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403)
성황의 아이들-403화(403/469)
403. 머리 탑 (1)
델크로스의 기후는 내륙치고는 비교적 온화한 축에 속했다. 특히 습기가 대폭 줄어든 맑은 가을의 공기는, 명징한 지성과 충만한 감성을 동시에 자극하는 구석이 있었다.
-그대는 내게 아름다운 하늘을 약속해요.
빛나는 별을 주겠노라 새처럼 속삭이죠.
하지만 나는 세상에서 오직 단 하나.
바로 보석 같은 당신의 영혼을 원해요.
사각사각.
그렇게 가을의 감성에 젖어 밤새 작업하던 극작가 하나가, 커튼 너머로 스며드는 햇살이 강해질 무렵 깃펜을 내렸다.
“조금만 더 쓰면 1장이 마무리되는데. 끄응…….”
안타깝게도 오늘의 작업은 여기까지인 모양.
깃펜을 양손으로 공평하게 쥘 수 없다는 사실이 슬슬 신경 쓰이기 시작하면, 그날의 집중은 이미 완전히 끝났다고 봐야 했다.
“흐음.”
극작가는 허리와 목을 이리저리 돌린 후, 지금까지 작업한 내용물들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그럭저럭 재미있게 진행될 거 같긴 한데, 아무래도 인형이 주인공이다 보니 조금 위험하려나?’
현재 그녀가 작업하고 있는 [인형의 노래]는, 한 인간이 만든 아름다운 인형이 살아 움직이며 벌어지는 일들을 다룬 오르토나의 고전 문학이다. 당시에는 인간의 존엄성과 주체 의식에 대한 성찰과 비판을 담았다 하여 높이 평가받았지.
하지만 이곳 델크로스에서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자칫 잘못하면 ‘생명의 창조’라는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단으로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딱히 금서로 지정된 건 아니라 건드려 보긴 했는데, 역시 권선징악의 느낌을 살짝 가미해서 교훈을 주는 방향으로 가는 쪽이 안전하겠지?’
잠시 고민하던 극작가는 이내 고개를 저였다.
될 대로 되라지. 뭐가 문제겠는가. 아마 자신의 애인이라면, 설령 논란이 생기더라도 단숨에 일축해줄 수 있을 텐데.
“그럼 오늘은 이쯤에서 슬슬 끝낼까.”
그녀는 팔을 쭉 뻗으며 크게 기지개를 켰다. 마침 일을 마치기에 적절한 시각이기도 했다.
똑똑.
곧 작은 노크 소리와 함께, 마치 틀로 찍어낸 듯 똑같은 얼굴들이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으니까. 그녀의 아이들인 헤르나와 가데스였다.
“일어날 시간이야, 조.”
“나와서 밥 먹어, 조.”
극작가는 답지 않게 함박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내 사랑스러운 보물들!
* * *
조슬린 랭스터.
비극의 변주자, 갈등의 마술사.
세간에는 본명보다 ‘소르본 선생’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이 젊은 극작가는, 예민한 예술가들이 간혹 보이곤 하는 기벽이 남들에 비해 유달리도 두드러진 인간이었다.
그녀는 일단 사물의 ‘비틀림’을 잘 견디지 못했다. 특히 ‘아름답지 않은’ 조형이나 ‘비대칭적’인 형태에 유독 쉽게 피로를 느끼곤 했다. 뭐든 보이는 것을 이상적인 형태로 끊임없이 보정 처리하려 드는 머릿속 때문이었다.
이 탓에 대인관계가 엉망진창으로 변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
심지어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의 얼굴도 제대로 보려 들지 않았다. 밤샘 작업 후에 종종 비대칭적으로 푹 꺼지는 눈두덩을 견딜 자신이 없어서다.
그런 면에서 그녀의 아이들은, 함께 지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존재들이라 볼 수 있었다. 언제나 양쪽에서 똑같이 말을 걸어오고, 얼굴의 조형 또한 완벽하게 아름다웠으니까.
생각해 보라.
지독한 뇌의 피로감 때문에 사랑하는 아이들을 향해 진심으로 웃지 못하게 된다면, 부모에게 있어서 이 얼마나 크나큰 비극일 것인가!
“그렇지. 나같이 불완전한 성격 파탄자가 완벽한 외모의 애인을 만나 연애를 하고, 또 이런 보석 같은 아이들까지 얻게 되다니. 이건 정말 주신이 내리신 기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지. 아무렴.”
쿨쩍.
새삼스러운 안도감에 코를 훌쩍이자, 똑같은 두 쌍의 보라색 눈동자가 걱정의 기색을 띠며 그녀를 올려다본다.
“몸이 좀 안 좋은가 봐.”
“또 밤새 작업한 거야?”
조막만 한 손 하나가 조슬린의 이마 위로 올라온다. 행동력이 강한 헤르나였다.
“열은 없는 거 같은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약은 잘 챙겨 먹어. 조.”
또 다른 작은 손 하나는 냅킨으로 그녀의 입가를 훔쳤다. 늘 사려 깊은 가데스다.
“아무리 영감이 대중없이 떠오르더라도,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 해. 조.”
그렇게 작은 아이들에게 덜떨어진 애 취급을 받곤 하는 조슬린은, 행복함과 동시에 어딘가 찜찜한 감상에 사로잡히고 마는 것이다.
‘이 아이들은 내게 있어 주신이 내리신 기적이지만, 정작 아이들에게 있어서 나는 대체 뭘까? 잘 보살펴 주고, 가끔 놀아줘야 하는 반려 인간?’
그 찜찜함이 걷잡을 수 없는 자괴감으로 치닫기 전에, 조슬린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아 참! 얘들아. 조만간에 나와 함께 공연을 보러 가지 않겠니?”
“공연을?”
“갑자기?”
“그래. 내가 얼마 전에 각색한 극이 지금 대유행이잖니! 너희들이 좋아하는 그 ‘머리 탑의 암브로시아’ 이야기 말이야. 그게 마침내 베르트랑 거리의 가장 큰 극장에서도 공연될 예정이란다!”
순수 창작극으로 이름을 떨치던 조슬린이, 첫 각색 작품으로 ‘머리 탑의 암브로시아’를 고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그녀의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늘 읽어달라고 부탁하던 동화였기에 자연히 먼저 손이 갔을 뿐.
“흐음?”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쌍둥이들이, 서로를 마주 보며 어쩐지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게 아닌가.
“뭐, 그때는 딱히 우리가 그걸 좋아했다기보다는.”
“모레스가 늘 찾아와서 읽어 달라고 졸라댔으니까.”
“…응?”
“우리는 그냥 모레스가 바라는 걸 곁에서 들어준 것뿐이야.”
“모레스는 그때 글을 잘 읽지도 못하고, 조금 외로워했거든.”
“그리고 그 애는 사람들로부터 일괄적 형태의 염상을 모으고 싶어 했지.”
“아무리 약한 염상들이라도, 집단의식이 뭉치면 힘을 발휘할 수 있댔어.”
그들의 대답에 조슬린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평생 3황자와는 대면한 적도 없는데, 그가 어떻게 이곳까지 찾아와 책을 읽어달라고 조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아이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어른들이 으레 그러하듯, 그녀는 곧 자기 나름대로 판단하고서 멋대로 납득했다.
“너희들은 그렇게 모레스가 좋니?”
쌍둥이들의 입에서 매일같이 오르내리는 이름 아닌가.
오죽했으면 조슬린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3황자를 친숙하다고 여기게 될 정도일까.
“흠. 좋으냐고 한다면 좋은 쪽이긴 하지.”
“걔는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흥미롭잖아.”
하지만 이번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예상외였다. 쌍둥이들이 이내 뾰로통한 얼굴로 투덜거리기 시작했으니.
“근데 요즘 모레스는 빨강이하고만 놀아.”
“뭐, 가끔 다른 애들을 부를 때도 있지만.”
“한동안은 매일같이 놀아줘서 재밌었는데, 최근에는 모레스가 너무 많이 바빠졌어.”
“수련이니 마물 전담반에만 신경 쓰고, 이제는 밤에도 잘 놀아주려 하지 않는다고.”
“그렇다고 모레스가 또 아파서 누워 있기를 바라면, 성황 아빠가 너무 불쌍하잖아.”
“걔가 그럴 때마다 큰 사고가 터지는 게 더 문제지. 아빠 폐하가 너무 힘드니까.”
“…….”
조슬린은 도통 영문을 알 수 없었다.
3황자가 아픈 동안 정기 알현 시간이 대폭 줄어들지 않았던가. 덕분에 헤르나와 가데스는 한동안 저택에서 잘 나가지도 않고, 하루 종일 서로 체스만 두면서 지냈던 것이다.
“음… 그 대신, 요즘은 너희들이 황궁으로 놀러 가잖니?”
3황자가 병석에서 일어난 후, 쌍둥이들은 전처럼 점심을 먹으러 자주 진주궁으로 찾아가고 있었다.
“응, 요리가 맛있어. 베르트란 & 리 참연어 전문점에서 직접 배달 오기도 하거든.”
“조도 다음에 우리와 함께 가보지 않을래? 모레스라면 아마 조를 환영해 줄 거야.”
“글쎄…….”
“우리 이참에 아예 황궁에서 살아도 좋을 거 같아, 조.”
“맞아. 모두와 함께 지내면 무척 재미있을 거라고, 조.”
“…….”
조슬린이 그런 제안을 듣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녀의 애인이 바라던 일이기도 했고.
하지만-
“헤르나. 가데스. 너희는 황궁 생활이 얼마나 빡빡한지 알고는 있어? 지금처럼 하루 종일 잠옷만 입고 지낼 수도 없고, 체스를 두고 놀면서 밤을 새우지도 못하게 될 거야.”
“…그런가?”
“그럴지도?”
아닌 게 아니라, 조슬린은 지금의 생활에 지극히 만족하는 중이었다.
물질적인 풍요와 사회적 지위를 마음껏 누리고, 밤낮이 바뀌어도 그 누구도 뭐라 하지 못하는 일상. 바로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주체적 삶의 최고봉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가 있지! 황궁의 구조는 끔찍한 비대칭이란 걸 아니? 그곳은 우리가 사는 이 저택처럼 완벽하고 아름다운 균형을 이루지 못한단다.”
“황궁보다 이 저택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건 세상에 조밖에 없을 거야.”
“뭐, 그래서 우리가 조를 좋아하는 거지만. 보고만 있어도 흥미롭잖아.”
“그래그래. 칭찬 고마워.”
식사를 완전히 마친 조슬린은 곧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밤샘 작업의 여파가 슬슬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제 황궁에 갈 거지? 그럼 잘 다녀오렴, 얘들아. 너희들을 보내고 나면 나는 한숨 늘어지게 잠이나 자야겠어.”
“와…….”
쌍둥이들의 얼굴이 대번에 못 말리는 사춘기 딸을 둔 부모처럼 바뀌었다.
“밥 먹고 바로 자는 거야, 조?”
“건강에 무척 나쁠 거야, 조.”
“괜찮아, 얘들아.”
자식들보다 더 철이 없는 그녀는 자신만만하게 가슴을 두드리며 대꾸했다.
“어차피 황궁에 놀러 가면, 너희 아버지가 뭐든지 말끔하게 치료해 주잖니?”
* * *
같은 시각, 황궁.
조용히 식기를 움직이고 있던 네이트가, 순간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음? 갑자기 왜 그러세요? 음식 맛이 이상합니까?”
“아니, 아니다. 무척 맛있다만…….”
네이트는 오랜만에 아들이 가져온 ‘훈제 참연어 에그 베네딕트’라는 생소한 요리를 내려다보았다.
어째서인지 무척 꺼림칙한 기분이 든다.
왜일까? 늘 가족들을 위해 최선의 행동을 한다고 믿고 있건만, 왜 요즘은 때때로 자신이 뭔가를 심각하게 잘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엄습할까.
“이번에 네가 또 뭔가를 한 게냐?”
“…네?”
그러자 사고뭉치 아들놈이 잠시 어리둥절하더니, 곧 뿌듯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아, 네. 그러니까 저 또 출장 간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꽤 믿을 만한 정보원이 생겨서, 이번에 잘하면 자코모 밀로를 체포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체포…….”
“네. 가는 길에 겸사겸사 슈미트 지부장에게 맡겨둔 사업도 점검하고요. 마지막으로 벤소 후작령에도 잠시 들를 겁니다. 발레리 경이 저한테 특별히 조사를 부탁한 건이 있어서요.”
“…….”
네이트는 조금 묘한 기분이 되어 물끄러미 아들을 바라보았다.
최근에 그의 아들은 말끔하게 다려진 성 테르바키아 기사단 정복을, 어째선지 자랑스러운 기색으로 입고 다니는 중이었다. 이는 단순히 아이가 노래를 부르던 그 ‘공권력’을 얻었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늘 아들의 상태를 유심히 살피는 네이트는, 간혹 습관처럼 정복을 쓰다듬는 아이의 손길에서 미약한 안도감을 함께 감지하곤 했다.
무엇이 그리 불안한지 짐작 가는 바가 있기에, 그런 아이의 모습을 볼 때마다 네이트는 대단히 착잡해지고 마는 것이다.
“참! 이번 출장은 어디까지나 성기사단의 공식 업무니까, 예산은 성회에서 제대로 타낼 생각입니다. 용돈은 따로 안 주셔도 돼요.”
저한테 돈을 왕창 뜯기고 나면, 성회의 영감님들도 이번에는 속 꽤나 쓰리겠죠?
기분 좋게 히죽거리던 아들놈이 호로록 차를 들이켜더니 아, 하고 덧붙인다.
“현상금도 제대로 타 올게요!”
“…….”
정말, 정말 이 아이가 하는 대로 가만히 내버려 둬도 좋은 것인가…….
네이트는 방금 삼긴 참연어 조각이 어쩐지 목에 걸린 것 같다고 생각하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