창백하게 질려 있는, 아무것도 살아 움직이지 않은 완전한 죽음의 세계에.
그러나 한계까지 혹사당한 벨린다의 영혼에게는, 그 섬뜩한 고요함조차 마치 천국의 평온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 * *
[참회]의 실체를 접한 벨린다의 영혼은 크게 타격받았지만, 다행히도 회복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아이러니하게도 지금껏 수행이랍시고 제 몸을 학대한 것이-특히 죽기 직전까지 이단 재판부의 미친 인퀴지터로부터 고통받은 것이-그녀의 영혼을 한층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던 모양이었다.
짧게 잠에 빠졌던 벨린다는, 곧 의식을 회복하고 이 새로운 세계를 천천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날 [참회]로부터 구한 것은 안식의 형제였지. 그렇다면 내가 이곳에 머무는 것 또한 [안식]의 의지라고 봐도 좋을까?’
처음에는 ‘주신의 또 다른 현신’께서 구원의 대가로 그녀에게 뭔가를 명하리라 여겼다. 하지만 벨린다가 아무리 기다려도, 도통 [안식]으로부터 호출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기다리다 지친 벨린다는, 이 의외의 평화를 즐기기로 결심했다.
이곳은 완전한 죽음의 세계.
발아래는 깊은 잠에 빠진 회색 주검들이 끝없이 뒤엉켜 있고, 하늘에는 빛을 잃은 천체들이 부조처럼 얼어붙어 있는 경직된 공간.
시간이 흐를수록 이 세계에 대한 궁금증들이 피어났지만, 모든 것이 죽은 듯 잠들어 있는 이곳에는 벨린다와 상호작용 가능한 영혼 자체가 거의 없었다.
게다가 그녀를 이곳으로 데려온 검은 영혼은 지나칠 정도로 과묵한 자였다.
[서둘러 많은 것을 알려 들지 마시오, 자매여. 지금은 그저 그분의 뜻에 따라 이곳에 영혼을 누이고, 편히 휴식을 취하는 것으로 족할 것이오.]다행히 이따금 벨린다의 말 상대가 되어줄 친절한 선배가 하나 있긴 했다. 죽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 자주 잠에서 깨어난다는 여인의 영혼이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당신이 궁금해하는, 이곳의 진정한 주인을 뵐 수 있도록 도와 드리죠.]여인의 제안에, 벨린다는 홀린 듯 그녀를 따라 날았다.
그들은 들판의 풀들처럼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비석들과, 여기 저기 금이 간 납골당 항아리들, 그리고 바닥에 멋대로 누워 있는 수많은 주검들 위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마치 거대한 전화가 한바탕 휘몰아친 듯한 광경이었지만, 신기하게도 누워 있는 영혼들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감정들은 지극히 평온…….
[그만! 오래 한곳에 시선을 두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조금이라도 안식의 본질을 접하게 되면, 그 즉시 자신도 모르게 끝없는 휴식을 갈구하게 될 테니까.]가녀린 여인이 하늘하늘 앞서 날아가며 주의를 준다.
[당신은 제법 격이 높은 영혼으로 보여요. 그러니 생전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더욱 많은 휴식이 필요할 테고, 그만큼 잠들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기가 쉽답니다.]그러니 너무 깊이 잠들지 않으려면, 분주히 돌아다니며 구경하되, 한곳에 오래 관심을 주지 않아야 한다고 여인이 재차 강조했다.
[물론, 마구잡이로 돌아다니다가 다른 영혼들의 잠을 방해해서도 안 되겠죠.]벨린다는 앞서가는 여인의 모습에 시선을 주다가, 문득 오른팔이 사라진 채 너덜거리는 어깻죽지를 발견했다.
‘저이는 누구지? 딱 봐도 전사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대체 생전에는 뭘 하던 여인이었을까? 저 팔은 날붙이에 베인 것이 아니라, 마치 산짐승에게 사정없이 물어뜯긴 것 같구나.’
그러자 앞서가던 여인이 고개를 돌려 한때 팔이 있었을 자리를 내려다본다.
영혼의 생각이 고스란히 사념이 되어 전해지는 공간. 벨린다의 의문 역시 당연히 그녀의 귀에 들릴 수밖에 없었다.
[…험한 삶이 아니었다고는 말하지 못하지만, 적어도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식의 재난은 아니었어요. 그냥 제 아이가 틈틈이 영혼을 뜯어 먹었을 뿐이죠.]뜯어 먹… 뭐?
벨린다의 의문이 깊어졌지만, 그녀를 돌아보는 여인의 눈동자는 지나치게 메말라 있었다.
[하지만 제가 구원받은 것 역시 그 아이 덕분일지도 모릅니다. 수순대로 다른 마왕들에게 끌려가는 대신, 저는 환한 빛에 휩싸여 곧장 이곳으로 날아왔으니까요. 함께 죽은 이들 중 구원받은 영혼은 오직 저 하나뿐이랍니다.]여인은 벨린다에게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젊은 나이에 산적들에게 끌려가 평생을 착취당하며 살아온 것. 그리고 종국에는 자신이 키우던 아이에게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만 것.
[그건… 그건 너무나도 슬프기만 한 생이었지 않은가!]벨린다의 탄식에 여인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별것 없는 이야기랍니다. 막상 죽음을 맞이하고 나니, 제가 겪은 생전의 고통 따위는 다른 이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이곳에 잠들어 있는 영혼들 중에는, 간혹 보통 인간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인고의 삶을 버텨낸 자들도 있으니까요.]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주변의 풍경은 서서히 바뀌고 있었다.
누워 있는 영혼의 빈도가 점점 드물어지고, 버석한 땅과 부서진 무기의 파편들이 간간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이곳은… 누군가의 전장이었나?’
벨린다는 직감적으로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얼마간 여인을 따라 날았을까.
[자, 이곳입니다.]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벨린다는, 순간 그녀를 압도하는 장엄한 광경에 멍하니 입을 벌렸다.
‘……!’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검은 공동. 그곳에 수만, 아니 수십만에 달하는 악마의 주검들이 얽히고 얽혀 산처럼 우뚝 솟아 있는 장소가 있었다.
[저들은…….] [주인께 대항하던 전대 ‘안식’의 권속들입니다.]악마들의 심장에 박힌 무기는 채 녹슬지 않았고, 주검의 산에서 흘러내리는 피 또한 아직은 굳지 않았다.
죽음 이후에도 해방되지 못하고 잔뜩 일그러진 채 굳은 표정들은, 해일처럼 몰아닥친 재난에 온 힘을 다해 항거한 생생한 투쟁의 증거.
[놀랍지 않나요? 저렇게 많은 악마들이 한번에 ‘그분’을 향해 달려들었다 들었습니다. 유례없이 치열했던 세대교체의 흔적이라 하더군요.]전율이 일었다.
저렇게 많은 악마들의 목숨을 취하여 권위를 세우고, 그들의 주검을 쌓아 오롯이 자신의 자리를 쟁취하였으니, 그 정상에 놓여 있는 검은 좌를 어찌 감히 왕의 옥좌라 칭하지 않으리.
[아아……!]그리고 그 정상에 조용히 앉아 있는 존재를 마주한 벨린다는, 차마 북받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어느새 철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 그곳에, 그녀가 평생을 갈구하던 진실이, 영원한 피안이 있었다.
[그래! 바로 이분이야말로, 내 영혼의 진정한 주인이신……!]* * *
후두둑!
거기까지 말한 벨린다의 눈에서, 갑자기 시커먼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