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405)
성황의 아이들-405화(405/469)
405. 머리 탑 (3)
로메인은 터덜터덜 임시 집결지로 삼은 동굴로 되돌아왔다.
본래는 정보를 수집하러 간 김에, 베르트랑 거리에서 인형극이나 한판 펼치고 올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 화려한 ‘요정’들의 물결 속에서, 도저히 자신의 낡은 인형들을 꺼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마치 지금의 성황과 자신의 격차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만 같았으니까.
그렇게 힘없이 동굴 안으로 들어서자, 마침 바닥에서 뒹굴거리던 [파종]이 그를 돌아보며 묻는다.
“그것들은 다 뭐냐, 인형아?”
로메인은 무심코 노인의 얼굴을 뒤덮어가는 검버섯에 시선을 주었다.
급하게 조치했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임시로 마련한 육체. 노인의 몸은 마왕의 그릇이 된 이후 빠르게 쇠락해가고 있었다.
‘조만간 새 그릇을 준비해야겠군.’
내심 그런 생각을 하며, 로메인은 주책없이 바닥에 퍼져 있는 고위 마왕을 향해 정중하게 대답했다.
“제 보잘것없는 인형들입니다, 질병의 군주시여. 이곳에서 매일같이 수선하는 걸 보지 않으셨습니까?”
“뭐, 보긴 했는데. 네 말대로 어찌나 볼품이 없는지, 그 누더기들이 설마 ‘인형’이라 불릴 만한 물건인 줄은 몰랐지.”
그의 신랄한 평가에, 로메인은 새삼스레 자신의 손인형들을 내려다보았다.
“…….”
주관적인 시각으로도 그의 인형들은 썩 상태가 좋지 못했다.
여기저기 손때가 타 이미 본래의 색도 알아보기 어려운 데다, 군데군데 서툰 솜씨로 바느질한 땜빵 자국도 눈에 들어온다.
본래 빨간색이어야 할 불의 마왕 인형이, 이제는 회색의 용사 인형과 아예 구별되지 않을 지경. 이대로라면 설령 인형극을 펼쳤더라도 유의미한 성과를 보기는 어려웠으리라.
염상의 바탕이 되어야 할 [형태]가 이렇게까지 무너져 버렸으니, 아무리 목소리의 힘으로 사람들을 매혹시킨다 한들 결국 염상 결계를 구축하는 데 한계가 생길 수밖에.
“너덜너덜하군. 보아하니 특정 대상을 겨냥한 인형들 같은데, 혹시 저주의 [반동]으로 망가져 버린 거냐?”
놀랍게도 고위 마왕의 눈썰미는, 누더기 인형들을 훼손한 부자연스러운 힘의 흔적을 단번에 파악해 냈다.
“꼴에 상대도 되지 못하는 표적을 대상으로, 저주를 담은 염상 결계를 치려 들었던 모양이군. 인형아. 대체 그 어설픈 도구들을 가지고 누구를 해치려 했지?”
“…….”
수개월 전, 황도를 지키는 성황의 기척이 일시적으로 약해졌던 일이 있었다.
당시 로메인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황도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를 찾아 제대로 된 [염상 결계]를 펼치려 시도했었다. 그의 숙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살아서 의념을 일으키는 상대를 염상으로 공격하려 들면, 당연히 그에 대한 [반동]이 생기게 마련.
완전히 적의 숨통을 끊지 못한 인형들은, 되레 그 반동에 의해 손상되기 시작했다. 몇 차례 극을 펼치지도 않았는데, 마치 수백 년의 세월을 정면으로 맞은 것처럼 형편없이 망가지고 말았지.
‘그래도 이로써 확실하게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용사와 불의 마왕, 두 인형 모두에게 반동이 생겼다는 건, 그 둘이 지금도 멀쩡히 이 세계에 존재한다는 뜻이니까.’
세대교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의 숙적은 결국 불의 마왕이 되지 못한 것이다.
아아,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리고 끝까지 살아남은 불의 마왕은, 원한을 잊지 않고서 지금까지도 내 영혼을 쫓아 이 델크로스 차원을 헤매고 있는 거겠지.’
이 사실 또한 얼마 전 직접 확인한 바 있었다. 로메인이 어설프게나마 영혼의 단말을 만들어 황궁에 잠입했던 날의 일이다.
당시 불완전한 비술을 흉내 내느라 영혼의 방어가 약해지자, 불의 마왕은 그 즉시 자신을 추적해 그가 점령한 인간의 몸속까지 쫓아 들어오지 않았던가!
-너냐? 네놈 새끼가 나한테 그런 하찮은 공격을 날린 거냐?
잠시 그때의 일을 돌이켜보던 로메인은 문득 의아함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당시는 단말을 잃은 충격에 미처 신경 쓰지 못했는데, 그때 불의 마왕은 자신을 전혀 못 알아보는 눈치가 아니었던가.
-아, 네놈이냐? 너무 하찮아져서 몰라볼 뻔했네! 죽지도 못한 것이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거냐!
-뭐? 이 새끼야? 너 나 알아? 너 정체가 뭐야?
설마.
‘나를… 기억하지 못하나? 그저 누군가에게 공격을 받았으니, 남아 있는 염상의 흔적을 따라 공격한 자를 추적해 왔을 뿐인 건가?’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불의 마왕이, 자신을 감쪽같이 속여 모든 것을 잃게 만든 꿈의 마왕을 기억하지 못할 리가.
‘아니면 인형사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나란 존재는, 더는 자신이 쫓는 [꿈의 마왕]이 아니라는 뜻인가?’
지끈-!
불완전한 기억에 깊이 몰두한 탓일까, 머릿속에서 갑자기 날카로운 통증이 인다. 로메인은 반가면 속에 감춰진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언젠가 인형사로부터 예기치 못하게 분리되며, 로메인은 기억의 일부에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받았다.
그 탓에 지금의 그는 자신과 용사 그리고 불의 마왕이 종국에 어떠한 결말을 맞이했는지 또렷하게 기억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사실만은 확실하게 알고 있다. 만일 이대로 그들을 가만히 내버려 둔다면, ‘용사’와 ‘불의 마왕’은‘ 향후 끊임없이 로메인의 안위를 위협하는 걸림돌로써 깊숙이 자리매김하겠지.
‘그러니 당장 끝장을 내지는 못하더라도,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그리고 착실하게 놈들을 말살해 나가야만…….’
그렇게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로메인은, 문득 그때까지도 말없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노인을 뒤늦게 발견하고는 크게 헛숨을 들이켰다.
인간의 영혼 따위 단숨에 압살할 수 있는 절대자의 시선. 그 무서운 시선이, 마치 자신을 관찰이라도 하듯 진득하게 훑어 내리고 있는 것이다!
“……!”
황도에서 받은 충격으로 잠시 정신이 나갔던 것이 분명했다. 무려 고위 마왕의 질문을 들은 척 만 척하고서, 혼자 잡생각에 빠져 있다니!
“…소, 송구합니다, 파종이시여. 별일 아닙니다. 그저 제가 모시는 왕자님의 정적을 멀리서 제거하려 했을 뿐이니까요.”
로메인은 재빨리 말을 둘러댔다.
“하찮은 인간사에 불과하니, 위대하신 질병의 군주께서 굳이 관심을 두실 일은 아닙니다.”
불완전한 기억과, 언제든 자신의 안위를 위협할 수 있는 숙적의 존재.
이 커다란 약점들을 섣불리 고위 마왕에게 들켜서는 곤란했다.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는 순간, 그는 자신을 잡아채어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곧바로 진짜 인형사의 편에 붙을 게 빤하니까.
“정적? 모시는 왕자? 뭐야, 그거 강한 놈인가?”
“그리 강하지 않기에 그냥 멀리서 손을 써보려 한 겁니다.”
“그래? 그런데 왜 실패했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이 미천한 인형이 성황의 눈을 피해 벌릴 수 있는 수작이라곤, 결국 그런 어설픈 염상 결계밖에 없더군요. 그의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준비를 마치지 못했습니다.”
“흐음…….”
완전히 납득할 만한 설명은 아니었지만, 다행히도 파종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래, 네 별거 아닌 사정 따위는 알 바 아니지. 근데 생각할수록 웃기지도 않는구나! 인형이 인형을 가지고 노는 셈이 아니냐? 킬킬킬!”
“…….”
역린을 건드리는 무례한 언사였으나, 감히 어느 누가 저 고위 마왕에게 이를 따지고 들 수 있는가.
대신 로메인은, 마음을 가다듬고 당면한 문제에 대해 절대자의 조언을 구하기로 결심했다.
“파종이시여. 실은 당신께 의논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바로 베르트랑 거리를 온통 휩쓸고 있는 요정 열풍에 대해서.
* * *
“그래. 요정이라고? 지난 천 년 간 허접한 경전에만 매달리던 신성제국에서 말이지? 거, 오래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네.”
로메인의 설명을 모두 들은 노인은 묘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정교회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어쨌거나 참 재밌을 것 같구나! 그 희한한 광경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면 좋겠는데!”
물론 불가능한 바람이었다. 성황의 [은총]이 황도를 감싸고 있는 한, 악마가 감히 그곳으로 접근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어쨌거나 우리에게는 나쁠 것 없는 얘기다, 인형아. [악]에 대한 인간들의 정신적 방어가 조금이나마 약해질수록, 내 휘하의 교단이 대륙을 잠식하는 것도 훨씬 쉬워지겠지! 침략에 더욱 가속이 붙지 않겠냐?”
집단의식이 강제하는 맹목적인 믿음은, 영혼의 무의식적인 방어에 예상보다 훨씬 큰 영향을 발휘한다.
특히 인과율의 제약으로 차원의 정신적 침략을 우선시해야 하는 고위 마왕들의 입장에서, 이는 더더욱 중요한 문제가 되겠지.
한데 지금 델크로스의 수호자는 그러한 이점을 깡그리 무시하고, 선악의 경계조차 불분명한 존재들을 하나둘 인식의 범위로 끌어들이며 인간들의 경계심을 무너뜨리고 있다.
로메인이 혼란에 빠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앞으로 있을 본격적인 침략에 대비해 경계를 단단히 하는 것도 모자랄 판에, 스스로 나서서 인간들의 방어력을 약화시키다니!
“…그렇다면 델크로스의 수호자는 대체 무슨 목적을 가지고 그런 일을 벌이는 걸까요?”
“글쎄다, 인형아. 내가 그자의 복잡한 속을 어찌 알겠냐?”
노인은 부루퉁한 표정으로 텅 비어가는 정수리를 긁적거렸다.
“하지만 뭐, 빤한 일 아니겠냐? 그자 역시 네가 했던 것과 같은 일을 하려는 거겠지. 황도 인간들의 집단의식을 이용해서, 이 차원에 ‘요정’에 대한 새로운 ‘염상’을 넓게 덧씌우는 작업을 하는 거다.”
“주신을 향한 맹목적인 신앙이 주는 방어력을 포기하고, ‘요정’이란 불확실한 존재를 받아들이게 만든다는 말입니까? 어째서요? 실익이 전혀 없지 않습니까?”
“뭐, 요정도 요정 나름이니까.”
그렇게 대꾸한 파종은, 갑자기 무슨 생각을 했는지 킬킬 기분 나쁜 웃음을 터뜨렸다.
“한데 인형아, 너 그거 아느냐? 처음 델크로스의 수호자가 권력을 잡았을 때, 그는 대륙의 악마란 악마는 깡그리 소탕할 기세로 날뛰었다. 어찌나 악마들을 잡아 죽이는 데 열중했던지, 손에 들어오는 도구라면 그야말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용했었지.”
심지어 성황이 직접 마계로 쳐들어온 적도 부지기수. 어떻게 인간이, 그것도 주신의 대리자라는 자가 저렇게까지 정신 나간 짓을 할 수 있는가!
당시 고위 마왕들이 느낀 당혹감이야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그자는, 자신의 휘하에 제법 강력한 악마까지 하나 부리고 있더구나! 처음 그놈을 봤을 때 내가 어찌나 놀랐던지.”
그 말에 로메인이 흠칫 놀라며 파종을 바라보았다.
“…악마…요?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다마다. 이 몸이 너에게 왜 허튼소리를 하겠느냐?”
딱딱하게 굳은 로메인의 표정을 재미있다는 듯 관찰하던 노인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 누가 알겠느냐? 어쩌면 말이다-”
노인의 장난스러운 눈매가, 그답지 않게 깊어졌다.
“이번에도 델크로스의 수호자에게, 그때 이상으로 강력한 패가 들어온 건지도 모르는 일인 게다.”
* * *
“이건 레몬 파이.”
[우와! 레몬 파이다!]“이건 곰 고기 커틀릿.”
[와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곰 고기다!]성진이 유리 그릇 위로 잘게 자른 음식을 던질 때마다, 하늘거리는 붉은 불꽃이 날름날름 그것들을 태워 없앤다.
그 꼬락서니를 곁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로베르 경이, 납작한 안경을 바로잡으며 심각한 얼굴을 했다.
“그분이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불의 요정’ 님이시군요. 저하의 손에 요정님의 불꽃이 닿는 거 같은데, 혹여 뜨겁거나 하지는 않으십니까?”
“어, 괜찮아. 로베르 경.”
성진은 본래부터 마왕의 불꽃에 해를 입지 않았다. 엄청 뜨겁다는 느낌만은 고스란히 전해지곤 했지만.
한데 최근에는 놈으로부터 느껴지는 온도가 처음보다 현저하게 떨어져 있었다. 마왕이 부단히 열기를 조절하려 노력한 탓이다.
-내 멋진 유리 접시가아아!
그동안 실체가 없었던 탓에, 마왕은 갑자기 얻은 불꽃 몸체를 외부 환경과 조율하는 데 꽤나 애를 먹었다. 덕분에 한동안은 값비싼 접시들을 여럿 못쓰게 만들어 버리곤 했지.
하지만 결국은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였다.
이제는 놈도 음식을 빠르게 연소시켜 흠향을 하면서도, 동시에 그릇을 멀쩡히 유지할 수 있는 적절한 온도를 찾아냈으니까.
그래서 지금은 장인들이 열과 성을 다해 만든 다면체 유리그릇에 앉아, 성진으로부터 편안하게 음식들을 받아먹고 있는 거다.
“으악! 뜨거워! 손가락에 물집이이이!”
그러니까 저건 어디까지나 마왕의 고의라는 뜻이다. 슬쩍 불꽃에 손을 가져다 댄 하벤 경이, 화상을 입고 꼴사납게 펄쩍펄쩍 뛰어오르는 상황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게 왜 허락도 받지 않고 얘를 만지려 드는 거야?”
“네에? 하지만 저하! 아멜리아 황녀님이나 다른 기사들은 다들 괜찮았지 않습니까?”
하벤 경은 화상 입은 손가락을 입에 넣으며 울상을 지었다.
“정말 너무하십니다! 불의 요정님은 유독 저만 미워하시는 것 같단 말입니다!”
“그거야 자네가 매번 무례한 짓을 하니까 그렇지. 잔말 말고 어서 닌니아스 의원한테 가서 치료나 받아, 하벤 경.”
그렇게, 평소보다 유난히도 평화로운 오후가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