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406)
성황의 아이들-406화(406/469)
406. 머리 탑 (4)
성황이 정무에 복귀한 이후, 황궁은 일견 빠르게 평온을 되찾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의 모습에 불과했다. 언제든 다시 터져 나올지 모르는 용암처럼, 식어가는 암석 아래에는 아직도 치열한 의혹과 혼란이 뜨겁게 들끓고 있었으니까.
우선 성회의 고위 사제들.
그들은 교묘한 악이 속삭여오는?아아, 주신이시여! 두렵게도 정말 문자 그대로의 의미일지도 모릅니다!-현혹의 목소리에, 일생 동안 지켜왔던 신앙의 방어막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 어찌하겠는가. 선과 악에 무뎌진 스스로의 눈과 귀를 닫고, 그저 주신께서 어서 이 가혹한 시련을 거둬 주시기를 부단히 기도드릴 수밖에.
그런 겉보기와 다른 내부의 동요와 긴장은, 최근 황궁 밖에서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 일례로 황가를 밀착 보좌하는 정보 조직, ‘원숭이 망루’를 들 수 있겠다.
오랜만에 성황에게 간단한 보고를 마치고 돌아온 21호는, 평소 은밀한 정적에 휩싸여 있던 주점 지하의 공기가 지나치게 날 서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여기 분위기가 왜 이렇습니까?”
그러자 반나절 만에 몰라보게 해쓱해진 19호가 그를 향해 소리 없이 입을 벙긋거린다.
‘몰라! 제발 날 좀 살려줘!’
아니나 다를까. 그 서슬 퍼런 공기의 중심에는, 19호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베테랑 정보 요원들이 있었다.
“9호 선배와… 13호 선배?”
실로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하게 된 둘은, 21호가 알기에 애초부터 그다지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두 사람 모두, 뭔가 단단히 심사가 꼬인 듯 험악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서로를 노려보고 있다.
정보원들의 주된 업무가 몸을 쓰는 험한 일이다 보니, 간혹 부대끼는 중간중간 마찰이 생기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다.
문제는 짬 깨나 되는 두 사람이, 하필이면 애꿎은 19호를 사이에 끼고서 알력 다툼 중이라는 거겠지.
“웃기네. 주인 모신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무신 만고의 충신이 된 듯 기고만장인감. 넌 이걸 어찌 생각하남? 19호야.”
아담한 체격의 9호가, 역시나 그다지 크지 않은 19호의 어깨에 정겹게 팔을 올리며 묻는다. 수년간 바르샤 부족들 사이에서 치이느라 발음이 심각하게 무너져, 유난히 건들거리는 듯 느껴지는 가벼운 말투다.
19호는 까마득한 선배 앞에서 뭐라 대꾸도 하지 못한 채 부들부들 떨었다.
“모신 기간이 길다고 해서, 신뢰 관계 또한 그에 비례하지는 않겠지. 얼마나 밀접하게 곁에 두느냐에 따라, 정보원에 대한 주인의 신뢰가 드러나는 것 아니겠어? 어디 대답해 봐, 19호.”
말쑥하게 키가 큰 13호가 싸늘한 표정으로 19호를 노려본다. 안 그래도 평소 빈틈없는 선배가 정색을 하니 배로 무서웠다.
19호는 이제 완전히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아하!’
21호는 그 언쟁의 내막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이번에 출장 간다는 마물 전담반의 문제구나.’
듣자 하니 13호 선배는 이번에도 모레스 황자를 따라간다 했지.
하지만 지난 수년간 남부 전선에서 오웬 황자를 성심성의껏 모셨던 9호에게는, 어째서인지 이곳에 남으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황도에 계속 머무르면서 누군가를 찾으라는 임무를 받았다던가?
아마 실력에 유난히 자부심이 넘치던 9호에게는 날벼락 같은 일이었으리라.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 두 사람, 너무 무신경한 게 아닌가? 정작 저기 있는 19호야말로 가장 오래 로건 황자를 모셔왔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토벌대를 따라가지 못했는데.
“뭐라? 지금 말 다 했남? 19호야, 저 근본 없는 바르샤의 잡것이 하는 소리를 너도 똑똑히 들었지?”
9호가 드디어 분을 이기지 못하고 버럭 화를 냈다.
자신과 썩 사이가 좋지 못한 후배 정보원이, 역시나 한때 자신의 주인을 괴롭히던 호감 가지 않는 황자를 모시고 있다. 그러니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설 수밖에.
“훗! 과연 지금 이 자리에서 누가 바르샤 촌놈 억양을 쓰고 있는지 모르겠네. 이봐, 잘 듣고 있어, 19호?”
물론 이에 대항하는 13호도 만만찮았다. 평소 바르샤인이라며 그녀를 업신여기는 이들에게, 늘 실력으로 당당히 스스로를 증명해 온 깡 넘치는 선배였으니까.
파지직!
마주한 둘의 시선에서 위험한 불꽃이 튀어 올랐다. 오직 숫기 없는 19호만이, 그 살벌한 신경전 사이에서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를 뿐.
‘제발, 누가 여기서 제발 날 좀 빼내 줘!’
바로 그때였다.
쾅! 쾅쾅! 콰앙!
누군가 위층과 이어진 연통을 거세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원숭이 망루의 책임자이자, 암살조직 ‘오베론의 손’의 간부인 브레만이었다.
가장 강한 강도로, 네 번.
그간의 경험에 비추어 보건대, 저 신호는 브레만의 최후통첩. 즉 ‘작작 하지 않으면 가게 문 닫고 당장 내려간다!’라는 뜻이다.
“…….”
한층 무르익었던 긴장감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9호는 물론 21호까지, 그곳에 있는 이들 모두가 브레만의 혹독한 교육을 거친 기수들이었으니까.
“저, 저는 가보겠습니다! 로건 황자님께서 긴히 지시하신 일이 있어서!”
19호가 눈에 띄게 안도한 표정을 지으며 부랴부랴 서류를 챙기기 시작한다.
잠시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려 생각했던 21호 역시 마음을 바꿔 발걸음을 돌렸다. 여기 계속 있다가 또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
“…그럼 나도, 준비할 게 좀 있어서 이만.”
그렇게 13호까지 새침하게 몸을 움직이자, 곧 넓은 지하에는 풀 죽은 9호만이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쳇!”
9호는 털썩 자리에 주저앉으며 내심 입을 삐죽거렸다.
까마득한 후배들 앞에서 추태를 보였다는 자각은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 오죽 속이 상해야 말이지.
“오웬 황자님도 정말 너무하시담. 다짜고짜 여기서 이……라는 사람을 찾으라니, 대체 그자가 뭐라고…….”
“…응?”
“네에?”
한데 뜻밖의 일이 생겼다. 이미 복도로 나섰던 13호와 19호가, 동시에 문 너머에서 9호를 돌아본 것이다.
“선배, 지금 누구를 찾는다고……?”
“…….”
“…음? 아아.”
예상치 못한 관심에 9호는 조금 당황했다.
“오웬 황자님께서 전부터 찾고 계시던 사람인데, 아마 델크로스 출신은 아닌 거 같암. 혹시 너희들, 이게 어느 지방 작명인지 알 수 있음? 좀 이상한 발음이었는데, 그러니까 이, 손…진?”
그렇게 또박또박 이름을 말해주자-
“아, 그건……!”
“어엇?!”
놀랍게도 13호와 19호, 두 사람 모두의 얼굴에서 어색한 깨달음의 빛이 스쳐 지나간다.
9호는 어리둥절했다. 어쩐지 다들 이 이름을 아는 것 같지 않아?
“너희들, 정말로 알앙? 이손, 진을?”
“아니, 그러니까…….”
그로부터 잠시 후, 9호가 그들로부터 전해 들은 진실은 뜻밖의 것이었다.
“그거, 그 발음이 까다로운 이름. 아마 저하의 애칭일 텐데.”
“애칭? 그나저나 저하라니, 그게 대체 누구?”
그러자 19호가 냉큼 대답했다.
“모레스 황자님입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언제부턴가 로건 저하께서 간혹 둘만 계실 때 모레스 황자님을 그렇게 부르곤 하시더군요.”
뜻밖의 정보에 9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어어?!”
이손진이, 그 모레스 황자라고?
* * *
장기 출장을 준비하는 동안, 성진은 로베르 경으로부터 많은 것들을 배웠다.
무지했던 성기사로서의 소양?물론 정복을 세탁하는 요령은 에디스가 성진 대신 전수받았다-들은 물론, 지금까지 막연하게 알고 있던 악마종들의 분류 및 특성들에 대해서도.
그러다가 상식의 일환으로, 성기사들이 학을 뗀다는 신성 결계의 실체에 대해서도 대충 알게 되었지.
“이건 완전 기하학이잖아?”
복잡한 도형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 교과서를 뒤적거리며 성진이 혀를 내둘렀다.
현재 신성 결계의 기초를 집대성한 인물은, 바로 5대 성황 당시의 유명한 신학자인 그라니우스라고 한다.
그 전까지는 성직자들이 만드는 결계라고 해봤자, 그저 무턱대고 신성력을 쏟아부어 정면에 큰 단면의 장막을 만드는 것에 그쳤다고 하지.
한데 그가 나타난 이후, 악마종의 특성에 따라 맞춤 결계를 치는 것이 가능해졌다.
보다 적은 인원으로, 그리고 더욱 효율적인 방식으로.
‘결계를 치는 인원과 대열의 각도, 그리고 감싸야 하는 대상에 따라 형태와 기울기, 높이까지 천차만별 달라지는 입체라니…….’
그렇게 해서 완성되는 결계는, 다각형의 구가 되기도, 혹은 다각뿔이 되기도 했다.
어느 것이든 만만한 모양이 아니다. 왜 성기사들이 신성 결계 연습에 그렇게 학을 떼는지 알겠는데?
“그나마 우리 엑소시스트들은 사정이 나은 편입니다. 기껏해야 두 사람 정도가 연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요. 하지만 대륙 여기저기 토벌을 다니는 릴리움 별동대 같은 경우는 사정이 많이 다르죠.”
온갖 종류의 해수나 악마를 상대로, 갖가지 결계를 펼쳐야 한다. 그렇다 보니 결계의 주축이 되는 자는, 당연히 기하학과 수학에 능할 수밖에 없다나?
릴리움 별동대는 물론, 그들을 이끌고 쏘다니는 로건까지 다시 보이는 순간이었다.
‘그저 로건의 주책맞은 팬클럽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말이지.’
그리고 로베르 경은, 성진에게 퇴마에 사용하는 도구들에 관해서도 꼼꼼하게 가르쳤다.
물론 그중 대부분은 관심이 없어 한 귀로 듣고 흘렸지만, 간혹 성진이 생각하기에도 제법 쓸 만하다 싶은 물건들이 있었다.
예를 들자면 한 달간 축성을 받았다는 작은 비표들이 그랬다.
이 비표는 주신의 문양이 아로새겨진 작은 송곳 형태의 도구들로, 던질 수도 있고 망치로 박아 넣을 수도 있게 만들어진 물건들이었다.
“각각이 가진 힘은 미약하지만, 비표 여러 개를 연이어 꽂으면 즉석에서 가벼운 정화나 결계의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로베르 경의 설명을 새겨들으며, 성진은 비표 한 뭉치를 집어 들었다.
타다다닥!
몇 개 시험 삼아 던져보니, 비표들은 성진의 의도대로 깔끔한 반원을 그리며 벽에 꽂힌다. 뒤에서 지켜보던 로베르 경이 나직한 탄성을 질렀다.
“훌륭하십니다, 저하! 혹시 따로 투검술을 배운 적이 있으십니까?”
“음? 그거야 뭐…….”
사실 성진은 전도유망한 암살자의 새싹. 이미 정예 요원 다샤로부터 요령을 쏙쏙 빼먹으며 성장하는 중이었다.
물론 그 사실을 로베르 경에게 곧이곧대로 털어놓을 수는 없겠지만.
‘어쨌거나 이 정도로 사용법이 간단하다면, 나도 요긴하게 쓸 일이 있겠는데?’
성진은 내친 김에 로베르 경으로부터 한 다발의 비표 세트를 받아 챙겼다.
“아! 그러고 보니, 가장 중요한 도구를 아직 저하께 보여드리지 않았군요.”
주의를 환기시킨 로베르 경이, 가방에서 서둘러 작은 물건 하나를 꺼내 들었다. 어린아이의 주먹보다도 작은 물건이었는데, 좌우로 침이 달려 있는 팽이처럼 보이는 물건이었다.
“이것은 자이로컴퍼스라 합니다.”
“자이로컴퍼스?”
“네. 마기를 추적하는 데 쓰는 장치입니다. 홀로 악마를 추적해야 하는 엑소시스트들의 길라잡이가 되어주는 중요한 물건이죠.”
그는 탁자 위에 그 팽이를 조심스레 놓으며 설명을 이어갔다.
“신성력이 강한 이들은 아무리 미약한 마기도 느낄 수 있다고 하지요. 하나 신성력이 약한 저 같은 엑소시스트들에게는 이것만큼 유용한 도구가 또 없습니다. 이렇게 바닥에 내려 두기만 하면, 주변에서 가장 마기가 강한 방향을 알려주는…….”
하지만 로베르 경은 미처 설명을 마칠 수 없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던 자이로컴퍼스의 바늘이, 곧바로 방향을 돌려 성진을 가리켰으니까.
휘리릭!
“…….”
“…….”
잠시 방 안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