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404)
성황의 아이들-404화(404/469)
404. 머리 탑 (2)
출장 준비는 성진의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었다.
먼저 비용.
다행히 성회에서는 군말 없이 성진이 요구한 예산을 내어주었다. 깎일 걸 생각해서 제법 후하게 불렀는데도 말이지.
-주신의 사도로서, 델크로스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 그러니 앞으로 정교회는 물론, 다른 네 개의 성기사단 또한 마물 전담반의 일에 전력으로 협조해 줄 거라 믿네. 그것이 곧 주신의 뜻이니까.
성회에서 대충 던져본 으름장이 통하긴 한 모양. 물론 협조를 한다기보다는, 아마 저놈이 어디까지 하는지 두고 보자는 심산인 것 같았지만.
그리고 인원.
몇 안 되는 마물 전담반 사람들을 모조리 키프로스로 보낸 뒤라, 아무래도 마사인 경과 진주궁 상주기사들을 중심으로 인원을 새로 꾸릴 수밖에 없었다.
“나도 갈래.”
의외인 점은, 오웬이 덜컥 성진을 따라가겠다고 나섰다는 것.
“네가? 왜?”
“딱히 할 일도 없잖아? 초상화 작업도 거의 막바지라, 이제는 꼬박꼬박 아틀리에에 가지 않아도 되거든. 참! 모레스. 바르토자를 데려가도 되냐?”
“바르토자? 그게 누군데?”
“응. 푸르마 부족의 생존자인데, 불쌍하게도 바르샤 최강의 부족장으로부터 미움을 샀지. 겉보기와 달리 소심한 놈이라 내가 근처에 없으면 엄청 불안해하거든. 아마 함께 데려가면 짐꾼 역할은 톡톡히 할 거야.”
성진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혼자 속 편해 보이는 장남에게 시선을 주었다.
오웬의 긴 머리에는 어느새 풍성한 가마우지 깃털들이 되돌아와 있었다.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황도에 붙잡아 둔다 한들, 고위 사제들의 반감이나 사기 딱 좋은 이교도의 꼬락서니.
“그래, 그러든가.”
성진은 순순히 허락했다. 저 녀석더러 황자답게 차려입으라고 또 잔소리를 하느니, 차라리 곁에 데리고 다니는 쪽이 마음이 편할지도.
그러자 이번에는 지브릴 의원도 번쩍 손을 들었다.
“저도 함께 가면 안 될까요. 저하? 언제 부상자가 생길지 모르니, 제가 동행하면 분명 큰 도움이 될 거예요. 한동안은 꼭 참석해야 할 학회도 없고요.”
“뭐, 그다지 상관은 없는데.”
긍정적인 답변을 하려던 성진은, 문득 그녀의 자리에 수북이 쌓여 있는 불길한 단지들을 발견하고 말았다. 각각으로부터 지독하고 독특한 꽃향기가 진동하는, 거대한 향수 단지들을.
“…설마 지브릴 의원. 저 많은 향수들을 모조리 들고 갈 생각이야?”
“네, 저하! 저는 역병과 싸우는 의사입니다. 얼마나 오래 황도를 떠나 있을지 모르니, 방역을 위한 준비는 가능한 철저히 할 생각이에요!”
“아! 다시 생각해 보니, 역시 한 명은 사무실에 남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네. 전국 각지에서 올라오는 역병 보고서들도 처리해야 하고.”
“네에? 아니, 저하! 대체 어째서?”
그렇게 충격받은 지브릴 의원을 제외한 대강의 인원이 꾸려졌다.
상주기사들을 나누어 선별하고, 그 과정에서 쿠르트 경과 마리아 경이 서로 성진을 따라가겠다고 다툰 것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그러던 어느 날.
마물 전담반으로 처음 보는 엑소시스트 하나가 찾아왔다. 정식으로 작성된 전입신고서와 함께였다.
“그대가 내 선임이라고?”
“예, 그렇습니다. 저하.”
그는 부스스한 고수머리에 납작한 안경을 눌러쓴, 인상 흐린 장년의 남자였다. 마치 오랜 가뭄에 잔뜩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처럼 메마른 인상.
레안드로스 경이나 샤론 경도 그랬지만, 사람이 삭막해 보이는 게 엑소시스트들의 전반적인 특징이 아닌가 싶었다. 오랜 시간 고독과 싸우며 홀로 악마를 상대하다 보면, 어느샌가 다들 그렇게 변해가는 모양이지.
“성 테르바키아 기사단은 다른 기사단처럼 신입을 모아놓고 훈련하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대신 신입 엑소시스트에게는 한동안 그를 지도해 줄 선임이 개별적으로 붙게 되죠. 일종의 도제식 지도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 이해했어. 하지만 왜 갑자기 자네가 우리 부서로 전입 오는 거지? 마물 전담반에는 이미 샤론 경이 있는데?”
그러자 엑소시스트는 자세를 바로 하며 대번에 정색을 했다.
“저하, 저는 샤론 경을 뛰어난 실력을 가진 후배로서 존중합니다. 하지만 설마, 진심으로 그녀로부터 제대로 된 뭔가를 배울 수 있으리라 기대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
매번 히죽히죽 정신 나간 듯이 웃는 엑소시스트를 떠올린 성진은, 무심코 그의 말에 긍정할 수밖에 없었다.
뭐, 암흑 교단의 본거지를 치는 일이다. 성기사가 하나라도 더 붙어주면 이쪽이 오히려 고마운 일이지.
“그래. 뭐, 어쨌든 잘 부탁하네. 그…….”
전입신고서를 슬쩍 곁눈질하며 성진이 덧붙였다.
“…로버트 경.”
“부디 로베르라고 불러주십시오, 저하. 제 양친께서는 브르타뉴 출신이셨고, 저 또한 지금까지 브르타뉴식 이름으로 불려 왔습니다.”
높낮이가 거의 없는 단조로운 목소리. 언뜻 보기에는 지극히 사무적인 태도였지만, 그래도 성진이 알고 있는 엑소시스트들 중에서는 가장 사교적으로 보이는 인간이다.
성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답했다.
“그러지, 로베르 경.”
* * *
여타의 성기사단과 달리, 성 테르바키아 기사단을 하나의 거대한 공권력이라 말하기에는 약간의 어폐가 있다. 기본적으로 엑소시스트들은 대륙 각지에 뿔뿔이 흩어져, 홀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까.
그렇다 보니 어쩌다 신입 엑소시스트가 들어오더라도, 체계적으로 그를 단련시킬 마땅한 방안이 없었다. 그래서 일정 기간 동안은 베테랑 선배를 따라 함께 움직이는 것이 일종의 관례가 되었다나.
그렇게 신입 기사는 선배를 마치 스승처럼 따르며, 엑소시스트로서 필요한 모든 것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저하께서는 이례적으로 입단과 동시에 부관급의 지위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니 일개 엑소시스트가 저하를 스콰이어 취급하며 달고 다닐 수가 없게 되었죠.”
물론 그 이외에도, 귀한 성황가의 황자를 오지 여기저기로 데리고 다닐 수 없는 이유 따위 차고 넘쳤다.
그 덕에 경험 많은 엑소시스트인 로베르 경이, 역으로 후배를 따라 전입신고를 하는 웃지 못할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거, 자네에게는 조금 미안하게 됐네, 로베르 경.”
“아닙니다, 저하. 저도 슬슬 내지 근무를 할 때가 되었지요. 더욱이 저하께서는 무력의 기초가 탄탄하시니, 제가 그리 오랜 시간 따라다니지 않아도 괜찮을 겁니다.”
거기다 성진에게는 다른 신입 엑소시스트와 다른 특이 사항이 또 하나 있었다.
선임 성기사들이 가장 골치 아파하는 교육이 바로, 후배에게 신성 결계에 대해 가르치는 거라나?
그런데-
“나는 신성력이 없는데?”
“네, 그러니 가르칠 거리가 큰 폭으로 줄어들게 되었군요. 외람되오나, 저나 저하에게나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르는 이들이야 단순히 신성력을 뿜어내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닌가 생각하지만, 신성 결계를 치는 데는 생각보다 복잡한 과정이 수반된다.
자신이 가진 힘을 일정한 형태로 만들어 안정적으로 외부에 발출하는 일. 어떻게 생각하면, 신성력으로 특정 모양의 검막을 펼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특히 다른 성기사들과 함께 대규모 결계를 펼치는 일은 더 문제다. 그러니 정확한 범위를 일정한 강도로 방어하는 동시에, 타인의 힘과 어우러지도록 함께 공명시키는 수련을 지겹도록 반복해야 한다는 것.
“어, 그거 듣기만 해도 골치 아픈데?”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이 바로 그겁니다, 저하.”
와, 신성력이 없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한데, 그러면 나는 딱히 로베르 경에게 배울 게 없는 거 아닌가? 검술은 이미 마사인 경이 봐주고 있고.”
“아닙니다, 저하. 성기사에게는 신성 결계보다 더 중요한 기본 소양이 있습니다.”
“기본 소양?”
“네. 바로 사열식과 의장 시범, 그리고 수월하게 정복 세탁하기 등을 예로 들 수 있겠군요.”
“…….”
그러고 보니, 언젠가 로건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긴 했지.
-외부인은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성기사단에 입단하면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이 바로 제대로 의장을 갖추고 사열식을 하는 거야.
-사열식? 검술이 아니라?
-그래. 어떤 의미에서는 성기사단의 본질을 꿰뚫는 일이기도 하지. 주신의 뜻을 세상에 펼치기 위해서는 ‘무력’을 행사하는 것보다는, 멋지게 ‘보여주기’가 더 중요하다는 거니까.
당시는 반쯤 농담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설마 정말로 그런 걸 익힌다고?
하긴, 로건이 쓸데없는 농담을 하는 성격은 아니지.
“그리고 신성력이 없는 저하께서 무엇보다 제대로 배우셔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미리 준비된 도구를 사용하는 방법이죠.”
거기까지 말한 로베르 경은, 들고 있던 커다란 가방을 척척 펼쳐 보이기 시작했다.
“저하의 입단이 결정된 후, 레안드로스 단장님께서는 곧바로 저를 저하의 선임으로 명하셨습니다. 한참 활동 중인 엑소시스트를 황도로 불러들이는 일은 잘 없지만, 그 이례적인 임명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이유?”
“네. 감히 자부하건대, 저는 엑소시스트들 중에서도 가장 도구 사용에 익숙합니다. 퇴마 도구들을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방법을, 저하께 그 누구보다도 자세히 가르쳐 드릴 수 있다는 뜻이죠.”
로베르 경이 장담한 대로, 그의 가방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물건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크고 작은 성수 병들부터 주신의 문양이 아로새겨진 복잡한 술식의 스크롤들. 한 무더기의 나무 송곳과 나무망치. 그리고 검은 실이 칭칭 감겨 있는 낡은 지푸라기 인형 등…….
아마도 저것들 모두가 사제들의 축성을 받은 신성한 도구들이리라.
[으와. 무서운 놈. 저런 흉악한 것들을 들고 다닌다고?]책상 위에 앉아 있던 마왕 놈이 진저리를 쳤다. 놈에게는 그야말로 흉기의 향연으로 보이겠지.
“……?”
그러던 중, 성진의 눈을 끌어당기는 물건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눈처럼 하얀 곰 인형이었는데, 아무리 봐도 어딘가 익숙한 디자인이다.
“로베르 경. 이건?”
“아, 그건 이번에 새로 축성한 부적입니다. 아이들의 수호자, [빈스 베어]라고 하더군요. 최근에 엑소시스트들이 자주 축성해서 길동무 삼아 가지고 다니는 물건이죠.”
“…엥?”
뭐야. 정말 빙수 3호를 본뜬 인형이야?
그런데 대체 왜 엑소시스트가 이런 인형을 부적으로 가지고 다녀?
“이왕이면 의미 있는 형상에 힘을 부여하는 쪽이 강한 힘을 발휘하니까요. 게다가 보기에도 꽤나 귀엽지 않습니까?”
“…….”
“황도 인사들 사이에서도 제법 유행이라 하더군요. 전혀 모르셨습니까?”
와. 테디 베어가 어디에든 잘 먹히는 디자인이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설마 엑소시스트들 사이에서도 유행할 줄이야!
* * *
로메인은 최근 수상한 기류를 느끼고 있었다.
정보 수집을 위해 수일에 한 번씩 방문하는 베르트랑 거리, 그곳의 분위기가 날이 갈수록 눈에 띄게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빈스 베어! 주신의 작은 은총을 지키는 빈스 베어를 사세요!”
“주신의 사도이신 시슬레 성녀님을 위해, 기꺼이 지상으로 내려온 깜찍한 주신의 기사!”
가판대에 일렬로 놓인 하얀 곰 인형들을 발견한 로메인은 속으로 조용히 식은땀을 흘렸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왜 이 델크로스 차원에 테디 베어가 있어?’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상한 것은, 거리 여기저기에서 펼쳐지는 단막극들이었다.
“아아, 애달프다! 초대 성황 폐하를 향한 달의 요정의 짝사랑 이야기!”
“새로운 극이 왔습니다! 아름다운 성 바스티안과 그의 충실한 수하, 그림자 요정의 기묘한 모험!”
“장난꾸러기 불의 요정 인형극을 보러 오세요! 관람하시면 맛있는 불의 요정 사탕도 드려요!”
로메인은 도무지 지금의 현상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수십 년 전, 달의 요정 올리비에 이야기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적이 없진 않지만, 이렇게까지 단숨에 거리의 분위기가 바뀌어 버리다니?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은 아무리 봐도, 이례적이다 못해 작위적이기까지 하다.
‘…어째서 갑자기?’
그 이면에 누구의 입김이 닿아 있는지 모를 수가 없는 바. 그래서 로메인은 모골이 송연해지는 두려움을 느끼며, 무력하게 몸을 떨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들은 다 무엇을 위한 포석인 거지? 아무것도,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구나! 델크로스의 수호자! 대체 그는 어떠한 미래를 보고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